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시즈벨은 지적재산권을 수익 모델로 삼는 회사답게 글로벌 특허를 검토하고, 필요하다면 관련 특허를 사들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런 활동이 아직은 활발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MP3 특허는 바로 이런 시즈벨의 메인 특허 중의 하나는 아니었다.
아직까지 매입한 특허만 가지고는 그 가치를 명확하게 정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톰슨이나 브라운호퍼 쪽에도 연락이 소극적이었다.
여기에 톰슨 멀티미디어 내부 사정도 한몫을 했는데, 그들은 굳이 MP3 특허를 매각할 생각이 없었다. 당장 노조가 난리를 치고, 회사 부채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상황에서 시즈벨과 협상이 될 리가 없었다.
브라운호퍼 쪽은 시즈벨에 부정적이어서 계속 반대했다.
이 둘 간의 밀고 당기기 때문에 MP3 특허 확보는 계속 뒤로 밀렸다.
오직 제이미 이사 혼자만이 이 MP3 미래 가치를 보고 계속 집요하게 매달렸다. 하지만 그도 MP3 수익성에 대해서는 시즈벨 이사진을 설득할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는 그래도 상관이 없었다. 아무도 MP3 특허에 관심이 없었으니까.
최민혁이 나타난 후에 이전과 완전히 상황이 달라졌다.
경쟁자, 그것도 최악의 포식자가 나타난 것이었다.
“제이미 이사, 도대체 KM 전자가 어떻게 알고 우리에게 그런 제안하는 겁니까?”
“지금 봐서는 톰슨 통해서 이야기를 들은 것 같습니다.”
“티에리 브르통 영업이사 말입니까? 아니, 그 작자가 왜 그런 이야기를 최민혁 이사에게 했다는 말입니까? 뭐가 아쉬워서요.”
“어려우니까요. 톰슨의 부채가 2조를 넘어간다는 것은 잘 알지 않습니까. 이미 민영화는 내부적으로 결정이 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프랑스 여당이 여론 때문에 눈치를 봤습니다. 아마 KM 전자는 그 점을 이용했을 겁니다. 프랑스 독점 판매권도 그런 연장선이겠죠. 1차 이벤트 결과만 봐도 나쁘지 않습니다.”
프랑스 기사 중에 나온 사진은 콜린스 이벤트에 당첨된 프랑스인이 환하게 웃음 짓는 모습이었다. 이번 행사는 프랑스 언론이 띄우면서 콜린스 광고가 제대로 된 결과였다.
그러나 황당한 것은 콜린스는 톰슨과 KM 전자가 공동으로 투자해서 만든 물건이라는 식의 기사였다.
전형적인 가짜 뉴스였지만 프랑스인은 그다지 신경을 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회의에 참석한 시즈벨 임원은 다들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다들 뒤늦게야 MP3 특허 가치를 조사하고서야 가치를 어림짐작했다. 이제는 시즈벨 특허를 넘겨서는 안 된다.
그런데 협상이 진행될수록 상황이 예상한 것보다 더 나빴다.
그들도 왜 최민혁 실장이 독일이나 영국의 그 많은 좋은 기업을 두고, 망해 가는 톰슨 멀티미디어와 손을 잡았는지 몰랐다.
‘정말 톰슨 특허가 목적이었을까?’
상상하면 할수록 황당했다.
최민혁 실장이란 인간을 알면 알수록 소름이 끼쳤다.
더욱이 최민혁 실장이 지금 자신에게 들이민 자료는 자신의 숨을 막히게 하였다.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유럽에 흩어진 시즈벨 지사의 세계적인 법률 전문가를 다 동원해서 파고들어도 마땅한 대안이 나오지 않았다.
[포기하는 게 좋을 겁니다. 지금이라도 협상해서 이익 일부라도 챙기는 것이 낫습니다. 최민혁 실장이 내놓은 특허 자료는 이미 철저하게 준비가 된 겁니다.]
그들은 지적 재산권을 이용해서 남을 협박한 적은 있어도 거꾸로 이런 식의 협박을 당한 적은 없어서 당혹스러웠다.
