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
하지만 굳이 그런 내색을 할 필요는 없었다.
마치 자신이 힘을 써서 채용 문제가 결정이 난 것처럼 입을 열었다.
“민수야, KM 전자 인사 팀에서 이미 채용 확정이니, 크게 걱정하지 말거라.”
“가, 감사합니다.”
최민수도 선뜻 최민혁 위세가 무서워서 전화도 하지 못했는데, 뜻밖의 결과에 고개를 숙였다. 내막을 알 수는 없지만, 최문경 부회장이 저렇게 나서 준 것이 고맙기만 했다.
의도한 바대로 흘러간 것에 만족한 최문경 부회장은 방긋 미소 지었다.
“그리고 요즘 콜린스 때문에 KM 전자가 정신없잖아. 그러니 넌 형이 된 입장에서 민혁이를 많이 도와줘야 한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아니, 그냥 단순히 돕는 것으로 곤란해.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회사 구석을 돌아봐. 민혁이도 아직 발견 못한 조직의 문제점을 찾을 테니까.”
“명심하겠습니다.”
그는 슬며시 목소리를 낮추었다.
“혹시라도 민혁이 감당 못한 일이 있을 수가 있어. 그 녀석 성격에 혼자 해결한다고 허둥지둥할 수도 있어. 그때는 나에게만 따로 연락하거라. 내가 다른 것은 몰라도 아는 사람이 많잖아. 국세청 같은 곳 말이다. 무슨 말인지 잘 알지?”
“물론입니다. 첫째 큰아버지 정말 고맙습니다.”
“이번 일만 잘되면 내가 알아서 민수 네 녀석은 계속 도와주마. 너희 아버지 재판에도 신경을 써서 형량을 줄일 수 있도록 할 거고.”
“큰아버지 정말 감사합니다.”
“그래. 내가 오영근 사장에게도 연락해 두마. 아마 큰 도움이 될 거야. 가족끼리는 돕고 지내야지.”
겉으로는 웃고 있었지만, 최문경 부회장의 눈빛은 섬뜩하게 번쩍였다. 잘만하면 괜찮은 프락치 하나를 구했다고 확신했다.
‘정말 잘되었어.’
최민수 역시 최문경 부회장이 부담스러웠지만, 차라리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일단 큰아버지 도움을 얻기만 하면 분명히 방법이 생길 거야.’
* * *
톰슨 멀티미디어 측과 만나기 위해 접촉을 시도하고 있던 배종대 과장은 박상기 차장에게 현 진행 상황을 말하다가 최민수를 인턴으로 채용한 것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처음에는 어이가 없었지만 뒤늦게 그 사업부서가 디지털 위성방송 사업부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위성사업부 내에 알고 지내는 허훈 과장에게 연락해 보았다.
허훈 과장은 도대체 최민혁 실장이 왜 이러느냐고 우는소리를 했다.
[실장님은 진짜 너무한 것 아닙니까. 이미 다들 실장님 눈치 본다고 정신이 없어요. 거기에 프로젝트는 제대로 진행도 안 되는데, 초짜 뽑아서 어쩌란 소리인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죽겠습니다.]
위성방송 사업부 자체가 워낙에 연구 기간이 길고, 실적도 잘 나오지 않는다. 하물며 이 연구를 진행하는 곳이 ETRI 연구소가 그 중심이다.
쓸데없는 형식적인 이야기만 한 채 계속 늘어지는 프로젝트.
결과가 나올 리가 없었다.
거기에 이 위성 프로젝트와 같이 엮여 있는 다른 대기업도 문제인데, 서로 밥그릇 싸움한다고 정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 차에 듣보잡 최민수가 들어온다는 이야기에 기겁했다. 안 그래도 최민혁 실장에게 찍힌 터라 혹시라도 심지에 불이 붙어서 위성 사업부 전체가 펑 하고 터질 것을 염려한 것이었다.
하물면 그 대상이 재벌 3세였으니.
배종대 과장조차 더 대꾸할 수가 없었다.
“최 부회장이 인사 팀장님에게 직접 전화해서 압박했다니, 정말 어이가 없네.”
톰슨 멀티미디어 실무진과 만남에 대해서 고민하던 정성근 대리는 쓰게 웃었다.
“아직 KM 전자가 KM 그룹 계열사라고 착각하는 것 같습니다.”
“정 대리도 그렇게 생각해?”
“뻔하죠. 이게 어디 하루 이틀 있는 일입니까. 최문경 부회장이 직접 인사 팀장님에게 압력을 넣은 것만 봐도 알 수가 있죠.”
그래서 더 이상했다.
과거에는 늘 있었던 일이다.
