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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혜정 비서는 오늘도 평소처럼 최민혁 실장이 퇴근할 때까지 기다렸다. 얼마 전부터 최민혁은 퇴근 시간에 칼같이 퇴근한 터라 부담은 없었다.
콜린스 때문에 회사 전체가 정신이 없지만 최민혁 모습은 그것과는 달랐다.
그런데 웃기는 것은 최민혁이 전사 공지로 콜린스 관련해서 굳이 업무 시간 외에 불필요하게 일을 하지 말라고 지시했다는 것이다.
공장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황당한 것은 임직원이 알아서 자발적으로 일한다는 점이다.
그래도 비서실은 이야기가 좀 다르다.
최민혁이 퇴근한 이후에는 정말 할 일이 없으니까.
처음에는 적응하기 쉽지 않았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적응한 오혜정 비서는 퇴근 시간이 즐거운지 휘파람마저 불면서 밖으로 나섰다.
그런데 엘리베이터 앞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홍보 팀 김민석 과장을 보자 눈살을 찌푸렸다.
다행이라면 최민혁 실장이 있다고 생각해서인지 TV 광고를 찍을 때처럼 적극 나서지 않았다.
“혜정 씨, 안녕.”
“무슨 일이세요?”
“KM 엔터 유영진 팀장이 계속 연락을 하는데, 전화를 받지 않는다고 해서.”
“그쪽에 분명히 기획사 들어갈 생각이 없다고 똑똑히 말했습니다. 아니, 전 연예인 생활 자체를 하지 않을 겁니다.”
답답한 김민석 과장은 오혜정 비서를 따라붙었다. 그는 엘리베이트 안에는 다른 직원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안타까워서 그래. 도대체 비서 일이 뭐가 좋다고 그러는지 모르겠어. 솔직히 최 실장이 오혜정 비서에게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 설사 관심이 있다고 해도 두 사람 사이가 잘될 것 같아?”
오혜정 비서 표정이 차갑게 바뀌었다.
“제 인생은 제가 결정합니다.”
“주제 파악 좀 해.”
“김 과장님이 나서서 왈가왈부할 일이 아닙니다. 자꾸 이렇게 귀찮게 하시면 회사 감사 팀에 과장님을 고발하겠습니다!”
감사 팀이란 이야기에 움찔한 김민석 과장은 움찔 몸을 떨었다.
“아니, 도대체 이해를 못 하겠어.”
김민석 과장은 마치 제정신이 아닌 사람처럼 오혜정 비서를 집요하게 설득했다.
오혜정 비서는 도대체 김민석 과장이 왜 이러는지 의아하기만 했다. 김민석 과장이 아무런 이해관계도 없이 이렇게 나설 이유는 없었다.
“설마 KM 엔터에서 돈이라도 받은 겁니까?”
움찔 놀란 김민석 과장은 바로 표정을 바꾸었다.
“혜정 씨, 말을 너무 함부로 하는 것 아냐? 당신 인생을 위해서 이렇게 나서는 거잖아. 그 왜 사람 마음도 못 알아보는 거야?”
‘지긋지긋한 사람이네.’
* * *
오혜정 비서는 엘리베이터를 나와서 본사를 나가는 동안에도 달라붙는 김민석 과장 행동에 소름이 돋았지만 다른 대응을 할 수가 없었다.
오가는 사람도 있는 자리에서 같은 회사 상사를 건드릴 수는 없었다.
만약 경찰에 신고하더라도 최민혁 실장이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결국 김민석 과장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걸음을 빨리했다.
다행히 김민석 과장은 더 쫓아오지 않았는데, 욕설만 퍼부었다.
[저게 완전히 미쳤다니까. 야, 고작 TV 광고 한 번 나온 걸로 네 인생 바뀌는 줄 알아? 아직 세상 쓴맛을 제대로 못 봤지!]
* * *
이를 악문 오혜정 비서는 김민석 과장에게 치를 떨면서 뛰어갔다. 하지만 그녀는 전철역 바로 앞에서 갑자기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정장 남자 때문에 걸음을 멈추었다.
“오혜정 비서이시지요?”
“누구…….”
정장을 입은 젊은 청년이 길가에 서 있는 고급 벤츠 승용차 문을 열어 주었다.
그 안에는 TV 광고를 찍을 때 우연히 만난 적이 있는 이창명 이사가 앉아 있었다. 영국식 정장을 한 이창명 이사는 반가운 듯 손을 흔들었다.
