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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261화 (261/1,021)

#261.

최영란의 인상이 험악하게 변했다. 그녀는 마치 지체 있는 고승과 이야기하는 것 같아서 은근히 화가 났다. 그래도 최민혁에게 험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최민혁이 집안으로 들어온 후에 경험한 사정을 너무 잘 알았다.

최문경 부회장은 고작 고등학생인 최민혁을 가지고 철저하게 이용하였고, 김이경은 뒤에서 이를 부추겼다.

제3자 입장에서 뻔히 지켜봤는데, 최민혁이 자기 부모님한테 가진 반감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지 않았다.

그녀는 당시 힘들 때 최민혁을 옆에서 위로도 해주고, 많이 도와주었다.

근심이 가득한 최영란은 다시 한번 최민혁에게 사과했다.

“후유, 아빠나 엄마 일은 내가 대신 사과할게.”

최민혁은 대수롭지 않은 얼굴이었다.

“다 지난 일이잖아. 이젠 신경 안 써. 다만 몇 사람과 사이가 나쁘다고 다른 가족과 굳이 나쁜 관계를 유지할 필요는 없으니까.”

그녀는 당시 힘들 때 최민혁을 옆에서 위로도 해주고, 많이 도와주었다. 실제로 최민혁은 그녀의 도움 덕분에 잘 버텼다.

최민혁은 본가 인물과 그렇게 친한 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자기 핏줄 모두와의 관계를 강제로 잘라낼 생각은 없었다.

최영란은 최민혁의 손을 잡았다. 그녀도 최민혁의 능력을 잘 알았다. 최영란은 잠깐 최민혁의 눈치를 봤다. 최문경 부회장 관계를 뻔히 아는데, 그녀도 양심이 있어서 질문을 망설였다.

그래도 지금 기회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저기 민혁아, 그러면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 말해줄 수는 없을까?”

“이미 충분히 이야기한 것 같아. 나머지는 스스로 답을 찾아야지. 그리고 이 조언은 첫째 큰아버지랑 아무런 관련이 없어.”

매몰찬 대답.

최민혁은 딱 힌트만 주고 나서는 더 말해주지 않았다. 그는 굳이 나서서 최문경 부회장 일가를 도와줄 생각은 아예 없었다.

‘물론 KM 그룹 미래가 많이 바뀐 것은 사실이지만 IMF를 극복하기 쉽지 않을 거야. 자금 사정이 나쁜 계열사 대부분은 IMF에 휩쓸려 갈 테니까.’

그건 아시아 디자인 하우스 역시 다르지 않았다. 큰 수익이 나지 않은 이 회사를 IMF 시기에 그냥 둘 리가 없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KM 그룹 계열사에서 독립한 후에 아시아 디자인 하우스는 사명까지 바꾸면서 승승장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의도도 있다.

최영란이 될 수 있으면 후계자 구도 싸움에 끼어들지 않기를 바랐다.

‘영란 누나가 KM 그룹이 아니라 이 사업에 더 열중한다면 더 많은 기반을 얻을 수 있겠지. 그건 스스로 결정해야 할 일이니까.’

그렇다고 최영란이 예상보다 더 성장하기를 원치 않았다.

딱 최민혁 그 자신이 용인한 정도.

그러니 정보를 눈곱만큼만 흘린 것이다.

실상 최영란이 만약 KM 그룹에 더 집착한다면 얻는 것이 별로 없을 거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최민혁이 이걸 확신하는 이유는 데이콤 미래의 변화 때문이다. 그가 손을 쓴 이후에 데이콤 미래는 많이 바뀌었지만, 최근에 와서는 인생 1회차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즉 흐름은 바뀌지 않은 것이다.

‘그건 최영란 누나에게도 적용될 거야. 현명한 선택을 하기를 바라야지.’

최영란은 최민혁의 복잡한 내심을 몰랐기에 몇 번이나 다시 질문했다.

“아니, 우리 부모님 일과 관계가 없다면 날 도와줄 수도 있잖아. 내용만 다 빼먹고, 그냥 입을 다무는 게 어디 있어?”

“내가 모든 것을 잘 아는 것은 아냐. 다만 누나 능력은 내가 잘 알지. KM 산업의 미래도 예측해서 한 충고야. 선택은 누나 몫이니까. 미래는 말이야. 진정한 노력이 없다면 자신의 정해진 운명을 변화시킬 수 없어.”

“…….”

최영란은 최민혁의 조언을 곰곰이 다시 생각했다. 그리고 나서야 최민혁의 진심을 깨달았다.

KM 산업의 장래가 어둡다는 것을.

KM 그룹의 장래가 밝지 않다는 것을 말이다.

아마 몇 달 전에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면 최민혁에게 욕설을 내뱉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는 상황이 다르다.

한국 재계에서도 다크호스로 떠오르고 있는 인물이 바로 최민혁이었다. 서자 출신임에도 그 누구도 서자라고 말하지 않는 인물이 최민혁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할아버지도 최민혁 조언에 따라서 KM 그룹 구조조정을 진행 중이었다.

