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임기석 부장은 그 덕분에 금요일 오전에 한남동 저택에 도착할 때까지도 이 문제를 쉽게 떨치지 못했다.
저택 입구에 마중 나와 있던 장승일 실장이 그 모습에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고민거리라도 있습니까?”
“아, 아닙니다. 장 실장님, 처음 뵙겠습니다. 전 KM 전자 STB 사업부의, 아니, KM 전자의 임기석 부장이라고 합니다.”
“고민이 많은가 봅니다.”
“아무래도 사업부가 날아가면서 붕 떠버린 상태이니까요.”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최 실장님이 다 알아서 그렇게 처리했을 테니까요.”
“알고는 있습니다. 당장 일이 없어서 불편한 것뿐입니다.”
“다행입니다. 그리고 이번 일도 별다른 일이 아닙니다. 회장님께서 몇 가지 질문할 것이 있어서 부른 것뿐입니다.”
고작 계열사 부장과 그룹 회장과는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존재한다. 평범하게 월급을 받는 임기석 부장이 최용욱 회장을 개인적으로 만나는 것 자체가 특이한 일이었다.
“말씀 감사합니다. 딱히 이번 일 때문에 고민한 것이 아니라 최 실장님이 던진 몇 가지 지시 때문에 고민 중이었습니다.”
“오, 최 실장님이 말입니까? 제가 혹시 알면 안 되는 겁니까?”
“글쎄요.”
그도 곤혹스러워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하지만 장승일 실장은 저택 안으로 안내해 주면서도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최민혁 관련된 안건에 대해서는 생각보다 민감하게 반응했다.
임기석 부장도 장승일 실장에 대한 소문을 안다. 기조실이라면 최소한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알 자격이 있었다.
더욱이 최민혁이 알아서 필요한 정보를 말하라고 한 상황이었다.
“MP3 플레이어를 개발할 예정입니다.”
“MP3 플레이어? 그게 뭡니까?”
MP3 대중화는 작년 말에 시작되었는데, 아직은 많이 알려진 것은 아니었다. 그것도 PC 응용 프로그램뿐이다.
이 시점에서 MP3를 동작하는 모바일 기기에 대해서 알 리가 없었다.
선행 조사를 하던 임기석 부장도 당혹스럽기는 매한가지였다.
“저도 조사 중인데, 작년 중순에 I3enc라는 최초 MP3 소프트웨어가 나온 후에 점점 관심을 두는 사람 수는 계속 늘어나고 있습니다. 아마 이와 관련된 제품인 것 같습니다.”
“호, 그래요? 더 자세한 것을 알 수 없을까요?”
“저도 자세한 것은 모릅니다.”
하지만 오히려 겸손을 받아들인 장승일 실장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최 실장님과 같이 붙어 일하고 있지 않습니까? 뭔가 알아도 더 알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도 진짜 아는 것이 없습니다. 아마 실장님이 직접 검토해 보면 금방 아실 겁니다.”
“그렇습니까?”
장승일 실장도 썩 마음에 든 얼굴은 아니었다. 명색이 기조실을 이끌어 가는 보스였다. 최문경 부회장도 자신에게 한 수 접어주니까.
임기석 부장은 가능하면 대답해 주려고 했지만, 그 역시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그는 집요하게 집착하는 장승일 실장의 태도에 식은땀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젠장 괜히 이야기했어.’
장승일 실장은 안색을 굳힌 채 MP3 플레이어를 계속 중얼거리면서 고민에 빠졌다.
‘도대체 MP3 플레이어가 무엇일까. 최훈열 전무나 김현우 상무를 정리한 후에야 실장님이 비로소 작업을 시작한 것일까?’
* * *
서재 안에는 이미 몇 사람이 와서 최용욱 회장의 질문에 대답하고 있었다.
그중에 한 사람은 바로 안현수 팀장인데, 그 역시 곤혹스러운 얼굴을 한 채 생각보다는 집요한 질문에 일일이 대답했다.
“저도 자세한 것은 모릅니다. 실무를 담당한 이동호 교수를 직접 찾아가서 물어봐도 제대로 된 대답을 듣지 못했습니다.”
정확히는 오성 전자 실무 팀이 이동호 교수의 연구실로 찾아가서 STB 사업부 매각에 따른 요구로 연구 자료를 다 수거해 갔다.
이동호 교수는 비록 10억 가까운 투자금을 받아서 큰 이익을 봤지만, 그 싫어하던 오성 전자 직원이 온 것 자체에 잔뜩 분노했다.
그 화는 바로 안현수 팀장에게 향했다.
가서 욕만 잔뜩 듣고 온 안현수 팀장이 STB 사업부 매각과 관련된 자세한 내막을 알 수는 없었다.
최용욱 회장은 어이가 없었다.
