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147화 (147/1,021)

* * *

최민혁은 항공권 예매와 동시에 가까운 공항으로 바로 출발했다.

갑작스러운 최민혁의 움직임을 미처 보고받지 못한 시즈벨은 아직도 KM 전자 특허를 분석하는 것으로 시끄러웠다.

처음에는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마치 늪에 빠져서 죽어가는 사람처럼 상황이 심각하게 변해갔다.

스케일 팩터, 전체 마스킹 한계값, 서브밴드 코딩과 관련된 특허만으로는 많은 한계가 존재했다.

문제는 KM 전자가 가지고 있는 정보 신호 부호화 장치나 인코딩 장치가 이들 특허 범위를 교묘하게 외각에서 감싸는 형태였다.

즉 KM 전자는 자신의 특허를 이용해서 시즈벨 특허를 비틀어서 제품을 만들 수가 있지만 그들 특허만으로는 아무런 제품을 만들 수가 없었다. 심지어 브라운호프 특허는 기본적인 오디오 신호에 대한 방법과 다양한 디지털 코딩 방식을 정하고 있었다.

설사 시즈벨이 가진 특허를 가지고 이용하려고 해도 이 권리 범위에 다 걸려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더 황당한 것은 이 MP3 특허 외에 비디오 특허 역시 무시할 수가 없다는 것.

시즈벨의 가용 인력이 전부 달라붙어서 한 분석 결과는 간단했다.

“무조건 협상을 해야 합니다!”

제이미 이사는 치를 떨었다.

“정말 믿을 수가 없네.”

가브리엘 대표이사 역시 뒤늦게 MP3 특허 관련 로드맵과 KM 전자가 들고 있는 원천기술을 확인하자 인상을 찌푸렸다.

제이미 이사의 말을 이제까지 무시했다. 그런데 정작 KM 전자라는 갑툭튀 회사가 튀어나와서 그들의 포트폴리오 일부를 다 먹어버렸다.

그들조차 제이미 이사를 통해서 분석하고서야 그 방향을 알았을 정도이니.

기가 막히고, 미칠 노릇이었다.

자신들의 주 종목으로 뒤통수를 맞은 셈이니.

“제이미 이사, 방법이 없을까?”

불만이 가득한 제이미 이사의 목소리가 좋을 리가 없었다.

그는 버럭 소리쳤다.

“이걸 보고도 그런 말씀이 나옵니까. 우리 특허만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건 KM 전자 역시 마찬가지잖아.”

“아니, 우회를 살짝 해도 MP3 관련 시스템을 만드는 데, 아무런 하자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예 시도조차 못 합니다. 과연 누가 우리에게 로열티를 지급하려고 하겠습니까?”

실상 시즈벨 특허에 욕심을 내는 업체가 있다고 해도 협상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그냥 KM 전자 특허료를 주면 간단히 끝나니까.

이런 상황을 깡그리 무시한 패트릭 이사가 피식 웃었다.

“제이미 이사 당신이 멍청해서 그런 거야. 도대체 지금까지 뭘 하고 인제 와서 이런 소리를 하는 거야? 자신이 가치가 있다고 주장했으면, 일을 제대로 했어야지!”

“개소리하지 말랬지!”

“아니, 모든 반대를 무릅쓰고 일을 진행했다면 제대로 해야 할 것 아냐. 이렇게 거지같은 상황을 만들어놓고, 나 몰라라 하면 되는 거야? 제이미 이사 당신도 이제는 한물갔다니까.”

분노한 제이미 이사가 벌떡 일어나서 패트릭 이사를 향했다.

가브리엘 대표이사가 단호하게 막았다.

“제이미 이사, 자꾸 이러면 곤란해. 아무리 당신 역량이 대단하다고 해도 회사에서 폭력을 행사하는 것까지 용납할 수 없어!”

“Fuck!"

다행히도 때마침 최민혁의 동선을 살피던 직원이 보고했다.

가브리엘 이사가 허겁지겁 최민혁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서 지금까지 검토 때문에 늦었다고 사과했다.

[네, 지금 오시면 됩니다. 바로 미팅을 준비하겠습니다.]

* * *

이미 유럽 텃세를 경험한 정성근 대리도 최민혁에게서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가브리엘 대표이사가 직접 전화를 걸어온 것에 혀를 내둘렀다.

조성돈 팀장은 피식 웃었다.

“거래가 원래 이런 거야. 너무 조급하게 생각해서는 안 돼.”

