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129화 (129/1,021)

#129

이미 조성돈 팀장도 최민혁이 디지털 위성방송 사업부나 멀티미디어 사업부에 불만이 많은 것을 잘 알아서 눈치를 봤다.

‘디지털 사업부 이일태 이사가 불안하던데, 어쩔 생각일까?’

“아, 그쪽이라면 자리가 좀 있습니다. 그런데 위성 사업부는 어쩔 생각입니까? 최훈열 전무와 친하게 지낸 이일태 이사는 툭하면 저에게 전화해서 하소연하는데, 저도 꽤 피곤합니다.”

“죄가 있으니, 그렇겠죠.”

“…이일태 이사가 최훈열 전무 라인인 점을 고려하시는 겁니까?”

“없다고는 말 못 하겠습니다. 하지만 실적만 있다면 상관이 없죠. 이일태 이사는 과연 어떨까요? 자신이 없다면 스스로 물러나겠죠.”

“그 말씀은… 혹시 이번에 최민수 씨를 이용해서 디지털 위성방송 사업부도 날려 버릴 생각입니까?”

‘눈치가 제법이야.’

최민혁은 이전보다 월등히 빠른 조성돈 팀장의 반응에 씩 웃었다.

“설마 제가 그런 생각마저 하겠습니까. 다만 민수 형 상황에 대해서는 이일태 이사에게 넌지시 흘리세요. 그리고 반응을 지켜보죠.”

‘사람은 변치 않는답니다.’란 말까지 굳이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무래도 이일태 이사에 대해서 명확히 해두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그리고 멀티미디어 사업부 원종상 전무도 걱정이 많던데, 그건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글쎄요. 당분간은 두고 보죠. 이사진을 다 잘라 버리면 좀 그렇지 않습니까? 새로 뽑는 것도 일입니다. 더욱이 아무나 뽑을 수도 없고요.”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인 MP3 프로젝트 사전 정지 작업이 진행될 동안에는 누구도 그 사실을 알아서는 곤란했다.

차라리 기존 이사진이 겁먹고 있는 상태 그대로 두는 것이 오히려 나았다.

뒤늦게 상황을 어느 정도 파악한 조성돈 팀장은 새삼 최민혁이 무섭기만 했다.

“그거야 그렇습니다. 하지만 정 아니다 싶으면 빨리 결정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요? 내부적으로 이사 자리가 빈 것 때문에 사내에서 말들이 많습니다.”

“조 팀장님도 이사 자리에 욕심이 생깁니까?”

조성돈 팀장이 놀라서 양손을 크게 흔들었다.

“네? 아, 아닙니다.”

최민혁은 피식 웃으며 한 가지를 말해주었다.

“이왕이면 기존 부장급을 승진시킬 생각입니다. 그런데 뚜렷한 결과가 있어야 하는데, 그게 지금 이 시점에서 명확하지는 않아요. 일단 콜린스 매출 결과가 나오면 상황이 달라질 거고, 승진시킬 사람도 나오겠죠. 최병연 팀장이 대표적이죠. 그때 가서 결정하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조성돈 팀장도 뒤늦게야 나머지 사람에 대해서 최민혁이 손을 대지 않는 이유를 깨달았다. 시기적으로 애매했기 때문이다.

“조직 개편안을 검토할 때 승진할 사람에 대해서도 염두에 두세요. 그러면 민수 형을 보내야 할 자리는 쉽게 나올 겁니다.”

“네.”

새삼 최민혁의 냉혹한 음모에 조성돈 팀장도 마른침을 삼키고 말았다. 그가 이전에 그냥 넘어갔던 일도 다 기억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뒤끝이 장난 아니구나.’

* * *

콜린스 여파는 오성 전자나 KM 전자 내부만이 아니라 최용욱 일가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최용욱 일가 중에 가장 큰 충격을 받은 이는 최훈열 전무 아내 김여정이었다. 그녀는 오빠 김용만 전무를 직접 찾아가서 하소연했다.

김용만 전무도 콜린스 사태를 지켜본 터라 DL 그룹 본사에 가서 이 문제에 대해서 따로 지시를 받았다.

DL 그룹이 그리고 있는 밑그림 중에서 KM 전자 인수는 가장 중요한 것이었는데, 그 계획이 근간부터 다 흔들린 것이다.

결국 아들 김기범을 따로 호출해서 이번 사안의 중대성을 말해주었다.

이번 일만 성공하면 집안에서도 인정받을 수 있다는 말에 김기범도 머리를 굴렸다. 최민혁에 대해서 호시탐탐 알아보는 중에 최민수가 마침 집행유예로 석방된 사실을 알자 곧바로 연락했다.

“잠깐 좀 보자.”

“지금은 좀 그래요.”

최민수는 김기범과는 굳이 연락하고 싶지 않아서 계속 연락을 피했다.