“혜정 씨, 또 보네요?”
“아, 네.”
오혜정 비서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이에나를 피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늑대가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시기도 이상했다.
딱 퇴근 시간에 맞추어서 자신을 기다린 것이 지난 광고 촬영장의 우연스러운 만남처럼 보이지 않았다.
‘설마 김민석 과장 짓일까?’
콜린스 광고를 할 때부터 김민석 과장 행동이 이상하기는 했다. 그 과정에서 안국호 부장을 우연히 만났고, 곧 이어서 이창명 이사를 만났다.
이창명 이사가 당시 누구인지 몰라서 커피를 마시기도 했다.
33살의 나이로 모바일 사업실 이사를 하는 남자였으니.
솔직히 과거였다면 이런 남자의 프러포즈를 거절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최민혁 실장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그녀도 스스로 많이 바뀌었다. 재벌 3세 사이에도 격이 존재한다는 것을 말이다.
‘아니면 최 실장님만 특별한 것일 수도 있고.’
이창명 이사는 오혜정 비서가 굳은 얼굴을 하고 있자 결국 차에서 내렸다. 그는 정중한 어조로 다시 입을 열었다.
“하하하, 이 근처를 지나다가 반가운 마음에 이렇게 차를 세웠습니다. 같은 방향이라면 제가 태워주고 싶습니다.”
“괜찮습니다.”
그녀는 정중하게 허리를 숙인 채 이창명 이사를 지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수행원으로 보이는 인물이 오혜정 비서를 막았다.
이창명 이사 표정이 순간적으로 차갑게 바뀌었다. 그는 설마 오혜정 비서가 또 자신의 호의를 거절할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하, 진짜 비싸게 구네.’
“오혜정 비서, 그, 사람이 편의를 좀 봐주겠다는데, 왜 그럽니까?”
오혜정 비서도 크게 당황했다. 상대는 오성 전자 임원이다. 자칫 그와 말썽이 생기면 회사에도 피해를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때 끼어든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이 싫다고 하는데, 왜 그렇게 자기 고집만 피웁니까?”
주의할 인물인 김민석 과장을 감시하고 있던 이에게 연락을 받아서 차량을 세운 최민혁이었다. 그도 보안 팀에게서 김민석 과장의 행보를 듣기는 했지만, 설마 이창명 이사와 관련이 있는 줄은 몰랐다.
‘스토커처럼 괴롭힌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생각보다 더 심하네.’
“…최, 최민혁 실장?”
이창명 이사는 최민혁 실장을 바로 알아보았다. 그는 안국호 부장 통해서 윗선에서 박살이 난 일 때문에 단단히 열받아서 조사를 시켰기 때문이다.
다만 스카우트 사건을 최민혁이 지시했다고 보지는 않았다.
‘최용욱 회장이거나 아니면 장승일 실장이란 인간 짓이겠지. 이놈은 얼굴마담일 거고.’
물론 그렇다고 최민혁 실장을 무시할 생각은 없었다. 오혜정 비서를 노리는 것도 최민혁에 대한 사전 정지 작업 중에 하나이니까.
그는 마치 친근한 친구처럼 악수를 청했다.
“최민혁 실장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 난 오성 전자 모바일 사업실을 책임지고 있는 이창명이다.”
“최민혁 실장이다.”
“…이다? 그 말이 짧네.”
“넌 말이 길고? 처음 보는 사람에게 반말을 찍찍하지 마라.”
“하.”
이창명 이사는 어이가 없어서 수행원을 쳐다보았지만, 그들은 잔뜩 긴장한 눈으로 김명준 과장을 힐끗 쳐다보았다.
두 사람은 이미 김명준 과장에 대해서 사전에 조사했기 때문이다.
그제야 이창명 이사도 김명준 과장에 대한 프로필을 떠올리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무력을 썼다가 오히려 자신이 박살 날 것이라는 금방 깨달았다.
주먹다짐을 한 후도 마찬가지다. 최민혁이 제법 검찰에도 영향력이 있다는 것까지 파악했다. 최훈열 전무를 설사 타인의 도움을 받았다고 해도 뭔가 있을 테니 말이다.
최민혁은 그런 이창명 이사를 쉽게 두지 않았다.
“다시 한번 오혜정 비서에게 쓸데없는 짓을 하면 스토커 혐의로 고소할 테니, 그냥 꺼지지. 아니면 맞고 갈래?”
