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264화 (264/1,021)

#264.

임권수 부장이 그제야 KM 전자의 TV 사업부 매각에 대해서 정리한 보고서를 내밀었다.

“이, 이거 정말인가?!”

“네, 최민혁 실장 의사는 알 수가 없지만, KM 그룹 기조실의 장승일 실장이 내부적으로 검토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권태성 실장도 경악해서 입을 딱 벌렸다.

“정말 최 실장도 이걸 수긍했다는 소리야? 혹시 다른 꼼수는 아니고?!”

“그건 아닙니다. 뭔가 다른 계획이 있다고 해도 설마 KM 그룹 기획조정실 직원을 이용할 수는 없습니다. 당장 최문경 부회장도 이 정보로 최민혁 실장을 압박할 겁니다. 특히 TV 사업에 애착이 심한 최용욱 회장이 이걸 용인할 리가 없습니다. 최민혁 실장이 바보가 아닌데, 그걸 생각 못 했을 리 없습니다.”

“그렇지. 맞아. 이런 일을 다른 의도로 할 수는 없어. 그건 말이 안 돼.”

하지만 권태성 실장 표정은 시간이 갈수록 더 일그러졌다.

그는 도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오성 전자 기획 팀도 권태성 실장 모습에 다들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표정 변화가 없는 평소의 권태성 실장 모습이 아니었다.

낸드 메모리 사태 때문에 KM 그룹과 KM 전자를 유심히 살피던 권태성 실장으로서는 상상도 못 한 이야기였다.

임권수 부장도 아직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아무래도 콜린스 공급을 감당하기에는 KM 전자의 체급이 낮습니다. 그렇다고 무리하게 콜린스 공급을 진행하기에는 이것저것 걸리는 것이 많은가 봅니다.”

“디지털 TV 말이군.”

“안 그래도 걱정을 많이 하던데, 혹시 무슨 정보라도 있습니까?”

“글쎄.”

권태성 실장도 굳이 자세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디지털 TV에 관련된 사안은 오성 전자 내에서도 아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가 않았다.

‘확실히 기술적인 진보는 상당히 이루어졌어. 적어도 2~3년이면 콜린스를 충분히 따라잡으니까. 설마 최 실장이 이것을 대비하려는 것은 아니겠지?’

아니, 그런 정도가 아니었다. 두께를 대폭 줄여서 디자인 면에서 콜린스를 압도할 수 있었다. 아직은 산적한 문제가 많아서 계획일 뿐이다.

사실 이 부분은 사업부 내에서도 제법 말이 나오는 중이다.

아직은 디지털 TV가 취약점이 많아서 아날로그 TV에 대해서 어떻게 할지 판단 내리지 못했다.

어떻게 보면 중복 투자가 되는 셈이다.

권태성 기획실장은 이 부분에는 의아했다.

‘최 실장이 우리 오성 전자 TV 사업부를 그만큼 높이 평가한다는 소리일까?’

하지만 문제는 이게 아니었다.

KM 전자 TV 사업부가 만약 소니나 아니면 중국 업체에 넘어가는 경우다.

그때는 오성 전자 TV 사업부가 원폭을 맞은 것이나 진배없다.

권태성 기획실장 표정이 시간이 갈수록 점점 굳어질 수밖에 없다.

“…가만 그러면 그 낸드 메모리가 결국 차세대 모델에 적용되는 것이 맞아. 하, 그러면 정말 황당하잖아. 도대체 차세대 모델이 뭐기에 콜린스를 포기하려는 걸까?”

임권수 부장도 어깨를 으쓱했다.

“아직 그 부분까지는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KM 그룹 기획조정실에서도 자세히 모르는 눈치였습니다.”

“아쉽네. 하지만 크게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어. 지금 그것보다는 TV 사업부가 문제야.”

특히 콜린스가 문제다. 최악의 상황에 중국에 넘어간다면 오성 전자 TV 사업부는 된서리를 맞는다. 물론 소니를 비롯한 일본 가전 업체 역시 예외는 아니다.

권태성 실장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자리에서 일어나서 왔다 갔다 했다. 그도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판단이 잘 서지 않았다.

‘우선 오큘러스 지분 문제부터 빨리 정리를 해야겠어. TV사업부 인수 문제는 좀 더 면밀하게 확인할 필요가 있어. 최 실장이 호락호락 우리에게 넘긴다고 할 수는 없으니까.’

순간 최민혁 실장의 얼굴이 떠올랐다.

심술 1,000단은 웃고 갈 그 인간이 호락호락하게 오성 전자에게 TV 사업부를 매각할 리가 없다.

차라리 일본이나 중국 업체하고 경쟁을 부추겨서 최대한 이익을 뽑아먹으려고 할 것이다.

문제는 최민혁 실장이 설사 자기 멋대로 한다고 해도 마땅히 대응할 방법이 없다는 점이다.

