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205화 (205/1,021)

#205.

최용욱 회장은 장승일 실장이 나서려고 하자 다시 불러 잠깐 망설이다가 오영근 사장을 호출해 달라고 지시 내렸다.

“…알겠습니다.”

장승일 실장은 잠깐 머뭇거렸다.

최용욱 회장도 쓰게 웃었다.

“너무 걱정하지 말게. 이 나이 들어서 손자 떡고물 뺏을 생각은 없으니까.”

“아, 아닙니다.”

장승일 실장은 서재를 나가면서도 지금 상황을 고민했다. 최용욱 회장이 고작 계열사 이사 목숨 하나 가지고 저렇게 신경 쓸 리는 없다. 그보다는 KM 전자 지분과 관련해서 마음에 복잡하기 때문일 것이다.

‘오영근 사장님과 괜한 이야기를 안 했으면 좋겠는데, 골치네.’

* * *

오영근 사장은 갑작스러운 최용욱 회장의 호출을 받은 후에 저택을 찾아갔다.

저택에는 이미 조촐한 술자리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는 영문을 몰라서 묵묵히 자리에 앉아 술을 주거니 받거니 했다.

‘혹시 이일태 이사 일 때문일까?’

이일태 이사가 최민혁을 이사회에서 들이박은 사건을 잘 기억했다.

까칠한 최민혁 실장이 당하고 그냥 있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예상을 벗어난 일이 위성 사업부 내에서 일어났다.

오영근 사장도 최민혁 실장을 불러 설득을 할까 하다가 이일태 이사가 회사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자 지켜보기만 했다.

시간이 갈수록 드러나는 결과는 그의 예측과는 많이 달랐다.

이일태 이사는 날이 갈수록 피골이 상접했으니까.

차라리 따로 불러서 회사 그만두라고 권고사직을 강요하는 것보다 더 끔찍했다.

오영근 사장도 이때서야 최민혁 실장이 얼마나 적에게 독한지 깨달았다.

김현우 상무나 최훈열 전무의 몰락에 최민혁이 손을 썼다는 것도 뒤늦게 알았다.

문형섭 부사장을 불러 서로 상의도 해봤는데, 결론은 지켜보자였다.

다행히 그 후로 이일태 이사 일은 그럭저럭 잘 끝난 것 같았다.

장승일 실장이 나타난 것이 좀 의외였는데, 아니나 다를까 최용욱 회장이 지금 자신을 호출한 것을 보자 최용욱 회장의 지시에 따랐다는 것을 깨달았다.

“요즘 최 실장은 어때?”

“늘 의욕적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위성 사업처럼 자신이 담당이 아닌 일에도 간섭하는 것 같아. 그것은 실장 업무 역량을 벗어난 것이 아닐까?”

“제가 알기에는 위성 사업부에서 미처 캐치하지 못한 부분을 보조해 주는 것으로 압니다.”

“그런가?”

“최 실장 스타일이 어느 정도 결과가 나와야 이사회에 보고하는 스타일인데, 아직은 진행 중인 것으로 압니다.”

“하긴 사장이라고 해서 기획실장 일에 왈가왈부할 수는 없지. 하면 자네는 민혁이, 그 녀석이 하는 일에 불만이 없다는 건가?”

“네?”

평소와는 전혀 다른 최용욱 회장 태도에 오영근 사장도 당황했다. 이렇게 최민혁 행보를 꼬치꼬치 질문한 적은 없으니까.

“아, 아닐세. 내가 괜한 이야기를 했어. 오늘 술을 제법 먹어서 그런지, 오락가락하는 것 같아.”

연달아서 잔을 걸치는 최용욱 회장은 평소와는 많이 달랐다.

오영근 사장은 그저 최용욱 회장 눈치를 봤다. 다행히 최용욱 회장은 제법 술에 취해 있었다. 오영근 사장은 그 점을 이용했다.

“혹시 무슨 걱정이라도 있습니까?”

“걱정? 내가 무슨 걱정이 있겠나.”

“이번에 최민혁 실장을 경영 승계자 중에 한 사람으로 내세운 것으로 압니다. 최문경 부회장도 그렇지만 다른 가족도 말이 나올 것 같은데…….”

“아, 그렇지. 며느리가 아주 난리야. 시아비를 못 잡아서 안달이 났어.”

술이 제법 들어가서인지 최용욱 회장은 쌓인 것을 하나씩 털어놓았다.

최문경 부회장의 무능함.

큰며느리 김이경의 불만.

장손녀 최영란이 갑자기 날을 세운 것.

최훈열 전무 때문에 원한을 가진 김여정이 김용만 전무로 부족해서 김상구 회장을 끌어들인 것.

“사돈이 아니라, 완전히 원수야. 전경련의 그 많은 사람 앞에서 날 비웃는데, 환장하겠더군.”

“…….”

“더 웃기는 것이 뭔지 아나. 손자 잘 뒀다고 그렇게 말하던 놈들이 김상구 회장 선동에 놀아나서 날 조롱하는 거야. 손자에게 1조가 넘는 돈을 증여했다고, 인간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

오영근 사장은 빈 잔을 채워주면서 더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듣기만 했다. 최용욱 회장은 자신이 편한지 지금까지 쌓인 모든 감정을 다 토로했다.