구치소에 있으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했고, 결국 김기범을 의심했다. 물론 증거 따위는 없었다. 그래서 조심했다.

자신은 아직 김기범과 싸울 수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집행유예로 풀려난 후에는 더 충격적인 사실을 직면했다.

아버지는 한창 재판 중이고, 실형 확정이나 마찬가지다.

어머니 김여정은 거의 집에 붙어 있는 날이 없었다.

집안은 완전히 콩가루 직전인 상황에서 마침 김여정과 같이 할아버지를 찾아갔다.

그곳에서 최민혁의 IFA 기조연설 장면을 보고 말았다.

세상이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이 늘 우습게 생각한 그 최민혁이 정말 자신이 아는 최민혁인지 충격에 빠져서 며칠 동안 집안에만 처박혀 있었다.

그때 마침 김기범이 직접 집에 찾아왔다.

“가자, 내가 술 한잔 사마.”

최민수는 김기범 제안을 거절하지 못했다. 그는 현실도피에 폭 빠져서 그냥 김기범이 하자는 대로 클럽을 찾아갔다.

김기범은 완전히 폐인이 되어버린 최민수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

‘완전 맛 갔군.’

“야, 괜찮아?”

“그냥 힘드네요.”

최민혁 기조연설 장면이 계속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자신이 받은 재판 받은 사실조차 이제는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대충 상황을 짐작한 김기범은 잘만 하면 주가조작 사건을 덮을 수 있다고 확신해서 오히려 쾌재를 불렀다.

“너도 민혁이 기조연설 뉴스 봤구나. 민혁이 그 새끼 진짜 장난 아니더라. 도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영문을 모르겠다.”

아닌 게 아니라 오늘도 조간신문 경제란은 전부 최민혁이 장식했다. 20살 나이에 IFA 기조연설을 한 사람은 아시아인 중에서는 최민혁이 처음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최민혁이 지금 독일에 가서 몇몇 소수 독일 특파원을 제외하고는 인터뷰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 더 난리였다.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었다!]

오늘 날짜 한영일보를 읽던 김기범은 황당한 눈으로 기사를 몇 번이나 다시 보았다. 어쩔 수 없이 휴학 후에 기업에 들어가서 운 좋게 KM 전자를 먹은 일에 관한 기사였다.

IFA 기조연설을 통해서 유럽을 뒤흔든 주제에 조용히 살고 싶다니.

울화가 터지자 참을 수가 없어서 신문을 북북 찢어서 집어던졌다.

“진짜 엿 같다. 그런데 민수 넌 이제 어떻게 하냐. 자칫하면 민혁이 그놈이 KM 그룹을 승계할지도 모르잖아.”

인정하기 싫은 현실을 다시 떠올린 최민수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의 목소리는 가파르게 올라갔다.

“네?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세요?”

‘자식 너도 별수 없구나.’

“아, 맞다. 너 얼마 전에 석방되어서 잘 모르나 본데, KM 전자 지분 대다수는 민혁이 가지고 있어. 그놈이 KM 전자 오너나 마찬가지야.”

충격적인 사실에 결국 참다못한 최민수는 앞에 놓인 양주를 병째로 꿀꺽 마신 후에 소리쳤다.

“…지, 진짜요?”

“어, 우리 아버지도 조사를 해봤다고 하던데, 벨린 투자도 최민혁 아버지하고도 많은 관련이 있어. 그런데 오늘 KM 전자 주가 봤냐? 가격제한폭까지 올랐는데, 주식 거래량이 천 주가 안 된다고 해.”

“…그렇겠죠.”

콜린스에 대해서 알아본 최민수도 깊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감옥에 갔다가 나오니, 세상이 완전히 바뀌어 있었던 것이었다.

김기범은 그 나름 안도했다. 최민수가 최민혁 때문에 지난 주가조작 사건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지 않는 것을 느꼈다.

‘어차피 증거는 없지. 심증만 있을 뿐이니까.’

결국 오성 전자와 있었던 데이콤 관련 이야기를 각색해서 말했다.

“주가조작도 민혁이 그놈이 꼼수를 부린 것이 아닌가 의심돼. 우리 회사 데이콤 지분 매입했다가 입은 손실만 해도 수백억이 넘어.”

“정말입니까?”

분노한 연기를 제대로 보인 김기범은 이를 갈아붙였다.

“이 모든 일이 최민혁 그놈의 꼼수였어. 나도 피해자일 뿐이야.”

김기범은 표정 연기를 제대로 보여주면서도 내심 마음에 들지 않았다. 주가조작 사건 이후에는 최민수와는 더 보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데 당장 최민혁과의 연결 고리 때문에 최민수가 필요했다.

“지난 일은 정말 미안해.”

“아뇨. 괜찮아요.”

