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
김명준 과장을 통해서 최문경 부회장의 동선을 파악한 최민혁은 피식 웃고 말았다.
“우리 첫째 큰아버지, 비행기 마일리지 부자 되겠네요.”
“가볍게 볼 일이 아닙니다. 회장님의 별장을 직접 찾아갔으니까요.”
“뻔하죠. 설마 우리 KM 전자가 KM 그룹과의 관계를 계속 줄여 가리라 생각 못했겠죠.”
“정말 괜찮을까요?”
“어차피 한 번은 겪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더 이상 나빠질 것도 없는 상황 아닙니까.”
“그것 때문에 매출이 꽤 줄어서 기획 팀에서도 말들이 많습니다.”
“일감 밀어주기 같은 편법 동원해서는 글로벌회사로 성장 못 합니다. 기회가 왔다고 생각할 때 체질 개선을 해야죠.”
“하지만 문형섭 부사장님도 이 일 때문에 불만이 많습니다. 당장 KM 건설 쪽과 관련된 매출만 수십억이 줄었다고 하니까요.”
“괜찮습니다.”
단호한 최민혁.
대기업 계열사 밀어주기는 금융계열사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는데, DL 그룹은 DL 생명과 DL 화재가 계열사인 DL 전자에 수백억 대출해 준 것이 단적인 예이다.
DL 전자의 김용만 전무가 이 돈을 이용해서 데이콤 지분을 인수했다. 물론 오성 전자의 압력 때문에 오히려 큰 손해를 봤다.
심지어 DL 그룹이 KM 산업 증자 과정에서도 참여한 적이 있었다.
최문경 부회장이 이런 일을 자주 경험했으니, KM 전자가 완전히 홀로서기를 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한 것이었다.
정확히는 KM 전자 상태가 나빠지니, TV 사업부가 망가지면 그때 가서 KM 전자를 다시 재인수할 것으로 생각한 것이었다.
최문경 부회장이 굳이 KM 전자를 따로 내버려 둔 이유였다.
최민혁은 어느 정도 큰 그림을 알고 있었기에 이 기회를 활용했다.
“그러면 이대로 그냥 있을 수는 없죠. 할아버지에게 연락 좀 해주세요. 우리 첫째 큰아버지가 오성 전자에 정보를 흘려서 엉뚱한 짓을 했다고.”
“하지만 그건 증거가 있습니까?”
“압니다. 그래서 할아버지에게 알릴 필요가 있는 거죠. 그래야 우리가 홀로서기 하는 것도 명분이 서지 않겠습니까.”
“…알겠습니다.”
* * *
최용욱 회장은 최근 들어서 건강 상태가 급격히 좋아지자 자신의 병이 정신 안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이미 최민혁에게 모든 것을 다 넘겨서 독립까지 시켜 준 마당이라서 아예 그쪽에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그 자신이 아는 상식선에서 잘 마무리가 될 것으로 판단했다.
오늘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채윤집 집사에게서 최문경 부회장이 오성 전자를 이용해서 엉뚱한 짓을 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처음에는 너무 황당했지만, 시간이 흐르고서야 장남 성정상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긴 문경이 이놈이 모략을 잘 꾸미지. 하지만 그 사이를 참지 못했나.’
자세한 질문 따위는 하지 않았다.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했다.
성격 같아서는 KM 산업 지분도 민혁에게 넘길까도 싶었다.
‘아니, 그건 아니야. 아무리 민혁이 이 녀석이 난다 긴다 해도 그 나이에 KM 산업까지는 무리야.’
최용욱 회장은 복잡한 머리로 북한산에 미처 가보지 못한 등산로를 정복하기 위해서 길을 나섰다.
그런데 장남 최문경이 북한산 입구에서 떡하니 기다리고 있었다.
꼴 보기도 싫은 터라 그냥 무시한 채 북한산 백운대를 따라서 올라갔다.
등산 초보자에게 적합한 코스라도 속도를 시작부터 올렸다.
정장한 최문경 부회장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포기하지 않았다.
“아버지, 이야기 좀 하죠.”
“너랑 할 이야기는 없다.”
“10분이면 됩니다.”
“1분도 아까워.”
“아버지, 정말 이럴 겁니까?”
아예 대답도 하지 않은 최용욱 회장은 속도를 더 올렸다.
숨을 헐떡이던 최문경 부회장은 결국 북한산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소리쳤다.
“민혁이 때문입니다!”
“그 일은 이미 내 손을 떠났다.”
“지금 그놈이 뭘 하는지 아십니까? KM 그룹과 완전히 선을 긋고 있다는 말입니다. 동영이 말로는 기존 KM 건설 납품선도 정리하고 있어요!”
KM 전자 매출 중에서 KM 건설 관련 매출은 적지 않다. 만약 이 매출마저 줄였다면 나머지 계열사도 다 포함된다.
