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
“설마 저희가 고작 오성 전자 기술 따위에 욕심낼 거라고 생각합니까? 콜린스도 당신네 회사 제품을 베꼈다고 생각합니까? 가서 콜린스 관련 특허나 확인하고 그런 소리를 하세요. 혹시라도 우리 콜린스 특허를 베끼면 당장 고소부터 할 테니까.”
“…그런 의미로 한 말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무슨 의미로 한 말입니까? 당신네가 다른 회사 핵심 직원이나 기술을 빼돌리면 괜찮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은 겁니까?”
“실장님, 지금 싸우러 이 자리에 온 것이 아닙니다. 또다시 그런 일을 벌이면 곤란하다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최민혁은 피식 웃었다.
“조용히 있는 우리를 먼저 건드린 것이 오성 전자였습니다. 벌써 잊었습니까? 그걸 알면서도 지금 그런 소리를 하는 겁니까? 정말 우리 KM 전자랑 싸워도 오성 전자가 손실을 보지 않을 거라 생각합니까? 그러면 한번 해보죠.”
격앙된 최민혁의 목소리에 1층 전시회에 온 이들은 물끄러미 그들을 쳐다보았다. 그만큼 최민혁의 태도가 공격적이었다.
“…….”
권태성 실장도 여전히 공격적인 최민혁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무슨 배짱으로 이러는지 알 수가 없네.’
최민혁도 굳이 극단적으로 나갈 생각은 없었다.
“아, 좋습니다. 지금은 서로 바쁜 일이 있으니, 이 정도만 하죠.”
“그쪽에서도 그 정도 하겠다면 저도 더 확전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앞으로 잘 지내고 싶습니다.”
“그렇습니까.”
권태성 실장도 지난 일은 이 정도에서 끝냈다. 그가 이 자리에 온 것은 톰슨 멀티미디어와 KM 전자의 협상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대운 전자처럼 그 역시 톰슨 멀티미디어와 계속 연락을 취했기에 내부 정부를 얻고 나타난 것이었다.
“톰슨 멀티미디어 쪽 관련자 통해서 이 회사와 협상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혹시 그 내막을 알 수 없을까요?”
“아니, 그걸 왜 알고 싶어 하는 겁니까?”
그는 마침 민경기 부장 일행이 모른 척 1층 전시회를 살피는 것을 발견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프랑스가 유럽 시장의 전지기지로 안성맞춤입니다. 우리 오성 전자 역시 톰슨과 꾸준하게 협상을 이어왔는데, 갑자기 KM 전자가 끼어들었기 때문입니다. 저기 모른 척하는 민경기 부장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권태성 실장은 실상 대운 전자와 톰슨 멀티미디어의 협상을 우려했다. 꼭 톰슨 멀티미디어를 원한 것이 아니라 둘이 협상할 때 오성 전자의 유럽 공략이 위축될 것을 염려한 것이다.
게다가 KM 전자가 대운 전자처럼 행동할 것도 염려되었다.
최민혁은 악동같이 씩 웃었다. 그가 원한 그림대로 상황이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설마 그들이 이곳 프랑스까지 직접 올지는 예상을 못했다.
“알다시피 우리 KM 전자는 프랑스나 독일이 처음입니다. 그러니 현지 업체와 손을 잡을 수밖에 없죠. 톰슨 멀티미디어는 그 후보자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그쪽의 경영 전략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그렇습니까.”
“아니, 생각을 해보세요. KM 전자가 오성 전자의 유럽 경영 전략까지 방해하면서 일을 벌이겠습니까? 그건 진짜 너무 나간 겁니다.”
‘지금 그러고 있잖아!’
권태성 실장도 묵묵히 최민혁의 이야기를 듣다가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KM 전자가 굳이 IFA 기조연설처럼 여기 와서 남의 영업을 해방 놓을 리는 없다고 봤다.
‘오버한 건가?’
몇 마디 말을 끝으로 권태성 실장도 조용히 떠났지만, 최민혁의 행보에 대해서 가볍게 생각하지 않았다.
민경기 부장은 두 사람의 분위기를 보자 겨우 안도했다.
그는 잠깐 최민혁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야 자신도 기우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콜린스 독점 판매권을 톰슨 멀티미디어가 가져가는 것이 살짝 부담스럽기는 했지만, 그것까지 참견할 수는 없었다.
최민혁은 여전히 굳은 얼굴을 한 채 떠나는 민경기 부장을 보자 마냥 웃을 수가 없었다.
‘하긴 톰슨 멀티미디어와 대운 전자가 많은 관련이 있었지. 아마 인수 합병에 대한 계획도 이때부터 검토를 시작한 것 같아. 가만 생각해 보니, 여기 갑자기 찾아온 것은 아무래도 톰슨이 정보를 흘렸나 보네.’
하지만 그는 곧 피식 웃고 말았다.
