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
“하, 하지만…….”
“괜히 나서다가 이일태 이사 꼴 나지나 마라. 그 양반 완전히 맛이 갔더라. 나 일어난다.”
최영란 과장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서 KM 전자로 향했다.
‘민혁이 이놈이 도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걸까?’
* * *
최근 KM 전자의 기세는 굳이 다른 것을 볼 필요가 없었다.
하나만 보면 알 수 있었다. 바로 주가.
반등으로 시작해서 무섭게 상승하다 하락하길 반복하는 코스피 조정장에도 KM 전자 주가는 여전히 8만 원대를 유지하다가 결국 9만 원 선에 안착했다.
KM 산업과 비교하면 시가 총액만 무려 4배가 넘어갔다.
실로 이례적인 상황이었고, KM 전자 주가가 얼마나 거품이 끼었는지 알 수 있는 구간이었다.
KM 산업의 상반기 반도체 매출이 20억 달러를 넘어갔고, 올해 목표한 35억 달러를 훌쩍 뛰어넘어서 40억 달러를 넘어섰다.
KM 전자의 콜린스는 유럽과 국내 판매가 늘어난 덕분에 만 대를 추가로 생산했지만, 고작 이틀을 넘기지 않아서 전부 다 매진되었다.
누적 콜린스 매출만 무려 2,800억.
너무 소극적인 대응이라고 말도 많았지만, 콜린스의 매출은 그런 비난 속에서도 꾸준하게 매출 증가를 견인했다.
두 회사의 단순 매출만 놓고 비교하면 KM 전자의 주가에는 의문점이 생긴다.
하지만 그럼에도 외국계 증권사의 움직임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KM 전자의 주가에 조정이 올 때도 꾸준히 KM 전자 주식을 샀다.
심지어 10만 원을 돌파했을 때도 그 추세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최영란은 KM 전자의 상승세가 6만 원 선에서 멈출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자신의 예상과는 달라서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KM 전자에 내가 모르는 다른 일이라도 있는 건가? 아니면 콜린스의 매출 성장세가 앞으로 더 있다는 말일까?’
플라즈마 TV의 공략이 본격화되면서 콜린스의 매출도 주춤하는 것 같았지만, 일시적인 현상이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플라즈마 TV를 고객이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다.
최영란은 KM 전자의 최근 현황 지표를 다시 한번 확인하면서 KM 전자 본사 입구에 도착했다. 그녀는 KM 전자 안으로 들어가면서 직원들 분위기부터 살폈다.
[아, 죽겠다.]
[이 대리, 이번 출장 잘 갔다 왔어?]
[아주 대리점주 때문에 죽겠습니다. 어떻게나 엉겨 붙는지 그거 거절한다고 진땀을 뺐습니다. 괜히 억한 감정 만들어 봐야 좋을 것 없으니까요.]
[하긴 올해까지는 콜린스 상승세가 지속되겠지만 내년 중반부터 한풀 꺾일 테니까.]
[물량을 막 찍어 내서 공급하지 못하는 것이 아쉽기만 합니다.]
[지금까지 나온 불량률이 고작 0.5%도 안 되잖아. 차라리 잘된 거야. 최근 고객 반응은 사상 최고였으니까. 우리 회사 브랜드의 이미지 자체가 달라진 것 같아.]
[하긴 그건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우리 회사 제품이면 이제 묻지 마 구매 할 거라고 하는 사람조차 있으니까.]
[실장님의 판단이 맞았어. 당장 눈앞에 이익보다는 고객의 신뢰를 얻는 것이 더 중요해. 이번 콜린스는 그것만으로도 성공한 것 같아.]
[하지만 과연 후속 모델도 과연 지금과 같은 분위기를 이끌어 낼 수 있을까요?]
[굳이 그런 것까지 걱정할 필요가 있나. 적당히 중박만 쳐도 이 분위기를 따라서 어느 정도 결과는 나올 테니까.]
[하지만 고객이 계속 만족할까요?]
[그거야 실장님 같은 분이 걱정할 문제잖아. 우리 영업 팀이 신경을 쓸 일은 아냐. 다른 것을 떠나서 이번 달도 인센티브만 무려 300%씩 나왔잖아. 그거면 된 거지.]
[하긴.]
“…….”
최영란은 다른 어떤 것보다 최민혁의 인기가 사상 최고란 점을 주목했다. 그녀도 외부에서 듣는 것과는 좀 다른 사실에 놀랐다.
‘신뢰라.’
아래 임직원의 신뢰.
고객의 믿음.
그것은 콜린스와는 좀 다른 문제였다.
그녀는 최민수에게 들은 얘기로 인한 분노를 가라앉힌 채 데스크 쪽에 이야기한 후에 허락을 구해서 곧바로 기획실장실로 향했다.
* * *
기획실 안에는 김부영 영업 팀장을 비롯한 몇 사람이 최민혁에게 간이 보고를 하는 중이었다.
