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45 >
단단히 마음먹은 오영근 사장 말에 문형섭 부사장도 무조건 주장을 고집할 수는 없었다. 결국, 오영근 사장이 떠나면, 최훈열 전무가 없는 상황에서는 자신이 사장이 될 것이다.
문제는 자신의 후임이다.
“......설마 부사장 후임에 김현우 상무를 올리자는 겁니까?”
“후유.”
김현우 상무는 회사 내부에서도 최훈열 전무보다 못해도 말이 많았다. 특히 여직원 성희롱, 폭언, 폭행 이야기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직원 중에 경찰에 고소해서 크게 문제가 될 뻔한 일도 가까스로 넘어간 적이 있었다.
대주주 입김에서 벗어나지 못한 오영근 사장도 뒤늦게 자신이 자리를 지키는 것보다 못한 상황에 인상을 잔뜩 찌푸렸고, 자포자기 심정으로 툴툴거렸다.
“정 안 되면 최 실장도 있지 않습니까?”
“설마 지금 대학교 1학년생을 부사장 자리에 앉히자는 말씀입니까?”
“그게......”
그는 스스로 주장하고도 대답하지 못했고, 문형섭 부사장 역시 다르지 않았다.
하도 대안이 없어서 한 말이지만 두 사람도 이 안건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KM 그룹보다 못한 중견 기업이라고 해도 대학교 1학년 오너 자식을 부사장은커녕 기획 실장으로 앉히는 회사는 없었다.
하물며 한국 10대 그룹에는 속하지 못한다고 해도 30대 그룹을 꼽히는 KM 그룹 계열사에 최민혁을 부사장으로 앉히면 한국 재계 역사상 초유의 일로 한국 언론의 조롱거리가 될 것이 뻔했다.
더욱이 두 사람은 차마 외부에서 수혈하는 것도 말하지 못했다.
지금처럼 회사가 혼란한 상황에서 잘못된 인사가 들어오면 진짜 회사는 당장 망하고 말 것이다.
아무리 둘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진짜 큰일이다.’
***
한선화 비서도 오늘따라 사장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서 외부에서 걸려온 전화를 다 커트했다. 심상치 않은 회사 분위기를 고려해서 눈치껏 행동했다.
그런데 최민혁 실장이 나타나자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곱슬머리, 늘씬한 몸매로 비서실 내에서도 핫 하지만 차가운 인상 때문에 질척거리는 남자가 없는 한선화 비서는 뜻밖에도 최민혁을 상대로 애교스러운 목소리로 실장이라고 불렀다.
“실장님, 안녕하세요.”
예상치 못한 달달한 목소리에 오히려 최민혁이 깜짝 놀랐다.
“선화씨도 요즘 잘 지내죠?”
“네!”
그녀도 최근 회사에서 일어난 일의 배후가 최민혁이라는 소리를 들었지만, 오히려 최민혁을 악당을 처리한 영웅처럼 대우했다.
쓸데없는 이야기에 김명준 과장이 최민혁에게 눈총을 줬다.
“급한 일도 없는데, 쉬엄쉬엄 가야죠. 한 비서 이야기도 도움이 됩니다.”
“그렇습니까?”
딱히 비서를 집적거리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정보를 얻고자 하는 자신의 마음을 못 알아주는 김명준 과장이 미더웠다.
“한 비서, 어떻게 하죠?”
“킥, 사장님을 찾아오신 거죠?”
“네.”
“잠깐만요.”
입가에 따스한 미소를 한 한선화 비서는 사장실 안으로 들어갔다가 곧 나왔다.
“들어가셔도 됩니다.”
최민혁은 한선화 비서의 안내를 받아서 사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오영근 사장은 안으로 들어온 최민혁 실장을 보면서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에는 그를 잠깐 기획실장 자리만 지키는 친구라서 무시했고, 최훈열 전무 구속 후에는 그를 부담스러워했으며, 이제는 그를 생각하기조차 싫었다.
