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
천하태평인 최민혁 실장의 모습에 조성돈 팀장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보통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이 정도인지는 몰랐다.
하지만 채권자에게 수십 년 동안 쫓겨 다닌 1회차 경험이 있는 최민혁은 당시 살기 위해서 사기도 많이 쳐봤다.
그는 생존하기 위해서 거짓말을 달고 살았는데, 이 정도 일쯤은 가볍게 생각했다.
이보다는 예상에 없던 일이 생긴 터라 김명준 과장을 통해서 국내 최문경 부회장의 동선부터 검사했다.
“우리 첫째 큰아버지 행적이나 한번 확인해 보세요.”
“알겠습니다.”
* * *
최문경 부회장도 IFA 전시회의 콜린스 반응을 유심히 살폈다.
그는 갑자기 독일로 튄 최민혁 때문에 머리를 계속 굴렸다.
특히 KM 계열사 매출 현황을 살피다가 도저히 그냥 둘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 자주 가는 요정에서 셋째 최동영 상무와 만났다.
“갑자기 네가 연락을 다 하다니. 무슨 일 있냐?”
고심이 가득한 최동영 상무는 잠깐 망설였다.
“부탁할 것이 있어요.”
자존심이 강해서 어지간한 일에는 손을 내밀지 않던 최동영 상무였다.
“무슨 일인데 그래?”
“서울지법 서부지원 신청사 청사 이전 공사가 태호 부도 때문에 공사가 중지된 것은 들어봤습니까?”
“아니. 지금 내 일만 해도 머리 아프다. 그런 일 따위는 신경 쓰고 싶지도 않아. 가만. 너는 왜 뜬금없이 그 이야기를 해?”
서울시 일부 부서가 원래 이달까지 완공 예정이던 공사가 태호 부도 때문에 멈추었다. 결국, 서울시 담당 부서는 폭탄을 맞았다.
건설 공정도 고작 70%에 불과한 상황에서 태호가 부도를 내버렸다.
지상 11층, 지하 3층의 서부지원 공사비만 해도 130억이 넘었다.
“문제는 이 공사의 연대 보증을 KM 건설이 해주었습니다. 알다시피 우리 회사 자금 사정이 그렇게 좋은 것도 아니라서 나설 상황이 아닙니다.”
이 청사와 관련이 있는 정부 부서는 검찰과 법원이 있었다. 둘 다 태호의 부도 때문에 화가 잔뜩 나서 KM 건설을 압박했다.
최동영 상무도 KM 건설은 가까스로 꾸려 갔는데, 갑자기 태호 때문에 한 방 맞고 나서는 크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 보증 함부로 하는 게 아냐.”
“…제가 그걸 몰라서 그랬겠습니까? 강북 건영을 비롯해서 서로 알음알음 도와주고 있어요. 그런데 우리만 따로 나 몰라라 한 상황도 아니었습니다.”
KM 그룹 차입금 사태가 멈추고 나서 KM 건설은 나름 부동산을 매각하면서도 회사 안정화에 주력했다. 그게 아니었다면 지금과 같은 사태에 자신들이 나설 수도 있었다.
“요즘 제대로 되는 일이 없어요. 형이 부탁한 대로 KM 전자와 계약도 다 취소했는데, 그것 때문에 타격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그런데 최민혁 그놈은 요즘 아주 살판이 났나 보더군요.”
“지금 태호 건설 사태가 나 때문이라는 소리를 하는 거야?”
“아뇨. 만약 KM 전자와 거래를 그냥 놔두었다면 제가 이렇게 아쉬운 소리 안 해요. 이번 일도 결국 형 때문이니, 좀 도와주세요.”
“은행은?”
“똑같아요. 아예 우리 KM 그룹을 죽이려고 작정을 한 것 같아요.”
최문경 부회장은 KM 건설에 손을 쓸 수 있는 정말 좋은 기회라고 내심 생각했다. 그런데 망둥이처럼 날뛰는 조카 최민혁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아쉽네.’
“쯧. 알았다. 100억이면 되냐?”
“그 정도면 괜찮습니다.”
복잡한 최문경 부회장 눈빛에 내심 피식 웃고 말았다.
‘민혁이 고놈이 그 난리를 치고 있는데, 지금은 날 건드리기 어렵겠지.’
내심을 숨긴 최문경 부회장이 천연덕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니, 어쩌다가 고작 100억에 그 모양이 된 거야?”
“그러게 말입니다. 아주 미치겠습니다.”
푸념을 털어놓은 최동영 상무도 머리가 아파서 술잔을 들이마셨다. 막상 구조조정을 한 이후에 KM 건설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깨달았다.
그래도 지금은 그나마 낫다.
그럭저럭 회사는 굴러가니까.
