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
아내 ‘김이경’을 떠올린 최문경 부회장은 굳은 얼굴로 머리를 굴렸다. 아내 김이경은 머리가 좋은 것을 떠나서 외가에서 물려받은 자산이 꽤 있었다.
그녀는 유산을 이용해서 KM 그룹 지분도 사들였는데, 그게 진짜 문제다.
차명 지분으로 되어 있어서 드러나지만 않았을 뿐이다.
“그래. 네 마음은 알겠다. 하지만 크게 신경 쓸 일은 아냐. 이미 계열사 사장들은 전부 날 지원하고 있고, 임직원도 다르지 않다.”
기가 찬 최영란은 자신이 직접 본 최민혁의 모습을 떠올렸다.
온갖 소문이 무성했지만 믿기지 않아서 직접 찾아갔다.
그런데 자신이 확인한 최민혁은 결코 소문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KM 산업에서 사회생활을 경험한 그녀로서는 지금도 믿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최민혁 모습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더 답답했다.
아니 경영권 분쟁을 하려면 최소한 적의 기량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나. 도대체 아버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소리쳤다.
“지금 민혁이 인기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면서 그런 말씀을 하세요? 제 눈으로 직접 민혁이를 보고 와서 하는 말이에요. 더욱이 KM 전자의 기업 가치는 KM 산업의 기업 가치를 뛰어넘은 지 오래에요. 만약 이 상황이 지속한다면 민혁이를 무시할 수 없어요. 그러면 제 꼴은 뭐가 되냐구요! 죽으라고 고생했는데, 죽 쒀서 개 주는 꼴이잖아요?!”
장녀의 거센 호소에도 최문경 부회장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너무 그렇게 걱정하지 말 거라. 그렇게 안 되도록 해야지.”
“어떻게요? 이번에도 또 아버지가 엉뚱한 짓을 한다면 할아버지가 그냥 두고 볼 것 같으세요?!!”
“당분간은 KM 산업에 좀 더 집중할 생각이다. 네가 제안한 전장 사업도 포함해서 기업 가치를 더 끌어올려서 아버지의 인정을 받을 거다.”
그녀도 자기 사업 계획서 이야기가 나오자 기세를 좀 죽였다. 그러곤 곧 눈살을 찌푸리면서 반박했다.
“확실한 것 맞아요? 또 민혁이 뒤꽁무니만 쫓아다니는 것 아니겠죠?”
“아니다.”
최문경 부회장은 자신의 장녀에게도 함부로 말하지 못했다. 그녀가 아내에게 쪼르르 달려가서 이를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김이경이 열받으면 한 달 정도는 냉각기다. 심지어 아내는 KM 산업의 대주주 중 한 사람이라 자칫하면 황당한 상황에 부닥칠 수도 있었다.
‘하아, 이 정도면 한숨 돌리겠지. 하지만 한동안 피곤하겠어.’
최영란 과장은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대략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했다. 더욱이 이번 일은 차라리 김이경과 상의하는 것이 더 맞겠다고 판단했다.
‘도저히 아빠 이야기를 믿을 수가 없어. 차라리 엄마라면 잘 알아서 하겠지.’
하지만 그녀도 상상도 못한 최민혁의 비상에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이미 그룹 내에서도 최민혁에 대한 소문이 파다했다.
최용욱 회장이 공식적으로 최민혁의 이름을 거론해서 더 말이 많아졌다.
이제 정식으로 경영권 승계 레이스 후보에 최민혁이 올랐으니, 아마 당분간은 KM 그룹이 조용한 날이 없을 것이다.
최문경 부회장은 뒤늦게 후회했다. 특히 최민혁을 얕잡아 본 것을 자책했다. 지금도 악몽이 아닐까 싶었다. 그 정도로 지금 상황이 황당했다. 이 일도 따지고 보면 배후 조정자가 최민혁이었다.
‘…오성 전자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었어. 거기에 ETRI 일도 끼어드는 것이 아니었다. 괜히 내가 긁어서 부스럼을 냈어. 그리고 민혁 그놈을 너무 과소평가했어. 하, 정말 어쩌다가 이 모양이 된 건지.’
* * *
최영란 과장이 KM 그룹 부회장실에 쳐들어가서 난리를 친 일은 당연히 KM 그룹 내에서 이리저리 알려졌다.
워낙에 특이한 일이라서 최문경 부회장 측근이라고 하는 사람조차 입을 가볍게 놀린 것이다.
의도적으로 이 상황을 만든 최민혁은 모를 수가 없었다.
“하, 우리 누나 제법이네. 설마 부회장실로 쳐들어가서 깽판을 치다니.”
평소 조용한 최영란은 최문경 부회장을 닮아서 소위 말하는 분노 조절 장애가 있다. 어지간해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데, 화가 극에 치밀 때 성격이 드러난다.
‘이거지, 이거야. 이게 진짜 복수지.’
최민혁은 희희낙락한 채 터져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았다. 그는 솔직히 경영권 분쟁 보다는 부녀간의 갈등이 더 재미있고, 통쾌했다.
