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240화 (240/1,021)

#240.

“설마 사장단 회의에서 그 안건을 내걸었다는 말입니까?”

“나도 회장님이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어. 다만 TRS지오텍 합작 법인 설립 무산 때문에 그러는 것 같기는 한데…….”

“아마 맞을 겁니다. 고작 합작사 하나 설립하는 걸 제대로 못 했으니, 아무리 첫째 큰아버지라도 책임을 져야 하겠죠. 그렇다고 할아버지가 설마 계열사 사장이 모인 자리에서 큰아버지를 질책했다니.”

최민혁 자신도 두 사람이 싸울 것으로 예측했다. 다만 노골적으로 대립할 것이라 예상하지 않았다. 최민혁은 최문경 부회장의 성정을 잘 알았다.

최문경 부회장은 앞에서 직접 싸우는 싸움닭이 아니라 배후에서 일을 만드는 스타일이기 때문이다.

‘첫째 큰어머니도 만만한 사람은 아냐. 아마 첫째 큰아버지가 너무 분개해서 날뛴 것 같아. 하, 예상한 것보다 더 괜찮은 결과네.’

최민혁이 복수에 앞서서 가장 걱정했던 것은 다름 아닌 최용욱 회장이다.

가족 사랑이 지긋한 최용욱 회장은 누구 한 사람을 편애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그래서 설사 최문경 부회장이 큰 잘못을 저질러도 내치지 않을 것이라 봤다.

자칫 최민혁이 악당이 된다면 최용욱 회장도 최문경 부회장 편을 들 수밖에 없다.

그건 정말 최악의 경우다.

최민혁 자신이 진다는 것이 아니라 일이 복잡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용욱 회장과 최문경 부회장을 대립하게 하는 것은 그 어떤 일보다 가장 우선해야 할 일이었다.

그것이 굳이 오큘러스 프로젝트를 만들어서 일을 복잡하게 만든 가장 큰 이유였다.

최민혁 모습을 본 오영근 사장은 혀를 찼다.

“그게 어떻게 최문경 부회장 탓일까. 장승일 실장을 비롯한 이들도 책임을 벗어나기 힘들어. 그런데 꼭 찍어서 최문경 부회장을 공격했으니, 회장님도 아예 작정하신 거네.”

“정말 믿기지 않습니다.”

“자네는 아직 소식을 못 들었나 보군. 그것 때문에 이번 사장단 회의 내내 시끄러웠네. 사실 따지고 보면, 그 일을 주도한 사람은 장승일 실장이었으니까. 정작 책임은 최문경 부회장에게 돌아갔어.”

“그렇습니까?”

최민혁도 흥미로운 이야기에 입맛을 다셨다. 그도 이번 사장단 회의의 멋진 불구경에 나가지 않은 것을 아쉬워했다.

하지만 어차피 오큘러스 프로젝트는 이제 그의 주된 관심사가 아니었다. 아니, 정확히는 이제 구경이나 하면 되는 단계다.

그는 원래 냅스트 이후, 앞으로 진행한 기획에 대해서 논의할 생각이었지만 잔뜩 흥분한 오영근 사장을 보자 조용히 물러났다.

‘상황부터 파악해야겠어.’

* * *

최용욱 회장도 최근 와서 이런저런 많은 일을 경험했다. TRS 합작 법인 소동은 그로서는 처음 경험하는 일이었다.

이 일 자체는 비록 최민혁이 동기를 제공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최용욱 회장 역시 누군가에게 책임을 물어야 했다.

마치 오성 전자의 이창명 이사가 오큘러스 프로젝트 실패에 관한 책임을 김현우 수석 부장에게 넘긴 후에 슬쩍 빠진 경우와 비슷하다.

최용욱 회장은 특히 손자 최민혁에게 압박을 받자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

그 폭탄이 터진 것이 바로 KM 그룹 사장단 회의에서였다.

최문경 부회장은 이상할 정도로 침묵했는데, 마치 자신은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태도를 보였다.

이런 그의 행동이 도화선이 된 것이다.

최용욱 회장은 마치 이 모든 일이 최문경 부회장이 제대로 그룹 경영을 하지 못하고, 다른 계열사와 협업을 하지 못한 탓으로 몰아갔다.

최문경 부회장도 처음에는 참았지만, KM 산업 지분 5%를 최민혁에게 넘기겠다고 하자 최용욱 회장과 정면에서 부딪쳤다.

두 사람은 많은 KM 그룹의 계열사 사장 앞에서 대판 싸운 것이었다.

최용욱 회장 앞에서는 단 한 마디도 큰소리치지 않던 사람이 이런 난리를 피웠으니.

KM 그룹은 난리가 났다.

최민혁은 조성돈 팀장에게서 보고를 들으면서 혀를 내둘렀다.

“예상보다 상황이 더 심각하군요.”

굳은 얼굴을 한 조성돈 팀장 역시 마찬가지다.