제이미 이사 역시 기분이 나쁜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아니, 이 자리에서 가장 분노한 것이 그였다.
그런데 문제는 현실이다.
회의실 한쪽 프로젝트에 나와 조사 분석 결과처럼 KM 전자의 MP3 특허를 무시하고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몇 가지 회피 특허입니다. 이쪽 특허는 우리도 대응책을 마련해 놓지 않아서 막기가 어려울 겁니다. 만약 이 특허대로 제품을 만들기 시작하면…….”
물론 그 제품이 뭔지 아직 시즈벨 이사진은 공상의 나래만 폈다. 그것만으로도 시즈벨의 MP3 플랜은 그냥 여기서 접어야 한다.
이유는 KM 전자가 당장 가진 MP3 특허를 모두 사들이려면 1천만 달러 이상의 자금이 필요한데, 설사 있다고 해도 구할 수가 없었다.
더 큰 이유라고 한다면 MPEG 표준화가 진행되면서 특허료 처리를 위한 다양한 방안이 제시된 것과도 관련이 있다.
MPEG 표준화 위원회에서는 다양한 특허권자와 여러 업체 간의 특허료 분쟁 소지를 줄이기 위해서 하나의 특허 풀로 만들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 지금 최민혁이 제안하는 협상도 시즈벨이 싫다고 해서 거절할 수는 없었다.
어차피 특허 풀로 뭉쳐야 하는 상황이니, 차라리 지금 협상하는 것이 맞았던 것이었다.
그러니 시즈벨 이사진도 극단적으로 최민혁의 제안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뭐 이런 개 같은 경우가 다 있냐.’
“…….”
다들 머리를 굴려 봤지만 뾰쪽한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최민혁이 얼마나 지독하게 시즈벨 특허를 공략해 놓은 것인지 차라리 특허를 매각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했다.
하지만 지적재산권 관리가 주 업무인 그들이 그런 일을 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5% 특허료는 너무하지 않습니까?”
“그건 협상하면 바꿀 수 있습니다.”
물론 반박하는 이는 없었다.
반대편에 속한 패트릭 호프만 이사는 오히려 제이미 이사의 무능을 꾸짖었다.
“아무리 주변에서 반대하고 해도 자신의 신념이 있었다면 끝까지 밀어붙여야지. 그렇게 힘이 없어서야 밤에 당신 와이프나 만족하게 하겠어?!”
“패트릭 이사!!!”
발끈한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는 결국 패트릭의 멱살을 잡았다. 다른 이사진이 다급하게 말렸다. 회의실 분위기는 한동안 시끌시끌했다.
가브리엘 아담스 대표 이사는 결국 일방적으로 결론 내렸다.
“…그러면 다른 반대가 없다면 최민혁 이사와 협상하는 것으로 결론 내겠습니다.”
하지만 제이미 이사만큼은 버럭 소리쳤다.
“저 특허를 제가 어떻게 사들였는지 모릅니까? 당신들이 그렇게 반대할 때 나 홀로 작업했던 겁니다. 정말 저놈들에게 우리 MP3 특허를 고작 5%에 넘기겠다는 말입니까?!”
가브리엘 아담스 대표이사가 분노한 제이미 이사를 설득했다.
“제이미 이사가 반대하는 마음은 압니다. 지금까지 당신의 노력을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뒤늦게 최민혁 실장에게 당하고 실수한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것 자체가 저 최민혁이란 놈의 흉계라는 것을 모릅니까? 이놈들이 우리 특허를 헐값에 사들이려고 수작을 부린 겁니다. 그러니 절대로 협상하면 안 됩니다!”
목이 찢어지라 외치는 제이미 이사의 반응은 평소와는 많이 달랐다. 그는 회의실 책상을 두 주먹으로 치면서 두 눈을 부릅떴다.
“최민혁 실장 그놈은 MP3 가치를 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저렇게 협박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절대로 이 협상 하면 안 됩니다!”
“당신 마음은 알지만 그럴 수가 없어요. 우리가 매입한 특허를 사장할 수는 없습니다!”
