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41 >
지난 X 보고서를 작성하면서 크게 눈을 뜬 조성돈 팀장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한 가지 보고서를 최민혁에게 내밀었다.
“아무래도 오성 전자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막상 오성 전자랑 싸울 엄두가 나지 않아서 피할 생각만 하던 최민혁도 지금은 오성 전자 행동이 은근히 거슬렸다.
“와이드 TV라......”
이미 올해 들어와서 오성 전자뿐만 아니라 TV 3사 모두가 정부 압력을 빌미로 다양한 판촉행사를 벌였는데, 여기서 끝내지 않고 와이드 TV에는 오히려 판촉 행사를 강화했다.
와이드 TV는 화면 비율이 16:9로 CD 영화를 볼 때 기존 TV와 비교하면 화면이 잘리지 않은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지난달부터 시작된 케이블 TV와 위성 방송 때문에 이 분야 쪽으로 오성 전자가 투자를 대폭 늘리고 있습니다. 올해 예상 수량만 2만대, 내년에는 단숨에 40만대 시장을 노립니다.”
“와이드 TV도 새로운 시장 수요이니, 혹시 TV 시장 전체 파이가 커진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
최민혁은 눈을 감은 채 기억을 천천히 돌이켜보기 시작했다.
TV 시장에 대한 오성 전자뿐만 아니라 TV 3사의 공세는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늘어난 시점이 바로 지금이다.
이 시기에는 단순히 TV 3사만이 아니라 중견 기업 역시 새로운 시장 공략에 나섰다.
“차세대 영상으로 꼽히는 LCD 분야에서도 ISO 인증을 획득했고, TN급 LCD 수출에도 대폭 투자를 늘려서 무선호출기와 같은 분야를 확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최근 개발 완료된 STN LCD 수출도 현재 진행 중입니다.”
“아직은 소형 디스플레이에 국한되어서 당장 큰 영향을 주기 어려울 겁니다.”
“그런데 오성 전자 내부적으로 이미 LCD TV에 대한 인력과 투자를 대폭 늘렸습니다. 작년에 이 분야 석박사 인력만 백여 명을 넘게 뽑았습니다.”
“그렇겠죠.”
최민혁이 평소와 달리 고심이 깃든 조성돈 팀장 얼굴을 가볍게 생각하지 않았다.
“저랑 팀장님 사이에 무슨 숨길 것이 있습니까?”
X 보고서를 떠올린 조성돈 팀장은 그제야 입을 열었다.
“정말 이대로 흘러간다면 X 보고서대로 TV 사업부는 점점 어려워집니다. TV 사업부를 정말 매각하실 겁니까?”
하지만 이 와이드 TV는 고작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아는 최민혁은 피식 웃었다.
“설마 조 팀장님이 스스로 만든 X 보고서가 단순히 조작된 것으로 생각하셨던 겁니까?”
“......정말이었군요.”
“보고서를 만든 분이 저에게 그런 질문 하면 어떻게 합니까?”
그도 최민혁 지시받은 대로 보고서를 만들었다고 생각했지 실제로 그렇게 할 것처럼 말해서 크게 당황했다.
“하, 하지만 그, 그러면 회사 매출이 당장 반 토막 납니다. 주주도 용납 안 할 거고, 회장님이 결사반대할 겁니다.”
“시장 분위기를 알면 다를 겁니다.”
“지금 문제가 되는 차입금은 안 받으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TV 사업부에 대한 회장님의 관심은 생각한 것과는 많이 다릅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방안을 마련하라고 할 겁니다.”
최민혁은 정성근 대리 통해서 계속 보고를 받는 든든한 신형 평면 TV를 떠올렸고, 턱을 쓰다듬으면서 반문했다.
“방법을 찾으면 된다는 말이군요. 정말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합니까?”
“솔직히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오성 전자 TV 사업부는 단순히 하나로 생각하면 안 된다. 오성 전기, 오성 코닝, 오성 전관 등이 각종 브라운관, 콘덴서를 비롯한 전자 부품을 생산한다. 이들 업체는 비록 오성 전자 덕분에 잘 드러나지 않지만 어지간한 대기업 못지않은 인력을 지녔다.
