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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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T 슬림 TV에 대한 개념이 본격적으로 나온 것은 7년이 지난 후다. LCD TV가 시장 흐름을 장악하면서 CRT 역시 변모를 한 것이다.
오성 전관과 LC 전자의 경쟁은 사뭇 치열할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흘러서야 제품이 나오는 이유는 평향각이 줄어들수록 개발하기가 어렵기 때문이었다.
당장 평향각이 125도만 되어도 개발 난이도가 무지막지하다.
전자빔이 전자기장의 힘으로 S자로 휘어져서 섀도 마스크를 통과해야 하는데, 매우 높은 수준의 기술력이 필요했다.
쉽게 말해서 휘어지는 총알처럼 빔을 같이 조작해야 했다.
이 작업을 위해서는 편향 코일부터 시작해서 고압 변성기도 달라져야 하고, 관련 다른 부분 역시 일일이 다 따로 만들어야 한다.
이런 개발 자체가 하루 이틀에 걸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최용욱 회장이나 최문경 부회장도 영문을 알지 못해서 최민혁에게 직접 전화를 한 것이다.
최민혁은 특히 최문경 부회장이 KM 그룹 계열사를 통해서 압력을 행사한다는 것을 보고받았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콜린스만 출시되면 판을 바꿀 수가 있어.’
내막을 잘 모르는 오성 전관을 비롯한 협력업체 역시 브라운관을 제작하면서도 의문을 표시할 정도였다.
[너무 욕심내는 것 아닙니까? KM 전자의 의도는 잘 알겠지만 이게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생산 단가가 올라가는 것은 여러분이 더 잘 알 텐데요?]
[돈에 구애받지 말고, 주문대로만 공급하세요.]
문제는 주문 수량이 적지 않아서 무조건 무시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이보다는 편향각이 높아지면서 오히려 수급 요인을 더 철저하게 살펴야 했다.
최민혁은 직접 본인이 나서서 이 브라운관 불량을 살폈고, 계약서상에는 불량에 관한 책임 요인을 분명히 했다.
대신 브라운관 납품 단가를 올렸다.
제값을 주는 대신에 최대한 양품을 공급받을 것이었다.
만약 불량이 나오면 바로 교체가 되어야 한다는 전제가 붙었다.
이 부분은 최민혁이 직접 협력업체 담당자를 만나서 경고했다.
“저희가 제값을 주는 것은 최고의 부품을 공급받기를 원하는 겁니다. 만약 이 약속만 지켜준다면 그쪽 업체 위주로 물량을 늘릴 겁니다.”
오리운 전기, LC 전자, 소니, 오성 전관 담당자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한숨을 내쉬었다.
“실장님, 그게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쉬울 리가 없으니, 단가를 더 올려주는 것 아닙니까. 만약 문제가 많은 업체는 바로 그 자리에서 계약을 해지할 겁니다.”
이미 알음알음 오성 전관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다른 협력업체도 최민혁의 눈치를 봤다. 설마 전석재 전무를 이용해서 오성 전자를 압박할지는 몰랐다.
“…알겠습니다.”
각 업체 역시 KM 전자의 특이한 움직임을 알아서인지 일단 따랐다. 당장 자기 앞에 주어진 물량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직 팔리지도 않는 제품에 저렇게 공을 들이는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오성 전관은 이미 따끔한 맛을 봐서인지 다른 업체에 비해서 더 성실하게 움직였다.
최병연 팀은 당분간 이 일에서 뺐다.
최병연 부장은 왜 최민혁 실장이 자신을 스카우트한 것인지 몰랐고, 그저 지시에만 따랐다.
그는 오성 전자에서 딴짓을 한다고만 알았지 콜린스 양산과 관련해서 정확한 내막까지는 잘 몰랐다.
이런저런 사연 끝에 최구만 과장은 드디어 나온 양산 샘플을 보면서 또다시 눈물을 흘렸다.
“축하합니다.”
콜린스 양산 전까지 겪어야 했던 일을 떠올린 최구만 과장은 도저히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다.
딱 한마디 말에 40대 중반의 남자가 어린아이처럼 흐느끼고 말았다.
“김 과장, 수고했어.”
“…네.”
말투가 부정적이라서 주변에서 늘 말이 많은 김갑래 과장 역시 흐르는 눈물을 감추기 위해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유독 주변의 부정적인 인식 때문에 말없이 일했지만, 그 과정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상상하기가 쉽지 않았다.
김갑래 과장은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묵묵히 최구만 과장을 지원했다.
“윤 대리, 고생했어.”
“…아닙니다.”
다른 연구소 직원에게까지 외면당한 윤선기 대리도 이때만큼은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이제는 정말 이직해야 하나 마음먹었지만, 끝까지 견뎠다.
덕분에 결실도 볼 수가 있었다.