“직접 경험해 보니, 그게 또 그렇지가 않습니다.”

“윗선의 지시도 따라야 하니, 더 그렇겠지. 그러니 이번 경험을 잘 생각해 봐.”

“알겠습니다.”

두 사람은 최민혁이 별 표정 없이 차량에서 내리는 모습을 힐끗 쳐다보았다. 안내를 받아서 이탈리아 시즈벨 사무실로 향하는 내내 최민혁은 별 감정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시즈벨 이탈리아 사무실은 도심에서 살짝 떨어져 있어 고즈넉했다. 오가는 시즈벨 직원도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흰색 2층 건물 여러 개가 붙어 있는 모양은 일반 주택이나 별반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최민혁은 미래에 특허 괴물이라고 악명이 자자했던 시즈벨과의 미팅을 앞둔 상황에서도 방심하지 않았다.

지금의 이탈리아 시즈벨 본사는 괴물과 같은 철옹성은 아니었다.

이제 자리를 잡아가는 중이고, 신기술을 이용한 특허료 공략은 몇 년 후에나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때문이었다.

최민혁은 한편으로 시즈벨 이탈리아 사무실 모습을 보면서 많은 것을 느꼈다. 이들이 세계적인 회사로 성장할 수 있다면 KM 전자라고 해서 못할 것이 없었다.

‘한번 생각을 해봐야겠어.’

옆에 동행한 안현수 팀장은 최민혁이 준 특허 자료를 머릿속에 정리하기 바빴다.

최민혁이 내놓은 특허 중에 복수의 정보신호 부호화장치 및 방법은 시즈벨 디지털전송시스템의 앞을 가로막았다.

시즈벨이 설사 디지털전송시스템이라는 특허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부호화과정 자체에 대한 권리 범위를 피해 갈 수가 없다.

따라서 시즈벨 입장에서는 기존 특허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서 이 특허가 반드시 필요했다.

그런데 이런 부분은 한둘이 아녔다.

‘도대체 이런 방식을 어떻게 고안했을까. 이건 마치 시즈벨 스스로 우회 특허를 막기 위해서 만든 방식이나 똑같잖아.’

문제는 이 특허가 단순히 우회 정도가 아니라 실제로 적용된다는 점이다.

최민혁이 내놓은 MP3 특허는 기존 시즈벨 특허보다 구체적이고 그 권리 범위가 협소하기는 하지만, 시즈벨의 특허 길을 다 막아 버렸다.

심지어 어떤 특허는 교묘하게 시즈벨 특허와 겹치는 것도 존재했다. 이런 특허는 법적인 분쟁으로 갈 수도 있었다.

만약 KM 전자가 승소한다면 시즈벨의 특허는 절름발이가 되고 만다.

안현수 팀장은 바로 이런 점을 최대한 이용해서 공격할 포인트를 하나씩 정리했다.

그는 본사 안으로 들어와서도 최민혁의 특허를 정리했다.

마치 시즈벨 특허를 무효화시키기 위해서 만들어놓은 듯한 최민혁의 특허는 원천기술 성향보다는 오히려 공격적인 특성이 더 강했다.

‘…보면 볼수록 놀랍구나.’

* * *

시즈벨 회의실에서 안현수 팀장이 정리한 자료를 살펴본 최민혁은 꽤 만족했다. 자신이 예상한 것보다 더 상세하게 정리된 자료는 법적으로 상대를 공략해서 완승하기에 충분했다.

‘좋네.’

더욱이 협상이 시작되고서 상대가 먼저 허리를 굽힌 점을 주목했다.

시즈벨은 이미 자신이 던진 미끼를 제대로 물었다고 확신했다.

‘그렇다면 공격적으로 가도 나쁘지 않지.’

시즈벨의 대표이사 가브리엘 아담스는 흑인이었다. 키는 190이 넘었는데, 별다른 표정 변화는 잘 드러나지 않았다.

은은한 목소리는 사람의 시선을 끌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다시 한번 일정이 늦어진 점에 대해서 사과드립니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매의 시선으로 나머지 두 사람을 살핀 최민혁은 그들 얼굴에 피로가 남아 있음을 금방 발견했다.

‘고심이 많았나 보군.’

그들은 아직도 MP3 특허권의 본질에 대해서는 몰랐다. 오히려 최민혁에 관한 조사를 하면서 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는 전형적인 백인으로 오만한 눈빛을 반짝였고, 그 옆에 협상 자료를 들고 나타난 마이클 리트는 몸이 바짝 말랐다. 하지만 의욕에 가득한 눈빛만 봐서 가볍게 볼 사람은 아니었다.