“…지금까지는 특별한 특이 사안은 없습니다. 다만 아쉬운 점은 여전히 공장의 생산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는 고질적인 문제뿐입니다. 최소한의 공장 증설이 필요합니다.”
“그건 따로 보고서를 작성해서 올려주세요.”
“알겠습니다.”
부장급 인물은 모두 고개를 숙인 채 정중하게 일어나서 회의실을 나섰다.
“…….”
최영란은 김부영 영업부장을 비롯한 실무진의 표정을 살폈다. 그 누구도 최민혁 실장을 얕잡아 보는 사람은 없었다.
전형적인 회사의 풍경이다.
하지만 최민혁 나이가 고작 20살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아주 특이한 일이었다.
입술을 꽉 깨문 최영란은 치솟는 감정을 참았다.
“미, 민혁아, 너 잘 지내는구나.”
“뭐, 누나가 걱정해 준 덕분이야.”
“하, 너 진짜 많이 변했구나.”
전에 가진 식사 자리에서 느꼈지만, 최민혁의 행동은 과거 할아버지 저택에 왔을 때와는 많이 달랐다.
길 잃은 고양이 같은 처량한 모습은 이제 그 어디에도 없었다.
깍지를 낀 채 물끄러미 자신을 응시하는 최민혁 모습에는 오직 자신과 패기만이 가득했다.
오혜정 비서가 들어와서 다과를 준비해 놓고 나갔다.
최영란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오혜정 비서를 대하는 최민혁의 행동에도 더 놀랐다.
국민 비서를 부리는 최민혁의 모습은 그 어디서도 어색하지 않았다.
최민혁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냈다.
“누나가 내가 적응할 때 도와준 것은 고맙게 생각해.”
“그래?”
“어, 누나가 아니었다면 정말 제대로 엇나갈 수도 있었어.”
실제로 최민혁은 집안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해서 탈선도 했었다. 그런 그를 다독거려 준 사람이 바로 최영란이었다.
최영란은 최문경 부회장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녀는 최문경 부회장이 서자인 최민혁을 교묘하게 괴롭히는 것을 싫어했다.
“그러면 다행이다.”
지난 일을 추억하던 최영란은 그제야 조심스럽게 말했다.
“ETRI 일은 들었어. 내가 아버지를 대신해서 사과할게.”
“어? 누나도 알아? 뭐 그런가. 하지만 괜찮아. 하루 이틀 겪는 일도 아닌데…….”
그녀는 최민혁 눈치를 봤다. 당당하게 KM 전자 본사로 걸어올 때와는 달리 KM 전자 내에서 최민혁의 위치를 확인하자 몸을 사렸다.
“하아, 우리 아빠는 욕심이 너무 많아.”
“당연한 이야기잖아.”
“그래서 말인데, 혹시 내가 도와줄 일은 없을까?”
최민혁은 생뚱맞은 이야기에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소리야?”
“그게 나도 ETRI 일을 듣기는 했는데, 자세한 내막은 몰라.”
예상치 못한 대답에 최민혁은 피식 웃었다. 하지만 그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최문경과 최영란 관계는 세상 사람이 아는 것과는 많이 달랐다.
특히 최영란은 경영 수업을 제대로 받은 터라 탄탄한 성장을 거듭하면서 오히려 최용욱 회장의 신뢰를 받게 된다.
‘아마 남자였다면 할아버지가 계열사 지분 하나를 넘겼을지도 몰라. 그렇다면’
“그게 뭐 어려울 것 있어. ETRI 일이 어떻게 된 것이냐 하면……. 발단은 이일태 이사 때문이었어.”
이렇게 시작된 이야기는 돌고 돌아서 ETRI, 오성 전자, 최문경 부회장으로 이어졌다.
최영란도 그룹 비서실 통해서 일부 정보를 얻기는 했지만 상세한 이야기를 듣고 나서는 최문경 부회장의 꼼수에 혀를 내둘렀다.
“…그, 그게 진짜야?”
최민혁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커피를 홀짝였다.
“내가 누나에게 왜 거짓말을 하겠어? 원래 첫째 큰아버지가 이런 수법을 애용해. 벌써 십여 차례도 넘었을 거야.”
“미, 미안하다. 내가 아빠를 대신해서 사과할게.”
“뭐 잘 해결되었으니, 난 신경 안 써.”
“…고맙다.”
“덕분에 할아버지에게 그룹 후계자 자리도 얻었으니, 나쁠 것은 없잖아.”
“…그렇구나.”
뒤늦게 모든 진실, 아니 정확히는 아직 진행되고 있는 ETRI 관련 일을 제외한 모든 사실을 안 최영란은 넋을 잃은 채 고민에 빠졌다.
처음에는 최용욱 회장이 너무 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할아버지가 오죽 화가 났으면, 그랬을까.’
최민혁은 최영란 표정 변화를 유심히 살피면서 한마디 더 했다.
