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최민혁도 지난 클럽 마약 사건을 다시 머릿속에 떠올렸다.
당시만 해도 자신은 힘이 없었다. 자기 누명을 벗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때와는 상황이 많이 달랐다.
최문경 부회장과도 무리하면 맞설 수도 있는 상황이다.
굳이 이전처럼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최민혁은 마음을 달리 먹었고, DL 그룹 기사를 한번 쭉 확인해 봤다.
[DL 그룹이 정보통신에 300억 투자를 늘리다. DL 그룹은 고부가가치 통신망과, 휴대폰 통합 시스템 사업에 본격적으로 진출한다. OA 기기 공략의 목적으로 일본 카시오와 손을 잡았다.]
DL 정보통신 사업의 투자 확대였다.
별것 아닌 일로 볼 수가 있다.
하지만 KM 그룹과 DL 그룹의 실타래처럼 얽힌 싸움을 잘 아는 최민혁은 그렇게 단순하게 보지 않았다.
‘김현탁 부장이 이 시기에 국내로 돌아오는 건가?’
최민혁은 인생 1회차에서 김현탁과 안면이 있었는데, 자세히 아는 것은 아니지만 워낙에 오만한 인간이라서 기억했다.
더욱이 그가 김현탁의 얼굴을 잘 아는 것은 바로 마약 밀매 때문이다.
김현탁은 대량의 코카인을 밀수해서 들여왔는데, 이 코카인을 김기범에 넘겨서 파티할 때 주로 사용해 왔다.
김기범은 이 마약을 이용해서 재벌 3세의 인맥 관리를 해왔고, 그들을 자기 측근으로 끌어들였다. 이 모임에는 재벌 3세만이 아니라 이름만 되면 알만한 정·재계 인사 자녀도 포함한다.
‘내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마약 사범으로 수사받을 때 마약 출처가 바로 그놈이니까.’
IMF를 거치면서 이들 모임은 더욱 끈끈하게 뭉쳤다.
김현탁은 이를 기반으로 해서 DL 정보통신을 키우고, 결국 이를 인정받아서 DL 그룹 후계 싸움에서 앞서 나간다.
‘심지어 DL 반도체 사업에 대한 제안을 한 이도 이 작자지. 결론적으로 KM 산업 인수에 대한 작업을 진행했어. KM 산업이 결국 무너지자 할아버지의 건강은 더욱 나빠졌고, 결국 사망했으니까.’
최민혁도 고민하던 끝에 김명준 과장에게 김현탁 부장의 행적을 조사시켰다.
이미 김명준 과장은 최민혁 지시에 따라서 최문경 부회장, DL 그룹, 오성 전자 로열가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철저히 감시하고 있었기에 단 하루 만에 김현탁 행적을 찾아냈다.
‘3일 후 베트남에서 출발하는 한국행 대한항공 376편이라. 재미있네. 맞아, 그랬어. 이때 마약 밀수로 걸렸던 것 같아.’
뒤늦게야 김현탁과 관련된 내용이 조금씩 떠올랐다. 바로 마약 밀수와 관련된 사건이다. 재벌 3세가 대규모 코카인을 밀수하다가 걸린 이 사건은 당시 기사에 나오기도 했다.
그런데 불과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아서 그 기사는 흐지부지되었다.
DL 그룹의 빠른 행보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깔끔한 대처였다. 김현탁과 관련이 있는 이들이 같이 나서서 이 사건을 무마한 것이었다.
최민혁은 인생 1회차에서 DL 그룹에 대한 복수 때문에 자료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뒤늦게 알았다. 그때는 많이 아쉬워했다.
‘설마 그게 도움이 될 줄은 몰랐네.’
그는 잠시 김현탁, 김기범에 대해서 고민하는 중에 김명준 과장을 통해서 뜻밖의 정보도 얻었다.
“대형 클럽을 빌려서 연예인까지 초청한 파티를 준비한다고요?”
“지난 파티보다 규모가 더 큰 것으로 압니다. 특히 검찰, 사법부, 정부 고위 공무원 자녀가 꽤 초대받았습니다.”
“그렇습니까.”
소위 말하는 재벌가, 고위 공무원, 판사, 검사 자녀가 모여서 벌이는 파티. 당연히 여기에는 마약이 빠질 수가 없다.
시간이 지나면서 소규모 모임에서는 섹스 파티로도 변질한다.