이곳에 참석한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는 최민혁의 의도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

“명성 많이 들었습니다.”

최민혁은 어깨를 으쓱한 채 입을 열었다.

“저 역시 명망이 자자한 시즈벨에 대해서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하하하,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아직 우리 회사 명성이 그렇게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주로 시즈벨이 취급하는 특허 업계 쪽만 잘 알지, 모르는 사람은 잘 몰랐다. 아직까지 시즈벨이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까지 그들이 확보한 특허를 무시해서는 곤란하다. 당장 가지고 있는 MP3 특허도 핵심에 근접했다.

MP3 원천기술은 이미 따로 정해져 있지만 가지를 치고 나오는 특허는 지금도 전 세계 각국에서 쏟아지고 있었다.

그 특허 중에 핵심 특허만을 따로 보유하고 있으니, 시즈벨의 안목을 무시해서는 곤란했다.

실제로 가브리엘 아담스 이사는 콜린스에 대한 언급과 동시에 특허에 대한 관심을 드러냈다.

“일정이 늦어진 것은 주 고객도 아닌 KM 전자의 갑작스러운 제안을 검토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콜린스 관련 특허는 너무 복잡해서 확인하는 데 시간이 많이 소요되었습니다.”

“괜찮습니다.”

“편향 코일과 고압 변성기에 적용된 특허를 살펴보았습니다. 혹시 그 특허를 매각할 생각은 없습니까. 충분한 보상을 제시하겠습니다.”

이미 KM 전자를 조사한 시즈벨 실무진의 의견을 따라서 나온 제안이었다.

편향 코일도 기존 편향 코일과는 한 단계 더 나아갔다.

편향 코일 디자인 자체가 충분한 연구 성과를 토대로 나온 결과였기 때문이다.

“저희 시즈벨은 고객의 지적재산권을 보호해 줍니다.”

MP3 특허는 별것 아니란 식으로 몰고 가려는 전략이었다.

최민혁은 상대의 엉뚱한 핑계에 피식 웃었다.

“아, 오늘 우리가 이곳을 찾은 것은 콜린스 때문이 아닙니다.”

“다른 용건이라뇨?”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고개를 갸웃했다. 심지어 바쁜 시간을 쪼개서 이 자리에 나온 것 같은 행동이었다.

지친 시즈벨 직원을 살핀 최민혁은 그들 행동이 가소롭기만 했다.

“사실 귀사의 MP3 특허와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좋은 분위기는 사납게 바뀌었다.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의 포트폴리오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MP3다.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는 최민혁의 반응에 차갑게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이사진의 압력에도 계속 이 MP3 원천기술을 모아왔다.

심지어 1년 넘게 공을 들인 브라운호프 MP3 특허를 도둑맞았다.

다만 그걸 이 자리에서 겉으로 내색할 정도는 멍청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 시선이 묘하게 적대적이고, 모욕적이었다.

가벼운 자극에 적의를 느낀 최민혁은 쓰게 웃었다. 상대의 반응을 충분히 고려했지만 그것과는 달랐다. 아마 자신이 힘이 없다면 더 냉랭하게 나올 것이 뻔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차별.

아시아 기술은 유럽에 비할 바가 아니라는 우월적인 표시다.

그나마 일본이 그 편견을 없앴지만, 아직 한국은 갈 길이 멀었다.

하물며 10대 대기업도 아닌 KM 전자 기획실장인 최민혁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아마 톰슨이나 브라운호프 연구소 쪽과 협상이 끝나기 전이거나 비디오 특허가 아니었다면 이번 협상은 어려웠을 거야.’

협상이 끝난 이 시점에서는 이야기가 많이 다르다.

굳이 상대에게 허리를 숙여가면서 협상에 임할 이유는 없는 최민혁은 넌지시 MP3와 관련된 자사 특허와 시즈벨의 특허를 같이 비교한 자료를 내놓았다.

바로 안현수 팀장이 각 특허의 가치와 위치에 대해서 정교하게 정리한 문서다. 그는 굳이 말보다는 숫자를 내놓은 것이었다.

달러로 표기된 특허 가치를 본 가브리엘 아담스는 표정을 바꾸었다.

“…이게 뭡니까?”