최훈열 전무나 김현우 상무는 자기 측근을 깔기 위해서 친인척 위주로 회사 내에 직원을 투입하며 이 작업을 했었다.
그 탓에 KM 전자는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로열패밀리에 충성하는 이만 생존하는 회사가 되었다.
다양한 부정부패가 끝도 없이 이어졌고, 회사는 서서히 무너졌다.
최민혁 실장이 나서서 이런 문제를 다 척결해 버리면서 회사는 환골탈태했다.
“최민혁 실장님도 과거 일을 모를 리가 없잖아요. 그런데도 굳이 이 일을 놔두는 것은 다른 계획이 있겠죠.”
“하긴.”
조정욱 인사 팀장에게도 몇 가지 확인해 본 배종대 과장조차 굳이 최민수를 탓하거나 아니면 최문경 부회장을 비난하지 않았다.
이미 최민혁의 지시를 따로 받았다는 것을 알았다.
“왜 최 실장님이 최훈열 전무 아들 최민수를 회사에 끌어들였을까?”
프랑스에서 삽질하느라 머리가 아픈 정성근 대리도 푸념을 털어놓았다.
“최훈열 전무와는 다르죠. 최민수가 알아봐야 얼마나 알겠습니까? 설사 날뛴다고 해도 위성 사업부에서 혼자 뭘 할 수 있을까요?”
“하긴 실장님이 보통은 아니니까.”
이번 IFA 기조연설만 해도 오성 전자에게 제대로 한 방 먹여준 쾌거였다는 것을 고려하면 최민혁이 그냥 아무런 의미도 없이 일을 밀어붙일 리가 없었다.
최민혁이 진행한 일에는 어떤 형태로든지 의미가 있었다.
그렇게 보면 두 사람의 톰슨 멀티미디어 협상 역시 마찬가지다.
정성근 대리 안색은 좋지가 않았다. 지금까지 몇 차례 톰슨 멀티미디어 측과 접촉했지만 별다른 결과를 얻지 못했다.
최민혁 지시에 따른 일치고는 결과가 너무 좋지 않았다.
‘협상이 잘되어야 할 텐데…….’
* * *
최민수 일 때문에 머릿속이 복잡한 와중에도 정성근 대리와 배종대 과장은 톰슨 멀티미디어 본사 근처의 한 호텔에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KM 전자요? 어디 회사죠?”
코가 커서 인상적인 앙트 브라소 부장은 노골적인 시선으로 두 사람을 비웃듯이 쳐다보았다. 그나마 자신의 노력 덕분에 나온 실무진이 그였다.
“KM 전자는 자본금 200억에, 자산만 3,000억이 넘는 회사입니다. 오디오와 TV 사업부를 중심으로 멀티미디어 분야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정성근 대리는 열심히 KM 전자에 대해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배종대 과장 역시 정성근 대리와 같이 열심히 그를 설득했다.
하지만 앙트 브라소 부장은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곧 내부적으로 검토만 해보겠다는 이야기를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이 따라붙어도 앙트 브라소 부장은 아예 무시해 버렸다.
정성근 대리는 앙트 브라소 부장이 탄 차를 앞에서 가로막은 채 큰 소리로 설득했다.
“앙트 부장님, 잠시만 이야기를 더 들어주십시오!”
KM 전자가 KM 그룹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이야기했다.
어쩔 수 없이 대운 전자와 오성 전자 예를 들어서 KM 전자가 어느 정도 기업인지 짧고 핵심만 잘라서 말했다.
“KM 그룹의 주축을 이루는 KM 산업은 전 세계 패키징 시장 점유율이 압도적입니다. 이건 잠깐만 조사해도 알 수가 있습니다. 올해 예상 매출액만 40억 달러가 넘습니다. 바로 그 그룹의 계열사입니다.”
불행히도 상대는 KM 산업이 뭔지 전혀 몰랐다.
반도체 패키징.
게다가 전문성이 모자란 앙트 브라소 부장은 정성근 대리의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가 그나마 알고 있는 회사는 오성 전자나 LC 전자였으니까.
배종대 과장은 죽어라고 매달리는 정성근 대리를 막으려다가 포기했다.
그가 보기에 앙트 브라소 부장은 아예 KM 전자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딱 한국 공무원의 모습이다.’
프랑스가 선진국이라는 기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정성근 대리는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콜린스, 아시죠? 이번 IFA 전시회에서 이름을 알린 콜린스를 만든 곳이 바로 KM 전자입니다!”
‘콜린스’라는 말에 앙트 브라소 부장도 흠칫 놀랐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그 역시 콜린스 이야기를 동료에게 듣기는 했지만, 자세한 것까지는 몰랐다.
그는 차량 앞에 아예 누워 버린 정성근 대리의 행동에 질렸다.