자금 압박을 받는 상황에서도 KM 건설이 멀쩡한 것이 그 증거다. 더욱이 건설 경기 자체는 나쁘지 않아서 올해만 잘 견디면 괜찮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차입금 계획은 아무래도 문제가 많았어요. 만약 이번 일을 경험하지 못했다면 우리 회사 내부 부실을 간과했을 겁니다.”
최문경 부회장도 최민혁 때문에 이 일을 인정하기 싫었지만 수긍했다.
“그렇지. 확실히 기업 체질이 문제기는 문제야.”
체질 개선 이야기가 나오자 실제로 KM 그룹 중에 유일하게 기업 체질 변경에 성공한 KM 전자를 떠올렸다.
“요즘 민혁이는 어때요?”
“그놈 얘기는 마라. 아주 돌아버리겠다.”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
“너도 알 것 아니냐. 콜린스인지, 지랄스인지 말이다.”
“아, 안 그래도 그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어제 아버지도 그 콜린스 이야기하더라고요.”
최문경 부회장은 잠깐 망설였다. 하지만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다 알 일이다. 지금까지 콜린스 관련된 내용을 요약해서 말해주었다.
대충 이상하다는 것을 보고로 안 최동영 상무도 깜짝 놀랐다.
“…진심으로 하는 말입니까?”
“그래. 그래서 고민이다. 손을 써야 할 것 같은데, 방법이 없어. 이미 KM 전자와 KM 그룹 계열사 간의 거래도 다 끊어져서 압력 넣기도 어려워. 심지어 검찰이나 국세청 동원하는 것도 둘째 그 녀석이 싼 똥 때문에 쉽지 않아. 오히려 검찰에는 날 보고 조심하라고 거꾸로 경고했으니까.”
푸념이지만 실상 최문경 부회장도 심각했다. 그는 혹시라도 최민혁에게 당할까 싶어서 KM 산업을 비롯한 계열사를 감사했다.
“…….”
최동영 상무도 충격을 받아서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KM 건설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KM 전자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더욱이 KM 전자와 거래를 끊었으니, KM 전자는 타격이 클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정작 KM 전자는 콜린스라는 새로운 무기로 무장까지 했다.
KM 전자를 말려 죽여서 KM 전자를 먹으려고 했던 계획은 이제 아무런 의미가 없어졌다.
“자, 잠깐만요. 콜린스 평가가 그렇게 좋습니까?”
“말도 마라. 너도 보면 기절할 거다. 이제는 국내가 아니라 외국 시장을 노릴 거야.”
최동영 상무는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맙소사. 형, 설마 이대로 그냥 두고 볼 것은 아니죠?”
최문경 부회장은 기분이 나빴지만 차마 내색하지는 않았다. 이대로 간다면 KM 전자는 완전히 자신의 손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최용욱 회장 제안을 들어준 척한 것도 KM 전자가 과연 생존할 수 있을지에 관해서 판단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제 생존은커녕 오히려 다른 가전 3사가 KM 전자를 신경 써야 할 상황이었다.
“뭔가 대안을 마련해야지.”
그런데 수작을 부리고 싶어도 당사자는 독일로 튀었다.
여기서 뭘 하고 싶어도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정 안 되면 LC 전자나 대운 전자를 부추겨 봐야지. 콜린스 반응에 따라서 당장 게네들 발등에도 폭탄이 떨어질 테니까.”
“저도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그래. 일단 우리 계열사부터 잘 확인하자. 자칫하다가 민혁이 그놈이 거꾸로 우리를 상대로 뒤통수칠 수도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 * *
최민혁은 최문경 부회장과 최동영 상무가 만났다는 정보를 우영민 과장 통해서 받았다. 예상을 벗어나지 않은 행보였다.
다행이라면 그들도 독일에 와 있는 자신의 움직임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었다.
‘MP3 특허권 협상 마무리할 때까지만 시간을 벌면 되니까.’
결국 이번 기조연설 준비에 집중했다.
이런저런 많은 일이 있었다. 엔서 위원장이라고 해서 독자적으로 결정할 수 없기 때문에 여러 사람을 찾아다니면서 이해를 구했다.
오다 히로 부사장 역시 자신의 건강 문제를 내세워서 뒤로 물러났다.
덕분에 다른 문제는 생기지 않았다.
권태성 실장 역시 그저 다른 인맥을 통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었고, IFA 기조연설 날이 밝아오자 머릿속이 복잡했다.
불과 며칠 사이에 IFA 조직 위원회가 내부적으로 혼란해졌다.
게다가 그는 이번 IFA 개막식 기조연설을 들으러 갔다가 결국 발표자가 소니 부사장 오다 히로에서 최민혁으로 바뀐 것을 발견했다.
“…….”
충격과 패닉.
너무 황당해서 나라 잃은 표정을 한 채 잠깐 서 있었다.
입구에서 뒤늦게 안 이들은 다들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네. 기조연설자가 오다 히로 부사장이 아니라고?]
