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166화 (166/1,021)

* * *

최민혁도 자신의 선동에 이창명 이사가 낚인 것에 어이가 없었다. 처음에는 단순하게 생각했는데, 막상 김명준 과장의 보고서를 보자 마음을 바꾸었다.

“설마 광고 찍을 때 성추행까지 한 겁니까?”

“다행히 미수로 끝났습니다. 이번 광고 방송을 찍은 업체가 오성 전자 건도 많이 받습니다. 엄밀히 말해서 오성 전자가 키우는 업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이창명 이사는 이 점을 이용해서 오혜정 비서에게 접근했습니다.”

[170]“혹시 그냥 내버려 둔 것은 아니겠죠?”

“준비해 둔 자료도 있습니다.”

김명준 과장이 내놓은 CCTV 자료에는 이창명 이사가 오혜정 비서를 지속해서 괴롭히고, 성추행하는 장면이었다.

문제는 광고 업체 직원도 이 내막을 알았지만, 오성 전자가 무서워서 아무런 간섭을 하지 않았다.

협력업체의 직위를 남용해서 상습적으로 성희롱하고, 성추행한 것이었다.

놀라운 사실은 KM 엔터테인먼트의 배후에도 이창명 이사가 관여했다는 것이다. 그는 유영진 팀장을 최대한 이용해서 계속 오혜정 비서를 설득했다.

행동은 안국호 부장이 했지만, 그 배후는 이창명 이사였다.

흥미로운 것은 그 집요한 요구에도 오혜정 비서는 묵묵히 참았다. 그녀도 처음에는 분노해서 안국호 부장을 고소하기도 했지만, 뒤늦게 그 배후에 오성 전자 이창명 이사가 있다는 것을 알자 차마 회사에 피해주기 싫어서 입을 다물었다.

더 황당한 것은 이 일에 홍보팀 김민석 과장도 끼어들었다.

소위 말하는 직장 내 성희롱 사건이나 마찬가지다.

그는 홍보 팀 과장이라는 직위를 이용해서 상습적으로 오혜정 비서의 인격을 짓밟고, 불안한 환경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것도 법의 사각에서 교묘하게.

“…….”

최민혁은 허훈 과장에 이어서 튀어나온 또 다른 물건에 혀를 내둘렀다. 조직 내의 기생충을 그렇게 잘라냈는데, 여전히 문제가 되는 이들은 남아 있었다.

‘바퀴벌레보다 더 집요하네.’

자신이 벤처를 설립해서 독립하려고 했던 계획이 얼마나 리스크가 큰지 새삼 깨달았다. 물론 덕분에 한 가지 사실을 더 깨달았다.

‘이놈들도 욕먹을 짓을 했지만, 이 자료를 이런 식으로 꼼꼼하게 챙긴 김 과장도 보통은 아냐.’

최민혁은 의아해서 김명준 과장을 쳐다보았다.

“아니, 이 사실을 아시면서 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습니까?”

김명준 과장은 뜻밖에도 냉정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처음에는 솔직히 좀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안국호 부장 배후 때문에 더 조사했습니다. 오혜정 비서는 이미 광고 모델로 명성까지 얻은 상황인데, 자칫 배신을 했을 때 실장님에게 큰 타격을 줄 수도 있었습니다.”

보통 여자라면 일반 재벌도 아닌 오성 전자 재벌 3세의 유혹을 쉽게 거절하기란 쉽지 않았다.

하물며 오혜정 비서는 광고 모델로 한창 뜨는 상황이었다.

이때 만약 이창명 이사가 밀어준다면 오성 전자 광고도 따낼 수가 있고, 어지간한 드라마나 영화 조연 자리 정도는 먹을 수 있었다.

만약 오혜정 비서가 이 제안을 받아서 계략을 꾸민다면 최민혁에게 큰 타격을 줄 수도 있었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강간범으로 몰아서 누명을 뒤집어씌울 수도 있으니까.

김명준 과장도 뒤늦게 최악의 상황을 고려했다. 그 자신도 솔직히 자신의 이런 행동이 지나쳤다는 것을 인정했다.

“하지만 이번이 좋은 기회라서 확인이 꼭 필요했습니다. 오혜정 비서는 앞으로 계속 실장님의 최측근으로 일을 할 텐데, 믿을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게 다입니까?”

“그리고 이창명 이사를 확실히 보낼 대안도 필요했습니다.”

잠깐 말없이 김명준 과장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김명준 과장은 절대 미안하다는 소리를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인생 1회차에서 봤던 그 모습이었다. 그때는 이와 유사한 일 때문에 자존심이 상해서 오히려 김명준 과장을 질책했다.

‘지금은 그럴 수가 없지.’

“오혜정 비서를 불러 주세요.”

“알겠습니다.”