사실 다른 이들은 경험해 보지 않아서 그가 경험한 정신적인 고통이 얼마나 지독한 것인지 알 리가 없었다.
콜린스 제품 개발이 어려웠던 것이 아니라 정작 주변의 방해가 더 큰 난관이었다.
안선종 팀장을 비롯한 김창호 부장 역시 세 사람을 안아주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그들은 누구보다 콜린스 제품 개발 과정에서 일어난 일을 잘 알았다.
“자네들 최고야.”
최민혁 역시 이 자리에 참석했는데, 양산되어서 나온 샘플을 검사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일이 드디어 결실로 이루어졌다.
사실 그 역시 막상 콜린스 일을 진두지휘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마무리까지 하고서야 뜨거운 고양감을 느낀 것이었다.
‘좋네. 나쁘지 않아. 이런 기분이었나.’
한껏 고취된 공장 분위기는 그 어느 때와는 달리 경건했다.
이 자리에 있는 이들만큼은 콜린스에 대한 사연을 알음알음으로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양산을 통해서 나온 샘플은 생각한 것보다 결과가 더 좋았다.
다만 아직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불량률은 어때요?”
“5% 가까이 나오기는 합니다만 개발 난이도에 비하면 나쁘지 않습니다.”
5%면 꽤 크다. 그런데 제품 자체의 특성상 어쩔 수가 없었다.
‘하긴 8년 가까운 기간을 당겼으니.’
“언제까지 불량률을 줄일 수 있겠습니까?”
“적어도 두 달은 족히 걸립니다. 하지만 영업이나 마케팅 일정을 고려하면 어렵지 않습니다. 당장 나타난 불량률은 대다수가 부품 불량이거나 아니면 제조 공정상에서 나타나는 문제입니다.”
“큰 고비는 넘겼다는 말이군요.”
“당장 불량 리스트를 잘 봐도 심각한 하자는 없는 것으로 나옵니다. 제품이 워낙에 얇아서 이런저런 자잘한 문제가 있지만 그건 협력업체와 협의해서 잘 풀어갈 수 있습니다.”
극단적인 Slim-TV 형태가 되면서 일어난 불량이 문제였다.
기존 공장의 공정을 바꾸는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겼다. 오성 전자와 같은 가전 전문 대기업과의 차이에서 생기는 문제였다.
최민혁도 그런 점을 순순히 인정했다.
“좋네요. 그 작업 마무리는 이제 공장의 다른 대형 팀과 같이 관리를 해주세요. 다만 불량이 나는 제품은 무조건 반품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세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번 사업부 회의에서 이 콜린스를 정식으로 소개할 겁니다. 그 작업에도 문제가 없도록 잘 좀 처리를 해주세요. 일정이 만만치 않으니, 큰 문제가 없도록 해야 합니다. 이제까지 고생한 결실을 거두는 겁니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주세요.”
“알겠습니다.”
하지만 최민혁은 이 콜린스를 이용해서 유럽 시장을 공략하고, 이를 기반으로 몇 가지 원천기술 계약을 염두에 뒀다.
그는 생산설비 앞에 서 있는 콜린스 모델 개발 인력 전원과 눈빛을 하나하나 마주하면서 목소리를 슬쩍 높였다.
“이 콜린스는 그냥 단순한 제품만은 아닙니다. 우리 KM 전자가 국내 시장을 뛰어넘어서 이제 본격적으로 외국 시장을 공략하는 첨병이 될 겁니다.”
그는 중앙에 서 있는 콜린스 개발 영웅을 잠깐 쳐다보았다.
“중간에 불량과 같은 문제에 발목이 잡혀서는 안 됩니다. 그러니 필요하다면 품질 관리 아르바이트를 대규모로 뽑아서라도 검증을 거쳐야 합니다. 단, 공장 생산 인력을 제외하고는 아직은 보안을 유지해 주세요.”
“네.”
대답하는 이들 역시 쉽게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들 역시 콜린스의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이런 결과를 이끌어낸 최민혁의 리더십을 다시 보았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최근 KM 전자에서 일어난 변화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었다.
‘……진짜 대단한 분이다.’
다들 최종적으로 나온 콜린스 모델을 보면서도 자신을 믿지 못했다. 콜린스의 결실이 저렇게 대단한 모델이 될지는 그들조차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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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혁은 콜린스 양산 최종 현황을 파악하자 이번에는 이제까지 계속 말이 나왔던 구조조정 문제에 대해서 고민했다.
정확히는 이미 나갈 사람이 다 나간 상황이라서 고민하는 이들을 고려했다.
자발적으로 지금 그만두는 직원에 한해서는 3년치 위로금을 내놓았다.
그러자 조성돈 팀장이 바로 달려왔다.
“실장님, 이건 좀 아니지 않을까요?”