‘아니지, 이 정도로 끝낼 수 없지. 적어도 원수지간으로는 만들어야지.’
조성돈 팀장은 서서히 혼란을 더해가는 KM 그룹 분위기가 불편했다.
조 팀장은 최민혁의 표정 변화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지켜보다 말을 꺼냈다.
“괜찮을지 모르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 영란 누님이 뜻밖에 똑똑한 분이니까. 숨김없이 그대로 분탕질을 친 것도 다 자기 입지 때문일 겁니다.”
“노리고 했다는 말입니까?”
“생각을 해보세요. 지금까지 사원, 대리, 과장 순으로 진급했죠. 비록 다른 직원에 비해서 빠르다고 해도 특혜 한 번 없었죠. 여자이기 때문에 경영권 승계에서 빠졌다는 이야기가 도는 상황에서 이번이 기회라고 판단해서 액션을 취한 거죠. 우리 누님 머리가 얼마나 좋은데요.”
“설마 그렇게까지 할까요?”
“에이, 조 팀장님은 막장 재벌 드라마 안 보셨습니까? 뭐 과한 면이 있기는 하지만 현실에서도 그런 일이 전혀 없다고 말 못 합니다.”
“…그렇습니까.”
“확실합니다.”
인생 1회차에서 벌인 최영란의 행보.
그녀의 행보는 잔 다르크라는 말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놀라웠다.
‘막내 정수의 나이가 너무 어린 점을 절묘하게 이용했지. IMF가 터졌을 때도 만약 그룹이 공중 분해되지 않았다면, 그 위기를 이용해서 최영란 누나가 다음 그룹 회장이 되었을지도 몰라.’
최민혁은 최영란 과장의 능력을 무시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과는 달리 순수한 자기 능력으로 지금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 봐야 안목이 좀 있고, 경험이 제법 쌓인 재벌 3세에 불과하니까.’
“하지만 크게 걱정 안 해도 될 겁니다.”
하지만 조성돈 팀장도 최민혁이 정식 후계자 중의 한 명이 된 이후에 KM 그룹을 면밀하게 조사했다.
“제가 듣기로 큰 사모님이 알게 모르게 회사 경영에 간섭한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KM 산업 지분도 있다는 소리가 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최영란 과장님도 무시할 수 없는 것 아닐까요?”
“그래서 더 괜찮아요. 능력이 뛰어나서 제법 대화 상대가 되니까. 사실 첫째 큰아버지나 셋째 큰아버지가 무서운 것은 대책 없는 욕심 때문에 대화가 잘 안 된다는 점이죠. 능력도 없는데, 어찌나 탐욕스러운지 그게 더 무서운 겁니다. 반풍수가 집안 거덜 낸다고 하잖아요. 딱 그 꼴이죠.”
“…네.”
최민혁의 야박한 최문경 부회장에 대한 평가에 조성돈 팀장도 무안했다.
하지만 최민혁은 피식 웃었다.
“중요한 것은 저희는 최영란 누나가 뭘 해도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그 말씀은?”
“전 애초에 그룹 승계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아, 아니, 그게 또 무슨 말씀입니까? 그러면 지금 하는 일은 다 무엇 때문입니까?!”
최민혁은 쓸쓸하게 웃었다.
“첫째 큰아버지 때문이죠. 그 양반은 욕심이 많아서 절 용납 안 해요. 제 재산을 다 먹어야 성이 차는 사람이니까. 저로서는 살기 위해서 대응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일어나는 모든 일은 다 그 때문인 겁니다.”
“…….”
상상도 못한 이야기에 조성돈 팀장은 멍하니 최민혁을 쳐다보았다.
최민혁은 억울한 얼굴을 하고는 이어 말했다.
“전 조용히 살고 싶습니다. 그게 제가 바라는 소박한 소망입니다.”
“…그건 좀 아닌 것 같습니다.”
“재벌 3세도 조용히 살고 싶을 수도 있는 겁니다. 꼭 거창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그거 전부 다 막장 드라마로 말미암은 선입견입니다.”
“…….”
이제까지 최민혁이 벌인 사건 사고를 떠올린 조성돈 팀장은 어이가 없어서 멍하니 최민혁 얼굴을 쳐다보았다.
“컥.”
좀 뜬금없게 느껴졌던 최민혁의 마지막 말에 억지로 웃음을 참다가 숨을 삼킨 김명준 과장은 따가운 최민혁 시선에 얼굴을 돌리고 말았다.
최민혁도 자신이 진행한 일이 있기 때문에 굳이 자기 소망을 다시 말하지 않았다. 아무리 떠들어 봐야 조성돈 팀장이나 김명준 과장이 자기 말을 믿을 것 같지가 않았다.
“뭐 언젠가 제 마음을 알 때가 있을 겁니다. 일단 그룹 승계 정식 후보에 올랐다는 이야기가 돌 테니, 회사가 좀 어수선하죠?”
“아무래도 말이 많습니다. 더욱이 이일태 이사 이야기도 있고 해서 더 복잡합니다.”
“그런가요? 그러면 ETRI 오현종 부장은 뭐라고 합니까?”
