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241화 (241/1,021)

#241.

“겉으로 보면 외국에서 돈을 써 그런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정확히는 차입금 규모가 급증해서입니다. 기업이 외국자본을 끌어와서 무리한 투자를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회의실 한쪽에는 국내 20대 대기업의 차입금 규모가 도표로 잘 나와 있었다. 대부분이 단기자금을 끌어왔는데, 그 규모가 심상치 않았다.

한국 외화보유액으로는 도저히 감당이 될 수준이 아니었다.

장승일 실장은 도저히 상황 자체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정부에서 저걸 모르고 있다고?”

“압니다. 재정경제원에 있는 친구 이야기로는 다들 인식하고 있고, 심각성을 계속 보고하는 중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현 정권이 밀고 있는 세계화 정책의 일환 때문에 아예 논의조차 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 문제를 거론한 공무원에게 경고를 하거나 심지어 좌천성 인사를 취했습니다.”

“하.”

장승일 실장도 KM 그룹의 전체 계열사 업무 분담을 조정하는 최종 책임자로서 국내 외환 흐름을 가볍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지금처럼 극단적인 상황에서 문제가 터지면 대안이 필요했다.

아마 최민혁 보고서 내용을 몰랐다면 이게 단순히 심각하구나 하고 넘어갔을 것이다.

그런데 그 이후로 일어나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떠올리자 마냥 그렇게 볼 수가 없었다.

하물며 지오텍과 오큘러스 프로젝트 때문에 최민혁 실장의 능력을 뼈저리게 느끼는 마당에서 더 심각하게 봐야 했다.

음모론을 질색하는 구길모 차장조차 이 문제를 예민하게 봤다.

장승일 실장은 굳은 얼굴을 한 채 최민혁의 보고서를 다시 보고 또 봤다. 불과 얼마 전에 봤던 최민혁 실장의 단호한 태도를 다시 떠올렸다.

아마 한국이 무너져도 최민혁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자기 스스로 이 문제를 파악해야 했다.

‘우리만 무리하게 투자를 받은 것은 아니니까. 그나마 최 실장님 덕분에 그 일이 중간에 중단되어서 우리는 상황을 피해갈 수 있었어.’

장승일 실장도 최민혁 보고서의 예언 중에 일부 현상이 지금과 비슷하다는 것을 확인하자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외화보유액은 365억 달러이지만 총외채 증가율이 안 좋구나.”

“더 심각한 문제는 엔고에 따른 우리 정부의 대응이 문제입니다. 환차손 부담을 최소로 줄이기 위해서 강세 통화 비중을 늘리려 하는 중입니다. 그렇게 되면 달러 비중이 급격히 줄게 됩니다. 만약 차입금으로 말미암은 투자가 성공한다면 모르겠지만 실패한다면 상황이 급속도로 악화할 겁니다.”

“일테면 동남아 투자 말인가?”

“네. 일본에서 엔화를 들여와서 동남아 쪽에 투자하는 기업이 급증하는 것도 그 연장선입니다.”

“자네 말은 만약 이런 시기에 동남아 쪽이 흔들린다면 그 피해가 우리 쪽으로 날아온다는 소리군. 그것도 최 실장님의 보고서와 일치하고?”

“바로 그게 문제입니다. 도대체 최 실장님은 이런 사실을 어떻게 예측한 것일까요?”

쉽게 흥분을 잘하는 구길모 차장은 평소보다 더 호들갑을 떨었다.

그는 솔직히 최문경 부회장과 최용욱 회장의 갈등보다는 이 일을 더 심각하게 생각했다.

오큘러스 프로젝트의 진행 상황을 보면서 최민혁 실장의 능력을 새삼 깨달았다.

구길모 차장 역시 자신이 찾은 문제점을 무겁게 받아들인 것이다.

“저도 장 실장님이 왜 그렇게 최 실장님을 심각하게 생각하나 싶었는데, 이제는 좀 알 것 같습니다.”

“그래, 늦게라도 알았으니, 다행이야. 그리고 이건 정말 잘했어.”

“아닙니다. 저야 최민혁 실장님의 보고서를 토대로 검토한 것에 불과합니다. 정작 이 보고서에 더 놀랐습니다.”

“알겠네. 우선 KM 그룹 계열사 재무 상태를 다시 한번 검토해 봐. TRS지오텍KM과 같은 계열사는 어떤 형태로든지 정리해야 하니까.”

“…알겠습니다.”

* * *

외화보유액의 이상을 느낀 KM 그룹 기획 조정실은 부산하게 움직였다. 다행이라면 최민혁의 보고서 덕분에 이미 KM 그룹의 계열사는 상당 부분 구조 조정이 되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쓰나미와 같은 대형 재난에 대한 준비는 미흡했다.