“아니, 안 팀장, 자네는 그룹 법무 팀을 총괄하는 사람인데, 이 중요한 결과에 대해서 몰랐다는 것이 말이 되나. 그러면 누가 이 비디오 특허에 대해 안다는 말이야?”
“…죄송합니다.”
안현수 팀장 역시 순순히 자기 잘못을 시인했다. 번갯불에 콩 볶듯이 진행된 일이라고 해도 그라면 알고 있어야 할 일이었다.
다행히 그 대답을 해줄 임기석 부장이 들어왔다.
장승일 실장은 뒤로 물러나서 조용히 듣기만 했다.
이미 장승일 실장에게 들들 볶인 임기석 부장은 최용욱 회장의 굳은 얼굴을 보면서 식은땀을 흘렸다.
다행히 최용욱 회장은 임기석 부장을 타박하지 않았다. 그는 정말 궁금해서 비디오 특허와 관련된 질문들을 던졌다.
이미 최민혁에게 허락을 받은 임기석 부장은 그동안 있었던 일을 빠짐없이 다 설명해 주었다.
“…임 부장 자네가 아니라 민혁이가 이 비디오 특허 아이디어를 제안했다고?”
“네.”
“아니, 어떻게?”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아니, 이 사람아, 그게 말이 되는 소리야? 나도 알아보니, 하루아침에 만들 수 있는 결과가 아니야. 이동호 교수 팀도 의뢰를 받아서 일을 진행한 것뿐이라고. 그러면 누군가 사전에 작업을 해야 할 것 아닌가?”
“저도 실장님에게 자료를 받았을 뿐입니다.”
어이가 없어진 최용욱 회장은 툴툴거렸다.
“…설마 민혁이가 이 아이디어를 고안한 것은 아니겠지. 요즘 한국대 1학년생은 이런 특허 아이디어도 낼 수 있는 건가?”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이거야 원 내가 귀신에 홀린 것도 아니고, 영문을 모르겠어. 아니, 그러면 자네들이 이제까지 한 것은 아무도 것도 없어?”
“저희가 한 것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비디오 특허만 한 가치는 안 됩니다.”
안현수 팀장이 슬쩍 나서서 임기석 부장이 고안한 80가지나 되는 MPEG 관련 특허에 대해서 꼼꼼하게 설명해 주었고, 마지막으로 비디오 특허와의 차이점에 대해서 말해 주었다.
“결론만 말하자면 이 비디오 특허는 시스템에 바로 적용할 수 있을 정도로 구체적입니다. 다만 구현하기가 좀 까다로워서 그 부분을 개선해야 할 겁니다.”
“설마 그것만 해결된다면 MPEG 표준화로 채택이라도 된다는 소린가?”
“네.”
“허허.”
최용욱 회장도 난감한 듯 장승일 실장을 힐끗 쳐다보았다.
다행히 임기석 부장이 분위기를 파악했다.
“이런 말을 하기는 그렇지만 이 분야는 모르는 사람이 알기 어렵습니다. 이제 한창 표준화 작업이 진행 중이고, 그 기술 가치를 아는 사람도 없습니다. 최 실장님은 의도적으로 그런 부분을 가려서 외부에서 알 수 없도록 손을 썼습니다.”
“아니, 그러면 김 상무는 어떻게 알고 사업부를 매각했다는 건가?”
“최 실장님이 의도적으로 흘렸습니다.”
질문할수록 나오는 황당한 대답에 최용욱 회장도 기가 찼다.
“뭐야? 아니, 왜 그런 미친 짓을 한 건가?”
“으음, 저도 그 문제 때문에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최 실장님은 결코 그 부분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제 추측이지만 아마 표준화에 채택되지 않을 거라고 봅니다.”
“아니, 자네는 충분히 가능하다면서?”
“가능하다는 것이지, 채택된 것은 아닙니다. 아직까지 소니를 비롯한 일본 대기업이나 미국 대기업 역시 투자를 아끼지 않으니까요.”
아직까지는 다양한 업체에서 여러 특허를 열심히 출원하고 있고, MPEG 표준화에 적극적이었다. 그 치열한 경쟁의 승자가 당장은 최민혁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 정도였다.
“…….”
최용욱 회장도 그제야 돌아가는 상황을 이해하고 나서는 혀를 내둘렀다.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뜬 안현수 팀장과 입을 딱 벌린 장승일 실장을 보고서야 두 사람도 이제야 내막을 알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비디오 특허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을 이용해서 교묘하게 주변 사람을 이용해먹을 술수가 더 무서웠다.
심지어 900억이라는 돈까지 챙겼으니.
‘이놈들도 모르는구나. 민혁이 고놈이 제대로 알리지 않았어. 설마 이것을 처음부터 다 설계했다는 건가? 허, 도저히 믿을 수가 없구나.’