“내부적으로 검토한 후에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요식적인 이야기.
앙트 브라소 부장은 차량을 후진시킨 뒤 정성근 대리를 슬그머니 지나쳐서 떠나 버렸다.
“빌어먹을.”
정성근 대리는 굴욕감에 입술을 깨물었다.
KM 전자는 나름 한국에서 방귀깨나 뀌었다.
그런데 먼 프랑스란 곳에서는 전혀 모르는 회사였다.
배종대 과장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정성근 대리의 모습을 보면서 KM 전자의 위상을 알았다.
앙트 브라소 부장은 KM 전자를 저기 외딴 시골구석에 있는 작은 구멍가게로 알고 있었다.
정성근 대리도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서 벤치에 풀썩 앉았다.
“하, 정말 기가 막힙니다.”
“담배 피울래?”
“아뇨.”
배종대 과장은 담배를 베어 문 채 지금까지 했던 일을 떠올렸다. 특허권 협상을 하기 위해서는 톰슨 멀티미디어와 연결 고리를 만들어야 하는데, 그 일 자체가 쉽지 않았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당신 회사의 MP3 징수권을 얻고 싶다는 이야기는 통할 것 같지가 않았다.
‘생각보다 어려워.’
새삼 최민혁이 자신을 바라보던 묘한 시선을 다시 떠올렸다.
그 눈빛은 그다지 기대를 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최민혁이 의도적으로 이 작업을 지시한 것은 현실을 알라는 뜻이었다.
“아, 모르겠다.”
하지만 정성근 대리는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어쩌죠?”
“뭘 어떻게 해. 아예 우리랑 담쌓은 놈들에게 방법이 없잖아.”
“설마 실장님에게 가서 그렇게 말씀하실 겁니까?”
그 말에 IFA 기조연설을 하던 최민혁 실장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떠올렸다.
그 행적과 비교하면 지금 이 일은 정말 가벼운 일이었다.
“다른 대안을 연구해 봐야지. 아, 김부영 영업 팀장님을 만나봐야겠어.”
“제가 연락해 보겠습니다.”
“그래.”
배종대 과장은 물끄러미 앞을 지나가는 프랑스인이나 관광객을 쳐다보았다. 아무런 관련이 없을 때는 그저 좋기만 하던 그들. 하지만 막상 이익 관계에 접하자 높은 벽을 느꼈다.
* * *
두 사람은 결국 김부영 영업 팀장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런데 역시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김부영 영업 팀장 역시 노골적인 대응에 혀를 내둘렀다. 이미 독일과 프랑스에 와서 바이어를 만나면서 느꼈다.
‘그나마 콜린스가 있어서 이야기라도 되어 가지. 안 그랬다면 계속 삽질만 했을 테니까.’
“앙트 부장이 아무래도 동양인에 대해서는 차별이 심한 것 같습니다. 특히 이런 사람은 아예 대응조차 쉽지 않습니다.”
“아니, 해외 바이어를 상대하는 사람이 저래도 되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그것도 상대 나름이니까요. KM 전자가 어떤 회사인지 알 리가 없으니까요. 해외 영업은 저보다 더 심합니다. 당장 자기 나라 기업이나 아니면 유럽 기업과 거래를 해도 되죠. 굳이 먼 동양권 회사, 그것도 알려지지 않아서 자기들 마케팅에 도움이 되지 않을 기업이랑 이야기할 이유는 없죠.”
“하.”
유럽에 올 때만 해도 나름 자신을 가졌던 배종대 과장은 힘이 쫙 빠졌다.
상대가 아예 자기 회사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이야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김부영 영업 팀장 역시 국내 쪽 영업만 주도했기에 현실을 깨닫자 안색이 좋지가 않았다.
정성근 대리도 뒤늦게 문제점을 파악했다.
“톰슨 사정이 좋지 않잖아요. 그러니 더 돈이 안 되는 쪽에 관심이 안 가겠죠. 거기에 프랑스 공기업이라는 인식도 있고요. 설마 프랑스 정부가 자신을 내치겠느냐는 의식도 있을 겁니다.”
“빌어먹을.”
배종대 과장도 막상 현실을 접하자 욕설이 절로 나왔다.
막상 최민혁 실장에게 지시를 받을 때만 해도 자신이 있었는데, 상황이 많이 달랐다.
물론 세 사람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앙트 브라소 부장을 몇 번이나 찾아가서 KM 전자에 대해서 피력했다.
다행이라면 그런 노력이 통한 덕분에 몇 번 더 미팅을 가질 가질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결과는 딱 거기까지였다.
KM 전자를 대하는 톰슨 멀티미디어 직원의 태도는 그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뿐이었다.
‘후유, 도대체 어떻게 보고를 해야 할지 모르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