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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46화 (46/1,021)

< #046 >

기업 규모가 작은 곳에서 큰 곳으로 이직하면 직급은 내려간다. 장승일 실장 위치를 고려하면 기껏해야 오성 전자 기획실 팀장급 수준이다.

그런데 본부장 자리를 그냥 준 것은 그만큼 장승일 실장을 높이 평가했다.

“제가 그걸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저는 KM 그룹이 좋습니다.”

권태성 실장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해서 힐끗 이 일을 주도한 황광수 차장을 쳐다보았는데, 그 역시 상상 못한 대답에 식은땀을 흘렸다.

“으음, 이런 말 하기는 그렇지만 지금 하는 일에 만족하십니까. 지금도 최훈열 전무 재판에 대응하는데, 아마 여론 때문에 실형 나옵니다. 그 후에 최훈열 전무가 김명준 실장을 이번 일을 명분으로 토사구팽 시킬 겁니다.”

“압니다.”

“......설마 최문경 부회장을 믿는 겁니까. 제가 알기로 KM 그룹 실권을 장악한 후에 가장 먼저 장 실장을 쳐낼 사람이 그입니다.”

“잘 아시네요.”

씁쓸한 얼굴의 장승일 실장은 새삼 상대가 자신을 감시라도 한 것처럼 기막힌 타이밍에 연락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히려 어리둥절한 권태성 실장 모습에 피식 웃었다.

“이번에 오성에서 와이드 TV 모델인 더블와이드 신제품을 발표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혹시 귀사에서 TV 사업에 이제 본격적으로 뛰어드는 겁니까. 사직서를 낸 임권순 팀장이나 저를 스카우트하려는 것도 그 사전 정지 작업입니까?”

“그거야......”

이제까지 거의 표정 변화를 보이지 않던 권태성 실장은 불과 한 달 남짓한 시간에 다시 만난 장승일 실장 태도는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서 당혹했다.

장승일 실장은 굳이 더 질문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만 왜 상대가 이렇게 적극적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아직은 37인치 이상의 고가 TV 시장은 성숙하지 않았는데, 굳이 오성 전자가 이 시기에 뛰어들 필요가 있습니까?”

“......”

권태성 실장은 잠깐 머뭇거렸다. 이미 상대 마음을 굳혔다는 것을 안 이상 회사 내부 사정을 말할 수는 없었다.

“제가 알기로 저희 최 회장님과 오성 그룹의 안 회장님은 친한 것으로 압니다. 그런 상황에서 서로 얼굴을 붉혀가면서 애매한 TV 시장보다는 더 나은 사업도 많지 않습니까?”

안 회장 이야기가 나오자 권태성 실장은 결국 속내를 털어놓았다.

“이미 LC 전자는 4백만원대 와이드 30인치대 TV 가격을 대폭 낮추었고, 28인치 제품을 200만원대 TV 가격에 시판했습니다.”

더블스캔 방식으로 주사선을 확장한 와이드 TV 제품을 선보인 대운전자 역시 이 새로운 전장에 같이 뛰어 들었다.

“이미 TV 시장은 전운이 고조되고 있는 전쟁터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오성 전자도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KM 전자 TV 사업부를 노리는 겁니까?”

“곤란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그쪽 KM 전자 회사 사정이 어려운 것은 알지만, 그것은 KM 전자 사정일 뿐입니다.”

냉랭한 말에도 장승일 실장은 자신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자 딱히 상대를 향해서 화내거나 감정을 토로하지 않았다.

그저 최훈열 전무를 원망했고, 문득 한 사람이 떠올렸다.

‘최 실장님은 이런 사실을 알까. 그래도 최 실장님이라면 이런 상황에서도 대안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나 혼자만의 착각일까?’

스스로 생각하고도 고작 대학교 1학년생에 의존하고 있으니, 어이가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쉽게 상대 제안을 거절할 정도로 마음은 편했다.

오성 전자는 먼저 커지는 한국 TV 시장을 정복해 승자가 된 후에 다시 해외 TV을 본격적으로 노크할 계획이다.

그 시장은 절대 작지 않았다.

그 전쟁을 위한 사전 정지 작업이 바로 자신의 스카우트였다.

“말씀 감사합니다.”

권태성 실장은 일어나는 장승일 실장을 보자 다급하게 따라붙었다.

“저기 장 실장님, 혹시 직위가 마음에 들지 않으신 것 같은데, 오성 전자 본부장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본부장을 시작으로 그다음부터는 계열사를 한 번 쭉 돌면서 경험을 쌓고, 결국 그룹 기획실로 옮깁니다. 다른 사람과는 차원이 다를 겁니다.”

“저를 높이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제 마음은 변치 않습니다.”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 장승일 실장은 오성 전자의 뜨거운 스카우트 제안에도 당당히 거절한 모습에 아직도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구길모 과장과 같이 조용히 떠나버렸다.

“허, 나 이거야 원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네. 황 차장, 도대체 어떻게 된 건가?”