[여기 최민혁 실장이라고 나오네요. 아니 KM 전자의 최민혁 실장이 도대체 누구야?]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대다수는 부정적이었다. 갑자기 개막식 기조연설자를 바꾼 것도 황당한 일이지만 이번 연설자는 듣도 보도 못한 사람이었다.
“…….”
한동안 망부석이 되어서 멍하니 기조연설자 최민혁 실장의 프로필을 살피던 권태성 실장은 다른 직원이 일깨우자 겨우 정신을 차렸다.
그는 기조연설 강연장 제일 앞쪽으로 걸어가면서도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자리에 참석한 이들 역시 불만을 토로하기는 매한가지였다.
기조연설자라면 모름지기 뭔가 세상에 변화를 줄 만한 실적이 있어야 했다.
차라리 오성 전자의 사람이라면 그나마 이해라도 할 텐데.
[도대체 KM 전자가 뭐 하는 회사야?]
심지어 한국에서 온 사람조차 잘 몰랐다.
물론 소수 몇 사람은 알고 있었지만, 분위기 때문에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하나둘 사람이 모이면 모일수록 더 분위기는 소란스럽기만 했다.
하지만 이번 IFA 조직 위원회에서는 그 어떤 언급도 없었다.
그저 말없이 자기 일만 할 뿐이었다.
임권수 부장이 툴툴거렸다.
“잘하는 짓이다. 내가 이럴 줄 알았다니까. 아니, 이제 갓 대학교 입학한 놈이 알아봐야 얼마나 안다고, 이렇게 문제를 만들어? 독일 놈들 제정신인 거야?”
“…….”
황광수 차장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그 역시 돌아가는 상황이 불안했다. 최민혁 실장이 정말 발표자로 나설지는 몰랐다.
그리고 사회자 소개를 시작으로 IFA 개막식 기조연설이 시작되었다.
최민혁이 드디어 IFA 개막식 기조연설을 위해서 천천히 단상 위에 올라왔다.
침묵이 한동안 감돌았다.
* * *
“괜찮습니까?”
조성돈 팀장의 진심 어린 소리였다. 그 역시 긴장하고 있었다.
“좋습니다.”
하지만 최민혁은 느긋했다. 그는 청바지에, 후드티만 달랑 입고 있었다.
“…저기 정 뭐 하면 제가 양복을 준비해 오겠습니다.”
“이게 딱 좋습니다. 외국은 한국과는 달라서 자유로운 분위기를 좋아합니다.”
“…그렇지도 않은 것 같은데.”
“안 그러면 뭐 어떻습니까. 전 제 할 이야기만 하면 됩니다.”
“후유, 솔직히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모르겠습니다. 엔스 위원장이 이런 결정을 한 것도 이해가 안 되고요.”
“사람 일이 뭐 뜻대로 됩니까. 하다 보면 이런 일도 저런 일도 있기 마련이죠.”
물에 빠지면 입만 동동 뜰 정도로 최민혁의 입은 한시도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 조성돈 팀장은 더 걱정스러웠다.
소식 듣고 나타난 배종대 과장이나 정성근 대리 역시 혀를 내두르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들 역시 갑자기 일이 왜 이렇게 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최민혁은 이번 행사를 준비한 직원에게 연락을 받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도 솔직히 이렇게 된 것은 뜻밖입니다. 하지만 시기를 아는 자가 준걸이라고 했습니다. 이미 기회가 온 마당에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나머지는 제가 걱정할 일이 아닌 겁니다.”
“…네.”
조성돈 팀장은 우려 반 기대 반의 심정으로 멍하니 최민혁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는 인생 1회차에서 채무자에게 쫓겨 다니면서 온갖 사기를 다 해본 최민혁을 이해할 수는 없었다. 당시 최민혁은 세계 최고의 사기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따가운 시선을 받으면서 발표회장으로 걸어가는 최민혁은 지난 일을 떠올리면서 피식 웃고 말았다.
‘그 일도 이렇게 도움이 되다니.’
* * *
최민혁은 IFA 개막식 행사에 몰려온 수천 명의 시선을 받아도 그다지 당황하지 않았다. 1회차에서 온갖 사기를 쳤던 그로서는 이런 일이 그다지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더욱이 콜린스도 있고.’
없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있는 것을 가지고 적당히 각색해서 하면 된다.
하물며 그 지식이 미래의 것이다.
곧 앞으로 일어날 일을 기반으로 말하면 된다.
자신감은 당연했다.
자기소개는 간단하게.
[KM 전자의 최민혁 실장입니다.]
청바지와 가벼운 티를 입어서인지 더욱 어리게만 보였다.
다만 너무 자연스러워서 어색하지가 않았다.
오히려 듣는 청중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격식을 따지는 유럽인은 약간 불편한 얼굴이었지만 미국인은 그다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 덕분에 이번 개막식 행사를 찾은 이들도 한껏 최민혁의 말에 집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