이 파티 중에 과다 마약 복용으로 사람이 죽기도 했었다.
심지어 부패한 경찰 간부가 마약을 가져오다가 걸리기도 했었다.
기사가 가끔 나왔지만, 이 사건을 주목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한두 사람의 일탈로 치부할 뿐이다.
‘이때부터였던가? 이 모임 이름도 있었지. 아, 맞아, 단심회.’
단심회는 초창기에 김기범 지인이 중심이 된 친목 단체였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하나의 이익 집단이 되어갔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서로 힘을 합치기 시작한 것이었다.
김명준 과장도 굳은 얼굴로 말했다.
“아무래도 이번 모임은 실장님을 노린 것으로 보입니다. 영식이 말로는 실장님에 대한 불만이 대단하다고 하니까요.”
최민혁은 피식 웃고 말았다. 인생 1회차 때와는 좀 달랐다. 그런데 막상 돌이켜보면 꼭 그렇지도 않을 것 같았다.
여러 가지 환경적인 요인은 다르지만 인생 1회차와 비슷하게 인생 2회차에서 단심회의 과녁이 되고 만 것이었다.
‘하긴 치밀하게 나를 벼랑 끝으로 몰아갔지.’
“그렇단 말이죠.”
최민혁은 새삼 지난 클럽 마약 사건을 떠올리면서 어금니가 부러지도록 이를 으드득 갈았다. 박두영 부장검사와 엮인 지난 일을 떠올렸다.
바로 자신이 지난 1회차 인생에서 감방에 가게 된 계기가 된 마약 사건.
최민수는 이미 감방에 보냈지만 정작 그 배후인 김기범은 손을 댈 수가 없었다.
당시 최민혁은 KM 전자 후계 구도 문제 때문에 이 일을 뒤로 미루었다.
그런데 이미 어느 정도 체급을 키운 최민혁은 다시 자신에게 이를 들이대는 김기범을 절대로 그냥 둘 수가 없었다.
아니, 이제부터 철저하게 보복할 생각이었다.
‘아쉽다면 김현탁과 김기범의 연결 고리가 취약해. 그래도 하나씩 엮어 넣으면 되겠지. 보자, 어떻게 한다……. 지금쯤이면 클럽 파티에 마약을 준비한다고 정신이 없겠지. 아마 그래서 이번에 마약 밀수를 하는 것일 거야. 문제는 공항에서 설사 적발되어도 그냥 넘어갈 거야. 그렇게 둘 수는 없지.’
최민혁은 그제야 김명준 과장에게 자신이 베트남의 거친 다음 한국으로 향할 것이라는 정보를, 소위 말하는 모든 한국 언론에 다 흘리라고 지시했다.
김명준 과장은 조금 뜬금없는 지시에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한국 언론에 죄다 실장님의 행적을 알리라뇨?”
“저도 공항에서 대규모 인터뷰를 할 것이니, 그렇게 준비를 해두세요. 아, 장소는 반드시 인천공항이어야 하고, 날짜는 이날이어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도 베트남을 경유한 한국행에 영문을 몰라서 몇 번이나 질문했다. 하지만 최민혁은 그저 베트남을 한번 가고 싶다는 이야기만 늘어놓았다.
“우리 KM 건설도 베트남에서 뭔가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그곳에 가서 한번 둘러보고 싶은 것뿐입니다.”
“…알겠습니다.”
‘늘 조용히 살고 싶다고 입만 열면 말하는 분이 노골적으로 시끄럽게 살고 싶은 행동을 하다니, 영문을 모르겠네.’
“그리고 김기범과 김현탁이 관련된 CCTV 파일을 박두영 부장검사에게 몰래 제보하세요. 아, 검찰이 제대로 안 움직이면 언론 통해서 제보한 사실을 다 폭로하겠다고 하시고요.”
그리고 몇 가지 정리한 자료를 추가로 내밀었다.
“…….”
한동안 눈만 끔뻑인 김명준 과장은 최민혁을 힐끗 쳐다보았지만 입을 열지 않았다.
최민혁이 먼저 말해주었다.
“신문에 나온 기사와 동영상을 토대로 김기범과 김현탁 동선을 토대로 추론한 것뿐입니다. 안 되면 어쩔 수 없고, 잘되면 대박 아닙니까. 그냥 그렇게 아세요.”
“…네.”