따라서 수익성이 떨어지는 계열사는 매각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문제는 KM 계열사가 수익성 측면에서 그다지 좋은 회사가 없다는 점이다.

그러니 KM 그룹 본사는 어수선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 최문경 부회장과 최용욱 회장 갈등이 겹치면서 각종 유언비어까지 돌았다.

최용욱 회장조차 채윤집 집사 통해서 KM 그룹 내부 소식을 들었다. 그는 자신을 찾은 장승일 실장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

“죄송합니다. 너무 서두르면서 소문이 샌 것 같습니다.”

“그래, 장 실장 자네가 고생하는 것은 알아. 아마 자네 조언을 처음부터 잘 들었다면 큰놈하고도 이렇게 심각하게 벌어지지 않았을 거야. 그렇다고 해도 이미 다 지난 일이야. 앞으로 일은 더 신중할 필요가 있어.”

“회장님께서 너무 노여워하는 모습에 제가 신중하지 못했습니다.”

“내가 서두를수록 자네는 얼음처럼 냉정할 필요가 있는 거야. 외환보유고 문제도 그래. 설사 최악의 상황으로 흐른다고 해도 2년은 지나야 할 일이잖아.”

그랬다.

장승일 기획실장의 행동은 좀 서두른 감이 있었다. 하지만 그도 사람인 이상 최민혁에게 된통 당하자 크게 당황해서 이성을 잃어버린 것이다.

최용욱 회장도 그 침착한 장승일 실장이 당황한 모습을 착잡하게 바라보았다. 이 모든 일에는 자신의 책임 역시 피하기 어려웠다.

그는 애초에 오큘러스 프로젝트를 심각하게 바라보지도 않았다.

그런데 막상 진행된 결과는 전혀 그렇지가 못했다.

너도나도 오큘러스 프로젝트에 빨대를 꽂으려고 했다.

최용욱 회장은 심란했고, 그런 차에 최문경 부회장이 자신은 이 일과 관련이 없다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자 분노를 터뜨리고 말았다.

물론 지금은 자신의 행동이 지나쳤다는 것을 알았다.

KM 산업의 5% 지분을 최민혁에게 넘긴다는 것 자체가 최문경 부회장에게 일방적으로 경영권 후계 문제를 다시 검토하겠다는 선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도 손자 최민혁의 행보를 이제는 냉정하게 바라봤고, KM 그룹 미래를 위해서라면 최민혁이 최문경 부회장을 견제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다만 그 결과가 극단적이라는 점이 아쉬웠다.

최용욱 회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채 장승일 실장의 보고서를 살폈다.

“다시 잘 봐. 상황이 악화하기 위해서는 동남아 경제가 흔들려야 해. 지금 상황이 그 정도까지는 아니잖아. 아르헨티나나 멕시코와는 상황이 달라.”

“제 개인적으로는 멕시코 금융위기도 같은 연장선이라고 봅니다. 일본 정부가 엔고에 따른 정책을 수정하면서 멕시코나 아르헨티나 경제에 영향을 미쳤다고 봅니다.”

“글쎄, 그건 너무 나간 이야기야.”

하지만 최용욱 회장은 이미 최민혁 보고서 검토안을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처음 이 보고서를 봤을 때는 정신이 나간 놈이 썼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특히 KM 그룹 차입금에 따른 주변 변화가 문제였다.

‘정말 이 보고서대로 흘러간다면 2년 안에 최악의 경제 위기가 올 수도 있어.’

최용욱 회장은 손자 최민혁의 행보를 떠올리자 이 최민혁 보고서 분석안을 도저히 가볍게 생각할 수는 없었다.

“좋아, 우리 그룹 차입금 상황은 어때?”

“다행히 KM 건설이나 KM 산업은 부채율을 대폭 줄였습니다. 특히 문제가 될 만한 계약 건은 취소하는 것으로 정리했고, 수익성 위주로 재편했습니다.”

“…그렇지. 역시 장 실장이야.”

KM 그룹은 내부에서는 그룹 후계 갈등 때문에 불안한 모습을 보였지만 내실만 놓고 보면 또 그렇지도 않았다.

갈등이 첨예한 양상을 보이면서 다들 몸을 사린 결과였다.

최용욱 회장의 지시도 있었지만, 장승일 실장이 꼼꼼하게 부채를 다 관리한 것도 한 원인이다.

KM 그룹에서 가장 크게 변화를 이끌어간 것은 다름 아닌 KM 전자였다.

별다른 차입금도 없이 올해 회사 매출 규모를 무려 1조로 끌어올린 탓이다.

장승일 실장은 이런 KM 전자의 실적을 이용해서 KM 그룹 계열사를 압박했다.

최용욱 회장도 장승일 실장의 일 처리에 크게 감탄했다.

“하지만 부채 관리는 더 철저히 할 필요가 있겠어. 얼마까지 줄일 수가 있겠나?”