“내가 서자잖아. 솔직히 그룹 승계까지 노릴 처지는 아니지. KM 전자 정도면 만족했어. 그런데 첫째 큰아버지가 자꾸 시비를 거네. 안 그래도 이것 때문에 정말 쌓인 것이 많아. 누나라도 좀 도와줬으면 좋겠어. 난 정말 그룹 승계에는 관심이 없걸랑.”
“그, 그래. 알았다. 내, 내가 최선을 다해서 도울게.”
“그래 주면 좋고.”
긁어서 제대로 부스럼을 만든 아빠에 대한 분노를 품은 최영란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허겁지겁 사무실을 나섰다.
최민혁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다가 따가운 김명준 과장 시선에 헛기침했다.
“흠흠, 전 누나에게 진실을 말해준 것뿐입니다. 결코 분탕질을 칠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렇습니까?”
“네!”
“하지만 최 과장님은 이번 일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지 않습니까?”
“그럴 수도 있습니다. 어찌 보면 살인범의 가족일 뿐이니까. 그런데 그거 아세요. 우리 첫째 큰아버지는 우리 엄마도 이용했고, 영란 누나는 본의 아니게 엄마에게 피해를 줬죠.”
“이상하네요. 제가 알기로 그런 일은 없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아, 그럴 수도 있다는 겁니다.”
최민혁은 순간 당황해서 입을 다물었고, 곧 최영란 방문을 잊고 말았다.
‘정확히는 인생 1회차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그나저나 정식 후계자가 되니, 문제가 되는구나. 조용히 일만 하던 영란이 누나가 저렇게 호들갑을 떨 정도라니.’
* * *
다른 것을 떠나서 KM 전자의 임직원이 최민혁을 대하는 태도는 최영란이 예상한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녀도 한편으로 최민혁이 KM 그룹을 승계받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그런 위기감 때문에 그녀는 더 크게 정신적인 충격을 받았다.
‘진짜 민혁이가 그룹을 승계받을 지도 몰라. 지금 보니 절대로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어. 맙소사 이게 어떻게 가능한 거야?!’
최민혁에게서 돌아가는 사정을 들은 최영란의 분노는 KM 그룹 본사에 도착할 때까지 증폭해서 도착할 즈음엔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그녀는 KM 그룹 부회장실에 쳐들어가서 난감해하는 최문경 부회장을 쳐다보면서 소리쳤다.
“아빠, 민혁이가 그룹 경영 승계 레이스에 정식으로 뛰어들었다는 것이 사실이에요?!”
“…….”
안 그래도 그 문제 때문에 권재홍 그룹 비서실장을 비롯한 자기 측근을 모아 놓고 대책 이야기를 하던 최문경 부회장은 입을 다물었다.
회의실 책상을 양손을 쾅쾅 내려치는 최영란의 모습은 마치 장군을 보는 것 같았다.
“부회장님, 말 좀 해보세요. 아니, 이미 할아버지가 경영 승계를 아버지로 다 정한 일 아닙니까. 그런데 이제 와서 갑자기 바꾼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겁니까?!”
“영란아, 말이 좀 심하구나.”
그는 턱짓으로 힐끗 회의실에 모인 이들을 가리켰다.
하지만 최문경 부회장이 물러나게 되면, 자기 몫조차 날아갈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낀 최영란 과장은 평소와는 많이 달랐다.
“지금 제가 진정하게 생겼어요? 그냥 조용히 있기만 해도 그룹을 물려받을 수 있는 여건이었잖아요.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할아버지 눈 밖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습니까?!!”
“그, 그게 아니라니까.”
최민혁에게 디테일한 정보까지 얻은 최영란은 분노의 화신이 되어 있었다.
“도대체 얼마나 멍청하면 의사결정이 신중한 할아버지가 이렇게까지 나옵니까. 아버지, 지금 제정신인 거 맞아요?!!!”
“…….”
최문경 부회장도 분노한 장녀 최영란의 독설에 입을 다물었다.
회의실에 있던 이들은 다들 최영란 눈치를 보았다. 어쭙잖은 재벌 3세였다면 그들도 무시했을 테지만 최영란은 회사 돌아가는 상황을 빠삭하게 알았다.
그들 역시 다른 라인 통해서 최영란에 대해서 들어와 그녀를 잘 알았기에 함부로 끼어들지도 못했다.
괜히 부녀지간에 끼어들어서 폭탄을 맞지 않을까 걱정해 사무실을 나가 버렸다.
권재홍 그룹 비서실장도 당황했다. 그 역시 최영란이 하는 말의 의미를 모를 수가 없었다.
‘사실 부회장님께서 최 실장만 안 건드렸다면 이런 사단이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이 모든 일이 집착왕인 최문경 부회장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최문경 부회장 이후에 그룹 일부를 승계받을 것이라 예상한 최영란 과장으로서는 분통이 터질 일이다. 막내 최정수가 아직 고3이라서 기회를 노리는 그녀 처지에서는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최영란은 비장의 한 수도 내밀었다.
“만약 엄마가 이 사실을 알면 가만히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