‘설마 회장님이 KM 전자 후계자로 최 실장을 고려할까?’
최민혁은 다정한 목소리로 한선화 비서를 상대하면서 설탕, 프림 뺀 커피를 부탁했다.
비서실 여직원이 악몽 같은 최훈열 전무를 구속하게 시킨 배후로 떠오른 최민혁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잘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너무 여유로운 모습으로 사장을 앞에 둔 사람 같지가 않았다.
분위기에 젖어 있던 최민혁은 따가운 두 사람 시선을 의식하자 헛기침하면서 사장실 한쪽에 있는 소파에 앉았다.
“안녕하세요.”
“......”
두 사람은 따가운 시선으로 최민혁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KM 전자 비서실에는 미인이 많기는 하지만 그중에 독보적인 미인인 오혜정 다음으로 꼽는 것이 한선화였던 것이다.
비서실에 미인이 이렇게 많은 것은 따지고 보면 최훈열 전무가 비서를 뽑을 때 미모를 가장 우선순위로 두었기 때문이다.
최민혁은 그런 점에 대해서는 최훈열 전무를 높이 평가했다.
‘확실히 비서실 여직원 미모가 보통이 아니라고 생각했었는데, 이게 다 이유가 있었구나. 우리 둘째 큰아버지가 이런 쪽에는 또 능력이 있다니까.’
오영근 사장은 불편한 듯 툴툴거렸다.
“얼음 같은 한 비서의 저런 모습은 처음이야. 누가 보면 한 비서는 내 비서가 아니라 최 실장 비서 같아.”
“하하하, 그저 농담 삼아서 가볍게 한 이야기입니다.”
한선화는 눈치껏 커피를 가져다 두고는 부끄러운 듯 휑하니 나가버렸다.
허허 웃던 문형섭 부사장 역시 조금 전의 두 사람 분위기를 떠올리면서 입을 다물고, 물끄러미 최민혁을 쳐다보기만 했다.
최민혁이 두 사람과 가볍게 인사하는 정도로 안면이 있을 뿐이었고, 업무 때문에 직접 마주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딱히 이렇게 서먹서먹하여진 것은 최민혁은 KM 전자에 오래 있지 않을 것이라는 점과 최민혁이 최근 일으킨 일 때문이었다.
최민혁 역시 어색한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서 기존에 문제가 된 일본 업체의 압력과 정부 압력에 따른 가격 인하 문제를 가볍게 언급한 후에 화제를 돌렸다.
“임원회의나 사업부 회의 전에 와이드 TV에 관해서 할 말이 있습니다.”
두 사람은 와이드 TV 때문이 아니라 오성 전자의 공격적인 포지션 때문에 안색이 어두웠다.
최민혁은 두 사람 반응에 핵심만 줄여서 간단하게 말해주었다.
그런데 조성돈 팀장 태도와는 달리 오영근 사장도 은근히 언짢은 듯 말했다.
“이 일을 주도한 정부 관료가 한둘이 아니고, 손을 잡은 가전 3사가 바보가 아니지 않은가. 그 정도 문제는 사전에 예상했을 거네.”
문형섭 부사장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최민혁은 와이드 TV 동호회 모임의 고객 소감을 첨부한 조성돈 팀장 보고서를 슬쩍 내밀었다.
-화질이 왜 이따위인지 모르겠다.
-소문만 요란하고, 정작 볼 것이 하나도 없어.
-하, 씨발, 내가 정부 새끼 말을 듣는 게 아니었어. 괜히 이 비싼 물건 싸서 그냥 방에 처박아만 놓고 뭐하는 건지.
사실 판매 전에 와이드 TV에 대한 것을 간단하게 조사만 했더라도 알 수 있는 내용이다. 컨텐츠가 없으면 결국 고객 불만은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벤트 행사로 나간 소수 물량을 사들인 고객 반응입니다. 아마 고객 숫자가 늘어날수록 심각한 문제가 될 겁니다.”