황광수 차장은 잠깐 머뭇거리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회장님은 양아들이나 마찬가지로 대우하는 분이니, 제가 이미 말했지만, 능력을 떠나서 장 실장님은 쉽게 배신할 타입은 아닙니다.”

“아니 이게 무슨 배신이야. 어차피 다음 KM 그룹 후계자 중에 장 실장을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 친구는 KM 그룹에서 왕따야!”

“그렇게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상황이라고 해서 쉽게 포기 안 합니다. 그래서 장 실장님 스카우트에 이렇게 공을 들이는 것 아니겠습니까?”

“끙.”

그도 황광수 차장 통해서 장승일 실장 능력에 대해서 알고, 철저히 조사했다. 결국, 윗선에 보고 해서 스카우트 전략까지 짰다.

윗선에서 오히려 더 관심을 둬서 따로 장 실장에 관해서 조사까지 진행했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스카우트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런데 실패했으니, 제대로 긁어서 부스럼을 만든 것이다.

‘젠장맞을 괜한 짓을 했어.’

***

와이드 TV 문제 때문에 우울한 장승일 실장은 오영근 사장실을 찾아갈 때만 해도 인사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정 안 되면 오영근 사장을 그냥 유임시키는 것도 한 방법이었다.

그런데 성격이 급한 문형섭 부사장은 최민혁 실장을 달달 볶아서 와이드 TV의 실제적인 문제점을 가져와서 털어놓았다.

“국내에서 DVD는 매니아가 아니고는 구하기조차 힘듭니다.”

DVD 컨텐츠 자체가 없는 상황에서 VCR도 서서히 몰락하는 시기였다.

“그런데 방송국에 알아보니, 이놈들이 아직 제대로 준비도 안 했다지 뭡니까. 대답이 정말 가관입니다. 아니 제조사와 정부의 압박 때문에 안 된다고 말을 해야 했는데, 어쩔 수 없었다는 소리는 또 뭔지 모르겠습니다.”

방송국에서 걱정하는 것은 4:3 비율로 화면을 억지로 늘려서 봐야 하는 시청자가 피로를 호소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더 황당한 것은 화면이 옆에 잘리는 것을 감안하면 32인치 와이드 TV 면적이 일반 29인치 면적과 비슷하다는 겁니다. 그런데도 두 배 가격으로 파는 겁니다. 이게 말이나 됩니까?”

“......”

어지간해서는 감정 변화가 없는 장승일 실장조차 최민혁이 제안한 수정 기획안을 꼼꼼 확인하면서 멍하니 쳐다보기만 했다.

‘아, 이런 생각을 왜 못했을까.’

최훈열 전무에 대한 여론몰이는 한풀 꺾였기는 하지만 여전히 난리였다. 회사 주가는 바닥을 모르고 떨어졌다.

오성 전자는 숨김없이 그대로 KM 전자를 노리는 중이었다.

모든 제반 환경 때문에 혼란스러운 장승일 실장은 새삼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실로 믿기지 않는 보고서입니다!”

“오, 우리 장 실장님도 놀랄 때가 있습니다. 하긴 저도 이 보고서 처음 보고, 어이가 없었습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이런 사실을 어떻게 아신 겁니까?”

문형섭 부사장은 뒤늦게 멋쩍은 표정을 한 채 어깨를 으쓱했다.

“우리 최 실장님 솜씨입니다. 걱정하지 말라고, 이 보고서를 가져왔지 뭡니까.”

“최민혁 실장님이 만든 제안서라고요? 정말 믿을 수가 없습니다.”

입에서 감탄을 멈추지 않는 장승일 실장.

이제까지 그렇게 자신의 마음을 괴롭힌 상황이 단숨에 해결된 것에 경탄했다.

진심으로 감탄한 장승일 실장은 보고서를 몇 번이나 다시 살폈고, 아직도 정신이 나가 있는 구길모 과장에게도 넘겨서 확인을 시켰다.

구길모 과장은 기조실보다 월등히 나은 KM 전자 기획팀의 역량에 놀라서 최민혁 실장 능력을 다시 보았다.

어려운 문제가 해결되자 사장실 분위기는 부드럽게 바뀌었다.

한선화 비서는 마치 자기 일인 양 기뻐한 채 특채 녹차를 내왔다.

오영근 사장도 분위기가 달라지자 은근히 사임에 대한 뜻을 밝혔다.

장승일 실장은 바로 그 제안을 거절했다.

“지금은 안 됩니다.”

“지금 와서 좀 늦은 이야기이지만 나도 최 전무 일에서 벗어날 수가 없네. 최 전무를 암묵적으로 내버려둔 것은 나였으니까.”

장승일 실장도 실제로 중간 관리층에서 계속 올라온 보고를 덮을 사람이 오영근 사장이라는 것을 추론했지만 최훈열 전무에 대해서 할 말이 많았다.

“저는 KM 전자 내부 고발에 대해서 몰랐겠습니까. 알아도 회장님 뜻을 저버릴 수가 없어서 나설 수가 없었습니다.”

오영근 사장도 최용욱 회장 이야기가 나오자 나직이 신음을 토했다.