패트릭 이사는 숨김없이 그대로 비웃었고, 실제로 제이미를 싫어하는 이사진을 중심으로 협상에 찬성했다.
제이미 이사는 소리를 내질렀다.
“당신들 이번 협상 반드시 후회할 겁니다!”
“…….”
이번에는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반박하는 이는 없었다. 다들 본능에 따라 문제가 된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게 정확히 어느 정도인지는 몰랐다.
더욱이 생각보다 더 집요한 최민혁 실장 때문에 이대로 그냥 있을 수도 없었다.
* * *
“5% 특허료는 곤란합니다.”
“6%로 하죠. 이게 마지막 제안입니다. 싫으면 저희는 일어나겠습니다.”
가브리엘 대표이사도 버럭 화를 냈다.
“정말 협상할 생각은 있는 겁니까? 아무리 그쪽 특허가 더 우위에 있다고 해도 우리 특허료를 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세요!”
“특허 가치 비교 자료는 이미 그쪽에서 봤을 텐데요? 만약 일괄 로열티로 정한다고 해도 3%도 많습니다. 저희도 그쪽에서 투자한 비용을 보상해 주려고 최선을 다하는 겁니다.”
“이렇게 나오면 더 타협은 없습니다!”
상대가 벼랑 끝 전술로 나오자 최민혁도 피식 웃으면서 양보했다.
“좋습니다. 그러면 제가 다른 제안을 하나 내겠습니다.”
안현수 팀장이 망설이는 표정으로 비디오 특허와 공간 압축 특허 자료를 포함한 열다섯 가지 특허 자료를 내밀었다.
“……?”
가브리엘 아담스 대표이사도 의아한 얼굴로 자료를 살폈고, 제이미 이사를 노골적으로 놀리던 패트릭 이사도 같이 그것을 검토했다.
“……!”
그리고 화들짝 놀란 그들은 최민혁의 눈치를 보면서 멍하니 자료를 계속 살폈다.
MP3 특허는 이미 다 확정이 되었는데, 지금처럼 MP3 산업이 없는 상황에서는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비디오 특허는 아직도 표준화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특히 이 특허는 방송 사업에 큰 영향을 미친다.
산업 전반적인 파급 효과는 이 비디오 특허가 더 압도적이다.
그 영향력이 마침 필요한 시즈벨 입장에서는 마른침을 삼킬 수밖에 없는 먹잇감이었다.
“잘 아시겠지만, 우리가 이 특허료를 직접 징수하거나 관리할 수는 없습니다.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쪽은 우리가 어떻게 한다고 해도 유럽이나 미국은 대리인이 필요합니다. 경험이 없는 우리로서는 대리인을 세울 수밖에 없어요.”
“설마…….”
“이 MP3 특허권을 우리에게 준다면 유럽과 미국 시장에 특허 대리를 그쪽에 맡기겠습니다.”
“설마 이 비디오 특허 관리를 우리 쪽에 의뢰를 주겠다는 말입니까?”
“지금 진행하는 브라운호퍼와의 공동 연구와 관련된 것을 다 포함합니다. 그 수수료만 해도 적지 않을 겁니다. 시즈벨이라면 꼭 그 수수료가 아니라 그 비디오 특허를 관리하는 것만으로 재미를 꽤 보겠죠. 우리 역시 당신들의 그런 능력이 필요합니다.”
최민혁은 흡혈귀보다 더 악질인 시즈벨의 성향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역설적이지만 그래서 시즈벨은 더 믿을만했다.
‘특허료 수탈은 시즈벨에 맡기고, 우린 이익만 챙기면 되니까.’
물론 욕은 시즈벨이 다 먹을 것이다.
어차피 비난을 받고 사는 시즈벨 입장에서는 거절하기 힘든 제안이었다.
가브리엘 아담스 대표이사도 힐끗 다른 시즈벨 이사진 표정을 살폈다. 반대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패트릭 이사는 엉덩이를 들썩인 채 숨을 죽였다. 괜히 끼어들어서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겉으로 어려 보이는 최민혁 실장이 자신이 협상에 적극적이면, 그것을 이용해서 얼마나 뜯어먹을지 생각하면서 이를 악물고 참았다.