그룹 전체 물량을 합치면 400억은 족히 넘어간다. 그 물량을 다른 대기업 회사에서 납품을 받는다면 그룹 전체적으로 손실이었다.
최용욱 회장도 설마 그렇게까지 했을까 싶어서 잠깐 걸음을 멈춘 채 등산로 한쪽에 놓인 벤치에 가서 앉았다.
최문경 부회장은 숨을 헐떡인 채 최민혁이 계열 분리를 하기 위해 지금 하고 있는 일을 하나씩 다 폭로했다.
“…아니, 이게 말이나 됩니까? 제가 전화를 해도 민혁이 이놈이 전화를 안 받습니다. 직접 찾아가도 사무실에 없고요.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입니까?”
장승일 실장을 통해서 동선을 다 파악한 최민혁이 피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걸 알 리가 없는 최용욱 회장도 최문경 부회장을 구박했다.
“네가 오죽 괴롭혔으면, 민혁이 그놈이 널 피한다고 생각하냐?”
“이게 모두 아버지 때문 아닙니까. 왜 그 지분을 넘긴 겁니까? 그렇지만 않았어도 제가 이렇게까지 할 리가 있습니까?”
“허, 이놈 봐라.”
최문경 부회장은 분노를 참을 수가 없어서 계속 항변했다.
“그거 아십니까? 아니, 세상에 그놈이 오성 전자 직원을 빼돌렸지 뭡니까. 이거 잘못하다가는 오성 전자랑 싸워야 할 판입니다.”
꼼수를 부린 것이 최문경 부회장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그 이후 일까지 잘 모르던 최용욱 회장도 흠칫 걸음을 멈추었다.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최문경 부회장은 자신이 보고받은 사실을 가감 없이 말했다.
하지만 최용욱 회장은 바보가 아니었다. 그는 보복의 하나로 오성 전자를 거꾸로 스카우트했다는 최민혁의 행동에 혀를 내둘렀다.
그것도 권태성 실장이 직접 장승일 실장을 찾아와서 항의할 정도로 대단한 인재였으니.
“…대단한 놈이네.”
“아버지, 지금 민혁이를 칭찬하고 끝낼 일이 아닙니다. 이런 일이 자꾸 생기면 오성 전자와도 트러블이 생깁니다. 그러면 당장 KM 산업의 거래에도 악영향을 줄 겁니다.”
하지만 이미 돌아가는 상황을 다 파악한 최용욱 회장은 피식 웃었다.
“글쎄다. 내가 아는 안 회장은 그런 조잡한 술수를 쓰지 않아. 이번 일은 밑에 실무진이 무리해서 일어난 일일 거다. 그러기 그놈들도 일을 계속 키우지는 못할 거야. 적당히 덮겠지.”
“아버지, 아니 자세한 내막도 모르고 그렇게 장담하십니까? 아버지 지분까지 다 사들인 민혁이 그놈에게 돈이 얼마나 있다고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KM 전자의 자금 사정이 좋아졌다고 하니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까?”
“걱정 마라. 지분은 증여했으…….”
최문경 부회장도 깜짝 놀랐다.
“아버지, 그게 무슨 말입니까? 설마 지분 매각이 아니라 민혁에 그놈에게 아버지의 KM 전자 지분을 그냥 다 넘겼다는 말입니까?”
최용욱 회장이 가지고 있는 KM 전자 지분은 30% 가까이 된다. 단순 계산만으로도 700억이 넘어가는데, 자산 대비 평가액으로는 그 이상이었다.
최용욱 회장도 추후 상황 봐서 말하려고 했던 사실이라서 당황해서 시선을 피했다.
“아버지!!!”
“야, 이놈이 자식이 겁을 상실했네. 너 지금 나를 질책하는 거야?”
“하지만 이건 너무하지 않습니까. 저에게는 단 한 주의 주식도 그냥 주지 않았습니다. KM 전자의 지분 가치를 아시는 분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그러면 손자에게 지분을 매각하란 말이야? 난 그렇게는 못 하겠더라.”
“아니, 그러면 자식에게는 왜 그렇게 엄하게 나오는 겁니까?”
“그건 네가 너무 무능해서 그래. 민혁이 그놈이 한 일의 반만 해.”
“진짜 너무하십니다.”
최문경 부회장은 울화가 치밀었지만 차마 더 최민혁과 관련된 일을 거론할 수가 없었다. 이미 KM 전자는 자신이 손대기 힘들 정도로 멀어졌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독하게 마음먹었다.
‘차라리 잘됐다. 아버지도 이제 다 아는 사실이니, 이번 기회에 KM 그룹 관련 매출을 다 끊어야겠어.’
오히려 최용욱 회장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상하구나. 아니, 민혁이 그놈이 뭐가 그리 급해서 그 많은 인력을 다시 채용한 거야?”
“그건…….”
