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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87화 (87/1,021)

#87

* * *

최문경 부회장 역시 심상치 않은 KM 전자의 변화를 보면서 처음부터 재조사를 시작했다. 이번에는 장승일 실장을 배제한 채 자기 인력만으로 확인했다.

그 과정에서 심상치 않은 의혹 몇 가지를 발견했다.

그는 김현우 상무를 직접 만났다.

최근 오성 전자로 옮길 때만 해도 꿈에 젖어 있던 김현우 상무는 벌써 이런저런 정신적인 갈굼에 시달리고 있었다.

심지어 자신이 맡은 사업부 실적이 나쁘면 구조조정이 된다는 소리마저 들었다.

회사를 옮긴 지 한 달도 되지 않아서 나온 이야기에 치를 떨었다.

그는 이 모든 일의 원흉으로 최민혁을 꼽았다.

“최 실장, 그 새끼 때문에 STB 사업부를 매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확히는 김현우 상무가 자기 이익을 위해서 비밀로 한 것이라는 사실을 최문경 부회장은 잘 모르고 있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아직도 최민혁에 대한 분노를 잊지 않은 김현우 상무는 지금까지 일어난 일을 하나씩 다 설명했다. 그 내용은 직접 경험하지 않는다면 잘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정말인가?”

“아니, 부회장님은 지금 제 처지를 보면서도 그런 말이 나옵니까? 최훈열 전무 구속의 배후에도 최 실장 그 새끼가 있어요!”

“…잘 이해가 되지 않아. 도대체 민혁이가 어떻게 자네를 그런 식으로 몰아갈 수가 있다는 소리야?”

“아, 진짜 답답합니다.”

울화가 치밀어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김현우 상무 역시 답답하기는 매한가지다. 사실 그 역시 심증만 있을 뿐이다. 직접적인 증거는 없었다. 최민혁에게 당한 협박 역시 둘이 있을 때 당했던 것이다.

그나마 비디오 특허 덕분에 지금은 버티고 있어서 그것까지 말하지 않았다.

“전 충분히 할 만큼 설명했습니다. 나머지는 부회장님이 알아서 하세요. 그리고 생각을 해보세요. 아니, 최 전무는 바보가 아닙니다. 알고 보니 중앙지검 차장 검사와 판사에게도 손을 썼다고 하는데, 구속까지 되는 게 말이 됩니까?”

몇 번 더 설득하던 김현우 상무는 한마디만 남긴 채 그냥 힁허케 떠나 버렸다.

“흠.”

최문경 부회장도 그제야 뭔가 좀 비정상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권재홍 비서실장을 통해서 다시 최민혁을 철저히 조사했다.

하지만 주주총회에서 430억을 벌었다고 밝힌 것 외에 특별하게 나오는 것은 없었다. 그는 귀신에 홀린 사람처럼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마침 최용욱 회장의 호출을 받았다.

‘아무래도 내가 민혁 이놈을 너무 과소평가한 것 같아. 철저히 감시해야겠어.’

* * *

최민혁에 관한 추가 조사가 진행될수록 조금씩 이상한 부분이 드러났다.

다만 그 사실만 놓고 봐서는 딱히 최민혁의 능력이 대단하다는 것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KM 전자의 가장 큰 변화라면 최훈열 전무 구속, 최두진 사장 지분 매각, STB 사업부 매각으로 나눌 수가 있었다.

최훈열 전무의 구속과 관련해서는 최민혁과 관련된 증거는 없었다.

그나마 최두진 사장의 지분 매각에 관여한 것과 STB 사업부 매각에 손을 썼다는 정도였다.

‘확실히 900억에 매각한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지.’

최문경 부회장은 드러난 이 사실을 토대로 다시 최민혁에 관한 조사를 진행했고, 최용욱 회장의 서재를 찾았다.

그 자리에는 최동영 상무 역시 함께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이전과는 달리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민혁이 녀석에 대해 조사했나 보군.’

두 사람은 서로 시선을 교환했지만 별다른 감정을 보이지 않았다. 최민혁에 대해 막상 조사했지만 석연치 않다는 점만 확인했다.

최용욱 회장은 그런 두 사람을 쳐다보면서 인상부터 찡그렸다.

“아직도 KM 전자에 미련이 있다면 말해봐.”

“그게…….”

그는 짜증스러운 눈빛으로 두 사람을 쳐다보면서 혀를 찼다.

“KM 전자의 사정에 대해서는 내가 분명히 말했다. 안 회장이 이제 본격적으로 대형 TV 시장에 뛰어든다는 것을 알아야 할 거다. 당장 필리핀과 베트남에 TV 공장을 추가로 신설할 테니까.”

“그, 그게 정말입니까?”

“팬히터, 보온병을 비롯한 자잘한 품목을 다 접을 거다. 하청 OEM 방식업체 숫자도 20개사로 대폭 줄인다고 봐야 해.”