* * *
박두영 부장검사는 최민혁 덕분에 재미를 톡톡히 본 터라 꾸준하게 그의 행보를 살폈다. 그는 덕분에 KM 전자의 움직임에 대해서 꽤 많은 정보를 얻었다.
‘이상하군.’
그 자신이 아는 최민혁이 얼마나 권모술수가 대단한지 잘 알았다. 그런데 정작 KM 전자는 당장 내일 망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박두영 부장검사는 뭔가 있다는 것을 느끼자 처가의 도움을 얻어서 1억 5천만 원으로 KM 전자의 주식을 주당 1,500원에 10만 주를 매입했다.
처가에서는 난리가 났다.
[박 서방, 정신 좀 차려. 자네 보고 언제 주식에 투자하라고 했나. 자네는 자기 일만 철저히 해. 그깟 푼돈은 신경 쓰지도 마.]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박두영 부장검사도 투자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최민혁이 유럽으로 간 이후에 모든 것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기조연설이 그 시작이었다.
톰슨 뉴스가 나오기가 무섭게 KM 전자 주가는 요동쳤다.
결국 4만 원을 돌파하기가 무섭게 6만 원에 안착하자 혀를 내둘렀다.
‘60억인가?’
처가에서는 당연히 난리가 났다. 아무리 처가가 돈이 많다고 해도 60억은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다. 특히 법밖에 모르는 박두영 부장검사의 혜안에 경악했다.
그들은 오히려 처가를 방문한 박두영 부장검사를 데리고 조사했다.
박두영 부장검사는 그저 웃기만 했다.
덕분에 처가에서도 큰소리칠 수 있었던 박두영 부장검사는 최민혁의 행보에 감탄했다.
‘어째 이상하더라.’
잔술수의 대마왕인 최민혁 실장의 행보를 도저히 이해하기 힘들었는데, 뒤늦게야 그 진실 일부를 알았다.
지금까지도 잘 보면 자신과 협상할 때 결코 뇌물로 주도한 것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최근에 와서는 오직 정보만을 주고받았다.
이익은 그게 더 컸다.
그제야 박두영 부장검사는 최민혁 실장의 행보에 숨겨진 의미를 파악했던 것이다.
박두영 부장검사는 시간이 갈수록 최민혁의 동선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가 때마침 김현탁 부장에 대한 제보를 받았다.
CCTV 파일이었는데, 과거 재벌 3세가 연루된 마약 파티에 대한 자료다. 그런데 이 파일에는 김기범을 비롯한 몇 사람이 마약을 취급한 장면이 녹화되어 있었다.
“…흠.”
그는 딱 보는 것만으로 과거 김명준 과장이 자신에게 넘기지 않았던 클럽 마약 사건 파일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바로 파악했다.
당시 최민혁이 모든 죄를 다 뒤집어쓸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무혐의로 끝났다.
김대영 수사관은 당황해서 관련 파일을 일일이 확인하고서야 소리쳤다.
“클럽 마약 사건 파일 맞습니다. 김기범 이놈도 마약 밀매를 했던 수사 대상에 올랐던 놈이 맞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김기범 이놈이 클럽 파티를 주도한 놈이었습니다.”
이미 박두영 부장검사도 다 아는 사실이었다. 다만 그 역시 외부 압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했다.
그런데 그 증거가 갑자기 튀어나온 것이었다.
더 황당한 것은 그다음 자료.
[김현탁 부장이 서울행 대한항공 376편의 화물 편으로 다량의 마약이 밀매될 예정임. 세관 공무원을 매수해서 진행되는 일이니, 철저한 확인이 필요함. 김기범의 사촌 형인 김현탁 부장이 지난 클럽 파티에도 마약을 공급했음.]
심지어 날짜와 마약 밀매 당사자에 관한 내용까지 다 나와 있었다.
관세청 공무원을 매수해서 수십억이 마약을 화물 차량으로 밀반입할 것이라는 정보. 언뜻 생각하면 도저히 믿기 어려운 정보였다.
그런데 재벌 2세, 고위 공무원이 포함된 고위층의 환각 파티 이야기는 검찰 내에서 이미 말이 나왔다.
박두영 부장검사조차 이와 관련된 사건을 조사하면서 파티에 사용된 마약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궁금했다.
얼핏 생각하면 이들 권력자가 마약 조직을 통해서 코카인을 얻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럴 리가 없지. 그건 위험성이 너무 커.’