“하, 이 새끼가…….”
김명준 과장이 앞으로 나서려는 이창명 이사를 막아섰다.
이창명 수행원 두 사람이 반사적으로 나서면서 몸을 떨었다.
이창명 이사는 이 자리에 오혜정 비서 때문에 온 것인지, 최민혁 때문에 온 것이 아니었다.
“물러서.”
그는 피식 웃고 있는 최민혁을 차가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야, 최민혁 너 하룻강아지 범 무서울 줄 모르는구나. 너희 할아버지 믿고 나대나 본데, 세상 그렇게 만만한 곳이 아니야.”
“창명 씨가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것 같은데, 그러다가 회사에서 쫓겨나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안 회장이 너 때문에 단단히 열을 받았다고 하던데?”
“이 새끼가…….”
“너 같은 변태 새끼가 할 말은 아냐.”
“너 진짜 죽을래?”
“역시 개새끼라서 입이 거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야?”
“이…….”
그가 참을 수가 없어서 앞에 나서려고 할 때 김명준 과장이 다시 나섰다. 가볍게 움직인 것 같았는데, 벌써 바로 앞이었다.
그런데 눈에 흐릿한 뭔가를 느끼나 싶었는데, 바로 주먹이었다.
얼마나 주먹이 빨리 날아왔는지 그 권풍이 자신의 얼굴을 미친 듯이 뒤흔들었다.
“헉!”
패닉에 빠진 이창명 이사는 허겁지겁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수행원은 그런 이창명 이사 앞만 막을 뿐이지 쉽게 나서지 않았다.
더욱이 길을 오가는 행인의 따가운 시선도 문제다.
처음부터 이창명 이사가 한 짓을 본 사람이 너무 많았다.
여자에게 추근거리다가 그 여자 지인을 만나서 창피 당하고 있는 변태 청년의 모습이니까. 아마 이런 사실이 외부에 알려진다면 이제까지 쌓은 사내 평판이 다 망가질 것이다.
이창명은 특히 김명준 과장이 주먹을 굳이 쓰지 않은 채 기다리는 것도 정당방위 때문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았다.
“두, 두고 보자!”
최민혁은 차를 타고 떠나는 이창명 모습을 보다가 고개를 푹 숙인 오혜정 비서를 쳐다보았다. 붉게 달아오른 그녀의 모습은 한 폭의 수채화 같았다.
상처 입은 가녀린 모습은 한껏 시선을 끌고도 남았다.
“이런 일이 있으면 앞으로 바로 이야기를 하세요.”
“죄, 죄송합니다.”
“제 말을 못 들은 것 같은데, 이런 일이 있으면 사전에 인사 팀이나 보안 팀에 따로 이야기하세요. 괜히 혼자 나서다가 일을 복잡하게 만들지 말고. 저 쓰레기에 대해서는 따로 법적인 조처를 할 테니까.”
“가, 감사합니다.”
최민혁은 잠깐 오혜정 비서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자신이 벌인 일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는 것을 금방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긴 내 약점을 당연히 노리겠지. 오혜정 비서라면 얻은 것이 많을 테니까.’
하지만 한편으로 왜 오혜정 비서가 이런 일에 자꾸 엮이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문득 인생 1회차의 오혜정 비서의 미래를 떠올렸다.
그 미래가 해결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형태로 나타났다.
‘내 운명은 바뀌었는데, 왜 오혜정 비서의 미래는 다시 반복되려는 것일까. 아, 가만. 정말 내 운명이 바뀐 것일까?’
문득 자신이 KM 전자를 완전히 소유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주변 환경은 바뀌지 않았다.
최훈열 전무가 사라진 자리를 오성 전자가 채웠다. 심지어 그 배후도 최문경 부회장이란 점이 달라지지 않았다.
지금 오혜정 비서는 그 사이에 끼어서 새우 등이 터질 뻔했다. 설사 연예인 길로 나선다고 해도 그 미래는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자기 우산 밑에 있는 것이 오혜정 비서가 사는 길일지도 몰랐다.
최민혁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아니, 어쩌면 더 심해질 수도 있지. 자살한 다른 연예인처럼 생을 끝낼 수도 있으니까. 결국 최문경 부회장이 완전히 무너져야 오혜정 비서의 미래가 바뀌는 것일까. 아니면 오성 전자를 압도한 체급을 갖추어야 그녀도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