“으음.”

“사장단 회의에서 회장님의 불편한 시선을 느낀 것은 이해합니다. 그런데 회장님이 오 사장님이 중간에 잘 중재해주지 못한 것 때문에 실망한 겁니다.”

그도 억울한 듯 툴툴거렸다.

“최 전무 성격을 알면서 그런 말이 나오나?”

“압니다. 그래서 이번 일은 그냥 서로 덮어두는 것이 최선입니다. 이미 최 전무는 구속되었고, 실형이 불가피합니다. 이제는 남은 사람이 힘을 합쳐서 이 난국을 극복해야 합니다.”

“......”

예상 밖의 대답에 오영근 사장도 힐끗 갑자기 침묵하고 있는 문형섭 부사장을 쳐다보았다.

문형섭 부사장은 어깨를 으쓱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장 실장님이란 소리가 절로 나옵니다.”

“하지만......”

“사장님 사임 문제는 제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회사 일에만 집중해 주세요. 회장님이 원하는 것은 바로 이런 보고서로 외부 환경에도 꿋꿋하게 자리 자리를 지키기를 원합니다.”

장승일 실장은 자기 설득이 먹혔다고 판단하자 넌지시 최민혁 실장 이야기를 꺼냈다가 사업부 구조 조정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솔직히 회사 돈만 축내는 이들에게 반감이 있는 문형섭 부사장은 노골적으로 툴툴거렸다.

“다른 것을 다 떠나서 최 실장 의견도 일리가 있습니다. 오성 전자에 대응하기 위해서라도 불필요한 사업과 인력을 정리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장승일 실장도 공감하지 않았다.

“굳이 기존 VCR 사업부 이름까지 바꾼 STB 사업부는 비록 적자이기는 하지만 미래 성장 엔진으로 필요한 사업입니다. 그것을 그냥 최 실장님 의견만 듣고 없앨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그 문제는 장 실장님이 최 실장을 설득하는 것으로 합시다.”

“제가 최 실장을 만나 보겠습니다.”

“안 그래도 회사가 어수선한데, 될 수 있으면 조용히 넘어갑시다.”

***

와이드 TV에 대한 걱정을 털어버린 장승일 실장은 잠깐 본사에 가서 이 문제를 재검토했고, 결과에 대만족했다.

그는 오영근 사장에게 큰소리쳤지만 새삼 최민혁 능력을 고려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도대체 최민혁이 어떻게 나올 지도 검토했다.

그런데 기조실에서도 특별하게 나오는 것은 없었다.

철저한 준비를 끝낸 장승일 실장은 마음을 단단히 한 채 최민혁을 찾아갔다.

“오, 장 실장님 아닙니까. 오랜만입니다.”

“안녕하세요.”

장승일 실장은 가볍게 인사했지만, 너무 기뻐하는 최민혁을 보자 마음이 편치 않았다. 자연스럽게 최훈열 전무 구속 과정을 떠올렸다.

최용욱 회장조차 두 손을 들 정도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지만, 결과는 완패였다.

‘이미 끝난 일인데, 그 일은 이야기 하지 말자.’

결국 최민혁이 꺼낸 사업부 구조 조정 문제에 집중했다.

“제가 오 사장님에게 듣기로 실장님이 사업부를 재검토한다고 한다고 들었습니다.”

“아, 그 정도는 아닙니다. 그냥 가볍게 확인만 하는 겁니다.”

‘가볍게’란 말을 최훈열 전무 구속 사건을 떠올리면서 간단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실장님, 지금 KM 전자는 오성 전자의 압박 때문에 큰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내부 문제는 심각한 사태를 자아냅니다.”

겉으로 기분 좋아 보이는 최민혁이라서 강한 압박에 반박하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최민혁은 오히려 한껏 진지한 얼굴로 툴툴거렸다.

“그건 장 실장님이 잘못 알고 있는 겁니다. 우선 STB 이야기만 예를 들죠. 단순 아날로그 STB 역시 다양한 문제 때문에 STB 시장이 그렇게 커지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한 번 거래만 뚫으면 대규모 거래가 가능합니다.”

“그건 구조적인 한계가 있는 아날로그 STB에서는 어렵고, 디지털 STB으로 넘어가야 그렇게 될 겁니다. 그런데 그 시기는 앞으로 7~8년 후에나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

다른 사람과는 달리 시장에 대한 안목이 탁월한 장승일 실장은 심장이 터지는 충격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사실 아날로그 STB의 여러 가지 문제는 계속 나왔지만, 기술이 모든 것을 해결할 것이라 믿었다.

문제는 그 시기인데, 4~5년 후라면 디지털 방송이 대세가 된다는 점이다.

즉 디지털 STB이 나오게 되면 상황이 아주 달라진다. 말 그대로 아날로그 시대에서 디지털 시대로 넘어가는 대변화가 일어난다.

그 변화 중의 하나가 대량의 디지털 데이터 표준화인 MPEG(Moving Picture Experts Group)이다.

< #046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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