이들 연합군이 한 해에 퍼붓는 연구 예산은 수백억을 가볍게 넘고, 인력만 석 박사급 인력만 수 백 명 이상이었다.
하지만 최민혁도 신형 TV로 재미를 톡톡히 본 후에 넘겨주려니, 배가 너무 아팠고, 문득 조 팀장 보고 내용을 떠올리다가 LCD란 말에 유독 집중했다.
‘아무리 비싸게 팔아치워도 그냥 주면 호구로 알 거고, 최소한 깽판이라도 처 놓고 싶군. 가만 LCD TV라......,아, 맞아, 내가 그 생각을 왜 못했을까! 이거 잘하면 작품 하나 나오겠는걸?’
뒤늦게 최민혁은 기발한 한 가지 아이디어를 떠올린 후에 오히려 상대를 위로해주었다.
“요즘 조 팀장님이 너무 긴장한 것 같습니다.”
당장 회사 경영 전략을 바꾸어야 할 주제를 고민하는 조성돈 팀장은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하지만 이 일은 정말 중요한 일입니다. 지금이라도 뭔가 대안을......”
‘조 팀장님, 당장은 KM 전자 주가를 폭락시켜야 하므로 곤란하답니다.’
“알아요. 제가 조 팀장님이 쓴 보고서를 가장 먼저 접한 사람입니다. 그런 제가 조 팀장님 고심을 모르겠습니까?”
“......네.”
최민혁은 조성돈 팀장이 여전히 갈등하는 모습을 보이자 질문은 받지 않겠다는 노골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한 가지 지시를 내렸다.
“잘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죠. 언론에 나온 X 보고서와 이번 오성 전자의 움직임을 토대로 수정된 보고서를 작성해서 올려주세요.”
“......알겠습니다.”
조성돈 팀장은 괴이한 최민혁 지시에서 묘한 느낌을 받았지만 차마 더 질문할 수가 없었다.
‘안산 공장 사태도 겨우 수습한다고 정신이 없는데, 오성 전자마저 날뛰다니.’
***
연이은 안산 공장 사태는 안산 공장을 뒤흔들기는 했지만, 업무 자체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 어차피 공장 노동자는 생산해야 했고, 기존에 하던 그대로 제품을 제조했다.
다만 협력 업체조차 줄줄이 검찰 수사를 받으면서 협력 업체에 변화가 일어났다.
당장 대체하기 힘든 업체는 그대로 가지만 그렇지 않은 업체는 다 바뀌었다.
결국 이를 처리하는 공장 설계 부서는 주말도 잊은 채 나와서 일했다.
이런 처리 결과를 받은 기획팀 역시 기존에 만든 보고서를 처음부터 다시 만들어야 했다.
TV 사업부 업무를 주로 담당하는 배종대 과장은 결국 야근으로 눈이 충혈된 채 수십 차례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다가 실수로 작업했던 문서를 날렸다.
“으악!”
비명에도 옆에 앉은 이정원 과장이나 이영란 대리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두 사람은 다른 분야를 담당하고 있지만 정신없기는 매 한 가지다.
특히 이영란 대리는 세탁기와 냉장고를 수입하는 일을 맡고 있었는데, 최근 오성 전자를 비롯한 가전 3사의 공세에 넋이 나갔다.
TV 사업부의 갑작스러운 일 쓰나미 때문에 임시로 나선 정성근 대리는 최근 안산 공장 기획팀에서 올린 보고서를 수정해서 책상을 치면서 통곡하는 배종대 과장에게 넘겼다.
“아, 고마워.”
눈물마저 글썽이던 배종대 과장은 마치 컴퓨터 프로그래머같이 정교한 정성근 대리 보고서를 받아서 감탄을 거듭했고, 한 가지 부분을 확인한 후에 오히려 소리쳤다.