“회장님 태도가 너무 강경해서 최문경 부회장의 경영권도 위태롭다는 이야기가 파다합니다. 회장님이 최문경 부회장님의 지난 경영 성과에 대해서 다시 원점에서 조사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어, 그거 너무 나간 것 아닙니까? 그렇게까지 키울 일은 아닌 것 같은데…….”

“회장님 분노가 그만큼 컸습니다.”

“아, 분노요. 그렇죠. 화가 많이 나셨겠죠.”

그 분노를 부추긴 최민혁은 혀를 내둘렀다. 따지고 보면 최용욱 회장을 계속 자극한 사람이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꼼꼼하게 기억을 되짚어보고서야 자신이 자극한 일이 원인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원래 피의자는 자기가 한 일을 잊어도 피해자 당사자는 그 일을 잊지 못 하는 것과 비슷했다.

거기에 김상구 회장이 계속해서 최용욱 회장을 압박한 상황도 문제였다.

단순한 압력이 아니라 달콤한 당근도 같이 휘둘렀기 때문이다.

최용욱 회장 처지에서 수천억 투자 제안은 무시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것도 은행 이자 금리보다 살짝 높은 정도의 제안이었으니까.

최용욱 회장도 참다가 참다가 최문경 부회장의 태도에 분노를 터뜨린 것이었다.

실제로 이 문제 때문에 스트레스에 찌든 장승일 실장이 다시 최민혁을 찾아왔다. 그로서는 이 모든 사태가 최민혁 때문이라고 확신하지만 그렇다고 최민혁에게 직접 물을 수도 없었다.

“후유, 앞으로 어쩔 생각입니까?”

최민혁은 어이가 없었다.

“아니, 제가 뭘 했다고 그럽니까? 두 사람이 싸운 건데 제가 나설 일이 아니죠.”

“하지만 그 동기를 제공한 것이 실장님입니다.”

“전 합리적인 비즈니스를 한 겁니다.”

“실장님, 그게 어떻게 단순한 계약입니까? 더욱이 KM 산업의 지분을 요구한 것 자체가 최문경 부회장에게 선전포고한 것이나 진배없습니다.”

“그런 의미가 아니었어요.”

“그러면 도대체 무슨 의미였습니까?”

큰소리치는 장승일 실장의 태도는 확실히 이전과는 사뭇 달랐다.

최민혁은 어이가 없었지만 뭐 자신이 한 일이 있으니, 한 번쯤은 넘어갔다.

“저도 손해를 볼 수는 없습니다. 오큘러스 프로젝트에 나름 투자를 한 것은 사실이니까.”

“…….”

장승일 실장도 자신이 지나쳤다는 것을 깨닫고 잠깐 멈칫했다.

제정신을 차린 그는 자신이 사자 입에 자기 얼굴을 내밀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심호흡까지 했다.

참고 있는 최민혁 얼굴이 눈에 확 들어왔다.

‘젠장.’

한 발자국만 더 나아가면 최민혁이 자신을 물어뜯을 것이라는 것을 금방 깨달았다.

“죄송합니다. 워낙에 큰일이 생겨서 제가 너무 흥분했습니다.”

“정신 차렸다니, 다행이네요. 이번 한 번은 넘어가겠습니다.”

“…….”

장승일 실장은 흥분을 더 가라앉히기 위해서라도 잠깐 최민혁을 힐끗 쳐다보았다. 정말 난 모른다고 오리발을 내미는 최민혁 행동에 어이가 없었다.

그가 오죽하면 다시 최민혁 실장을 찾아왔겠는가.

“…그렇다고 해도 이번 일은 쉽게 끝나지 않을 겁니다. 이제부터 최문경 부회장님이 대놓고 최 실장님을 공격할 겁니다.”

심드렁한 최민혁은 툴툴거렸다.

“뭐 언제는 조용했습니까? 하루 이틀 경험하는 일이 아니라서 신경 안 씁니다. 그리고 차라리 이빨을 드러내는 것도 편하고요. 그래야 저도 할아버지에게 할 말이 있지 않겠습니까?”

“…하아, 꼭 그러셔야 합니까?”

“아니, 제가 뭘 어쩐다고 그러세요? 우리 첫째 큰아버지가 저에게 한 짓은 생각 안 하세요. 제가 KM 전자에 입사하기 전에 있었던 일을 모를 거로 생각합니까?”

“그건…….”

“우리 두 사람은 화해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에요. 누구보다 잘 아시면서 그런 말씀을 하세요?”

장승일 실장도 안색 하나 안 바뀌는 최민혁 실장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

“…걱정이 되어서 최 실장님을 찾아왔는데, 제가 너무 나선 것 같습니다.”

“나댄 것 맞습니다. 다만 KM 그룹을 위해서 한 것이니, 특별히 이번 일은 마음에 두지 않겠습니다. 오히려 두 분 관계나 신경 쓰는 것이 맞을 겁니다. 둘 사이의 갈등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서 아마 화해하기 쉽지 않을 겁니다.”