이런 최민혁 조언을 어떻게 무시할 수 있겠는가.

“저, 정말이야?”

“어. 과거 누나가 해준 도움에 대해 보상으로 해준 말이야.”

최민혁은 딱 여기까지만 했다. 그는 살기가 가득한 최문경 부회장 시선을 느끼자 피식 웃고 말았다. 이제는 그가 딱히 두렵지가 않았다.

‘제이미 이사가 잘 처리하는 것 같은데, TRS 사업 매각 협상의 출구 전략을 어떻게 해야 할지 그것도 고민이네.’

* * *

최문경 부회장은 부회장실에 도착해서도 한동안 흥분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조카 최민혁 얼굴을 본 것만으로 미칠 것 같았다.

더욱이 이놈이 최영란에게 뭔가 안 좋은 이야기하는 것을 봤다.

최민혁이 떠나고 난 후에 최영란에게 질문했다가 오히려 분노어린 장녀의 시선만 받았다.

화가 안 나면 더 이상한 일이다.

권재홍 비서실장 역시 분해서 부회장실을 왔다 갔다 하는 최문경 부회장의 눈치를 봤다. TRS 정리 때문에 지금 진행하는 대부분의 일에서 손을 떼야 했다.

“…부회장님,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지오텍이 미치지 않고서야 우리랑 계속 이렇게 갈등을 일으키지 않을 겁니다.”

“권 실장은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아니, 진심으로 하는 말입니다. 제이미라는 인간이 나서서 문제가 복잡하기는 하지만 그들 역시 국내 사업을 완전히 접지는 않을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계속 지오텍과 법정 분쟁을 이어간다면 국내 어떤 기업도 지오텍과는 손을 잡지 않을 겁니다. 돈보다 더 많은 것을 잃게 됩니다.”

권재홍 비서실장도 비록 어려운 시기이기는 하지만 침착하게 자기 의견을 피력했다. 돌아가는 상황이 복잡하게 꼬인 것 같아도 결국에는 쉽게 풀릴 것이라 봤다.

살벌한 최문경 부회장의 시선을 당당하게 맞선 채 자기주장을 피력했다.

실상 권재홍 비서실장의 의견이 마냥 틀린 것은 아니었다.

지오텍도 제이미 이사에게 의뢰를 맡겨두었지만 최근 다른 기업과도 이야기하는 중이다. 다만 아직 명확하게 결론이 나지 않았다.

그걸 아직 잘 모르는 최문경 부회장은 감정을 쉽게 추스르지 못했다.

“젠장맞을.”

“조급하게 생각할 일이 아닙니다. 그보다 산적한 일을 해결하는 것이 더 급합니다. 이번 지오텍 문제 때문에 계열사 사장의 시선도 곱지가 않습니다.”

“지랄한다. 그게 어떻게 내 탓이냐? 우리 아버지가 밀어붙인 사업이잖아!”

물론 최용욱 회장이 고안한 신사업에 따른 플랜이 TRS 사업이다. 기획 자체는 장승일 실장이 전부 다 작업했다.

그렇게 해서 순조롭게만 진행되어도 그 실적은 다 최문경 부회장에게 갔다.

불행히도 지금 상황은 그렇지가 못했다. TRS 사업은 예측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진행 중이다. 그렇다고 이 모든 일을 장승일 실장이나 최용욱 회장 탓으로 돌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권재홍 비서실장이 그런 내막을 모르지 않아서 슬그머니 화제를 바꾸었다.

“일단 필리핀 현지 반도체 생산기지 증설에 성공한 것에 우선 집중하는 것이 어떨까요?”

“나보고 지금 이 시국에 외국에 나가 있으란 말을 하는 거야?!”

“애초에 지오텍과 협상은 비서실이 아니라 기조실에서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부회장님이 당장 자리에 없다면 자연스럽게 그렇게 될 겁니다.”

풀썩 자리에 앉은 최문경 부회장은 양손으로 얼굴을 쓰다듬으면서 고개를 숙였다.

“아버지 생각은 다를 거야.”

하지만 권재홍 비서실장은 어려운 시기 속에서 그 기지가 빛을 발했다. 그는 묵묵히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모든 일은 잘될 것으로 생각했다.

“아뇨. 전 반대라고 생각합니다. 회장님도 안 되는 일을 붙잡고 있는 부회장님에게 실망했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일은 시간이 해결해 줄 겁니다.”

“…그래?”

최문경 부회장도 조용히 자기주장을 피력하는 권재홍 비서실장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제야 마음이 좀 진정되는 것 같았다.

권재홍 비서실장은 자기주장이 먹혔다고 생각하자 쾌재를 불렀다.

“네. 지금은 제이미 이사가 날뛰고 있지만 지오텍 경영진도 바보가 아닙니다. 상황이 바뀌면 그들도 태도를 바꿀 겁니다.”

