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107화 (107/1,021)

#107

오영근 사장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괴짜인 오상현 과장이 따르는 최병연 팀장을 쳐다보았다.

문득 지난 일이 떠올랐다.

그때는 왜 최훈열 전무를 적극 말리지 않았나 새삼 후회가 됐다.

잊고 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자 새삼 최민혁이 왜 이런 자리를 만들었는지 이해했다.

‘조직이 잘못했어.’

회사의 잘못된 악습이라는 걸 알았다 한들 이제 와서 손을 댈 수도 없었다. 그런데 최민혁은 결국 바로 잡았다.

이런 일은 결국 사내 임직원 사이에도 큰 뉴스가 될 것이 분명했다.

미소 짓고 있는 최민혁 실장을 다시 한번 감탄 어린 시선으로 바라본 후에 최병연 팀장에게 말했다.

“최 부장.”

“네.”

“지난 일은 솔직히 자네에게 책임을 묻기도 그래. 하지만 그 일은 어떻게 해도 잊히지 않을 거야. 그런데 내가 살아 보니 그렇더라고. 시간이 약이야. 조금 힘든 점이 있어도 초심을 잊지 말았으면 해.”

구수한 오영근 사장의 훈시.

오성 전자의 엄격한 임원과는 차원이 다른 모습이다.

이 자리에 올 때까지도 번민했던 최병연 팀장 마음이 편안했다.

KM 전자를 떠난 이후에도 늘 힘들 때면 이곳을 생각했다.

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오영근 사장의 온화한 경영관에 있었다.

아버지같이 느긋한 태도.

당장 눈에 보이는 결과가 나오지 않아도 그저 지켜봐 준다.

그게 여유를 만든다.

최병훈 팀장은 그런 분위기 속에서 최선의 성과를 이끌어 냈다.

그런 오영근 사장의 모습은 최민혁 실장과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최병연 팀장도 오영근 사장이나 문형섭 부사장을 다시 한번 살피면서 자기 막내아들보다 어린 최민혁 실장을 힐끗 다시 쳐다보았다. 솔직히 최민혁에 관한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면 이 자리에 있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들은 얘기들이 사실일까?’

최민혁은 물론 별다른 태도 변화를 보이지 않았는데, 이미 잡은 물고기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보다는 언제 손을 봐주려고 했던 김현우 상무 소식에 피식 웃었다.

‘안 그래도 오성 전자는 좀 더 엿 먹이려고 했는데, 잘되었네. 이동호 교수를 통해서 오성 전자에 비디오 특허 진실을 슬쩍 흘리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 사내 갈등은 더 증폭될 텐데, 과연 우리 김 상무가 얼마나 버티나 볼까?’

흉악한 표정.

면접을 진행하던 오영근 사장을 비롯한 다른 임원은 최민혁의 차가운 얼굴을 보자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또 무슨 일을 벌이려는 걸까?’

* * *

최민혁은 STB 사업부 매각 이후로 일거리가 없어서 멍해 있는 임기석 부장을 따로 호출했다.

“요즘 어때요?”

“좀 그렇습니다. 말도 나오고 있고요.”

최근 30명이 넘는 경력 사원 충원 소식을 들은 임기석 부장은 한껏 풀이 죽었다. 불과 STB 사업 매각 전만 해도 나름 기대를 했는데, 최민혁은 아무런 지시도 내리지 않았다.

“일이 없어서 느긋할 텐데, 오히려 불만이 나오는 겁니까?”

머리를 긁적인 임기석 부장도 민망했다.

“일이 없으니, 오히려 불안한 듯합니다. 명확한 지시도 없이 그냥 모호한 말만 하셨지 않습니까?”

“그러면 이제부터 슬슬 일을 해봐야겠군요.”

임기석 부장의 눈빛이 샛별처럼 반짝였다. 노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이제는 지긋지긋했다. 최근 들어온 1,300억의 현금을 감안하면 KM 전자가 망할 리는 없겠지만, 오히려 불안했다.

“그러면 김현우 상무 소식도 들었습니까?”

“네? 이미 퇴직한 사람인데…….”

“복수는 해야죠.”

“무슨 말씀이신지…….”

“한 번에 두 마리 토끼를 잡으란 겁니다.”

그는 미리 작성해 놓은 비디오 관련 특허를 책상 서랍에서 꺼내 내밀었다.

김명준 과장은 요즘 조용히 지켜만 보고 있었지만, 또 갑자기 튀어나온 새로운 기술 자료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도대체 최민혁이 어디서 저런 자료를 구하는지 알고 싶었다.

그건 임기석 부장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는 특히 기존 비디오 특허보다 더 구체적이고, 발전된 특허에 입을 딱 벌렸다.

“이, 이게 뭡니까?”

“비디오 특허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역시 압축 기술입니다. 그중에 버퍼 점유율을 제어하는 방법으로 레이트 버프와 제어 방법도 포함합니다.”