“쯧쯧, 내막도 모르고 그냥 열받아서 온 거야? 너는 언제 정신을 차리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이러면 나도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다.”
“네?”
“이번에는 마지막 경고다. 괜히 민혁이 그 녀석을 건드려서 그룹을 혼란하게 만들지 마. 만약 그 사태가 일어나면 내 지분을 다 민혁에게 넘길 테니까.”
“…….”
반발하려던 최문경 부회장은 최용욱 회장이 뒤늦게 오성 전자에 한 수작을 눈치챘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이 계획한 일이 전혀 엉뚱한 양상으로 흘러가는 것에 분노했지만 내색할 수는 없었다.
‘민혁이 이 새끼, 두고 보자. 반드시 박살 내 주마.’
* * *
최용욱 회장도 돌아가는 상황을 보자 마냥 손 놓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최문경 부회장이 돌아가자 채윤집 집사에게 KM 전자 상황을 다시 파악하라고 지시했다.
채윤집 집사는 비록 은퇴하기는 했지만 KM 그룹과 관련된 정보를 매집했다.
“아마 신제품 개발 때문일 겁니다. 예상 수량은 대략 10만 대 분량인데, 그것 때문에 KM 안산 공장이 정신이 없습니다.”
“수량이 제법 많기는 하지만 고작 그것 때문에 문경이가 그 난리야?”
“그건 아닙니다. 협력업체 이야기로는 전혀 다른 모델입니다.”
최용욱 회장은 눈을 끔뻑거렸다. 최민혁에게 지분을 넘기기 전에 이미 KM 전자의 사정을 상세히 조사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게 무슨 소리야? 아니, 그러면 TV 사업부의 신제품 개발이 끝났다는 소리야? 언제부터 그런 제품을 개발했는데?”
채윤집 집사는 KM 전자 상황도 두루 경험한 터라 대답하지 못했다.
“그건 아직 파악 중입니다. KM 전자 내부 보안이 워낙에 강화되면서 그것까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채윤집 집사 능력을 잘 아는 최용욱 회장은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런 사이드 스토리보다는 영문을 알고 싶었다.
결국 참다못한 최용욱 회장은 최민혁에게 직접 전화했다.
[넌 이놈아, 지분 받았다고 이제 할아비는 뒷전이야? 전화 한 번 안 하느냐.]
[죄송합니다. 요즘 이것저것 일이 많아서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게 손자가 할아비에게 할 소리야? 최소한 주말에는 와서 이 할아비 얼굴을 봐야 할 것 아냐?]
[정말 바쁩니다.]
[허, 이놈 봐라.]
최용욱 회장도 막상 통화하고서야 은근히 최민혁이 괘씸했다.
지분을 받고 나서는 나 몰라라 하는 태도가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당장 최민혁이 무슨 짓을 하는지 그게 더 알고 싶었다.
[이번에 새로운 신제품이라도 개발하는 거야?]
[신제품 개발 맞습니다.]
[그러면 한 푼 두 푼 들어가는 일도 아닌데, 최소한 이 할아비에게 와서 이야기를 해줘야 할 것 아니냐. 내가 지금 그 중요한 사실을 이렇게 전화 걸어서 들어야 하는 거야?]
[워낙에 바쁘게 움직인 나머지 미처 할아버지 생각을 못 했습니다. 곧 시제품을 내보일 예정입니다. 그때 가서 제가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좀 참아 주세요.]
[너 지금 이 할아비도 못 믿는 거야?]
[할아버지는 믿지만, 그 주변 사람은 그렇지가 못 합니다. 이번 오성 전자 사태도 첫째 큰아버지 솜씨로 추정하니까요.]
[그걸 어떻게 확신하느냐. 증거도 없이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거라.]
[압니다. 그래서 할아버지에게 따지지 않은 겁니다. 하지만 보안을 위해서 그런 것이니, 할아버지도 이해를 해주세요.]
[내 지분 승계받았다고 이제 막나가는 거야?]
[할아버지, 전 공짜로 지분 받겠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돈 주고 사들이겠다고 했고, 할아버지가 자발적으로 주신 겁니다. 그 일은 그것으로 끝난 겁니다. 그리고 KM 전자는 제가 알아서 할 겁니다.]
딱히 따지려고 전화하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서 전화했다. 그런데 최민혁의 반응은 예상과는 많이 달랐다.
[좋다. 그러면 언제쯤이면 내가 알 수 있겠냐?]
[이 주만 기다려 주세요. 그때는 할아버지께 샘플을 보낼 겁니다.]
[그래. 알았다.]
최용욱 회장은 전화를 끊고 나서도 한동안 이 건방진 손자 때문에 화가 났다. 새삼 왜 최문경 그 녀석이 그토록 난리를 치는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반대로 의문이 절로 떠올랐다.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이 녀석이 이렇게까지 비밀리에 작업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