최민혁 때문에 한계를 느낀 최민수도 김기범에게 지난 일을 구체적으로 따지지 않았다. 최민혁에 대해서 손을 쓰려면 그의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봐도 답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잔머리에 능한 김기범은 결국 하나의 대안을 찾아냈다.

“참, 너희 첫째 큰아버지도 이번 일에 불만이 많은 것 같던데, 그쪽에도 한번 도움을 청해봐. 아마 진지하게 도와줄지도 모르잖아.”

“글쎄요.”

“야, 적의 적은 친구라고 하잖아. 최문경 부회장도 골치가 아플 거야. 이럴 때 찾아가서 조카로서 부탁을 해봐.”

“생각해 볼게요.”

하지만 김기범은 최민수의 눈빛이 바뀌는 것을 보자 쾌재를 불렀다. 잘만 하면 최민수를 이용해서 KM 전자 내부 정보를 얻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 * *

최민수도 처음에는 김기범의 제안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최문경 부회장에게는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전화를 걸었다.

[어, 그래. 한번 와라. 내가 도와줄 일이 있으면 도와주마.]

뜻밖의 반가운 목소리.

용기를 낸 최민수는 바로 다음 날에 KM 산업 본사를 찾았다.

KM 산업은 올해 반도체 수출을 견인할 정도로 잘나간다. 올해 반도체 수출 예상액 200억 달러 중에 무려 20%에 해당하는 40억 달러에 가까운 매출을 올릴 것이란 전망이 있다.

KM 산업의 상반기 매출 금액은 수출만 무려 18억 달러를 넘었다.

최훈열 전무 추문은 전화위복이 되어서 부채 규모를 상반기에 대폭 축소했다.

하반기를 넘어서 내년 상반기까지는 성장세가 계속 이어질 예정이었다.

오성 전자의 반도체 예상 매출 65억 달러와 비교해 보면 KM 산업이 얼마나 한국 반도체 산업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잘 보여준다.

KM 산업 본사 분위기는 입구에서도 잘 드러난다.

임직원의 입가에는 미소가 끊이지 않았다.

다만 그들조차 KM 전자의 기조연설 때문에 최민혁 이야기만 했다.

아무래도 아직 후계 구도가 완전히 결정이 난 상황이 아니라서 자칫 최민혁이 KM 산업에도 영향을 미칠지 모른다는 이야기를 한 것이었다.

‘최민혁’이란 이름을 입구에서부터 시작해서 경비원을 만날 때까지 들은 최민수는 새삼 그의 영향력을 몸으로 느꼈다.

‘정말 내가 아는 민혁이가 맞는 것일까?’

기가 푹 죽은 최민수는 자신이 재벌 3세라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했다.

“아, 최민수 도련님이군요. 바로 안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다행이라면 경비의 태도.

심지어 안으로 들어가자 안내 데스크에 있던 사람이 깍듯한 자세로 자신을 맞이했다.

“오시죠. 비서실장님이 이미 기다리고 있습니다.”

자신이 재벌 3세라는 것을 새삼 실감한 최민수는 그제야 좀 정신을 차렸다.

그는 심지어 최문경 부회장실로 바로 가서 자신을 환대하는 첫째 큰아버지를 볼 수 있었다.

“그래, 고생이 많았지?”

“아, 그냥 그랬습니다.”

“이놈아, 그걸 말이라고 하냐. 구치소 생활이 그냥 그럴 리가 없잖아. 더욱이 늘 태어나서 처음 가보는 곳이잖아.”

“네.”

솔직히 가슴 한구석이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아마 아버지 최훈열 전무가 있었다면 저런 이야기를 들어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는 감방에 들어가서 면회만 몇 번 봤고, 이야기도 오래 못 해봤다.

최문경 부회장은 최민수 어깨를 토닥이면서 이런저런 사적인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았지만, 곧 눈빛이 바뀌었다.

“제수씨가 이야기한 거 말이다. 설마 민혁이 그놈이 안 된다고 하더냐?”

“아직 그런 이야기는 듣지 못했습니다.”

“그래? 기다려 봐.”

최문경 부회장은 권재홍 비서실장에게서 KM 전자 조정욱 인사 팀장 전화번호를 받아서 전화했다.

[나, 부회장이다.]

단단히 한소리 하려고 작정하고, 최민수 채용 문제를 거론했다.

[아, 안 그래도 최민수 씨에게 연락하려고 했습니다.]

[응? 그래?]

[조성돈 팀장님에게 따로 지시를 받았는데, 일단 인턴 채용 형식으로 처리할 겁니다. 그리고 정식 직원으로 돌릴 예정입니다.]

[직급은?]

[평사원입니다. 아무래도 아직 휴학생인 것도 있고, 여러 가지를 고려했습니다.]

[그래.]

최문경 부회장도 발 빠른 조정욱 팀장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물론 최용욱 회장 통해서 이미 승낙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확신하지 못했다.

‘면접 일정을 질질 끌어도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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