‘지금은 과거와는 달리 굳이 첫째 큰아버지랑 당당하게 붙어 싸울 수도 있어. 페이즈 2인데, 굳이 페이즈 1때처럼 소심하게 나갈 필요는 없어. 톰슨 역시 마찬가지야. 그들은 결코 콜린스 독점 판매권을 포기할 수 없을 테니까.’
* * *
KM 전자 프랑스 법인 1층 전시회를 보러온 이들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앞서 IFA 전시회를 통해 정보를 얻지 못한 이들은 실제 콜린스를 보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와아, 진짜 끝내준다.]
[도대체 이 모델 정체가 뭐야?]
[이게 정말 대형 TV 맞아?]
1층 전시장에 들어온 프랑스인이나 관광객은 콜린스를 직접 보게 되자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입소문이 돌면서 벌써 400m 가까이 길게 늘어서 있는 줄.
그 모습이 바로 콜린스에 대한 프랑스인의 관심이었다.
티에리 이사 역시 KM 전자 프랑스 지사 빌딩 앞에서 늘어서 있는 줄을 보면서 도대체 왜 저럴까 싶었다. 그러나 그 역시 콜린스 실물을 보고서는 쉽게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신문과 같은 언론 매체로 접한 것과 실물을 본 것은 너무도 달랐다.
톰슨 멀티미디어 부사장인 드리 역시 콜린스를 직접 만지고, 확인하면서 놀람을 쉽게 감추지 못했다.
밑에 실무진이 이미 보고서를 올렸지만 직접 콜린스를 보고 난 느낌은 그것과는 또 달랐다.
실무진이 옆에서 설명해 주는 대로 하나씩 확인을 했는데, 화질에 더 깊은 감명을 받았다.
단순히 디자인만 혁신적인 것이 아니었다.
소비자가 원하는 그 품질이 제대로 반영되어 있었다.
‘오성 전자나 LC 전자 모델보다도 월등히 나아. 도저히 비교조차 할 수가 없어.’
디스플레이 품질은 그 대단하다는 소니의 놀라운 화질과 비교해도 거의 떨어지지 않았다.
“…….”
뒤따른 톰슨 이사진 역시 입을 딱 벌린 채 콜린스 외형을 살폈다.
현존하는 그 어떤 TV 모델도 콜린스에 비할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전시회를 보러 온 이들 중에는 일본 사람도 꽤 있었는데, 믿기지 않은 눈으로 콜린스를 살폈다.
심지어 사진까지 계속 찍으면서 분석에 분석을 거듭했다.
그럴수록 그들의 안색은 오히려 더 썩어 들어갔다.
따지고 본다면 대형 TV 시장을 쥐고 있는 소니가 오성 전자와 비교하면 더 큰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콜린스의 자태에 깊은 충격을 받은 나머지 한동안 최민혁을 찾지 않았다.
드리 부사장 역시 자칫하면 협상이 쉽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후유, 이거 진짜 물건입니다.”
티에리 브로통 이사 역시 다르지 않았다.
“오성 전자나 대운 전자 쪽에서 사람이 왔다고 하니, 아마 KM 전자도 상당한 부담을 느끼고 있을 겁니다. 그런 점을 잘 활용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자네 의견처럼 그래도 쉽지 않을 것 같아.”
드리 부사장을 비롯한 톰슨 이사진은 다들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콜린스 모델을 세세하게 살피면 살필수록 가슴이 답답했다.
이 물건이 풀리면 톰슨 역시 타격이 불가피하다. 차라리 콜린스 판매 독점권을 얻는 것이 오히려 손실을 줄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갑자기 나타난 권태성 실장이나 민경기 부장에 대해서 생각하던 최민혁은 경비의 연락을 받고 내려와서 프랑스 담당자, 특히 티에리 브로통 이사 앞으로 나섰다.
정성근 대리가 통역으로 나섰다.
“티에리 이사님, 안녕하세요. 앙트 브라소 부장님 통해서 이미 몇 번 협상을 진행했습니다.”
“아, 그래요. 앙트 부장 통해서 잘 들었어요.”
하지만 그는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앙트 브라소 부장이 보고한 것과 실제 콜린스 실물은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눈빛이 달라진 태도에 정성근 대리는 쾌재를 부른 그제야 통역을 시작했다.
특히 앙트 브라소 부장 이야기가 계속 언급되었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티에리 브로통 이사 안색은 더 안 좋아졌다.
‘앙트 부장 이 친구가 도대체 무슨 짓을 했기에 저런 반응이야?’
자칫 몰랐다면 KM 전자와의 협상은 아예 진행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최민혁은 의아한 얼굴로 정성근 대리를 쳐다보았다.
“앙트 브라소 부장이 이번 일을 진행하는 데 도움을 많이 줬어?”
“진짜 그분이 최선을 다했습니다. 콜린스는 톰슨 멀티미디어에도 큰 도움이 될 거라고 누누이 말했으니까요.”
보고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에 티에리 브로통 이사는 한숨을 내쉬었다.