다른 하나는 텔레비전 이미지의 서브 픽셀 세트를 결정하는 방법으로 모션 벡터 추정 장치에 대한 구체적인 기술이었다.

이 방법은 김현우 상무에게 간 특허와는 달리 아주 구체적이고, 실제로 구현도 어렵지 않다. 스펙 자체가 더 줄어든 것이다. 후일 방송 동영상과 관련해서 적용되는 기술로, 그 응용 가치는 기존 그 어떤 특허와도 비교하기 어려웠다.

‘다행이라면 아직 특허로 등록되지 않았다는 거야.’

“아마 그 정도라면 이동호 교수라도 쌓인 불만에 대해서 더 말하지 않을 겁니다. 가서 잘 좀 이야기해서 제대로 진행하세요. 이왕이면 이번 MPEG 발표회에도 참여해서 제대로 알려 보세요.”

“아, 알겠습니다.”

“혹시라도 너무 독불장군식으로 나갈 필요는 없어요. 아마 비슷한 연구를 하는 연구 팀도 있을 테니, 그쪽과 손을 잡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혹시라도 유사한 특허로 법률적인 문제가 나올 것을 염려한 말이라는 것을 알아들은 임기석 부장은 잠깐 그의 눈치를 보다가 결국 조용히 실장실을 나서고 말았다.

김명준 과장도 어지간해서는 입을 다물려고 하다가 혹시나 싶어서 질문했다.

“실장님, 저 특허는 또 언제 고안하신 겁니까?”

“자기 전에 틈틈이 아이디어를 스케치해 봤어요. 이동호 교수가 연구한 프로젝트도 꽤 도움이 되었고요.”

뻔히 최민혁의 사생활을 아는 김명준 과장은 솔직히 믿을 수가 없었지만, 굳이 내색하지는 않았다.

“정말 놀랍습니다.”

“저야 아이디어만 제시한 것뿐이죠. 실제로 구현하고, 적용하는 것이 더 어려울 일입니다.”

“그렇다고 알겠습니다.”

“과장님도 한번 연구해 보실래요?”

“좋습니다.”

김명준 과장은 자기 전공이 아님에도 자료를 받아서 살펴보았다. 봐도 무슨 말인지 도저히 알 수는 없었다.

‘영민이 이 친구에게 한번 문의나 해 봐야겠어.’

* * *

임기석 부장은 여전히 많은 의문을 가진 채 수정 특허안을 다시 살펴보고는, 대학 스승인 이동호 교수를 다시 찾아갔다.

“저 왔습니다.”

오성 전자에 다시 한번 개발 자료를 몽땅 털린 이동호 교수는 그다지 그를 반기지 않았다.

“나 강의 들어가야 해.”

그는 슬쩍 이동호 교수 앞을 가로막았다.

“아니, 교수님도 참. 지난 일은 제가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강제로 임기석 부장을 밀어붙인 채 사무실을 나서던 이동호 교수는 일축했다.

“일없어.”

안 그래도 오성 전자라면 치를 떠는 이동호 교수는 이번 일 때문에 또 비록 외주를 받았다고 해도 연구 성과를 다 틀린 것 때문에 분노해 있었다.

이미 내막을 잘 아는 임기석 부장은 억지로 이동호 교수의 양손을 잡은 채 연구실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교수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새로운 프로젝트를 곧 시작할 테니까요. 저희 실장님이 이미 사전 준비를 다 끝냈다고 합니다.”

“이 손 놔! 네놈이랑 다시는 일 안 해!”

“하지만 이번 프로젝트는 그 비디오 특허를 능가하는 겁니다. 충분히 표준이 될 만한 일인데도 포기하실 겁니까?”

“헛소리 마.”

말로는 설득이 안 되자 임기석 부장은 이미 내부적으로 검토해서 어느 정도 정리한 보고서를 이동호 교수 눈앞에 살짝 흔들었다.

“이거 보면 교수님도 왜 우리가 그랬는지 다 이해가 갈 겁니다.”

“개소리 마. 다시는 네놈에게 안 속는다. 솔직히 네놈이 더 나빠. 오성 전자 그 새끼들이야 돈을 줬다고 하지만 너희는 그것도 아니잖아. 내가 프로젝트 연구 자금이 적어서 이러는 게 아니야. 너도 알지?”

분노한 이동호 교수의 눈앞에 기술 자료를 바로 보여 주었다.

“압니다. 그래서 이 진짜 연구 자료를 가져온 겁니다. 이건 교수님을 일약 세계적인 엔지니어로 만들 수 있는 자료입니다.”

쉽게 포기하지 않는 임기석 부장의 행동에 눈살을 찌푸린 이동호 교수는 짜증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기석아, 이제 그만 좀 하자. 난 너희한테도 질렸어. 도대체 뭘 하자는 건지 그 속셈을 모르겠다. 아니, 오성 전자에 팔아치울 거면 왜 연구를 하는 거야?”