“아뇨. 어차피 회사 일에 계속 불협화음을 만들어내는 이가 있어요. 이들을 그저 보고만 있어서는 좀 어려울 겁니다. 그들이 나갈 수 있도록 적극 분위기를 조성해야죠.”
“하지만…….”
최민혁도 이 문제를 좀 고민하기는 했지만 확실한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적당히 사내에 소문을 내세요. 실적이 없는 사람 위주로 도려낼 거라고. 아, 물론 진짜 그렇게 하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망설이는 사람이라면 지금이 좋은 기회죠. 회사 그만둬도 어차피 지금은 갈 데가 많으니까요.”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그럴 필요가 있습니다. 인사팀 프로필을 잘 보면 최훈열 전무 라인이 사전에 자기 인맥을 뽑은 이도 문제지만 부실하게 뽑은 인력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최근에 다 나가기는 했지만, 여전히 붙어 있는 사람들도 있어요.”
“…알겠습니다.”
조성돈 팀장은 왜 최민혁이 콜린스 양산과 관련된 것까지 철저하게 보안을 유지했는지 새삼 이해했다. 그는 피도 눈물도 없는 듯한 최민혁 행동에 한편으로 아쉽기만 했다.
하지만 이미 최훈열 사태를 경험해 본 입장에서는 차마 최민혁 실장을 무조건 비난할 수는 없었다.
‘…어쩌면 저게 합리적일 수도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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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M 전자 전체 사업부 회의는 임원만이 아니라 과장급 이상 관리직이 다 참여해서 듣는 회의다.
이 회의 때 각 사업부별로 팀 실적을 발표하기 때문에 실적이 나쁜 사업부일수록 스트레스를 더 많이 받는다.
김부영 영업 팀장은 가면 갈수록 매출이 격감하는 상황이라 더 힘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만둔다는 팀원이 있으면 더 괴롭기만 했다.
“이봐, 장 과장,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네가 그만두는 것은 말리고 싶어. 솔직히 자네 실적은 김 대리만도 못하잖아.”
“괜찮습니다.”
“아니, 정말 자네가 걱정되어서 하는 소리야.”
“걱정하지 마십시오.”
“자네도 김 상무 소식 들어서 알 텐데, 오성 전자에 고소당했어. 그런 일이 자네에게도 생기지 않는다고 누가 그래?”
“저랑 김 상무와 비교하기는 좀 그렇지 않습니까?”
오성 전자가 김현우 상무를 고소한 사실은 원래 언론을 통해서 알려진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최문경 부회장과도 만날 수가 없었던 김현우 상무가 오히려 언론과 인터뷰를 통해서 오성 전자의 불법 행위를 맹비난했다.
특히 중견업체가 고생해서 고안한 특허를 가로챈 점을 지적했다.
김현우 상무도 이제는 이판사판이 되자 살기 위해서 발악을 한 것이었다.
최민혁은 김현우 상무의 행적을 철저히 감시하고 있었기에 이 사태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는 한영 일보를 통해서 오성 전자의 편법적인 행위를 흘린 것이었다.
사태가 커지면서 권태성 실장조차 다른 일은 다 접어둔 채 이 일을 무마하기 위해서 움직였다.
그 과정에서 이 사태는 더욱더 커져 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최민혁이 원한 최종 시나리오였다.
김부영 영업부장 역시 세상이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잘 알기에 굳이 나온 기사 내용이 아니더라도 그 일면을 읽었다.
“아니, 사람 일은 몰라. 김 상무가 설마 오성 전자와 저렇게 원수처럼 대립할지 누가 알았겠나. 다른 회사 가면 결국 부딪치는 사람이 생기기 마련이야. 난 안 그런 줄 알아? 자네 과실을 덮어주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는지 아냐고.”
장민홍 과장도 순간 갈등했다. 그 역시 김현우 상무가 아니라 천선구 과장을 통해서 오성 전자에서 진행되는 일을 들었던 것이다.
“…솔직히 제가 못 한 것도 있지만, 회사 매출이 떨어진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 제 실적은 나빠질 수밖에 없죠.”
“또 남 탓인가?”
다른 사람과는 달리 장민홍 과장은 실적이 좋지가 않았다. 그렇다고 팀에 적응을 잘하나 하면 그렇지도 못했다.
그런 이가 갑자기 회사를 그만둔다고 하니 걱정이 되는 것이었다. 물론 그만두겠다고 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최 실장님이 내놓은 위로금이 그렇게 탐나나 본데, 그거 다 낚시야.”
“압니다. 상관없습니다. 6천만 원이면 적은 돈이 아닙니다. 비록 제 실력이 뛰어난 것은 아니지만 오라는 곳도 있고요.”
“알겠네.”
그도 장민홍 과장의 사직서를 정식으로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