“…후유, 알겠습니다.”
‘됐다!’
최민혁은 쾌재를 불렀다. 실상 자신이 의도적으로 끼워 넣은 MP3 특허는 상업적으로 미흡했다. 물론 MP3 플레이어가 뭔지도 모르는 시즈벨이 그 내막을 알 리가 없었다.
‘1년만 지났어도 이런 계약은 되기가 어렵지.’
물론 약간의 시간은 필요했다.
시즈벨 이사진은 따로 다시 나가서 한 시간 가까이 회의했다.
가끔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의 격앙된 소리가 나오기는 했지만, 신경 쓰는 이는 없었다.
시즈벨은 물론 마치 협상이 이렇게 흘러갈 것이라 예상한 것처럼 준비된 계약서를 보면서 움찔했다. 그리고 결국, 바뀐 계약서에 사인하고 말았다.
협상을 끝낸 최민혁은 표정 관리를 한다고 꽤 고생했다.
물론 분노가 가득한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는 가브리엘 아담스 대표이사에게 숨김없이 그대로 말했다.
“비디오 특허가 중요하다는 것은 압니다. 하지만 이해관계가 너무 복잡합니다. 그걸 다 참작하면 그 특허로 떨어지는 이익이 얼마 안 됩니다. 이익이라고 하면 고작 명성뿐인데, 이런 엉터리 계약을 하다니. 이 계약은 반드시 후회할 겁니다!”
물론 그럴 수도 있다.
그런데 꼭 그렇다고 하기도 힘들었다.
“…….”
시즈벨 이사진은 최민혁 사탕발림에 다급하게 계약서에 사인하고 말았지만, 제이미 이사의 말이 마음에 계속 걸렸다.
그래도 어쩔 수가 없었다.
지금은 무섭게 치고 올라오는 KM 전자의 비디오 특허가 그들에게 필요했다.
시즈벨 이사진의 표정에 결국 두 손을 들고 만 제이미 이사는 불난 집 구경을 하면서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억지로 참고 있는 최민혁의 얼굴을 살피다가 악수를 청했다.
“……?”
최민혁은 상대의 반응이 의아했다.
하지만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는 뒤끝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씁쓸한 표정을 한 채 계약서를 힐끗 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이미 같은 배를 타게 되었는데, 계속 싸우는 게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저 당신의 수완에 감탄할 뿐입니다.”
“아, 천만에요. 저 역시 제이미 이사의 혜안에 감명을 받았습니다. 따지고 보면 이 일을 위해서 벌써 몇 년 전부터 준비를 해왔으니까.”
실제로 시즈벨 특허 중에 가장 오래된 것은 3년 전에 사들였다.
그만큼 MP3 특허 로드맵을 주도하는 제이미 이사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전 세계 기업을 상대로 한 미래 MP3 특허 분탕질의 주인공이란 말이지.’
지금까지는 협상 상대로 부담스러운 인물이지만 동료가 된다면 이야기가 좀 달랐다.
그의 안목은 진짜였으니까.
최민혁도 진심으로 그를 대했다.
“앞으로 유럽이나 미국 쪽 특허 문제는 시즈벨에 일임할 생각입니다. 그리고 특허와 관련해서 협상할 일이 있으면 언제라도 연락하십시오. 우리 모두 같은 배를 탄 상황 아닙니까. 앞으로 잘해봅시다.”
“기꺼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하지만 최민혁이나 시즈벨 이사진은 서로 믿지 않았다.
그들은 각자 자신의 이익을 고민하면서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최민혁 역시 1회차 인생의 시즈벨을 떠올리면서 방긋 미소 지었다.
‘이게 동상이몽(同床異夢)일까?’
* * *
실상 비디오 특허가 KM 전자에게 유리하게 흘러간다고 해도 장담하기는 쉽지 않았다.
지금은 미국이나 독일 쪽에서 소니를 의식해서 KM 전자 손을 들어준다고 해도 앞으로 계속 이럴 거라고는 누구도 확신할 수 없다.