“아, 정 대리, 이건 또 뭐야. 대림 전자는 내가 빼라고 그렇게 말했잖아. 제발 이런 일에 고집 좀 부리지 말자!”
“하지만 대림전자는 지금 일만 가지고 다른 업체로 바꿀 수는 없습니다.”
“아니 그러면 우리 회사 거래 대금을 부풀려서 빼돌린 업체랑 계속 거래하자는 거야. 당장 안산 공장 설계팀은 어떻게 설득할 건데?”
“그 안산 공장 중형 TV 설계 1팀 안선종 팀장님의 제안입니다. 물론 내키지는 않지만 대림 전자만큼은 꼭 넣어달라고 했습니다.”
“아니 그러면 지금까지 내가 작업한 기획서는 어떻게 하란 말이야?!”
“죄송합니다.”
배종대 과장이 길길이 날뛰자 보다 못한 박상기 차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 배 과장, 회사가 너희 집 안방이야. 아무리 화가 나도 좀 적당히 하자.”
“아니 차장님도 들었으면서 그런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커피 믹서를 듬뿍 담아서 홀짝이던 박상기 차장도 여전히 당당한 정성근 대리를 쳐다보았다.
“정 대리, 배 과장 이야기도 일리가 있어. 검찰 압수 수색에, 구속 영장까지 받은 회사랑 어떻게 계속 거래를 해?”
“저도 공감합니다만 안선종 팀장 이야기는 다릅니다.”
“그건 어떻게 알았어?”
“안선종 팀장님이 저에게 따로 요청했습니다.”
“정 대리도 생각이 있다면 앞뒤가 안 맞는다는 것은 알잖아.”
어지간하면 정성근 대리도 목소리를 낮추어서 자신을 설득하는 박상기 차장 의견에 수긍하겠지만 이번 일은 또 그렇지가 않았다.
“그런데 대림 전자에 대해서 아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아니 본사 기획팀이 사업부 관리만 하면 되지, 밑에 협력업체 사정까지 알 필요가 없어. 그래, 좋다. 도대체 그 사정이 뭔데?”
목소리가 올라가자 열심히 일하던 다른 팀원도 귀를 쫑끗한 채 논쟁을 쳐다보았다. 다들 언제나 승리하는 정성근 대리가 왜 저렇게 무리하는지 알고 싶었다.
“대림 전자는 원래 매출이 20억에 불과하던 업체였는데, 우리 회사랑 거래하면서 급격히 성장해서 작년만 400억 매출을 달성했습니다.”
“......설마 우리 회사 부품 대금을 빼돌린 것으로 그만큼 성장했다는 말은 아니겠지?”
“아니 그 추측이 사실입니다. 최훈열 전무에게 빼돌린 돈 외에 매년 5억씩 꾸준한 시드 머니를 마련했고, 그 기반으로 부품 국산화에 전력을 기울였습니다. 특히 우리 회사 납품 실정을 명분으로 가전 3사에 공급 물량을 꾸준히 늘였고, 결국 일본에 역수출하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하, 씨발.”
평소 욕과는 전혀 먼 박상기 차장조차 KM 전자 역시 미래를 위한 새로운 성장 엔진을 만들 기회를 최훈열 전무 덕분에 협력 업체에서 가져갔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자 욕설을 내뱉으면서 치를 떨었고, 다른 팀원 역시 상상을 초월한 반전에 입을 다물었다.
정성근 대리는 다양한 표정을 한 팀원을 한 번 둘러보았다.
“특히 고압변성기 쪽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서 TV 브라운관뿐만 아니라 프린트를 비롯한 다양한 영역으로 범위를 넓혔습니다. 이게 전부 다 우리 KM 전자의 최훈열 전무 덕분입니다. 설마 이런 업체랑 무조건 거래를 끊는 것이 정답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래 좋아. 그렇다고 하자. 그래서 어쩌자는 거야?”
“어차피 계약은 남아 있고, 이 계약을 재조정하면 굳이 당장 업체를 변경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리고 형사 소송과는 별개로 피해 보상을 받아야 합니다.”
“설마 민사 소송이라도 걸자는 거야?”