그보다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아니, KM 전자는 그렇다고 해도 KM 그룹은 왜 이런 미친 짓을 용인하는 것일까? 최용욱 회장이 이걸 용납할 리가 없어. 우리가 미처 예상 못 한 다른 문제라도 있는 것일까?’

고민을 거듭하던 권태성 실장은 결국 황준엽 부사장을 찾아갔다.

* * *

황준엽 부사장은 권태성 실장의 행보를 유심히 지켜보면서 계속 안재운 대리를 만났다. 특히 e오성 설립과 관련된 일을 도왔다.

다행히 e오성 설립은 황준엽 부사장이 자기 인맥을 총동원했고, 그룹 기조실에서도 도움을 얻어서 어렵지가 않게 설립했다.

황준엽 부사장과 최학준 전무를 비롯한 오성 그룹 핵심 인사가 e오성에 투자했다. 투자금 대부분이 차명으로 되어 있어서 겉으로 봐서는 오성 전자와 관계를 알기 어려웠다.

황준엽 부사장은 앞으로 e오성 사업에 대한 일 때문에 안재운 대리와 같이 협의를 나누었다.

권태성 실장이 나타난 것은 이들 미팅이 한창 물에 올랐을 때였다.

“아, 안 그래도 권 실장님과 몇 가지 상의할 일이 있었는데, 마침 잘되었습니다.”

“e오성 문제입니까?”

“네. 이왕이면 오성 전자에서 괜찮은 인력을 받았으면 하는데, 추천할 만한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건 제가 알아보고 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보다 한 가지 건의드릴 것이 있습니다.”

“네?”

황준엽 부사장은 자신을 응시하는 권태성 실장을 보자 고개를 갸웃했다.

안재운 대리는 다행히 눈치가 빨라서 경청했다.

곧이어 나온 것은 바로 KM 그룹의 대규모 구조조정에 관한 이야기였다.

황준엽 부사장은 크게 의문을 품지 않았다.

“우리 오성 그룹도 작년에 대규모 구조조정을 진행했습니다. KM 그룹이라고 해서 그러지 말라는 법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건 그 정도가 심합니다.”

권태성 실장이 내놓은 것은 서류는 현재 진행 중인 KM 그룹 사업부 정리에 대한 안건이다. 합병이 아니라 정리 형태로 사업을 매각하는 중이었다.

광학기기 쪽은 오성 계열사와도 겹치는 부분이 있었다.

그런데 이런 사업부 대상이 무려 10곳이 넘었다. 한 사업부가 40~50명 정도라는 것을 고려하면 무려 400명이 넘는 대규모 구조조정이다.

오성 그룹이라면 큰 숫자가 아니지만, KM 그룹 규모에서 본다면 대규모 구조조정이다.

“마치 KM 그룹이 내일 당장 부도라도 난 것처럼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구조조정 규모가 만만치 않습니다.”

“흠.”

황준엽 부사장도 그제야 안색을 굳힌 채 멍하니 권태성 실장이 내놓은 KM 그룹 구조조정 안건을 살폈다. 마치 KM 그룹 내부 정보를 가져온 것인 양 상세했다.

하지만 그는 이런 정보를 어떻게 얻었느냐고 묻지는 않았다.

‘권 실장 실력이 제법이야. 그나저나 애들이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

안재운 대리 역시 옆에서 보고서를 받아서 확인하면서 입을 딱 벌렸다. 경영 기획실에 있었던 덕분에 이 구조조정 규모가 꽤 크다는 것을 깨달았다.

“맙소사 설마 KM 그룹이 내일 당장 파산이라도 합니까?”

“그건 아닙니다. KM 산업만 해도 사상 최고의 매출을 올리고 있습니다. 내년 상반기, 하반기에도 그 성장세를 이어갈 겁니다. 더욱이 KM 그룹 계열사 역시 대부분이 적자 규모를 대폭 줄였습니다.”

“…그러면 더 이상하지 않습니까. 굳이 이렇게 극단적인 구조조정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권태성 실장도 진지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이번 일은 그룹 차원에서 검토가 필요합니다. KM 그룹이 아무런 생각도 없이 일을 이렇게 벌일 리가 없습니다.”

“그건 제가 한번 따로 알아보겠습니다.”

그도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잠깐 망설였다. TV 사업부 인수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아, 그리고 이건 확인된 사실은 아니지만 KM 전자에서 TV 사업부 매각을 검토하는 것 같습니다.”

황준엽 부사장도 깜짝 놀랐다.

“네?!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휴우, KM 전자가 TV 사업부 매각을 내부적으로 검토하는 중입니다. 장승일 실장을 통해서 확인된 내용이라서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권 실장님도 참 그걸 지금 저보고 믿으라고 하는 겁니까?”