소니 역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필립스와 같은 회사와 공동 전선을 구축할 수가 있다.
그런데 시즈벨이 만약 여기에 끼어든다면 상황이 또 달라진다.
그들은 KM 전자 이익만이 아니라 자기 이익을 위해서라도 적극 움직일 것이다.
최강의 특허 사냥꾼이 움직인다면 다른 회사도 조심할 수밖에 없다.
시즈벨이 보유하고 있는 몇 가지 관련 원천기술 때문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시즈벨은 내년 정도만 되어도 MPEG 위원회에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다.
최민혁이 보는 큰 그림이었다. 손가락 하나 대지 않고 비디오 특허 표준화를 확립할 수 있는 이 방식을 포기할 이유는 없었다.
막상 일을 만들어 놓고 보니, 그 자신이 그렇게 부담스러워하던 부분이다.
‘설마 일이 이렇게 풀리다니.’
묵묵히 협상 과정을 보면서 어렴풋하게나마 최민혁의 계획을 깨달은 안현수 팀장은 실무진과 협상을 하면서도 그의 표정을 살폈다.
그 역시 전광석화처럼 이루어진 협상에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겉으로는 서로 웃고, 앞으로 잘해보자고 하지만 내심은 다 달랐다. 협상 기념사진을 찍을 때 제이미 이사를 제외하고는 시즈벨 이사 중에 아무도 웃지 않았던 것이다.
‘시즈벨이 만만한 회사는 아닌데…….’
특히 자기들 손에 들어온 지적재산권을 저렇게 허술하게 관리하는 것이 신기했다.
‘…정말 놀랍구나.’
장승일 실장이 이탈리아행을 권할 때만 해도 최민혁에 대해서 호기심을 느꼈다.
하지만 직접 최민혁을 옆에서 본 소감은 속된말로 끌렸다.
지난 STB 사업부 매각 때와는 또 다른 면모를 보았다.
그리고 최민혁이 보여준 시즈벨과의 협상은 바로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길이었고, 그 자신이 그렇게 가려고 했던 길이었다.
협상에서 비록 작은 역할이었지만 자신이 한 역할도 만족스러웠다.
‘앞으로 이런 기회가 또 있을까?’
최민혁은 시즈벨 건물을 나오면서 갈등하는 안현수 팀장을 힐끗 쳐다보았다.
“앞으로 재미있을 겁니다. 애플, MS, 퀄컴과 같은 다국적기업을 상대로 이렇게 싸워야 할 테니까. 그때는 지금처럼 쉽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만 지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습니까?”
말도 안 된다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시즈벨 협상을 보고서야 최민혁이 이미 또 다른 계획을 꾸미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안현수 팀장도 자신의 가슴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어때요? 앞으로 같이 가시겠습니까?”
“하지만 이미 KM 그룹을 그만뒀는데, KM 전자로 가는 것은 좀 그렇습니다.”
“정 그러면 벨린 투자에 자리를 만들어 놓겠습니다. 자문 형식으로 KM 전자 법무 팀을 따로 관리해도 됩니다.”
“…벨린 투자라면, 설마 최병문 상무님이 관리했다던 그 회사 말입니까?”
“네.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으니, 제가 굳이 자세한 말은 필요가 없겠군요. 벨린 투자 법무 팀 인사에 대한 권한을 줄 테니, 한번 세계 최고의 법무 팀을 만들어보세요.”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하하, 제가 오히려 고맙죠.”
최민혁은 나름 통쾌하게 웃고 말았다. 그가 안현수 팀장을 높이 평가하는 점은, 말로 행하는 다른 법률 전문가와는 달리 행동으로 보여 준다는 점이다.
인생 1회차에 실제로 안현수 팀장은 국내보다는 해외 법률 소송에서 더 명성을 떨쳤는데, 비록 사교적인 면은 부족해도 실력 하나만으로 결국 성공하게 되는 사람이다.
‘안 팀장이라면 시즈벨 관리도 잘 알아서 하겠지. 국제 변호사 자격뿐만 아니라 실무 경험도 있으니, 해외 특허 소송 문제도 알아서 잘 처리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