만약 마약 조직에 재벌 2세 정보가 흘러간다면 그들에게는 치명적인 위험이 될 수도 있었다.
따라서 믿을 수 있는 이가 대량의 마약을 밀수했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그 출처를 확인할 수가 없었다.
마약이 유통된 흔적에 대한 수사는 윗선에서 계속 덮어 버렸기 때문이다.
지난 클럽 마약 사건과 김현탁 부장의 마약 밀수 연관성은 가볍게 생각할 일이 아니었다.
박두영 부장검사는 아주 잠깐 갈등했다. 하지만 이미 사무실에 있는 몇 사람이 이 제보를 확인했다. 여기서 일방적으로 덮을 수는 없었다.
가장 큰 문제는 이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최민혁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점이었다.
‘제보와 함께 경고까지 했어. 이 일은 그냥 이전과는 달리 공격적으로 나설 거라는 얘기야. 최 실장도 이제 억만장자니, 그 돈으로 무슨 일을 못 하겠나. 여기서 덮으면 내가 뒤집어쓸 확률이 높아. 그럴 수는 없지.’
“…법원에 영장 청구하세요.”
“알겠습니다.”
박두영 부장검사는 최근 최민혁의 행보와 재산을 다시 한번 떠올리면서 그의 재산을 유추해 보았다. 증여받은 지분만 해도 수천억을 가볍게 넘어갔다. 당시 힘이 없었던 최민혁이 한 행동을 고려하면 앞으로 일은 결코 간단할 리가 없었다.
‘드디어 복수하려는 건가?’
* * *
계절적인 요인 때문에 항공업계 판촉전이 치열해지면서 일등석과 비즈니스석 대부분이 20% 가까이 인하되었다.
덕분에 서울행 대한항공 376편 일등석은 평소와는 달리 빈자리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월가의 금융종사자처럼 깔끔한 정장을 한 김현탁 부장은 괄괄한 목소리로 여자 승무원을 괴롭혔다.
“이 옷 가격이 얼마인 줄 알아. 당신 월급의 10배는 넘어. 그런데 흠집을 내?!”
다행히 남자 승무원이 나서서 수습했다.
보상을 약속받은 김현탁 부장은 일등석의 따가운 시선에 오히려 눈을 부릅떴다.
눈썰미가 좋아서인지 나서는 이는 없었다. 수행원으로 보이는 이가 따라붙는 모습을 보자 오히려 똥이 더러워서 피한다는 듯이 시선을 돌렸다.
“어디 하층민이 감히!”
대학 동창이기도 한 이상수 과장이 김현탁 부장을 설득했다.
“현탁아, 그만 좀 하자.”
“야, 너도 봤으면서 그래? 내가 뭐 어려운 부탁을 한 것도 아니잖아. 그냥 전화번호만 달라고 했을 뿐이야. 그런데 이 옷을 봐.”
정장 일부가 손톱으로 긁혀 있었는데, 자국이 생각보다 깊었다.
김현탁 부장이 전화번호를 주지 않는 여승무원 손목을 잡았을 때 여승무원이 강하게 밀치면서 일어난 일이었다.
“너도 지금 회사 분위기 알면서 이런 소동을 일으키고 싶어?”
“젠장맞을. 이게 모두 최민혁인지, 개민혁인지 하는 새기 때문이야!”
버럭 화를 낸 김현탁 부장은 일등석에 앉으면서 계속 투덜거렸다. 그는 원래 선진 금융 기법을 배우기 위해서 영국 DL 화재 지사에 체류했다.
DL 그룹 계열사의 기둥 중의 하나인 DL 화재 이사진이 1차 목표였다. 이제 한 1년만 영국에서 고생한 후에 국내로 돌아가면 모든 일은 계획대로 이루어질 예정이었다.
그런데 KM 전자가 갑자기 뜨겁게 달아오르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DL 전자가 KM 전자를 인수하려는 계획도 다 제동이 걸렸다.
더 황당한 것은 KM 산업의 빠른 행보다. 그들이 TRS 산업에 본격적으로 끼어들면서 모든 계획이 다 일그러졌다.
DL 그룹도 이제는 기존 계획을 변경해야 할 상황이 된 것이다.
그들은 결국 일정보다 빨리 DL 정보통신에 투자를 대폭 늘렸다. 올해만 매출 300억, 내년에는 2,000억을 목표로 했다.
