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123화 (123/1,021)

#123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국으로 추락한 일본은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서 경제 대국으로 성장했다. 그들은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아시아 지배권을 강화하기 위해서 움직였다.

미국 정부가 좋아할 리가 없었다. 결국, 일본 대기업에 대한 공세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소니는 그 과정에서 제일 먼저 두들겨 맞았다.

그나마 최근 와서는 양국 관계가 나아지고 있다고 하지만 미일 무역 적자의 확대 때문에 그것도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뜻밖의 정보에 조성돈 팀장도 혀를 내둘렀다.

“그 틈을 노렸는데, 결국 실패했다는 말이군요.”

“그런 셈입니다.”

“솔직하게 말씀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그 답례로 한 가지 말씀드리자면 최민혁 실장님도 기조연설자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네?”

황광수 차장은 매우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말도 안 되는 주장이기 때문이다.

이번 일에 회의적인 조성돈 팀장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서 말입니다. 혹시라도 오성 전자 측에서 이번 일을 도와줄 수 없을까요?”

“설마 기조연설 대상자를 바꾸는 일을 도와 달라는 말입니까?”

“네!”

“…….”

무슨 의도로 저런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는 황광수 차장은 조성돈 팀장의 눈치만 봤다.

조성돈 팀장은 피식 웃고 말았다.

“외국에 나오면 다 애국자 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도 일본 오다 히로 부사장보다는 우리 최민혁 실장님이 기조연설에 나오면 좋지 않겠습니까? 엔스 위원장도 관심이 있고요.”

“글쎄요. 그건 좀…….”

“일단 한번 권태성 실장에게 이야기라도 해보세요. 혹시 압니까. 우리 최민혁 실장님이 정말 기조연설을 하게 될지 말입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지난 일을 잊고 서로 도움이 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뜻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긍정적으로 말하기 그렇습니다.”

“기다리죠.”

“…….”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정말 우리가 최민혁 실장을 밀어볼 것으로 생각하나. 방해나 안 했으면 다행일 텐데…….’

* * *

황광수 차장도 조성돈 팀장의 제안이 너무 황당해서 망설였다. 그런데 KM 전자 이슈는 워낙에 민감해서 자기 혼자 결정할 수가 없었다.

당연히 이를 들은 권태성 실장은 분노했다.

“그게 무슨 개소리야?”

오성 전자 내에서도 극히 감정 변화를 보이지 않고, 어지간한 일에도 화 한 번 내지 않던 권태성 실장이 욕설부터 했다.

얼마나 심정이 황당한지 잘 보여주고 있었다.

임권수 부장도 허탈한 표정으로 황광수 차장을 쳐다보았다.

“이봐, 황 차장,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기조연설을 위해서 우리 기획 팀이 얼마나 열심히 움직였어. 그런데 그 일에 대한 실패 때문에 다들 힘들어하잖아.”

정확히는 오성 기획 팀 중에 해외 전시회를 담당한 팀에서 몇 달 전부터 광범위한 로비를 했고, 결국에 실패한 일이었다.

“이런 시기에 뭐 최민혁 실장을 밀어주자고? 지금 우리를 놀리는 거야? 아니, 다른 것을 떠나서 최민혁 실장이 자격이나 있어?”

권태성 실장도 이 일 때문에 윗선의 압력을 크게 받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불과 IFA 전시회가 얼마 남지도 않은 상황에서 기조연설자로 최민혁 실장을 밀어주자니.

아니, 그 당사자가 최민혁 실장이란 말이 우습기만 했다.

권태성 실장은 마치 화난 늑대처럼 으르렁거렸다.

“황 차장, 정말 미친 거 아냐?”

“죄송합니다.”

황광수 차장은 괜한 일에 나섰나 싶어 식은땀을 흘렸다. 그 역시 가능하면 KM 전자와 오성 전자 사이가 좋아졌으면 하는 바람에서 한 말이었으니까.

그런데 막 회의실에 들어온 해외 전시회를 주로 담당하는 기획 2팀 강석영 부장이 이들 갈등을 보고 끼어들었다.

“우리 쪽 IFA 조직 위원회 담당자 이야기로는 최민혁 실장의 기조연설에 대한 의견을 지금 나누고 있다고 합니다.”

권태성 실장은 입을 딱 벌렸다. 오성 전자조차 이 일에 실패했다. 이건 정말 너무 어이가 없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저, 정말인가? 그게 정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해? 동양권 내에서 기조연설을 한 사람이 전혀 없는데, 고작 20살짜리를 기조연설자로 내세우겠다고?”

아직도 선뜻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강석영 부장도 호텔 회의실 의자에 풀썩 앉았다.

