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
“그 양반은 이미 지분을 민혁에게 다 매각했잖아?”
“그 이후로 다시 사들였습니다. 특히 콜린스 발표 직전에 조흥은행 지분 일부를 블록딜 형식으로 매입했고, 이유는 물론 최민혁 실장을 압박할 목적인 것으로 압니다.”
“물량이 얼마나 되는데?”
“은행이나 기관투자자 쪽에서 물량을 긁어모았는데, 150만 주가 넘는 걸로 압니다. 아마 차명 물량 3%를 포함해서 모두 5%나 됩니다.”
“하, 그 양반, 진짜 기가 막히네. 설마 5% 지분을 꿍쳐 놓았던 거야? 아, 좋아, 일단 약속을 잡아 봐. 그 양반도 최민혁에게 된통 당해서 이를 갈고 있을 거야.”
“알겠습니다.”
최문경 부회장은 잘만 하면 이번 기회를 이용해서 최두진 사장과 공동 노선을 택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차라리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KM 산업의 지분을 인수하는 것도 가능할지 몰라.’
* * *
최두진 사장이 최민혁에게 지분을 사기당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바보는 아니었다. 그는 만약을 대비해서 차명 지분 3%는 여전히 가지고 있었는데, 이 지분을 자신 명의로 돌리면서 조흥은행이 가진 지분과 시장 지분을 다 합쳐서 2% 지분을 더 매입했다.
KM 전자 주식이 이상할 정도로 거래량이 줄어든 이유였다.
애초에 최민혁을 압박해서 이익을 취할 목적이었는데, 정작 콜린스 발표가 그 이후에 일어났다.
최민혁이 한국에 돌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던 최용욱 회장조차 혀를 내둘렀다.
“도대체 뭘 하려는 건가?”
“내가 KM 전자 지분을 사들이는 것도 불만이야?”
“아니, 그거야 자네 마음이겠지. 하지만 이미 다 끝난 일이잖아.”
“민혁 그놈이 괘씸해서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가 없어.”
“허.”
최용욱 회장도 딱히 최두진 사장의 행동에 제동을 걸지 않았다.
당시만 해도 KM 전자는 망해간다는 소리를 들을 수준이었다. 그 시기에 KM 전자 지분을 매입한 것은 다른 엉뚱한 의도가 있다고 하기는 힘들었다.
어려서부터 신동이라는 소리를 듣던 그는 한때 무소속으로 국회의원을 해본 적도 있지만, 다시 본업으로 돌아왔다.
오성 전자의 반도체 사업 조언자로 나름 큰 역할을 했다.
KM 산업이 한국 최초의 반도체 기업으로 설립할 당시만 해도 이 개념에 대해서 아는 이가 거의 없을 정도였다.
가족이나 지인이 모두 KM 산업의 반도체 사업을 막았을 정도였다.
실제로 사업을 시작한 이후에 수주되지 않아서 힘든 시기를 보냈다.
최두진 사장은 그 힘든 시기에 그를 도와줬던 사람이었다.
“달랑 7명의 직원으로 반도체 제품 생산에 성공해서 미국에 수출했으니, 정말 대단했지.”
지난 일을 떠올린 그는 새삼 추억에 잠겼다.
고비를 넘기자 KM 산업은 무섭게 성장했고, 불과 2년 만에 천 명이 넘는 기업이 되었다.
“사업은 그렇게 해야 했어.”
최용욱 회장 역시 KM 산업을 성공으로 해서 많은 회사를 인수합병 하고, 심지어 앰코사와 합작한 과정을 떠올렸다.
“…생각해 보면 민혁이가 하는 방식이 나랑 똑같이 닮았어.”
전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 최두진 사장조차 일부 인정했다.
“확실히 민혁이 그놈이 하는 행동만 보면 너랑 비슷하기는 하다. 하지만 아직 새롭게 맨땅에 뭔가 시작한 것은 아니잖아. 콜린스만 해도 최병연 팀장이 하다가 만 것을 진행한 것뿐이잖아.”
“그럴지도.”
그 역시 둘째 최훈열 전무의 일을 떠올리면서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일이 그렇게 흘러갈지는 몰랐다.
최용욱 회장도 이미 오영근 사장을 통해서 들은 바가 있었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야.”
한창 지난 일에 빠져서 막걸리를 마시면서 흥얼거리던 최두진 사장은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가?”
“지금 KM 전자의 주가가 폭등한 것을 보면 그냥 이루어진 것 같지 않아서 그래.”
“아니, 뭔가 또 있다는 소리야?”
“그렇지 않고서야 말이 안 되잖아.”
단숨에 잔을 비운 최용욱 회장도 평소와는 달리 많이 풀어졌다. 그 역시 암묵적으로 그룹을 최문경 부회장에게 넘겨두고 물러난 이후에 이런 일이 일어날지 상상조차 못했다.
그나마 막내 최병문이 최문경 부회장이나 최동영 상무를 견제하기를 바랐다. 그런데 갑작스러운 사고로 막내가 사망해 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손자 최민혁의 미래에 대해서 정말 많이 걱정했다.