그는 상대가 적의를 보인 만큼 그 자신도 똑같이 상대에 대응했다.

일단 가벼운 위협으로.

“서로 협상하는 겁니다. 우리 쪽 특허만 가지고는 한계가 있어요. 하지만 지금 시즈벨 특허만으로는 재미를 보지 못할 겁니다. 저희가 깽판을 치면 그쪽은 끝장이니까요.”

그런데 최민혁이 굳이 비디오 특허를 꺼내서 확전하고 싶지 않아서 내색하지 않았을 뿐이다. 암묵적으로 그 의미까지 내포했다.

시즈벨 이사진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살짝 바뀌었다.

“하하하.”

마치 내심을 숨기려는 듯이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는 한참 웃었다. 그는 자료를 아예 보지 않은 채 냉정하게 소리쳤다.

“협상하기 싫으면 이 정도로 합시다. 저도 화내기 싫으니까.”

돌아서려는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를 향해서 최민혁은 그가 쥐고 있는 서류를 잡아서 일부를 직접 지적해 주었다.

“그 서류 하단을 보세요!”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하기 바랍니다. 비록 콜린스가 대단하기는 하지만 그것과 MP3 특허는 전혀 다른 겁니다. 당신을 무시하…….”

아예 외면하려던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도 반사적으로 그 부분을 봤다가 눈을 떼지 못했다. 특히 KM 전자의 MP3 특허는 교묘한 구석이 많았다.

마치 시즈벨 특허를 사방에서 에워싸서 공격하는 방식이다.

웃긴 사실은 그럼에도 KM 전자 특허는 자기 살길을 만들어놓았다.

시즈벨이 분석한 결과보다 더 구체적이었다. 앞으로 특허 소송을 진행한다면 어떤 형식으로 이루어질지에 대해 기술되었다.

대부분은 특허료 분쟁에 따른 결과였다.

화들짝 놀란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는 바로 마이클 리트에게 자료를 주었다. 그 역시 서류를 확인하면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최민혁이 내놓은 서류는 그들도 내부적으로 걱정한 부분이었다. 상대는 그 아픈 부분을 칼로 푹푹 찔러 놓아 버렸다.

그것도 더 상세하고 구체적이었다.

안현수 팀장이 작업한 이 결과는 시즈벨도 그냥 말로 어떻게 덮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더욱이 이 자료는 시즈벨이 내부적으로 검토한 것보다 더 상세했다.

“…젠장.”

당황한 시즈벨 담당자들.

최민혁을 대신해서 나선 것은 안현수 팀장이었다.

그는 말보다는 자신이 만든 첨부 자료를 추가로 내밀었다.

수치화하기 위해서 근거 자료로 만든 다른 특허의 비교 결과다. 심지어 소송이 진행된 몇몇 예를 바로 보여주었다.

적게는 수천만 달러, 많게는 수억 달러가 걸린 특허 소송이었다.

그 근거를 토대로 KM 전자가 가지는 특허 가치와 시즈벨의 특허 가치를 구체적으로 비교했다.

각각의 특허 가치는 임기석 부장이 보낸 자료를 토대로 다시 계산했다.

KM 전자 특허만으로 시스템을 꾸릴 수 있지만 시즈벨 특허만으로는 갈라파고스 군도처럼 고립되어 있었다.

과연 시즈벨이 자사 특허로 다른 업체에 어떤 제안을 할 수 있을지가 의문이다.

더욱이 최민혁이 교묘하게 박아놓은 특허는 이런 시즈벨 특허의 빈틈을 끼어들었다.

시즈벨 특허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였다.

공황에 빠진 시즈벨 이사진 모습을 본 최민혁은 일축했다.

“우리는 MP3 관련 특허를 패키지로 모아서 특허료를 한 번에 받을 겁니다. 아무래도 특허료 규모가 커질 거고, 시즈벨도 큰 이익을 볼 겁니다.”

“대신에 우리 특허를 다 넘기란 말입니까?”

“눈치 빠르니 좋네요. 시즈벨이 가진 특허료의 5%입니다. 아, 물론 95%는 우리가 먹습니다. 이 정도면 사장되어 가는 당신 특허 가치를 많이 감안해 준 겁니다. 협상은 없습니다. 싫다면 이 자리에서 말하세요!”

사실 특허를 매각하라고 말을 하고 싶지만, 그 말을 들을 것 같지 않아서 나온 제안이었다.