“후유, 저도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이번 KM 전자의 신제품 콜린스 때문에 엔스 하이데커 위원장도 꽤 깊은 감명을 받은 것 같습니다.”

“신제품 콜린스라고? 가만 혹시 그 KM 고압 변성기와 관련된 거야?”

“아무래도 그 몰드 고압 변성기와 편향 코일은 신제품에 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제품 콜린스는 혁신적인 제품입니다.”

권태성 실장도 등골이 싸한 느낌에 흥분을 가라앉혔다.

“임 부장이 말한 제품이 이 제품이란 말이군.”

“최민혁 실장이 IFA 위원회 내부의 알력 싸움을 아는지 모르는지 모르겠지만, 그 콜린스를 내세워서 이번 기조연설을 하려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말이 안 되잖아. 독일 놈은 자존심도 없어?”

하도 어처구니가 없는 내용이라서 강석영 부장도 몇 번이나 확인했다.

“…저도 처음에는 한참 웃었습니다. 상황이 한 달 전과는 많이 다릅니다. 조직 위원회 말에 따르면 크라크 미국 경제 차관보의 행동도 거칠기 짝이 없습니다. 숫제 협박을 일삼으니까요. 아마 오다 히로가 이번 기조연설을 하게 된다면 엔스 위원장도 당장 그 자리를 지키기 어려울 겁니다.”

미국 정부도 천문학적인 미일 무역 적자 때문에 독이 잔뜩 올라 있다는 것을 잘 아는 권태성 실장도 버럭 소리쳤다.

“아니, 그러면 우리 오성 전자도 있잖아. 이미 수십 차례나 우리가 한 주장이잖아. 우리 사장님만 해도 경력 면에서 하자가 없어. 그런데 어째서 KM 전자의 최민혁 실장을 긍정적으로 본다는 소리야?”

“그게 다 콜린스 때문입니다.”

“도대체 콜린스가 뭔데 그래? 혹시 자료를 가져온 것은 없나?”

“여기 있습니다.”

다행히 강석영 부장이 IFA 조직 위원회 당사자를 통해서 얻은 콜린스 사진과 그 자세한 스펙 관련된 서류를 공개했다.

오성 전자 기획 팀에서 그렇게 열심히 추적한 콜린스.

그 정보가 뜻밖에도 IFA 조직 위원회의 손을 통해서 밝혀진 것이었다.

“…….”

그리고 침묵이 한동안 감돌았다.

자료에는 콜린스의 장단점을 가감 없이 설명해 놓았다.

단순히 겉보기와 관련된 정보가 아니라 실제로 소비자가 놓쳐선 안 될 귀중한 정보가 아주 잘 정리되어 있었다.

혁신적인 디자인도 놀랍지만 정말 놀라운 것은 그 품질이었다.

기존 KM 전자의 대형 TV를 뛰어넘어서 발전된 기능은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오성 전자 기획 팀을 패닉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빌어먹을.”

권태성 실장은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에 욕설만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래서 더 이 일을 그냥 둘 수가 없었다.

“당장 엔스 위원장에게 연락해서 약속을 잡아. 내가 직접 가겠다고.”

“알겠습니다.”

* * *

엔스 위원장도 권태성 실장의 연락을 받았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만나지 않았다. 집요한 그들의 로비 때문에 학을 뗐는데, 괜히 이 시국에 만나서 변명하고 싶지 않았다.

권태성 실장이 직접 찾아왔지만, 슬쩍 출장 핑계로 그들을 피했다.

권태성 실장이 길길이 날뛰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보다는 기조연설자를 바꿀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하자 5성급 호텔에 투숙한 오다 히로 부사장을 직접 찾아갔다.

오다 히로 부사장은 곧 있을 기조연설 준비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그가 있는 호텔 방은 이 준비 자료로 가득했다.

그는 이번 일에 목숨을 내건 사무라이라도 된 양 진지하기만 했다.

“아, 엔스 위원장님.”

너무도 밝은 얼굴로 자신을 환대하는 오다 히로 부사장.

지금 일이 그의 인생 역정에서 반환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엔스 위원장은 입술을 깨물었다. 다른 것을 다 떠나서 자신은 생존하고 싶었다. 만약 오다 히로가 이번 기조연설을 하게 되면 자신은 이 자리에서 내려와야 한다.

‘개새끼들.’

어금니를 뿌드득 갈았지만 오다 히로 부사장에게 내색하지는 않았다.

“긴히 할 말이 있습니다.”

“네?”

굳은 엔스 위원장을 보자 오다 부사장 역시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다.

두 사람은 결국 호텔을 나와서 잠시 걸었다.