그제야 두 사람 반응이 조성돈 팀장 놀랄 때와 비슷하게 바뀌었다.
“아, 맞아, 그렇지. 컨텐츠가 있구나. 그 오만한 방송국 애들이 당장 변하는 것도 아니었어. 이게 하루아침에 될 거라고 착각했다니!”
특히 실무에 강한 문형섭 부사장은 확신에 차서 소리쳤다.
“오성 전자 그놈들도 삽질할 수 있었습니다. 이번 와이드 TV에 수백 억을 퍼부은 이들은 죄다 박살이 나겠습니다!”
활기차게 바뀐 두 사람은 걱정거리를 준 가전 3사의 멍청함을 싸잡아서 조롱했다. 그들은 조금 전에 자신이 한 말을 아예 기억도 못 하는 것 같았다.
“......흠.”
두 사람은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최민혁 실장 시선을 의식하자 헛기침하면서 새삼 기획안을 다시 꼼꼼히 확인하면서 감탄사를 터트렸고, 뒤늦게 최민혁 얼굴을 쳐다보았다.
“......훌륭한 보고서네.”
“감사합니다.”
최민혁은 오늘 처음 자신을 봤을 때와는 차원이 달라진 두 사람의 시선에 만족했다.
“두 분이 걱정할까 싶어서 일단 급한 부분만 말했고, 임원 회의에서 정식 안건으로 올리겠습니다.”
“안 그래도 최 전무 구속에, 회사 주가는 사상 최저치를 찍으면서 힘들었는데, 이제 좀 길이 보이는 것 같아. 최 실장, 정말 수고했어.”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최민혁은 자신이 원한 분위기를 만들었다고 판단하자 슬그머니 본론으로 들어갔다.
“와이드 TV가 큰 문제가 아니라고 해도 오성 전자 공격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사전 대응으로 불필요한 사업을 정리하는 것도 생각해봐야 합니다.”
“?!”
안 그래도 외부 충격 때문에 피곤한 두 사람은 갑작스러운 구조 조정 이야기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최민혁을 쳐다보았다.
최민혁도 굳이 지분 매입 이후 이야기이지만 TV 사업부를 매각하자는 황당한 이야기를 해서 두 사람을 자극하지 않았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르는 것처럼 느낄 사이도 없이 하나씩 불필요한 인물을 정리하는 거야. 시작은 STB의 김현우 상무가 좋겠지.’
“아, 제 말은 STB 사업부를 시작으로 해서 모든 사업부를 한 번 재검토하자는 겁니다. 만약 와이드 TV처럼 미처 판단을 잘못한 사업이라면 충분히 검토할 수 있습니다. 결국, 불필요한 비용을 줄일 수가 있어서 오성 전자 대응에도 큰 도움이 됩니다.”
“그거야 그렇지만......”
“요식적인 행위일 뿐입니다. 그냥 기획팀에서 단순하게 사업 검토만 할 겁니다. 임원 회의 때 간단히 언급하겠습니다.”
“아, 알겠네.”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두 사람은 갑자기 나타난 최민혁 행동에 당황해서 별다른 대꾸도 하지 못했다.
사장실을 나가는 최민혁 등을 멍하니 쳐다보던 두 사람은 비록 잠깐 사이에 일이지만 그토록 머리를 아프게 했던 최근 문제에 대한 대응책을 내놓았기 때문에 최민혁 실장 능력을 다시 볼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사장 비서에게 대놓고 찝쩍거린 최민혁의 건방진 행동도 이제는 자신감의 발로로 보였다. 오히려 한선화 비서가 왜 최민혁에게 그토록 다정하게 구는지 이해했다.
이전과는 사뭇 다른 시각에서 최민혁 실장을 언급하기 시작했다.
특히 인사 문제를 고민하던 문형섭 부사장은 자연스럽게 사장단 회의를 통해서 KM 그룹 실권을 잡은 장승일 실장을 떠올렸다.