손자 녀석의 장래가 너무 암담했다. 살쾡이 같은 자식 놈들이 그나마 있는 손자의 재산을 갈기갈기 찢어버릴 것만 같았다.
그런데 정작 결과는 반대였다. 몰락해 가는 KM 전자를 다시 우뚝 세웠다. 심지어 뭔가 새로운 시도를 계속하면서 시장의 주목을 받았다.
‘한편으론 아쉽지. 이제는 딱한 민수 녀석을 도와주면 좋을 텐데, 민혁이 그놈도 당한 것이 있어서 쉽지는 않을 거야.’
스스로 생각하고도 상황이 우습기만 했다.
그런데 정작 하이에나 같은 외국 자본이 그냥 KM 전자의 지분을 욕심낼 이유는 없었다. 차라리 최두진이 지분을 확보하는 게 훨씬 낫다.
“두진아, 그냥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다만 너무 민혁이 그 녀석을 미워 마. 현우 그놈 때문에 KM 전자가 몰락하는 건 기정사실이었으니까. 그 어려운 시기를 다시 극복한 것은 민혁이잖아.”
“누가 뭐라냐!”
버럭 화를 낸 최두진 사장은 굳이 최민혁과 관련된 이야기를 더 하지 않았다. 그 역시 지금 돌아가는 상황 때문에 머리가 아팠던 것이다.
* * *
최두진 사장도 최용욱 회장을 자주 만나서 최민혁에 대한 생각을 들었다. 그는 그럴수록 최민혁에 대한 분노를 떨쳐 버렸다.
‘하긴 용욱이 말이 일리가 있어. 도대체 민혁이 이놈이 무슨 일을 벌이는 것일까?’
이제는 최민혁에 대한 감정 따위는 기억도 나지 않았다.
보복으로 매입한 150만 주 주식으로 말미암은 이익이 생각보다는 엄청났다.
다른 기관투자자나 은행이 외국계 은행에 지분을 넘길 때도 여전히 들고 있었다.
KM 전자의 주가는 결국 12,000원을 돌파해서 16,000원에 안착했다.
‘20,000원을 곧 돌파할 거야. 300억인가. 좀 아쉽네. 더 물량을 확보할 수 있다면 좋았을 텐데, 웃돈을 더 주고라도 홍수 그놈 물량을 노렸어야 했어.’
감정이 너무 앞선 나머지 김홍수가 가진 지분을 간과한 것이 아쉽기만 했다. 설마 SB가 직접 나서서 지분을 가로챌지는 상상도 못했다.
황당한 주가 변동에 최두진 사장은 이제 최민혁이 KM 전자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그게 더 알고 싶었다.
‘신기하네.’
최문경 부회장이 그를 찾아온 것은 바로 이 시기였다.
최용욱 회장과 요즘 지난 일을 이야기하다 보니, 최문경 부회장이 그다지 반갑지도 않았다. 욕망으로 번들거리는 눈빛을 보면서 이곳에 왜 왔는지 금방 눈치챘다.
“오랜만이구나.”
목소리가 그다지 좋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최문경 부회장은 바로 허리를 굽혔다.
“자주 인사를 드려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혹시라도 최용욱 회장을 신경 쓰고 있는지 넌지시 찔러봤다.
“실없는 소리 마. 네 아비 건강은 요즘 어때?”
“주치의 이야기로는 이제 무리만 안 하면 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합니다.”
“그래? 하긴 손자 놈이 세계적으로 노는데, 신바람이 나서 병이 생길 리가 있겠냐.”
“흠.”
‘최민혁’의 이름을 듣자 최문경 부회장도 안색이 좋지 않았다.
“어르신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민혁이에게 당한 일은 제가 뒤늦게 사과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최두진 사장은 이상할 정도로 감정이 격해 있지 않았다.
“네놈이 왜 사과를 해? 쓸데없는 소리는 입도 뻥끗하지 마. 민혁이 입장도 있는 거잖아. 현우 일도 있는데, 나도 어느 정도 협상을 해야지. 그 일은 그렇게 끝내는 것이 좋겠다.”
“네?”
최두진 사장은 최문경 부회장이 다른 엉뚱한 제안을 하기도 전에 최민혁 문제에 대해서는 선을 분명히 그었다.
“현우가 KM 전자에 상무로 있을 때 한 일이 많잖아. 그것 때문에 KM 전자 손실이 엄청났지. 심지어 조직 문제도 터트렸으니까. 오죽하면 지금은 오성 전자 가서 깽판을 치겠나? 그러니 그 일에 대한 액땜이라고 생각하면 괜찮아.”
“저기 어, 어르신…….”
최문경 부회장은 예상을 벗어난 최두진 사장의 반응에 당황했다.
하지만 최두진 사장은 이미 최민혁의 유럽 행보를 보면서 큰 충격을 받았다. 최용욱 회장 파트너로 KM 그룹의 태동과 성장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그이기에 KM 전자 변화에 깊이 감명 받았다.