“아무래도 전반적인 시스템 수정이라서 시간이 더 걸리는 것 같습니다.”
“하긴 그게 하루 이틀 한 일이 아니니, 그럴 겁니다. 혹시 프로젝트 수정 작업 자체는 어때요?”
“위성 방송 시스템 수정 자체는 큰 문제가 없다고 합니다. 큰 골격 자체는 어차피 송한성 교수 시스템을 토대로 작업한 것이니까요. 다만 문제는 작업 소요 시간입니다.”
“그렇습니까?”
‘보자, 어떻게 한다. 이런 어수선한 분위기에 꼭 사고 치는 놈이 있어.’
최민혁은 예상과는 다른 전개에도 그다지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작은 그림이 좀 바뀌기는 했지만 큰 그림은 자신이 의도한 바였다.
‘어차피 내가 원하는 것은 최문경 부회장과 오성 전자의 분란이니까.’
이리저리 회사 내의 주의할 인물을 하나둘씩 언급하다가 뒤늦게 최영란와 만났다는 최민수를 떠올렸다.
그는 힐끗 김명준 과장에게 시선을 돌렸다.
“우리 민수 형은 요즘 어때요? 설마 후계자가 되겠다고 설치는 것은 아니겠죠?”
최민혁 그룹 정식 후보 이후에 한층 시끄러운 주변 분위기를 살피던 김명준 과장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이전과는 한결 달라졌습니다. 이리저리 만나는 사람도 많습니다. 심지어 사내 인물만이 아니라 사외 인물, 특히 외가 쪽을 만나는 것 같습니다.”
“민수 형의 외가? 거긴 김기범이 구속되고, 김현탁이 불구속기소가 된 후에 조용하지 않았습니까?”
“아무래도 최 실장님이 경영권 후계자가 되면서 다시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최민혁도 새삼 적을 친구보다 더 가까이 두란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최민수가 만약 KM 전자 내부에 없었다면 이런 움직임까지는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둘째 큰아버지의 아내인 둘째 큰어머니 김여정도 무시할 수는 없지.’
“하여간에 욕심은. 아무래도 김 과장님이 좀 더 그쪽을 살펴보세요. 특히 민수 형도 간과하지 마세요. 원래 늦바람이 무섭다고, 더 집요하게 욕심을 부릴지도 몰라요. 그러다가 큰 사고를 칠 수도 있으니까.”
최민혁은 지시를 내리다가 문득 최용욱 회장의 경고를 떠올렸다. 괜히 한쪽 포인트에만 집중하다가 할아버지에게 들킬 수도 있었다.
‘가만 지금 당장은 할아버지의 경고를 가볍게 생각할 일이 아냐. 따라서 이대로는 좀 곤란해. 차라리 판을 키워 볼까?’
“꼭 그렇게 놔둘 필요는 없겠습니다. 이왕이면 소송으로 살짝 오현종 팀장을 압박해서 DL 그룹의 김현탁 본부장에게도 위성 정보 시스템 정보를 흘려보세요.”
“…알겠습니다.”
두 사람도 그제야 최민혁 주변의 행보가 달라지면서 다른 이들도 태도가 바뀐 것을 깨달았다. KM 그룹 전체를 승계받는 일은 꽤 매력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 * *
오현종 팀장은 김명준 과장을 통해서 DL 정보 통신 쪽에 위성 방송 시스템에 대한 정보를 흘리라는 황당한 지시를 받았지만, 이 제안을 거부하지는 못했다. 위성 사업 특허권 문제는 그에겐 계속 자신을 괴롭히는 가시나 마찬가지였다.
오현종 팀장은 김명준 과장에게 왜냐고 묻지도 않았다.
KM 그룹 내부에서 본격화된 후계 구도 레이스에 최민혁이 뛰어들었다는 것을 KM 그룹 지인을 통해서 들었다.
그러면 외가 쪽에 대한 견제는 자연스러운 순서였다.
최민혁의 대두는 이미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로 찌라시로 돌았다.
최민수에 대한 감시 역시 이전보다는 한 단계 더 올라갔다.
이런 내막을 잘 모르는 최민수도 이전과는 달리 그룹 내부 소식에 귀를 기울인 터라 최영란이 최문경 부회장을 찾아가서 벌인 소동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룹 이쪽저쪽에 소식통을 둔 허훈 과장 덕분이었다.
다재다능한 허훈 과장은 최민수에게도 의외로 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그도 이제는 정신을 차렸다. 그룹 후계 구도에 욕심을 내자 이전과는 달리 몇 가지 눈에 보이는 것을 발견했다.
다만 아직 본인이 힘이 없다고 생각한 최민수는 이번에 감옥에 있는 아버지 최훈열 전무나 지난 일 때문에 사이가 좋지 않은 김기범을 떠올렸다.
최훈열 전무는 최민혁 소식에 이전과는 사뭇 다른 반응을 보였다.
“최민혁, 이 개새끼 짓이었구나!!”
분노한 최훈열 전무는 마치 정신이 반쯤 나간 사람 같았다. 그는 최민혁 욕만 죽으라고 하며 방방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