하지만 김현탁 부장은 정보 통신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그는 오직 금융 쪽만 파고 싶었는데, 상황이 그렇게 되지 않았다.
이상수 과장이 경고했다.
“내가 대학 동창이라서 하는 말이 아냐. 오히려 DL 정보통신을 제대로 키울 수만 있다면 그룹 승계 구도에 바짝 다가갈 수가 있어.”
“마, 됐다. 그만해라.”
그도 바보가 아닌 터라 뜨거운 정보통신업계의 변화를 잘 안다. 그렇기에 영국에 잘 있다가 마약 밀수 때문에 베트남에 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이 전부 다 최민혁 그 새끼 때문이란 말이야. 도대체 작은아버지는 DL 전자에서 뭘 하고 있는 거야?’
김현탁 부장은 안 그래도 주변 환경이 짜증스러웠는데, 때마침 몇 사람이 한꺼번에 들어오더니 우르르 옆자리에 앉았다.
그는 부산한 발소리도 화가 나서 버럭 소리쳤다.
“아, 그 조용 좀 하자. 너희가 이 비행기 전세라도 낸 거…….”
“죄송합니다.”
꾸벅 고개를 숙이는 최민혁. 그 옆에는 불안한 조성돈 팀장을 비롯한 나머지 일행이 있었다. 김명준 과장은 최민혁의 바로 뒤편에 앉았다.
“…설마 최민혁 실장?”
최민혁은 어깨를 으쓱했다.
“저를 아세요? 이것 참, 요즘 프랑스 신문에 나오기는 했지만, 프랑스인은 잘 모르던데…….”
“흠.”
김현탁 부장은 짜증이 났지만 일단 감정을 추슬렀다. 이번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최민혁 프로필을 확인했다. 얼굴은 물론이고, 행적에 대한 것을 일일이 말이다.
심지어 김기범이 주최한 파티에서 가끔 얼굴을 본 적이 있었다.
그러니 최민혁의 얼굴을 모를 수가 없었다.
일단 적이라는 것이 분명하지만 그걸 대놓고 표현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다.
“혹시 한국대 사학과에 다니고 있는 기범이 아냐?”
“기범이 형은 잘 알죠.”
“내가 기범이 사촌 김현탁이다.”
“아, 그러면 기범이 형이 자주 언급하던 그 영국에 있다던 사촌 형이군요.”
“어, 볼일이 있어서 베트남에 잠깐 들렀다가 한국에 가는 거야.”
시작은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김현탁 부장은 이상하게 최민혁에게 편히 말할 수가 없었다. 여유로운 최민혁의 태도도 한몫했지만 동행한 네 사람이 신경 쓰였다.
특히 뒷자리에 앉은 검은색 정장을 한 김명준 과장이 문제였다.
조용히 눈을 감고 있지만 묘한 아우라가 무럭무럭 피어올라서 허튼짓을 하면 그냥 두지 않겠다는 표시를 분명히 했다.
특히 조성돈 팀장은 계속 최민혁에게 뭔가 보고를 하는데, 그 분위기가 사뭇 진지했다. 배종대 과장이나 정성근 대리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유럽에서 한 일에 대해서 계속 끊임없이 말을 한 것이다.
최민혁은 묵묵히 그 이야기를 듣고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그 모습이 그렇게 자연스러울 수가 없었다.
관록이랄까.
진짜 경영자의 포스가 드러났다.
김현탁 부장은 배알이 꼴렸다.
‘이 새끼가.’
“야, 민혁아!”
“네? 말씀하세요.”
“너 요즘 잘나가더라.”
“제가 뭐 한 게 있나요. 밑에 직원이 워낙에 잘해서 그런 거죠.”
“하지만 콜린스가 대박난 것만 해도 보통 일이 아니잖아.”
“그거 다 최병연 팀장이 한 겁니다. 전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만 올린 거고요.”
“그래?”
“우리 둘째 큰아버지가 최병연 팀장의 일에 계속 훼방을 놨던 게 문제였습니다. 결국 프로젝트는 잠정 중단되었죠. 둘째 큰아버지가 구속되고 난 후에야 그 사실을 알고 프로젝트를 다시 진행하게 했죠. 이미 끝나 있는 결과가 펑 하고 터져 나온 것뿐입니다.”
콜린스의 성공은 한국 재벌가라면 모를 수가 없는 일이었다.
최민혁이 재벌 3세로 운 좋게 콜린스를 챙겼다고 해도 그렇다.