오히려 최문경 부회장을 딱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문경아, 너도 술수 그만 부리고 정신 좀 차려. 조카가 저렇게 멋지게 성장하는데, 격려를 못 해줄망정 재를 뿌려서 되겠냐?”
“하, 하지만 어르신은 분하지도 않습니까. 그놈이 어르신 지분을 얼마나 사기 쳤는지 잘 알지 않습니까.”
“다시 말하지만 사기는 아냐. 분명한 거래였으니까. 나도 처음에는 정말 화가 많이 났다. 내가 오죽하면 추가로 주식을 더 매입해서 5%까지 만들었겠느냐. 민혁이 그놈을 엿 먹이려고 아주 작정을 했다. 그런데 유럽에서 민혁이 그놈이 한 일을 보고서야 알았다, 내 속이 좁았다는 것을.”
“…….”
“솔직히 너라면 어떻겠냐? 이제 망해간다는 소리를 듣는 KM 전자를 다시 기사회생시켜서 무섭게 성장시키는 시점에서 벌레가 꼬이면, 그걸 용납하겠어? 너라면 더 잔혹하게 처리했겠지.”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최문경 부회장은 도저히 설득이 안 된다는 것을 깨닫자 입을 다물었다.
최두진 사장은 이 부분에 대해서 자기 태도를 분명히 밝혔다.
“혹시라도 내 지분 이용해서 엉뚱한 짓을 하려나 본데, 포기해라. 난 이 주식 절대로 안 판다. 설사 네 할아버지가 와서 부탁해도 마찬가지야. SB에서 주당 30,000원 제안을 해도 안 넘겼다. 한번 끝까지 들고 있어볼 생각이다. 이제는 민혁이 그놈 미래가 너무 궁금해.”
“…진심입니까?”
“그래.”
최두진 사장은 문득 최용욱 회장과 같이 고생했던 추억을 떠올렸다. 그때는 정말 미친 듯이 일했다. 미래를 위해서 죽어라고 노력했다.
희망이 있었으니까.
그 결과로 KM 그룹이라는 기업을 이만큼 키웠다.
이제는 사채업자 소리를 안 들을 정도였다는 것에 만족했다.
“용욱이가 이 정도로 만족하지 말자고, 나를 설득해서 차입금을 끌어들이기로 했지. 당시는 그게 최선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보다 더 이상적인 방법이 있더라. 민혁이가 그걸 보여준 거야. 정말 대단한 놈이더라. 내가 살아오면서 그런 놈은 처음 봤어. 네 욕심은 나도 잘 안다. 그래도 한번 잘 생각해 봐.”
“…알겠습니다.”
겉으로는 순순히 대답한 최문경 부회장은 속으로 이를 으드득 갈았다. 최민혁에게 아주 푹 빠져 있는 최두진 사장을 보자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빌어먹을 영감이 누구에게 충고해?’
새삼 아버지가 야속하기만 했다. 최민혁에게 증여한 지분 실소유자는 원래 자신이었으니까. 무려 30%가 넘는 지분이다.
* * *
최민혁은 최문경 부회장과 최두진 사장의 만남 이후에도 특이한 두 사람의 동선에 대해서는 별다른 보고를 받지 않았다.
그도 이 일이 꽤 이상했다.
‘최두진 사장하고는 단단히 한바탕 할 생각을 했는데, 일이 이상하게 꼬이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우영민을 통해서 보고를 받은 조성돈 팀장도 그 내막을 알지는 못했다.
“다만 최문경 부회장이 단단히 열받아서 떠난 것만 확인했습니다. 최두진 사장은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까?”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자 최민혁도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손 놓고 기다리기보다는 먼저 나서기로 마음먹었다.
‘MP3 특허를 가진 곳은 브라운호퍼만이 아니다. 정작 후일에 문제가 되는 또 다른 MP3 특허는 시즈벨이 소유했으니까.’
시즈벨이 소유하고 있는 특허는 오디오 레이어3과 관련된 특허였다.
특히 시즈벨은 후일 이 특허를 이용해서 MP3 업체를 상대로 온갖 갑질을 일삼았다.
이들은 특히 일괄 로열티로 대당 10달러까지 요구했는데, 당한 MP3 기업은 기겁할 정도였다.
MP3 관련된 미래를 잠시 돌이켜보던 최민혁은 일단 임기석 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MP3 관련 특허 출원은 어때요?]
[다행히 잘 처리했습니다. 최병연 팀장님이 생각보다는 잘 풀었습니다. 거기에 같이 합류한 분들도 도움이 크게 되었습니다.]
[다른 문제는 없고요?]
[안 그래도 대안을 찾은 후에 보고하려고 했습니다. 시즈벨이 이미 스케일팩터, 비트율 감소와 관련된 마스킹 방법, 서브밴드 코딩과 같은 특허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특허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무시할 정도는 아닙니다.]
[그건 매입할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