* * *
최용욱 회장은 최민혁이 지금까지 한 일을 꼼꼼하게 다 확인하면서 그 밑에 깔린 치밀한 심계를 느끼고는 혀를 내둘렀다.
얼핏 보면 아무것도 없는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설마 첫째나 셋째 때문일까? 그래, 그럴 수 있지. 지키지 못한 보물은 오히려 독이 되니까. 민혁이, 이놈 정말 대단하구나.’
그는 뒤늦게야 왜 장승일 실장이 최민혁에 대해서 왜 그렇게 모호한 태도를 취한 것인지 제대로 이해했다.
문득 KM 전자의 어려운 상황을 짐작하자 돈을 받고 지분만 넘길 수는 없었다.
어느 정도 파악이 끝나자 다시 최민혁을 호출했다.
“제 제안은 많이 생각해 보셨어요?”
“…그래.”
두 사람 사이에는 묘한 침묵이 감돌았다.
최용욱 회장은 그렇게 순수하던 손자의 모습을 이제 기억에서 지웠다. 그리고 자신의 앞에서 어벙한 표정을 한 최민혁의 모습을 보면서 허탈하게 웃고 말았다.
“내가 뭔가 큰 착각을 했어.”
“할아버지가요?”
“이놈이!”
“……?”
최민혁은 두 눈을 끔뻑이며 어깨를 으쓱했다. 도대체 영문을 몰랐다.
하지만 최용욱 회장도 세세하게 질문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는 이제 최민혁을 진짜 손자가 아니라 진짜 후계자 중에 한 사람으로 인정했다.
‘어떻게 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훈열이 그놈을 감방에 보낸 것도 이놈이 틀림없어.’
고심에 빠진 최용욱 회장은 원래 지분을 매각하려던 생각을 바꾸었다. 오성 전자를 상대로 무려 900억이나 갈취한 손자에게 그럴 수는 없었다.
심지어 둘째 놈을 당당하게 밟아서 승자가 된 손자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는 최민혁의 놀라운 경영 능력을 인정하고, 미리 만들어 놓은 서류철 하나를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내 지분 증여 서류다.”
“네?”
피식 웃은 최용욱 회장은 부드러운 시선으로 최민혁을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결과만 놓고 보면 경영 성과 면에서도 첫째나 셋째보다 월등히 나았다.
“그래도 명색이 할아비가 손자에게 지분을 판다는 것이 그렇지 않냐. 이번 기회에 차라리 너에게 나머지 지분을 다 넘길 생각이다.”
수천억 지분 가치를 받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누구라도 매우 놀랄 일이었다.
하지만 최민혁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그게 다냐?”
“네? 할아버지가 지분을 증여한다고 해서…….”
“허허허, 그래. 알겠다. 하지만 조건이 있다.”
“뭐죠?”
그동안 많이 고민을 해봤지만, 최민혁이 만약 최훈열에게 계속 손을 댄다면 자신도 뾰쪽한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훈열이 일에서 손을 떼거라. 그리고 첫째나 셋째에 대한 일도 마찬가지다.”
“아니, 제가 무슨 힘이 있다고…….”
시치미를 뚝 떼는 손자에게 냉정하게 말했다.
“약속만 해!”
여전히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최민혁은 다른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저는 약속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두 분이 그럴지는 모르겠습니다. 둘째 큰어머님도 빼놓을 수 없고요.”
혹시나 해서 한 질문이었지만 그 대답은 사뭇 그의 예상을 벗어났다.
최민혁의 본심을 안 최용욱 회장은 혀를 내두른 채 그의 눈을 살폈다. 냉정한 그의 눈에는 그 어떤 두려움도 없었다.
최소한 최문경 부회장에게는 두려움을 보여야 함에도 그럴 모습은 아예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놈 진짜 내 손자 맞아?’
최용욱 회장은 놀란 감정을 추스르면서 피식 웃고 말았다.
“너도 알다시피 KM 전자는 앞으로 2~3년이 고비다. 그런 상황에서 외부 압력을 받으면 더 몰락할 가능성이 높아. 그런데 KM 산업이나 KM 건설을 비롯한 계열사 역시 마찬가지로 지금은 내실을 다져야 할 시기야. 따라서 당분간은 내부 갈등은 곤란하다.”
사실 최민혁도 시간을 번다면 굳이 반대할 이유는 없었다. 그 역시 규모를 키워야 최문경 부회장과 싸움에서 이길 수가 있기 때문이다.
“전 할아버지가 중재한다면 따르겠습니다. 다만 그쪽에서 먼저 공격한다면 그냥 있을 수가 없습니다. 전 앉아서 당할 생각이 없기에 먼저 선제공격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
최민혁의 본심을 확인한 최용욱 회장은 이 일을 심각하게 생각했다.
‘역시 이놈이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