오성 전자는 구조조정의 일환으로 팬히터, 냉온장고 사업을 정리하기로 했다.

“대신에 드럼세탁기나, 초대형 냉장고, 대형 TV를 비롯한 가전 사업군에 집중할 거다. 올해를 시작으로 조 단위 규모의 대규모 투자가 진행될 거다. 그런 오성 전자와 붙어서 이길 수 있겠어?”

“맙소사.”

“너희 두 사람은 아마 STB 사업부를 900억에 매각한 것 때문에 눈독을 들이나 본데, 그것도 안 회장이 그런 것까지 다 고려한 거다.”

사실 최용욱 회장과 오성 전자 안건민 회장과는 꽤 친한 사이다. 오성 전자 반도체도 따지고 보면, 최용욱 회장의 조언을 받아서 시작했기 때문이다.

최용욱 회장으로서는 패키지 반도체 쪽만 전담하면서 이왕이면 국내 반도체 업체가 우군으로 있으면 좋다고 판단한 것이다.

결국 이런저런 이해관계가 얽혀 있어서 두 기업 관계는 다른 대기업에 비해서 그렇게 나쁜 편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런 인간적인 관계가 사업 전략을 바꿀 정도는 아니었다.

“문제는 이제 시간이 너무 많이 흘렀다는 거야. KM 산업도 그 덕분에 혜택을 많이 봤어. 이제 세계시장을 주도할 수 있으니까. 나도 이제는 안 회장보고 뭐라고 하기는 힘들다.”

“끄응.”

최문경 부회장도 현실을 듣자 충분히 공감하면서도 쉽게 KM 전자에 대한 집착을 떨치기 어려웠다.

최동영 상무는 더했다. 그는 KM 건설과 KM 전자 두 계열사를 묶어서 자기만의 그룹을 어느 정도 염두에 뒀기 때문이다.

최용욱 회장은 자식들의 욕망과 집착을 읽자 착잡했다. 그가 설득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저게 걱정스러워서 최민혁에 여러 가지 무리한 일을 벌였던 것이었다.

‘하지만 KM 전자 내 지분까지 승계받으면 상황이 다르겠지. 두 녀석도 쉽게 최민혁을 건드릴 수는 없게 될 거야.’

그 정도면 충분했다.

대신 두 놈에게 먹을 만한 것을 줘야 했다.

“샐로먼 브러더스을 포함해서 다른 국내 기업과 같이 연합 SB증권을 진행하기로 했다. 이미 정부에서 설립인가까지 받기로 했으니, 큰 문제는 없을 거다.”

“가만 그 일도 정부에서 제동을 걸어서 저희는 빠졌지 않습니까?”

“내가 신경을 좀 썼다. 다행히 증권사 설립은 문제가 없을 거야. 다만 다른 5개사는 현재 무리한 차입금 때문에 상황이 좋지가 않다. 그러니 기회를 잘 노리면 그들 지분을 다 사들일 수 있을 거야.”

증권사를 보유하게 되면 아무래도 자금 유동성이 좋아진다. 은행에서 압력을 받는 상황에서 꽤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최문경 부회장은 그 과정에서 세계적인 증권사인 SB를 통해서 차입금을 더 쉽게 끌어올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설마 아직도 SB에서 여전히 투자하겠다고 하는 겁니까?”

“그래. 하지만 내가 좀 더 확인할 것이 있어서 장 실장에게 보류하라고 해두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투자한다고 하는 애들 돈을 거절하다니요?”

“너는 생각이란 것을 하는 거야? 아니, 훈열이 그놈 때문에 그 난리가 났어. 정부에서는 아예 숨김없이 그대로 압력을 넣고 있어. 그런데 SB가 여전히 막대한 투자를 하겠다고 하잖아. 이상하다는 생각이 안 들어?”

“…하, 하지만 일단 투자금이 들어오고 나면 상황이 달라지지 않습니까?”

“설마 KM 산업을 담보로 해서 차입금을 받을 생각이냐?”

“꼭 그럴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KM 전자, 아니, 다른 계열사도 있고…….”

“그놈들이 못을 박았다. KM 전자가 어려우면, KM 건설이나 아니면 KM 산업을 담보로 맡기라고. 그래도 못 느끼겠어?”

조용히 있던 최동영 상무가 발끈했다.

“그건 절대로 안 됩니다!”

인상을 찡그린 최문경 부회장도 툴툴거렸다.

“요즘 KM 산업 사정을 알면 아버지도 그런 고민을 하지 않을 겁니다.”

“내년에도 그렇게 자신해?”

“물론입니다.”

“자신감은 좋구나. 만약 세계 경기가 나빠지거나 다른 일이 터진다면 어떻게 할래? 지금처럼 단기 차입금을 왕창 끌어당기는 기업이 어디 한둘이야? 너도 한부 철강이 얼마나 심각한 상태인지 들었을 텐데?”