엔스 위원장은 망설이면서 천천히 주변 이야기부터 늘어놓았다.

“미국 정부가 일본 정부를 압박하는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닙니다. 그건 잘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아, 그렇죠.”

오다 히로 부사장도 입술을 깨물었다. 일본 각료가 미국 정부를 상대로 홀로서기 한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다.

그 와중에 소니와 같은 일본 대기업이 보인 반응.

그게 미국 정부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심지어 지난 이야기이지만 일본은 러시아와 손을 잡아서 미국을 견제하려고 했다.

‘미친 새끼들.’

그의 우려는 우려로 끝나지 않았다.

엔스 위원장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이번 기조연설은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야 할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청천벽력 같지도 않은 소리였다.

그 역시 기조연설자가 되고 난 후에 불안불안했던 것이다.

특히 미국 소니 지사장을 통해서 들려오는 소리는 더 안 좋았다. 소니가 미국 자산을 인수하기 시작한 이후부터 본격적인 미국 정부의 견제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크라크 경제 차관보 압력 때문입니까?”

“아니라고는 말 못 하겠습니다. 저도 최선을 다했지만 이제는 독일 정부마저 압력을 넣고 있습니다.”

착잡한 오다 히로 부사장은 화도 나지 않았다. 다만 그도 한 가지 점을 그냥 넘기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 왜 처음부터 절 선정한 겁니까? 차라리 처음부터 다른 사람을 선택했으면 될 것 아닙니까?”

“그게 마땅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미국 기업의 구닥다리 가전제품이나 유럽 회사의 제품은 이미 한물갔습니다. 우리 독일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나마 한국 대기업이 있지만 아직은 미흡했습니다. 그래서 소니를 선택한 겁니다.”

“그런데 상황이 달라졌나 보군요.”

“네. 혹시 KM 전자라고 들어보셨습니까?”

“글쎄요.”

고개를 갸웃하던 그는 곧 엔스 위원장이 내놓은 콜린스 사진을 확인하고는 혀를 내두른 채 넋을 잃었다.

하지만 엔스 위원장에게 굳이 욕설 따위는 내뱉지 않았다. 지난주부터 IFA 조직 위원회 분위기가 뒤숭숭한 것을 알았다.

이를 악문 채 참을 뿐이었다.

“하지만 엔스 위원장님이 이번 일 때문에 저에게 빚진 것은 사실입니다. 그 빚은 반드시 갚으셔야 할 겁니다.”

“알겠습니다.”

엔스 위원장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오다 히로 부사장 반응이 걱정한 것과는 많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하긴 이들 역시 미국 정부의 압력을 이미 알고 있을 테니까.’

소니라고 해도 굳이 지금 미국 정부와 싸워봐야 얻는 것은 상처뿐이었다. 그들 역시 알게 모르게 일본 정부에 대한 로비를 강화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소니와 같은 일본 대기업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들은 일본 경제의 힘을 너무 과신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최근 달러 엔화 환율에서 계속 문제가 터지는 것도 그 연장선이다. 심지어 일본 대기업이 베트남을 비롯한 동남아 국가에 투자하는 것에 대한 미국의 시선도 그 어느 때보다 따가웠다.

오다 히로 부사장은 소니의 앞날을 불안하게 바라보았다.

‘큰일이다.’

* * *

‘어, 이게 되네?’

최민혁도 IFA 위원회로부터 기조연설 당사자로 결정 났다는 통보를 직접 받고 나서는 어이가 없었다. 설마 의도한 대로 풀려갈지는 상상도 못했다.

‘미국의 일본에 대한 압박이 이 정도였던가.’

미래 지식은 안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흘러갔는지는 솔직히 그 자신도 몰랐다.

‘어쩌면 IMF 사태도 일본과 관련이 있을지 모르겠구나.’

그 부분은 추후 확인이 필요했다.

IFA 기조연설.

시간이 별로 없지만, 기조연설을 준비하는 것은 어렵지가 않았다.

“괘, 괜찮겠습니까?”

조성돈 팀장 역시 IFA 전시회 준비 때문에 정신이 없는 중에 일어난 일이라서 넋을 잃었다. 그 역시 최민혁 지시에 움직이기는 했지만, 설마 이 일이 될 것이라 예상하지 않았다.

“가서 발표 좀 하면 됩니다. 어려운 일은 아니죠.”

“그 발표가 전 세계 언론과 기업이 모인 자리에서 하는 것 아닙니까?”

“알아요. 하지만 본질은 똑같아요. 사업부 발표회나 뭐 차이가 있겠습니까.”

“틀린 말은 아닙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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