“현재는 최민혁 실장님 보고서대로 50% 이하까지 끌어내릴 겁니다.”

하지만 KM 산업 특성을 잘 아는 최용욱 회장은 눈살을 찌푸렸다.

“KM 산업이나 건설 쪽은 그렇게 쉽게 되지 않을 텐데?”

“하반기나 내년 투자를 대폭 줄이거나 연기하면 됩니다.”

최용욱 회장도 뒤늦게야 TRS지오텍KM의 문제점을 파악했다. 세계 경제라는 큰 흐름에서 본다면 TRS 투자는 진짜 미친 짓이었다.

“가만 그렇다면 지금 당장은 지오텍이 문제군.”

“…네. 만약 최민혁 실장님 예측처럼 흘러간다면 지오텍은 막대한 손실만 날 겁니다. 더욱이 인수할 기업도 없는 최악의 상황이 되면.”

“아, 거기까지. 일어나지도 않는 일을 가지고 고민은 그만해. 그런데 상황이 그렇게 된다면 오큘러스 법인도 문제가 되지 않을까?”

“사실 그것도 걱정됩니다.”

최용욱 회장도 손자 최민혁이 설마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하지만 도대체 무슨 문제인지 예측조차 할 수가 없었다.

“…이 문제를 더 철저하게 파 봐. 정 힘들다 싶으면 민혁이에게라도 도움을 청해.”

“알겠습니다.”

“그리고 KM 계열사들의 재무 구조를 외부 평가사에 외주를 줘서 전반적으로 다시 검토해. 내부 평가와 그들 평가를 비교해서 정말 아니다 싶은 기업은… 정리하는 것까지 고민해 봐.”

“…네.”

‘계열사 정리’란 말을 최용욱 회장이 자기 입으로 한 것에 놀란 장승일 실장은 새삼 놀랐다.

‘차라리 다행이다. 회장님이 그나마 리스크 관리를 해서.’

* * *

최민혁도 어수선한 KM 그룹 분위기를 살피면서 냅스트 상황을 유심히 살폈다. 그의 예측대로 냅스트의 인기는 장난 아니었다.

링컨 고등학교와 인접한 주변 주에도 냅스트가 빠르게 퍼져갔다.

그 흐름은 지역 대학을 통해서 점점 미국 전역으로 퍼져갔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느린 인터넷 속도가 발목을 잡았다.

‘이 정도면 양호해.’

최민혁은 결국 다음 단계로 MP3의 마케팅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는 대중이 MP3에 익숙하지 못한 점을 염려했다. 이대로라면 카세트 플레이어에 익숙한 대중이 MP3의 장벽을 쉽게 넘지 못할 것이라 봤다.

‘시간이 흐르면 양상이 달라지겠지. 하지만 굳이 세계 최초로 MP3를 내놓았다는 이야기만 듣고 끝낼 수는 없어.’

임팩트가 필요했다.

MP3를 보고 대중이 열광해야 한다.

입소문이 매니아를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퍼져야 한다.

MP3가 가지는 강점을 사람들이 알고, 열광하도록 말이다.

최민혁은 조성돈 팀장과 마케팅 최주호 팀장을 불러 협의를 나누었다.

마케팅 최주호 팀장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소 비관적이었다.

“MP3가 획기적인 제품인 것은 사실이지만 사람들이 익숙해지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최하가 1년이고, 2~3년은 족히 걸릴 겁니다.”

“그 기간을 당길 만한 마케팅은 없을까요?”

하지만 최주호 마케팅 팀장은 최민혁과는 달리 냉정했다.

“실장님 마음은 저도 압니다. 아마 지금 콜린스 인기 때문에 덩달아서 이 일이 쉽게 될 것이라 예상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콜린스만 봐도 결과적으로 시간이 많이 소요되고 있습니다.”

“그렇죠.”

최민혁도 순순히 인정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굳이 마케팅 팀장을 호출해서 의견을 나눌 이유는 없었다.

조성돈 팀장은 조용히 입을 다문 채 두 사람의 의견을 청취했다.

“저도 최 팀장 의견에 찬성합니다. 시간을 좀 더 길게 잡아서 가져가야 하지 않을까요? 아직 64MB 낸드 메모리가 개발 단계라서 굳이 서두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64MB 메모리의 시제품까지 받아서 테스트까지 잘 끝났지만 역시 부품 수급이 문제였다.

오성 전자와 도시바가 합작으로 연구하고는 있지만, 시간이 필요했다.

최민혁도 그 점은 순순히 인정했다. 그가 문득 떠올린 것은 역시 세상을 뒤흔든 슈퍼스타에 관한 기억이었다.

특히 뮤직비디오라는 새로운 세상을 만든 마이클 젝슨의 업적을 말이다.

‘과연 불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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