하지만 권태성 실장은 오성 전자 기획 팀에서 그리고 있는 아날로그 TV와 디지털 TV 현황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우리 오성 전자 내부적으로 콜린스 대응 모델을 서두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미 디지털 TV 사업부에서 차세대 TV 개발이 한창 진행 중입니다. 만약 그게 출시가 된다면 콜린스와 바로 맞대응할 수도 있습니다.”

“당장은 어려울 텐데요?”

“빨라도 2~3년은 걸릴 겁니다. 현실적으로 3~4년은 걸립니다.”

황준엽 부사장도 눈치가 전혀 없지는 않았다. 갑작스러운 KM 전자의 행보는 오성 전자 내부 사정을 안다면 그나마 수긍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설마 KM 전자가 우리 오성 전자의 차세대 TV 개발 정보를 알았다는 말입니까?!”

“그건 아닐 겁니다. 다만 그들 역시 어느 정도 예측을 하고 있을 겁니다. 아무래도 그런 점을 느낀다면 TV 사업부를 가장 비싼 가격에 팔 수 있는 올해가 기회일 수 있습니다. 더욱이 문제는 지금은 우리 회사가 KM 전자 TV 사업부가 일본 소니나 중국 전자 업체에 넘어가도록 내버려 둘 수가 없다는 점입니다.”

“설마 우리 오성 전자 때문에 TV 사업부 매각을 추진한다는 말입니까?”

“현재로서는 그게 가장 이상적인 추론입니다.”

“으음.”

황준엽 부사장도 이번에는 바로 대답할 수가 없었다. 안건이 생각보다 너무 중요했기 때문이다. 설마 KM 전자가 캐시카우인 TV 사업부를 매각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다.

권태성 실장은 넌지시 걱정하는 한 가지 사실을 말해주었다.

“만약 소니가 KM 전자 TV 사업부 인수를 하는 날에는 저희에게 미치는 타격이 지금과 같지가 않을 겁니다.”

소니의 생산성, 기술력, 영업력이 합쳐져서 콜린스 모델이 세계 시장에 쏟아진다면 오성 전자는 TV 사업에 한해서만큼은 철수를 고민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 될 것이었다.

창백하게 굳은 황준엽 부사장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하죠. 도련님, 그 이야기는 제가 다시 검토해서 연락하겠습니다. 전 지금 본사로 가야겠습니다.”

“…알겠습니다.”

* * *

황준엽 부사장은 오성 그룹 기조실의 최학준 전무를 찾아가서 KM 그룹의 구조조정 현황에 대해서 보고했다.

처음에는 다들 농담이라고 생각했다.

뒤늦게 다시 KM 그룹을 샅샅이 뒤져보고서야 심각성을 인식했다.

그다음에는 난리가 났다.

뜬금없는 이야기에 오성 그룹 기조실이 뒤숭숭해진 것이었다.

그리고 불과 일주일이 지나지 않아서 상황이 이전과 달라졌다.

첫 번째는 오큘러스 지분 매각 협상이 이전보다는 더 빠르게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오성 전자의 권태성 실장은 갑자기 최민혁 실장에게 저자세를 취했다.

최민혁조차 오히려 어리둥절했는데, 뒤늦게야 TV 사업부 매각 관련 정보를 오성 전자가 얻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장 실장님이 처리를 잘했나 보군.’

물론 그다지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장승일 실장에게 정보를 흘리라고 한 사람은 최민혁 자신이니까 말이다.

최민혁은 이 상황을 이용해서 DL 그룹에도 슬쩍 정보를 흘렸다.

DL 그룹도 가능하면 지분 인수 가격을 깎으려고 별짓을 다 했다. 그런데 오성 전자의 적극적인 행보 때문에 협상에 적극 임했다.

서로 밀고 당기는 협상은 일주일 내내 계속되었다.

결국 권태성 실장은 TV 사업부 매각이라는 정보 때문에 오큘러스 지분 15%를 얻기로 했고, DL 그룹은 나머지 12%와 KM 전자의 위성 사업부를 인수하는 것으로 결론 내렸다.

총 매각 대금은 오성 전자와 DL 그룹이 각각 1,300억과 1,200억으로 결정 났다.

총 지분 매각 대금은 무려 2,500억이었다.

여기서 송한성 교수와 이동호 교수 몫으로 300억이 넘어갔다.

오성 전자가 순순히 수긍한 덕분에 DL 그룹 역시 협상에 일방적으로 매달린 결과였다.

만약 다른 중소기업이었다면 두 회사가 기술을 강탈했을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얼마 일방적으로 협상이 흘러갔는지 잘 알 수가 있었다.

예상보다 매각 대금 가격이 내려간 것은 최민혁도 계속 이 오큘러스 사업 건을 가지고 시간을 낭비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최민혁은 최종 계약 협상 자리에 나가서 권태성 실장을 만나서 악수했다.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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