* * *

오혜정 비서도 이창명 이사의 일 때문에 잔뜩 긴장한 채 사무실에 나타났다.

김명준 과장은 두 사람의 미묘한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솔직히 최민혁이 자신을 질책하지 않은 것에 놀랐던 것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어.’

그래서 최민혁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몰라서 유심히 지켜봤다.

최민혁은 그의 예상과는 좀 다른 이야기를 시작했다.

“유영진 팀장을 고소하면서도 왜 이창명 이사에 대해서는 내버려 둔 겁니까?”

“그게…….”

오혜정 비서는 머뭇거렸다. 그럴 수밖에 없다. 이창명 이사의 정체를 알자 자신 때문에 회사에 피해가 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최훈열 전무보다 한 단계 위인 이창명 이사는 그녀로서는 도저히 어떻게 해볼 사람이 아니었다.

“제가 사적인 일이면 오혜정 비서에게 뭐라고 하지 않았을 겁니다. 지금까지 아무런 간섭을 하지 않은 것도 그 이유입니다. 그런데 유영진 팀장이나 안국호 부장이 노리는 것은 오혜정 비서가 아닙니다. 바로 저를 포함한 KM 전자를 노리는 겁니다. 그건 오혜정 비서 사생활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네…….”

그녀는 괜한 자기 일 때문에 최민혁이 화가 났다는 것을 깨닫자 차마 더 얼굴을 들지 못했다.

하지만 최민혁은 그런 그녀 마음을 들여다본 것처럼 말했다.

“아직 잘 이해를 못 하는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창명 이사는 오혜정 비서를 이용해서 절 노린 겁니다. 그런데 오혜정 비서 혼자서는 이창명 이사와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조직에 도움을 청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죄, 죄송합니다.”

“그런 말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만약 이 일이 복잡하게 꼬였다면 단순히 말로 끝낼 일이 아닙니다. 일이 잘 해결되었기에 별일 아닌 것처럼 넘어간 겁니다. 그건 오혜정 비서 인생과도 관련이 있어요. 최악은 오혜정 비서도 책임을 질 문제가 생길 테니까.”

깜짝 놀란 오혜정 비서는 그제야 얼굴을 번쩍 들어서 최민혁을 쳐다보았다.

최민혁은 씁쓸하게 웃었다. 일어나지 않는 일을 토대로 상대를 설득시키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데 오혜정 비서는 뜻밖에도 잘 참았다.

“오혜정 비서도 이제 느끼고 있겠지만 우린 지금 총과 칼만 안 들었지, 전쟁을 치르고 있는 겁니다. 상대는 우리에게 승전하기 위해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지금은 오혜정 비서가 그 대상인 된 것뿐입니다.”

“……알겠습니다.”

오혜정 비서는 자존심을 죽인 채 참았다. 처음에는 최민혁의 말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아서 눈물마저 흐르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그런데 최훈열 전무와의 일을 떠올리고 나서야 최민혁이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최민혁은 그제야 피식 웃었다.

“뭐 이미 지난 일을 더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겠지만, 앞으로는 자기 삶과 관련된 공적인 일은 감사 팀이나 저기 김명준 과장님에게 직접 말하세요.”

“명심하겠습니다.”

“가보세요.”

최민혁은 묘한 표정을 한 채 한쪽에 서 있는 김명준 과장을 쳐다보았다. 설마 오혜정 비서를 상대로 저런 이야기를 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최소한 날 질책할 줄 알았는데…….’

일방적으로 오혜정 비서를 깨는 최민혁의 모습은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최민혁은 그런 김명준 과장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자, 일단 김 과장님 계획대로 진행했습니다. 이제 어떻게 할까요. 설마 성추행, 공갈, 협박, 사기로 고소한다고 해도 쉽지가 않을 겁니다. 오성 전자는 최훈열 전무와는 레벨이 다릅니다.”

당황해서 잠깐 머뭇거리던 김명준 과장도 뒤늦게 어깨를 으쓱했다.

“저는 좀 힘들 겁니다. 솔직히 궁리를 많이 해봤는데, 답이 안 나왔습니다. 하지만 실장님이라면 방법이 있지 않을까요?”

최민혁은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저라고 해서 만능이 아닙니다. 이런 일이 생기면 될 수 있으면 저에게 먼저 허락을 받으세요.”

“알겠습니다.”

최민혁도 김명준 과장을 크게 질책하지는 않았다. 그는 지난 인생 1회차에서 비서가 회사 공금을 가지고 도망친 아픈 기억을 떠올렸다.

뒷날 안 사실로, 그 여비서는 최민혁 자신의 여자 친구나 마찬가지였는데, 그녀를 부추긴 사람이 바로 최문경 부회장이었다.

‘하긴. 인생 1회차에서 제대로 당했으니. 김 과장 우려가 마냥 무시할 수는 없는 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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