드리 부사장을 비롯한 나머지 임원들도 안색을 딱딱하게 굳힌 채 멍하니 콜린스 모델을 살피기만 했다.
그들 역시 티에리 이사를 통해서 사전에 정보를 얻었지만, 이 정도인지는 상상도 못했다.
꼬질꼬질한 톰슨 멀티미디어의 TV와는 아예 비교되지 않았다.
물론 그 대단하다는 소니 대형 TV의 디자인과 품질에서는 한 수 아래였다.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TV 화면 속에 녹아 있는 자잘한 노하우다.
안정되고 자연스러운 아날로그 화면은 디지털 화면 못지않을 정도로 발전된 모형이었다.
“이럴 수가.”
톰슨 멀티미디어 연구소장은 창백한 얼굴을 한 채 더 별다른 의견을 내놓지 않았다.
안 그래도 디지털 HDTV 때문에 난리가 났다.
그런데 아날로그 TV로 그 디지털 HDTV 수준을 뛰어넘은 명작을 봤기 때문이다.
기술적으로 저게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아는 이들은 충격에서 쉽게 헤어 나오지 못했다.
즉 기술 패러다임이 변화하는 이 시점에서 만약 톰슨 멀티미디어가 콜린스 판매 독점권을 얻는다면 최상의 선택이기 때문이다.
최민혁은 굳이 자주 바뀌는 톰슨 이사진에게 더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러면 회의실에 가서 계약서를 한번 검토해 보도록 하죠.”
“…알겠습니다.”
* * *
콜린스 모델을 실제로 확인해서인지 KM 전자 프랑스 지사의 회의실 분위기는 그렇게 나쁜 편이 아니었다.
톰슨 멀티미디어 이사진은 계속 모여서 자기들끼리 머리를 굴리기는 했지만, 콜린스의 유혹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했다.
최민혁은 그런 톰슨 멀티미디어 임원들의 분위기를 살피면서 혀를 내둘렀다.
‘진짜 잔머리 굴리는 표가 확 나네. 아마 톰슨이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이 협상도 이루어지기는 힘들었을 거야.’
사실 MP3 특허 문제가 아니었다면 상종조차 하기 싫은 인간이었지만 내색하지 않은 채 티에리 이사에게 넌지시 입을 열었다.
“어떻습니까?”
“정말 최고입니다!”
“사실 우리 회사에서 유럽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고 싶어도 여건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 모델을 이용해서 본격적으로 프랑스 시장에도 진출하고 싶어서 제안을 드린 겁니다.”
아직도 상기된 얼굴로 충격에 빠져 있던 티에리는 최민혁의 눈치를 봤다.
“…네.”
“프랑스 판매 독점권만 해도 톰슨 멀티미디어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설마 우리 회사의 제안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까?”
아니, 좋아도 매우 좋았다.
내심 환호하던 티에리 브로통 이사도 오히려 의심했다.
“아, 아닙니다. 하, 하지만 이 정도 모델인지는 저희도 몰랐습니다. 굳이 다른 회사도 많은데, 딱 우리 톰슨을 선택한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솔직한 이야기에 최민혁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저도 편하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관심을 보인 업체가 많습니다.”
“조건이 있다는 말입니까?”
“톰슨이 가지고 있는 멀티미디어 특허 몇 가지를 원합니다.”
최민혁이 내민 문서에는 여러 가지 특허가 있었는데, 대다수는 가치가 없는 것들이었다.
티에리 이사는 다른 이들에게 문서를 돌리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발견했다.
그중에는 MP3 특허권 권리도 있었다. 적당한 대가를 치르고 그 권리를 얻는 것이었다. 물론 여기에는 브라운호퍼 연구소와 관련된 특허권 인수도 포함했다.
다만 계약서상에는 멀티미디어 관련 특허라고 모호하게 표기해 놓았다.
‘계약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면 그때 가서는 딴소리를 못하겠지.’
그런데 티에리 이사를 비롯한 톰슨 이사진은 아직 MP3 특허권의 의미에 대해서 잘 몰랐다. 아직은 특허권 행사도 하지 않았고, MP3 관련 특허는 사람들의 시선을 받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최민혁은 그 부분에 관해서는 멀티미디어 특허 전체를 합쳐서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뭐, 알아보면 알겠지만, STB 사업부를 비롯한 많은 사업부를 정리했습니다. 수익성이 높은 신사업을 검토 중인데, 멀티미디어 관련 원천기술을 검토 중입니다. 이 리스트는 저희 엔지니어가 원하는 것입니다.”
“이런 말 하기는 그렇지만 이 특허는 별 의미가 없는 것으로 압니다만?”
“저희에게 오디오 사업부가 있습니다. 그쪽에서 멀티미디어 특허에 관심을 두더군요. 사업부를 정리하면서 안 그래도 밑에 실무진의 불만이 많은 상황이라서 이들 요구 조건을 들어줄 생각입니다. 엔지니어가 원래 고집이 세지 않습니까.”
“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