“아버지, 그건 너무 앞서 나간 겁니다.”

“내 말은, 만약에 그런 일이 생긴다면 어떻게 할래? 국내 자금 시장이 위축되면, 당장 계열사부터 위축될 거다. 거기에 만약 반도체 경기 하락이 일어난다면 KM 산업도 휘청할 거다.”

최악의 시나리오.

요즘 장승일 실장이 기조실에서 계속 퍼트리는 일이었다.

이 안건을 보고받은 KM 그룹 사장단 역시 불안에 떨었다.

KM 그룹 분위기는 불과 몇 달 사이에 천양지차로 바뀐 것이었다.

“…….”

장승일 실장의 행동에 치를 떨던 최문경 부회장도 창백한 얼굴을 한 채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불만이 많아도 조용히 듣기만 하던 최동영 상무 역시 다르지 않았다.

최용욱 회장은 가장 최근에 업데이트된 X 리포트 수정안을 두 사람 앞에 던졌고, 그는 두 사람이 창백한 얼굴을 한 채 보고서를 묵묵히 읽는 것을 보았다.

“지금 우리 그룹은 비상 상황이다. 따라서 다시 경고하는데, KM 전자에 대해서는 이제 손을 떼라. 만에 하나라도 헛짓하면 너희에게 줄 지분은 없어질 거니까.”

“아, 아버지…….”

“닥쳐. 지금은 너희 앞에 닥친 위기나 제대로 풀어가. 일단 연합 SB 증권에 대해서 지켜보겠다. 별 탈 없이 우리 거로 만들면 그때 가서 보상을 해주겠다.”

“…알겠습니다.”

두 사람은 불만이 많았지만 그렇다고 여전히 반수 이상의 지분을 가진 최용욱 회장을 감히 거스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최문경 부회장은 쉽게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아버지 행동이 뭔가 이상해. 민혁이 이놈하고 무슨 관련이 있어. 그렇지 않고야 갑자기 지분을 넘긴다는 이야기를 할 수가 없잖아.’

* * *

최문경 부회장도 김명준 과장에 대해서 알고는 있었지만, 그 능력까지는 잘 몰랐다.

김명준 과장은 갑자기 늘어난 주변의 감시 인력에 눈살을 찌푸렸다.

“실장님, 어떻게 할까요?”

평소처럼 회사에 출근하던 최민혁은 멀어지는 두 사람을 확인했다.

“첫째 큰아버지인가요?”

“권 실장 밑에 있던 친구들입니다.”

“그룹 비서실 소속인가요?”

“그건 아닙니다. 으음, 쉽게 말해서 비공식 비서 팀이라고 보면 됩니다.”

“아, 과장님처럼 사조직 비슷한 건가보군요.”

“네.”

“쯧.”

소위 말하면 대기업 소속으로 거친 일을 처리하는 이들 감시라는 것을 깨달은 최민혁은 턱을 쓰다듬으면서 다른 임직원의 인사를 받았다.

그가 지나갈 때면 이제 임직원은 딱딱 알아서 허리를 굽혔다.

딱히 강제해서라기보다는 기획실장을 보면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모습이다.

이제는 최민혁도 자신이 기획실장으로 완전히 인정받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묘한 감흥을 느끼면서 실장실에 도착하자 오혜정 비서가 모닝커피를 건넸다. 눈인사를 살짝 짓는 그녀의 모습은 이전과는 사뭇 달랐다.

‘확실히 좋아졌어.’

최민혁은 고민에 빠졌다. 그 역시 최문경 부회장이 직접 나설 것을 예상했다. 문제는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인 TV 사업부 신제품 개발이다.

‘괜히 첫째 큰아버지 귀에 들어가면 뭔가 수작을 부릴 거야.’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주변에 알려질 일이지만 지금은 곤란했다.

그렇다고 흥신소 직원을 처리하는 것처럼 부회장의 애들을 거칠게 다룰 수는 없었다.

최민혁은 고민하다가 문득 자신이 이런 일 가지고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곧바로 장승일 실장에게 전화했다.

[아, 그렇지 않아도 실장님에게 전화하려고 했습니다. 회장님의 KM 지분 증여는 별 탈 없이 마무리가 될 겁니다.]

[고맙네요. 그런데 그 지분 증여도 장 실장님의 솜씨였습니까?]

[…전 그저 사실을 회장님에게 보고했을 뿐입니다. 판단은 회장님이 하신 겁니다.]

[늘 변함이 없군요.]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그도 장승일 실장의 일 처리에 고마워서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다름이 아니라 오늘 아침부터 절 감시하는 사람이 붙었는데, 그 소속이 우리 첫째 큰아버지 호위 무사라고 하더군요. 아, 제가 장 실장님 편의를 위해서 팩스로 사진을 보냅니다.]

[…제가 한번 알아보고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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