최민혁은 ‘KM 산업 지분 5%’ 때문이란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그는 애초에 그렇게 의도한 것이니 말이다.

장승일 실장은 혹시라도 최민혁이 KM 산업의 5% 지분 요구를 취소했으면 하는 바람이었지만 최민혁은 결코 자신이 한 요구를 철회하지 않았다.

더 심각한 문제는 최민혁도 이제 최문경 부회장을 끌어내리려고 작정했다는 점이다.

‘후유, 진짜 큰일이다.’

* * *

최민혁은 KM 그룹 내부를 불구경하듯 흥미롭게 지켜봤는데, 아니나 다를까 이전처럼 쉽게 불화가 가라앉지 않았다.

최문경 부회장은 아예 자기 측근 사람을 죄다 불러 모아서 회의를 거듭했다.

‘하지만 지오텍 문제를 마무리하기 전까지 나에게 칼을 들이대기는 어려울 거야. 우리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가 그렇게 착한 사람은 아니니까.’

아니, 일을 그냥 그렇게 둘 수는 없었다.

그는 정성근 대리를 통해서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에게 몇 가지 정보를 던졌다.

바로 TRS 미래에 대해서 말이다.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 역시 지오텍 미래를 그다지 좋게 보지 않았는데, 정성근 대리 통해서 최민혁 전갈을 듣자 혀를 내둘렀다.

그도 설마 지오텍이 몇 년 안 가서 망할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최민혁이 설명한 부분은 생각보다는 합리적이고, 구체적이었다.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는 결국 지오텍 야론 메이탄 이사를 만나서 다시 협상했다.

야론 메이탄 이사도 제이미 이사가 내놓은 서류를 읽고 나서는 안색을 바꾸고 말았다. 지오텍 몰락 시나리오는 생각보다는 합리적이었다.

제이미 이사는 특히 지금 진행하는 지오텍 사업이 얼마나 허황한지를 꼼꼼하게 지적했다.

그리고 이런 부분은 지오텍 자체적으로도 우려하는 것이다.

굳이 KM 그룹과 손을 잡는 방식으로 일을 진행하는 것도 그 리스크를 줄이기 위함이다.

지오텍이 미래가 짱짱했다면 일을 번거롭게 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니 지오텍 몰락 보고서는 그만큼 그에게도 소름 끼쳤다.

“…이, 이게 정말입니까?!”

주도권을 잡았다고 생각한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는 느긋하게 상황을 풀어갔다.

“그쪽에서 보는 한국 시장만 해도 그렇게 장밋빛은 아닌 것 같더군요. 그러면 다른 동남아 쪽은 굳이 더 조사할 필요가 없죠.”

“으음.”

“이번 소송은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기보다는 금전적인 이익을 챙기는 것이 더 합리적입니다. 전 정말 그쪽 회사를 걱정해서 드리는 제안입니다.”

야론 메이탄 이사도 시즈벨의 제이미 니콜라스를 경멸했지만 그렇다고 이 제안 자체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하긴 이자들의 악명이 그렇게 대단해도 실력 자체는 무시할 수 없어.’

“…좋습니다. 귀사에서 보여준 태도는 잊지 않겠습니다. 본사 쪽과 협의해서 결과를 바로 알려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결론.

이번 소송은 소극적으로 끝내지 않을 것이다.

때문에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는 다시 KM 그룹 공략을 위해서 시즈벨 유럽 지부에서 소송 전문가를 불러들였다.

‘이번 일은 생각보다 재미있겠어.’

* * *

KM 그룹의 기획조정실 구길모 차장은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의 압박에 분노했다. 하지만 그런 그도 최악의 상황에서 미국에서 진행될 지오텍 소송 문제를 검토하는 중에 최민혁 보고서에서 예측한 한 가지 현상을 발견하자 마냥 날뛸 수가 없었다.

최민혁 실장이 보인 태도에 충격을 받은 장승일 실장도 영문을 몰랐다.

“외화보유액이 심상치 않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굳은 얼굴의 구길모 차장은 경상수지 적자 확대에 따른 총외채를 문제 삼았다.

“재정경제원의 발표로는 올 하반기에 총외채가 무려 1천억 달러를 넘어설 것으로 전망합니다. 이것 때문에 지금 외환보유고 수준도 문제가 됩니다.”

“내가 기억하기로 총외채가 그 정도는 아닌 것으로 아는데?”

“90년만 해도 317억 달러에 불과했지만 계속 증가해서 올 상반기에 이미 700억 달러를 돌파했습니다. 경상수지 적자가 문제입니다.”

“…경상수지 적자라면, 설마 외국으로 나가서 돈을 펑펑 쓴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겠지?”

농담조의 장승일 실장 말에도 구길모 차장은 안색을 굳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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