그리고 회장이 인사불성이 되자 오영근 사장은 눈치껏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이일태 이사 문제가 이상하게 변질된 것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었다.

‘환장하겠군.’

* * *

오영근 사장은 다음 날에 회사로 복귀하자 문형섭 부사장을 불러 최용욱 회장과 있었던 일을 가지고 상의했다.

문형섭 부사장도 심각했다.

“별것 아니라면 별것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의 본질은 경영 승계 갈등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그냥 둘 수 없습니다.”

“아무래도 회장님 마음을 풀어주는 것이 맞겠지?”

“맞습니다. 그런데 이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저도 KM 전자의 주가가 10만 원을 넘어서는 것을 볼 때 가슴이 덜컥했습니다. 틀림없이 문제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다행히 9만 원대로 떨어졌지 않는가.”

“그러니까요. 아무래도 최민혁 실장을 불러 이야기를 해두는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렇겠지?”

“네, 그리고 임시 이사회에 이일태 이사도 같이 불러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를 지어놔야 합니다. 당분간은 최 실장도 조용히 있는 것이 좋습니다.”

“자네가 최 실장에게 이야기 좀 하게.”

“알겠습니다.”

* * *

KM 그룹의 막내 최병문의 서자 최민혁은 아버지의 죽음 이후 어머니 정미선을 떠나 본가로 들어갔다.

하지만 이 일은 큰아버지 최문경이 KM 그룹의 경영 과실을 덮기 위해 사전 정지 작업을 한 것이었다.

최용욱 회장은 실제로 최문경의 처리에 만족했다.

그저 좋게만 생각했던 최민혁은 결국 최문경의 희생양이 된 채 두 번이나 감옥에 갔다.

감옥에서 나왔을 때 KM 그룹은 이미 공중분해 되고 없었다.

홀로 된 그를 돌봐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결국 쓸쓸히 죽어갔다.

그런데 그의 죽음은 마치 꿈처럼 사라졌다.

그는 지긋지긋한 재벌가의 욕망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고, 미래 지식을 이용해서 조용히 살기로 마음먹었다.

최민혁은 갑작스러운 이사회 소집에 고개를 갸웃했지만, 조성돈 팀장 통해서 사전에 안건이 무엇인지 빠르게 파악했다.

처음에는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곧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어차피 생길 일이었다.

오히려 자신의 예상한 범주 안이라서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차라리 잘됐다.’

어차피 오영근 사장이나 문형섭 부사장에게도 MP3에 대한 것을 알려야 했으니까.

최민혁은 오히려 자신이 적극 나서서 우선 이사회 일정부터 확인했다. 그는 특히 이일태 이사의 동선까지 파악했다.

안 그래도 이번 일 때문에 질린 이일태 이사는 마침 ETRI 출장 날짜가 잡혀 있었다.

최민혁은 자신이 이사회에서 보고할 것이 있다고 보고한 후에 이일태 이사의 출장 날짜에 맞추어서 이사회를 소집했다.

다만 원종상 전무를 살펴보려고 일부러 그에게는 연락했다.

달랑 네 사람만 이사회에 참석하자 오영근 사장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일태 이사는 왜 안 오는 건가?”

최민혁이 바로 나섰다.

“ETRI에 일이 생겨서 급하게 출장 간 것으로 압니다.”

“…정말인가?”

“네.”

오영근 사장은 최민혁 실장이 손을 썼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굳이 내색하지는 않았다. 그는 오히려 원종상 전무를 힐끗 쳐다보았다.

이일태 이사 소동 때문에 몸을 사리고 있는 원종상 전무는 눈치만 봤다. 이사회의 다른 사람과는 달리 자신 역시 이일태 이사 꼴을 당할지 모른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불안했던 것이다.

‘최 실장은 너무 독해.’

오영근 사장은 최민혁 실장에게 한마디 할까 하다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문형섭 부사장 역시 다르지 않았다. 둘 다 최근 회사에서 일어난 일이 얼마나 황당한지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상 밖의 사람이 뒤늦게 참석했다.

“어? 자네 최병연 팀장 아닌가?”

최민혁이 최병연 팀장에게 손짓하면서 빈자리를 가리켰다.

“제가 불렀습니다. 오늘 이사회를 통해서 보고할 내용이 있습니다.”

최용욱 회장 문제 때문에 골치가 아픈 오영근 사장이 질문했다.

“중요한 일인가?”

“네. 으음, 사장님이 지금 고민하는 것에 대한 대답이 될 겁니다. 그러니 우선 최 소장님, 아, 죄송합니다, 최 팀장님의 보고부터 먼저 진행하겠습니다.”

“…알겠네.”

오영근 사장도 최민혁이 독단적으로 이사회를 이끌어 간다는 것을 알았지만 아무런 이유 없이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 일단 물러났다.

최병연 팀장은 ‘최 소장’ 이야기에 묘한 눈으로 최민혁을 힐끗 쳐다본 후에 곧바로 MP3에 대한 보고를 시작했다.