최용욱 회장이 사장단 회의에서 보여준 장승일 실장에 대한 신뢰는 친자식 이상이었다.
“차라리 장승일 실장에게 최 실장 문제까지 포함해서 한 번 자문을 구하는 것이 어떨까요?”
안 그래도 최용욱 회장의 차가운 시선에 이미 의욕을 잃은 오영근 사장도 순순히 수긍했다.
“장 실장이라면 회장님 뜻을 잘 따를 테니, 그렇게 합시다.”
“제가 바로 연락해보겠습니다.”
***
장승일 실장은 최훈열 전무가 포토라인에 선 것을 보면서 꽤 큰 충격을 받았다. 설마 그렇게까지 뒤에서 작업했는데, 구속이 될지는 상상도 못했다.
앞으로 있을 재판에 대한 시나리오를 이것저것 준비했다.
특히 사장단 회의 중에 최용욱 회장이 보낸 신뢰 덕분에 KM 그룹 전반적인 내용을 점검했다.
그런데 KM 전자의 갑작스러운 주가 폭락 소식에 얼떨떨했지만 뒤늦게 자신이 우려한 오성 전자 때문인 것을 알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기를 바랐는데......’
다음 분기 실적이 드러나면 드러날 일이라서 Y 리포트를 낸 한영일보를 압박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문형섭 부사장에게서 전화를 받고 난 후에도 최훈열 전무 후속 인사 문제와 생각하는 것만으로 머리 아픈 최민혁 실장 일에 대해서는 아예 답변을 피했다.
[제가 직접 찾아뵙겠습니다.]
아무리 그의 능력이 대단하다고 해도 자본, 기술, 인재가 몰려 있는 오성 전자 상대로 도저히 어떻게 해볼 수가 없었다.
있다면 고작 여론몰이인데, 아마 그런 공격을 하면 오성 전자 반격에 KM 그룹 다른 계열사가 이번에 타격을 받는다.
문형섭 부사장이 넌지시 언급한 인사 문제를 고민하고 있을 때, 마침 황광수 차장에게서 연락을 받았다.
보통 때라면 다음으로 미루겠지만, 지금은 오히려 오성 전자 내심을 들어볼 기회였다.
‘아무래도 스카우트 건 때문인 것 같은데, 차라리 잘 되었어.’
북한산 근처에 가본 적이 있는 요정을 찾았다.
황광수은 다소 계산적인 성격이지만 쉽게 남을 배신할 타입은 아니었다. 최문경 부회장의 압박이 아니었다면 그만둘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이제는 오성 전자 직원이 되어서 어색한 황광수 차장과 간단하게 인사만 하고, 동행한 권태성 오성 전자 기획실장을 마주했다.
“또 뵙습니다.”
무미건조한 얼굴에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권태성 기획실장은 부드럽게 말했다.
“황 차장에게 장 실장님의 능력에 대해서는 귀가 따갑도록 들었습니다. 앞으로 같이 서로 일할 사이인데, 너무 격식은 차리지 않았으면 합니다.”
진지한 말투로 상대에게 부담을 주는 스타일인 구길모 과장은 설마 스카우트 제안 자리인지 몰라서 크게 당황했다.
하지만 장승일 실장은 오히려 손짓으로 옆에 앉기를 권했다.
“사실 할 말이 있어서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이미 말씀드렸지만, 대우는 KM 그룹에서 받는 연봉을 포함해서 많은 차이가 날 겁니다. 아마 크게 만족할 겁니다.”
“아, 그 부분부터 분명히 하고 싶습니다. 오성 전자의 스카우트 제안은 거절하겠습니다.”
“네?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 안 됩니다. KM 그룹이 나름 한국 30대 기업 순위에 오르내리기는 하지만 우리 오성 그룹과는 비교가 안 됩니다. 그럼에도 실장님의 능력을 감안해서 오히려 본부장 자리를 권한 겁니다.”
< #045 > 끝
ⓒ SSDHD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