“네. 이미 법무팀에 알아봤는데, 승소가 문제가 아니라 보상금액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아직 안산 공장에서도 검토 중이라서 미처 말을 못했습니다.”
“흠.”
이 이야기는 정성근 대리 아이디어가 아니라 공장에서 대체 부품을 찾아보았다. 그런데 막상 샘플을 받아보니, 기대 이하였다.
결국 일정에 문제가 생기자 지금 당장은 차라리 부품 대금을 합리적으로 바꾸고, 손해배상까지 청구하는 방향을 바꾼 것이었다.
그리고 공장에서는 신제품 개발 마무리 일을 비밀리에 담당해서 깊이 신뢰하는 정성근 대리에게 따로 요청했다.
옆에서 묵묵히 듣기만 하던 배종대 과장은 상상도 못한 이야기에 입을 딱 벌렸고, 뒤늦게 버럭 화냈다.
“야, 정 대리, 너 그거 어떻게 안 거야?!”
“안선종 팀장님이 따로 이야기해주었습니다.”
“아니 그걸 담당자인 내가 아니라 왜 정 대리 너에게 이야기해?!!”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와아.”
배종대 과장은 정신없이 수정하던 기획안을 양손으로 잡아 쨌다. 지금 했던 일도 처음부터 다시 새로 해야 했다.
“가만 설마 대림 전자 하나만 그런 것은 아니겠지?”
“좀 됩니다.”
“몇 곳인데?”
“......스무 곳입니다.”
“그렇게 중요한 일을 담당자가 아닌 정 대리 너에게만 말했다고? 아, 정말 기가 막힌다.”
배종대 과장은 당장 안선종 팀장에게 전화를 걸어서 항의했다.
[어, 이런, 아무래도 뭔가 문제가 터졌나 봅니다. 배 과장님, 정말 미안합니다.]
소속이 공장과 본사 사이라서 존대를 하던 안선종 팀장은 최민혁 실장과의 밀약을 말할 수는 없어서 다급하게 전화를 끊고 말았다.
여기에 더 열을 받은 배종대 과장은 정성근 대리를 째려보았다.
“야, 정 대리, 아니 그걸 알았으면 사전에 나에게라도 귓뜸을 했어야지. 너 지금 똥개 훈련시키는 거야?!”
“그게 저도 이틀 전에 안 팀장님에게서 들었습니다.”
“......”
복장이 터질 정도로 열 받아서 가슴을 탁탁 치던 배종대 과장은 담배와 라이트를 든 채 후다닥 사무실을 나가버렸다.
다른 팀원도 혀를 내두른 채 이 황당한 드라마를 지켜보기만 했다.
***
최민혁에게 새로운 지시를 받은 조성돈 팀장이 자기 자리로 돌아오다가 이 묘한 팀 분위기를 발견하자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박상기 차장이 마치 자신은 모른 사람처럼 자기 자리에 앉아서 기획안을 열심히 수정하는 정성근 대리를 힐끗 쳐다보면서 말해주었다.
다 듣고 난 조성돈 팀장은 오성 전자에 대응하는 이해하기 힘든 최민혁 행동 때문에 혀를 차면서 그냥 자기 자리에 앉았다.
최민혁 지시대로 보고서를 만들려니, 걸리는 것이 하나둘이 아니었다.
박상기 차장이 슬그머니 조성돈 팀장에게 말했다.
“기획안을 수정하라고 합니까?”
“네. 이번에 언론 통해서 나간 X 리포트와 같이 합쳐서 다시 올리라고 하네요.”
“아니 그런 가짜 보고서를 왜 참조하는 겁니까?”
“그게 X 리포트에 보면 오성 전자에 관한 것도 포함됩니다.”
제대로 X 리포트를 읽지 않았던 박상기 차장은 깜짝 놀랐다.
“설마 진담으로 하는 말입니까?”
의도적으로 엉성하게 만든 X 리포트 내용을 떠올린 조성돈 팀장도 난장판이 된 배종대 과장 자리를 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 #04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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