“좋습니다. 이거 보고 실망하시면 두 번 다시 교수님을 안 찾겠습니다.”

“좋아. 도대체 무슨…….”

대수롭지 않게 자료를 받아서 내용을 살피던 이동호 교수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이미 비디오 특허 관련 작업을 해본 터라 보다 발전되고, 구체적인 보고서에 충격을 받은 것이다.

특히 버퍼 제어 방법과 모션 벡터 처리에 대한 구체적인 인코딩, 디코딩 알고리즘이 다 들어가 있기에 더 매우 놀랐다.

핵심을 찌르는 단순한 논리는 기존 비디오 특허를 무효로 만들 정도로 강력했다.

“맙소사!”

임기석 부장 역시 피식 웃었다.

“아마 이 논문이 발표되면, 오성 전자 얼굴이 볼 만할 겁니다. 제대로 엿 먹이는 거죠. 이래도 이번 프로젝트 안 할 겁니까?”

“이놈아, 왜 먼저 이야기를 안 한 거야?”

버럭 화는 내는 이동호 교수.

임기석 부장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한 가지를 더 말해 주었다.

“기존 비디오 특허의 문제점과 내부 사정을 여기 오는 오성 전자 직원 통해서 우선 흘려주세요. 김현우 상무가 연구와 관련이 없었던 부분도요. 그냥 협박당했다고 그러세요.”

이미 다 지난 일.

굳이 긁어서 부스럼을 만들려고 하는 임기석 부장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해?”

“저희 실장님이 원하는 겁니다.”

그 역시 STB 사업부 매각에 대한 것을 이제는 안다. 그런데 지금 와서 지난 일을 다 폭로하면 김현우 상무가 비참해질 뿐이다.

“최 실장 말인가? 흠, 그렇게 안 봤는데, 심보가 고약해.”

“회사 내부적인 문제일 뿐입니다.”

“알았어. 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 뭐가 어렵겠어.”

그런데 한동안 보고서를 다시 보던 이동호 교수는 문득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가만. 그러면 지난 비디오 특허가 가짜였다는 소리잖아. 설마 엉터리 원천기술을 이용해서 무려 900억에 오성 전자에 팔아치운 건가?”

“가짜는 아니죠. 당시 구현이 생각한 것보다 더 어려웠습니다. 시스템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서 상업화하기 어려울 겁니다. 설사 한다고 해도 다른 표준이 나오면 사장되겠죠. 그리고 이런 사실은 교수님도 당시에는 잘 몰랐지 않습니까?”

“그거야 그렇지만…….”

두 가지 연구 자료를 비교하던 이동호 교수도 한숨을 내쉬었다. 한 사람이 두 자료를 가지고 장난쳤다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아무리 천재라도 그건 불가능해.’

문제는 자신이 들고 있는 수정된 비디오 특허였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나온 기술에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이거 사전에 이미 오성 전자를 엿 먹이려고 작정한 거냐?”

“설마 저희가 그렇겠습니까. 최 실장도 너무 성급하게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뒤늦게 문제를 파악했다고 할 뿐입니다. 그것은 이동호 교수님이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렇지. 나도 몰랐으니까. 그래 알았다.”

한편으로 발 빠르게 정리한 결과에 이동호 교수는 한 숨을 내쉬었다. 아니, 그 지독한 오성 전자를 한 방 먹일 수 있다는 점에 내심 싫지는 않았다.

그는 결국 찾아오는 오성 전자 직원에게 먼저 전화를 걸어서 넌지시 비디오 특허 관련 진실을 적당히 각색해서 토로해 버렸다.

* * *

직장인이 힘들어하는 문제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가장 심각하게 고민하는 것이 바로 사내 갈등이다.

아프면 병원 가서 치료하면 되지만 인간 사이의 갈등은 그렇게 해결되지 않는다.

단적인 예로 술을 싫어하는 직장인도 회식에 어쩔 수 없이 참석해서 술을 마실 수밖에 없다.

그런데 건배 소리가 계속 이어지면 상황이 많이 달라진다.

아침에 중요한 회의가 있다고 해도 그 말을 받아주는 사람은 없다.

오히려 괄시의 대상이 된다.

김현우 상무는 이런 사내 갈등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해왔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이자 대주주인 최두진 사장 덕분에 최훈열 전무와도 동등한 위치를 유지한 채 권력을 행사해 왔었다.

당연히 바보는 아닌 김현우 상무는 오성 전자로 이직하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비디오 특허 영향력을 믿었다.

이 특허라면 최두진 사장 못지않은 방패막이가 될 것으로 생각했다.

불행히도 900억 매각대금 때문에 이 특허는 STB 사업부에서 오성 전자로 다 넘어가 버렸다.

오성 전자로서는 김현우 상무를 잘라도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만 STB 사업부 인원을 감안해서 불합리한 행사를 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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