“…….”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도 내부적으로 검토한 것보다 더 잔혹한 진실을 깨닫고는 당황했다.

자고 일어나니, 갑자기 동양에서 웬 듣도 보도 못한 놈이 찾아와서 자신들을 압박했기 때문이다.

최민혁은 분위기가 의도한 것보다 더 좋게 흘러가자 넌지시 다른 제안을 했다.

“정 이 문제가 골치 아프면 100만 달러에 귀사의 특허를 매각하시죠.”

100만 달러는 적은 돈이 아니다. 지금 기준으로 본다면 많이 쳐준 셈이다. 하지만 지적재산권으로 먹고사는 시즈벨이 이런 제안을 받을 수는 없었다.

인상을 와락 구긴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는 차갑게 쳐다보았다.

“그 제안을 받아들일 거라 생각합니까?”

“아뇨. 그러니까. 5%만 받으란 겁니다. 싫으면 우린 이만 한국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지금 우리 회사를 협박하는 겁니까?”

최민혁은 차갑게 소리쳤다.

“천만에요. 이미 특허 가치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을 거고, 후일 생길 상호 간의 법적 문제를 사전에 정리하려는 겁니다.”

“우리가 고작 5% 특허료를 먹으려고 이 특허를 사들인 건지 압니까? 우리 회사가 이 MP3 미래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투자를 했는지 알고서 하는 소리입니까?”

“글쎄요. 제가 지금까지 조사한 바로는 아닌 걸로 압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톰슨이나 브라운 호프 쪽을 소극적으로 내버려두지 않았을 테니까. 그쪽은 애초에 생각이 없었던 겁니다.”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는 자신을 알아주는 듯한 말에 흠칫 놀랐다. 이를 본 아브리엘 아담스 대표이사는 이를 악물었다.

“이봐요, 최 실장. 말 그렇게 함부로 하지 마세요!”

“물론 그쪽은 다 계획이 있겠죠. 지적재산권으로 먹고사니까. 하지만 우리와는 사정이 다릅니다. 이미 조사를 하셔서 알겠지만 우리는 MP3에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 주 종목은 TV이니까요.”

시즈벨 특허를 고사시켜서 죽여 버리겠다는 노골적인 벼랑 끝 전술.

“이런 씨…….”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는 입을 다물고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유럽 전역이 좁다가 움직이는 회사가 바로 시즈벨이다.

자본과 전문 인력이 탄탄해서 지금까지는 무서울 것이 없었다.

그런 자신을 앞에 두고 협박이라니.

문제는 KM 전자가 정말 TV와 오디오 사업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회사다. 특히 콜린스의 인기는 폭발적이라는 말로도 부족했다.

지금도 400만 원이 넘는 제품이 프랑스에서 가장 먼저 1차 이벤트로 5,000대 출시되기가 무섭게 완판되었다.

워낙에 철저한 검증을 거쳐 나온 물량이라서 사들인 프랑스인의 평가는 최고였다.

실제로 콜린스는 없어서 못 팔고 있으니까.

거기에 비하면 MP3 특허는 정말 새 발의 피였다.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는 인상을 험악하게 구기고 말았다.

“…이건 여기서 당장 결정할 일이 아닙니다.”

“압니다. 하지만 전 곧 한국으로 가야 하기 때문에 시간을 많이 줄 수는 없습니다. 잘 생각을 해보세요. 시즈벨이 가지고 있는 특허만으로는 권리를 행사하기 쉽지 않을 겁니다. 5%라도 그나마 받는 게 그 특허를 보존할 수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좀 과장에 가까운 평가다.

불행히도 시즈벨은 아직 MP3 산업에 대해서 전혀 몰랐기 때문에 최민혁 말이 엄포인지, 아니면 진실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이 가진 특허가 당장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 계산이 되지 않았다.

실제로 최민혁이 다시 출원한 특허 중에는 시즈벨 특허를 회피할 수 있는 것도 있었다.

‘다만 시스템이 약간 꼬이지. 결국, 펌웨어 구조 덩치가 커지고, 지금 낸드 메모리 용량 기준으로 문제가 되겠지. 그런데 시즈벨은 아직 그 취약점은 모르겠지.’

최민혁은 크게 당황한 시즈벨 이사진의 모습을 보면서 음흉하게 웃었다.

‘지금 이 시기라면 특허 매입이 가장 좋은데, 지금 당장은 어려운 것 같기도 해. 하지만 잘만 머리를 굴리면…….’

가능할 것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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