콜린스가 가져온 결과 그 자체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 대단한 일을 길 가다가 복권을 주운 것인 양 말하는 최민혁의 행동에 김현탁 부장은 입을 딱 벌렸다.
“…진짜?”
‘이게 진짜 아무것도 모르고 하는 소리인가.’
“네. 전 정말 아무것도 한 게 없어요.”
술술 나오는 ‘난 모른다는 식’의 답변에 김현탁 부장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잠깐 곰곰이 생각했다.
그런데 어쩌면 최민혁의 말이 사실일 수도 있었다.
“그러면 IFA 기조연설은?”
“그것도 IFA 내부적인 알력 다툼이 있나 보더라고요. IFA 내부적으로 소니를 별로 안 좋아했죠. 내부적으로 피 터지게 싸우는 상황에서 짠 하고 제가 나타난 겁니다. 결국 그 대타를 제가 운 좋게 차지한 것뿐이죠. 사실 오성 전자가 그 상황을 만든다고 수백억을 퍼부었다는 소리도 있습니다.”
“진짜?”
“아니, 세상에 그 일 때문에 오성 전자 기획실장인 권태성 실장이 절 찾아왔지 뭡니까. 프랑스 지사 설립하는 곳까지 찾아왔으니, 화가 많이 났던 거죠.”
“그래?”
그도 처음 듣는 이야기라서 인상을 절로 찌푸렸다. 아니 언급조차 하기 싫어서 다시 주제를 바꾸었다.
“하지만 그 연설 내용이 꽤 인상적이었다.”
“아, 그거야 여기 조성돈 팀장님이 써 준 원고를 읽기만 한 겁니다. 그 정도는 초등학생도 다 할 수 있는 일이죠.”
‘씨발. 정말이야? 아니, 정말 그럴 수도 있잖아.’
질투가 부글부글 끓어오르자 겨우 심호흡까지 해서 이성을 차렸다.
“…그래? 그러면 도대체 KM 전자 주가는 어떻게 된 거야?”
“그거야 거품이죠. 특히 우리 KM 전자 주식 유통량이 적어서 주가 조작하기에 좋죠. 아마 외국계 단기 자금이 들어와서 쇼하는 것일 뿐입니다.”
천하태평인 최민혁의 말은 조금도 주저 없이 흘러나오기만 했다.
“솔직히 웃기죠. 도대체 왜들 다 민감하게 반응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생각이 있다면 우리 회사 일은 별 의미 없다는 것을 알 겁니다. 욕심만 많고, 지능이 떨어지는 이들이 호들갑을 떨면서 난리를 치는 겁니다.”
졸지에 험한 소리를 들은 김현탁 부장은 어이가 없었다. 난 별것 아닌 일을 했는데, 그게 뭐 대수롭냐고 거꾸로 공격을 당한 것이었다.
‘이 새끼 봐라.’
최민혁은 심지어 망설이는 척하면서 한마디 더 했다.
“그런데 김현탁 부장님이 기범이 형하고 인척이라는 것을 알겠는데, 초면에 그렇게 말을 놓으니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그러냐?”
“어, 그래.”
당당하게 말까는 최민혁 행동에 혀를 찼다.
“하, 너 꽤 건방지다.”
“그러면 김 부장 역시 예의가 없잖아. 서로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말을 막 하면 쓰냐.”
“이 새끼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김현탁 부장을 이상수 과장이 기겁해서 말렸다. 둘 사이 대화가 이상하게 부정적으로 흘러서 단단히 준비했기에 주먹다짐을 막았다.
김명준 과장은 쓱 자리에서 일어나서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남자 승무원이 다급하게 달려와서 그들 사이를 막아섰다.
덕분에 일등석 여행객은 이 뜻밖의 구경거리를 흥미롭게 쳐다보았다.
김현탁 부장도 감정이 없는 김명준 과장의 차가운 눈빛에 몸이 으스스 떨리자 결국 두 손을 든 채 자리에 앉았다. 그는 두 눈을 껌뻑이고 있는 최민혁을 보면서 이를 갈았다.
최민혁은 손가락으로 권총 포즈를 만든 후에 김현탁 부장 이마를 향해서 ‘탕’ 소리를 내면서 쏜 후에 ‘후’ 하고 불었다.
노골적인 공격에 김현탁 부장은 이를 갈았다.
‘이 나쁜 놈의 새끼가……. 두고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