겨우 정신을 차린 최문경 부회장은 TRS 사업에 대한 집착을 떨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게 또 쉽게 되지가 않았다.

권재홍 비서실장 말처럼 지금 필리핀 공장 증설과 같은 문제가 산적해 있다. 부회장이라면 균형적으로 일해야 했다.

그런데 그러지 못했다.

그게 그를 더 미치게 한 것이다.

더욱이 잊을 만하면 떠오르는 얼굴이 바로 조카 최민혁의 상판이다.

아시아 디자인 하우스에서 본 최민혁 얼굴이 쉽게 잊히지가 않았다.

특히 당당함을 잃지 않은 채 계열사 사장의 시선을 끄는 모습에 이를 으드득 갈았다.

다행히 그는 장승일 실장과 최용욱 회장 모습을 떠올렸다. KM 인스트루먼트 김환진 사장의 초조한 얼굴도 떠올랐다.

“가, 가만 계열사 내에 구조조정을 한다는 이야기 말이다. 단순히 검토가 아니라 벌써 계열사 측과 협상이 진행되는 거야?”

“그게…….”

비서실장 권재홍도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겨우 최문경 부회장이 안정을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또 그를 자극할 주제였기 때문이다.

“이봐, 권 실장, 설마 나에게 숨기는 것이 있어?”

“죄송합니다. 그게 사실 기획조정실이 계열사 구조조정 검토가 아니라 실제로 구조조정 속도를 올리고 있다는 소리가 있습니다.”

“서, 설마 아버지 지시에 따른 거야?”

“확실치는 않지만…….”

“야, 판단은 내가 해!”

권재홍 비서실장은 눈을 딱 감고, 자기가 파악한 사실을 말해주었다.

“KM 인스트루먼트를 위시해서 계열사 중에 수익성이 떨어지는 사업부 정리를 결정한 것으로 압니다. 이미 정리 절차에 들어간 사업부는 더 있습니다. 그 덕분에 그룹 현금 사정이 대폭 좋아졌고, 미래 가치가 높은 기업에 대한 투자를 늘렸습니다.”

“설마 아시아 디자인 하우스가 그 과정에서 진행된 투자야?”

“네.”

그랬다.

KM 그룹이 돈 안 되는 사업을 정리하고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투자를 줄인 것은 아니다. 아시아 디자인 하우스가 그 시작이었고, 미래 전망이 밝은 신규 아이템을 계속 검토 중이다.

다만 문제는 이걸 기획조정실에서만 단독으로 진행하고, 보고는 최용욱 회장에게 직접 했다.

최문경 부회장은 바이패싱 당한 셈이다.

“…….”

최문경 부회장은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자 너무 화가 나서 오히려 허탈하게 웃고 말았다. 그도 뒤늦게야 회사에서 구조조정을 진행할 동안 자신이 아직도 TRS 사업을 정리하지 못한 것을 깨달았다.

‘아버지, 그래도 정말 너무하시네요.’

잠깐의 침묵.

최문경 부회장은 참다 못해서 주먹을 사무실 책상을 두들겨 팼다. 손이 찢어져서 피가 나와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분노와 시기에 사로잡힌 최문경 부회장은 마치 정신병 환자 같았다.

그는 충혈된 눈으로 마른침으로 삼키고 있는 권재홍 비서실장을 쳐다보았다.

“권 실장, 내가 그렇게 잘못했어?”

“아, 아닙니다. 그냥 운이 나빴다고 생각합니다.”

“지오텍과 합작한 거 말하는 거야?”

“네. 당시는 지오텍과 합작을 반대할 사안이 아니었습니다. 아마 회장님께 그런 주장을 했다고 해도 받아들이시지 않았을 겁니다.”

“빌어먹을.”

한동안 씩씩거리던 최문경 부회장은 그제야 한 가지 사실을 더 깨달았다.

“장 실장 그 새끼에게서 눈을 떼지 마! 아니 기조실 내부도 감시해. 필요하다면 홍신소를 동원해서 도청이라도 하란 말이야!”

“…알겠습니다.”

* * *

장승일 실장은 아시아 디자인 하우스 창업식을 떠나면서 최문경 부회장의 섬뜩한 시선을 쉽게 떨치지 못했다.

더욱이 자칫하다가 최용욱 회장의 오해도 받을 수가 있어서 최민혁의 폭탄선언에 관한 이야기를 쉽게 꺼내지 못했다.

그는 최용욱 회장이 자주 찾는 한식집에서 술을 마시면서도 긴장을 떨칠 수가 없었다.

평소라면 알딸딸한 술맛을 즐길 만도 하건만 지금은 별다른 맛을 느끼지 못했다.

장승일 실장은 최용욱 회장에게 어떻게 보고를 해야 할까 머리를 굴렸다. 다른 것을 떠나서 TV 사업부 매각은 초대형 폭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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