이미 실무진을 불러서 했던 이야기의 반복.

하지만 오영근 사장이나 문형섭 부사장의 반응은 앞서 이야기를 들은 실무진의 반응과는 좀 달랐다.

그들은 설명을 들을수록 경악을 금치 못했다.

특히 문형섭 부사장은 이미 조성돈 팀장을 통해서 앞으로 모바일에 들어갈 스피커 500만 개 납품 이야기를 들었기에 더 큰 충격을 받았다.

기획 팀에서도 500만 개 수량을 베이스로 깔고 가는 만큼 기존 스피커 품질을 뛰어넘은 새로운 모바일 스피커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도 처음에는 농담으로 들었는데, 그 용도가 무엇인지 뒤늦게 안 것이었다.

다만 오영근 사장은 이미 최민혁 통해서 꾸준하게 보고를 들어서 MP3 프로젝트가 진행된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다.

문제는 그 결과가 드디어 나왔다는 점이다.

그리고 문형섭 부사장은 MP3와 관련된 특허 목록을 확인하고서야 한 가지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최 팀장, 저기 몇몇 특허를 원래 소유한 곳이 시즈벨인가? 내가 아는 특허 전문 기업인 그 시즈벨은 아니겠지?”

“맞습니다. 시즈벨에서도 특허를 사들였습니다.”

“시즈벨이 특허를 매각했다고? 그 친구들이 그럴 사람이 아닌데?”

“최 실장님과 기획 팀이 조용히 협상한 것으로 압니다.”

“아, 그러면 설마 그 유럽에 갔던 일이……. 하, 정말 기가 막히구먼.”

문형섭 부사장은 황당한 얼굴로 최민혁 실장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특허에 미친 시즈벨에게서 무슨 수로 특허를 사들였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최민혁은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이 자리에서 그 얘기까지 하기에는 너무 상황이 복잡했으니까.

“시즈벨이 결국 MP3 특허를 팔았다면, 그쪽 애들은 이미 우리 회사가 뭘 하는지는 알고 있겠어.”

“정확히는 모를 겁니다.”

“그렇겠지. 최 실장이 우리에게도 비밀로 했는데, 오죽하겠나. 그래도 짐작은 하겠지. 그랬구먼. 그랬어. 난 외국 애들이 왜 그렇게 우리 회사 주식에 집착하는지 몰랐는데, 이제야 알겠어.”

문형섭 부사장 자신도 이해당사자가 아니라면 KM 전자 주식을 따로 사들이고 싶었다. 그러니 눈치 빠른 외국인 투자자가 이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하하, 이거야 원. 도대체 뭘 그렇게 꼭꼭 숨기나 싶었는데, 이유가 있었구먼. 그런데 도대체 그 짧은 시간에 어떻게 개발을 한 건가? 아, 미안. 이거 질문이 너무 많아.”

소니의 카세트 플레이어와 MP3를 비교하는 것만으로 문형섭 부사장은 MP3 가치를 어느 정도 파악했다.

KM 전자에 잔뼈가 굵은 오영근 사장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허허허.”

그는 최용욱 회장과 있었던 일이 그다지 떠오르지 않았다.

김이경 일도, 김여정 문제도 이제 그에게 크게 와닿지 않았다.

그만큼 MP3가 충격적이었다.

콜린스 대박 하나는 운이 될 수가 있다.

그런데 연이어서 연타석 만루홈런은 이야기가 좀 달랐다.

오성 전자에도 이런 식으로 결과를 만들어낸 사람은 없었다.

오영근 사장과 문형섭 부사장은 힐끗 최병연 팀장을 쳐다보았다.

“이 제품 개발을 진행한 것은 최 팀장 자네였고?”

“최 실장님의 기획에 따라서 진행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런가? 사실 개발 일정부터 시작해서 궁금한 것이 산더미처럼 많아. 하지만 이 자리에서 할 말은 아닌 것 같아.”

“제가 따로 최 실장님에게 상세한 보고서를 올리겠습니다.”

“그러게.”

오영근 사장은 아직도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원종상 전무를 힐끗 일별한 후에 자신만만한 표정의 최민혁을 쳐다보았다.

“…혹시 최 실장 자네도 회장님에게 일어난 일을 알고 있나?”

“저도 들었습니다. 둘째 큰어머니가 김상구 회장을 찾아간 것은 뜻밖이기는 했습니다. 설마 그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습니다.”

“…이미 알고 있다면 말이 편하겠어. 회장님도 사람인데, 이런저런 고민이 많은가 봐. 주변에서 자꾸 바람을 집어넣는데, 쉽게 무시할 수도 없어. 하지만…….”

오영근 사장은 힐끗 자기 앞에 놓인 MP3를 보자 한숨을 내쉬었다. 이 물건이라면 최용욱 회장이 무슨 생각을 하든지 그다지 중요해 보이지 않았다.

1조 주식 증여.

확실히 많다.

그런데 MP3 플레이어와 특허의 가치를 살펴보면 꼭 그렇게 많다고 보기도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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