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33화 (33/1,021)

< #033 >

“자네가 그런 농담을 다 하다니, 믿을 수가 없어.”

우영민은 얼음 같은 얼굴의 김명준 과장을 보면서 쓰게 웃었다.

“뭐 안 믿는다면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정말 이 보고서를 최 실장님이 작업한 겁니까?”

“큰 그림은 최 실장님이 했는데, 실제 문서 작업은 조 팀장님이 한 거야. 두 사람이 서로 힘을 합쳐서 만든 거야.”

“......와아, 정말 믿기지 않습니다. 이 보고서는 일반적인 학술 보고와는 달리 구체적인 수치와 실제적인 표본을 이용해서 만든 겁니다. 그러니 같은 조건이라면 비슷하게 일어날 겁니다.”

김명준 과장도 살짝 보고서 내용을 봤기에 인상을 찡그렸다.

“그 보고서대로 KM 전자가 5년 안에 파산한다는 소리야?”

“아니. 여기 수치를 뒤틀어 수정을 많이 해놔서 오차가 존재하는데, 아마 원래 보고서대로라면 3년 안에 망할 겁니다.”

“말도 안 돼!”

KM 보고서를 아직은 믿지 않은 김명준 과장 주장에 우영민은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심각한 얼굴로 멍하니 다시 보고서를 살폈다.

‘진짜 놀랍네. 이제 겨우 한국대 1학년인 최 실장님이 이렇게 대단한 사람이었어?’

한 때는 대학원생으로 투자관리자를 하는 중에 횡령으로 고소당했던 우영민은 뒤늦게 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실의에 빠진 그는 최병문 지시를 받은 김명준에게 스카우트를 제안받고, KM 전자에 들어갔다.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서 최병문이 사망하면서 따로 다시 펀드 매니저나 할까 망설이다가도 결국 김명준을 따라서 KM 전자에 남았다.

시간이 갈수록 KM 전자의 몰락에 크게 실망해서 최근 이직할까 많이 갈등했다.

그런데 자신의 보스가 모시는 최민혁이 갑자기 부상하면서 상황은 아주 달라졌다.

지금까지 흥신소 직원, 심부름센터 직원, 증권 중개인 일을 했다.

이번에는 증권 보고서 작성이라 나름 호기심을 느꼈는데, 설마 이렇게 충격적인 보고서를 보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이거 진짜 흥미롭네. 딱 내 스타일이잖아.’

***

최민혁을 통해서 수정된 보고서는 다시 우영민을 거치면서 그 내용이 여러 차례 바뀌었다.

문서 포맷부터 시작해서 문체 특성까지 일일이 다 바꾸었다.

최종적으로 우영민이 자기가 쓰는 스타일 방식으로 재수정하면서 KM 전자와 비슷한 흐름을 보이는 회사를 더 추가했다.

한부철강, 삼민그룹, 지로그룹, 기영그룹과 같은 큰 회사도 포함했다.

이들 회사의 과거 실적을 토대로 해서 추가된 내용이라서 기존 보고서 수준과 비교해도 그다지 큰 차이는 없었다.

보고서를 다 작성한 우영민은 최민혁 실장이 제안한 계획을 다시 한 번 숙지한 후에 한영 일보 앞에 도착해서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만약을 위해서 뒤따른 경호원에게 다시 한 번 손짓해서 뒤로 물러나게 했다.

“범 기자?”

“당신이 X?"

“일단 신분증 보여주세요.”

“네?”

“왜 이러십니까. 신분은 확실할수록 좋은 거죠.”

검은 모자, 검은 선글라스, 검은 마스크, 검은 가죽옷으로 자기 몸을 숨긴 우영민은 심지어 성대모사 흉내까지 냈다.

‘어이가 없는 놈이네.’

“기다려보세요.”

일전에 최민혁에게 된통 당하고 난 다음부터 한결 신중한 범용구 기자는 상대를 조심스럽게 살폈지만, 곧 인상을 찡그렸다.

‘지명수배범이라도 되는 거야?’

신분증까지 확인한 우영민은 손을 불쑥 내밀어서 한 가지를 요구했다.

“뭡니까?”

“제보비 천 만원.”

“씨발.”

“뭐 싫으면 말든가.”

차량에서 서류뭉치를 꺼냈는데, 그 표지에는 다양한 한국 언론사 이름이 적혀 있었는데, 그중에 하나가 한영일보의 경쟁자인 한선일보였다.

“그, 그게 뭡니까?”

“아, 다른 언론사도 돌려야 하니까.”

“설마 우리 말고 다른 언론에도 다 뿌린 겁니까?”

“아직은 아니죠. 설마 당신네만 믿고 일 처리 할 거로 생각한 겁니까?”

“기다려 보세요!”

범용구 기자는 잠깐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는데, 돈을 주기에 앞서서 제보 내용 일부를 먼저 확인하고 싶다고 제안했다.

우영민은 용돈 벌었다고 쾌재를 부르면서 보고서 일부를 내밀었다.

자신이 수정했기에 이 보고서가 쓰기에 따라서 얼마나 가치 있는지 잘 아는 터라 묵묵히 팔짱을 한 채 지켜보기만 했다.

“......으음. 이것은......놀랍네요. 설마 엉터리로 만든 것은 아니겠죠?”

“그만합시다.”

“아, 죄, 죄송합니다.”

“이천!”

범용구 기자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지만, 다행히 3천만 원까지 받아왔다. 그는 어쩔 수 없이 현금 2천만원을 내밀었다.

우용민은 돈을 확인하기 무섭게 보고서가 든 서류를 줬다.

“아, 노파심에서 말하는 건데, 그쪽에서 정해진 시간에 기사화하지 않으면, 다른 언론사에서 기사가 나갈 겁니다. 그러니 결정 나면 여기서 볼 수 있도록 건물 옥상에 표지를 다세요. 다음에는 이렇게 만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수단으로 자료를 전할 겁니다.”

“후유, 알겠습니다.”

***

의문의 보고서를 받은 최경진 편집장은 수십 번이나 보고서를 읽고 또 읽었다.

‘설마 이것도 최 실장이 보낸 것일까? 아니겠지. 자기 회사를 상대로 이런 보고서를 만들지는 않을 거야. 더욱이 한부철강 같은 회사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잖아. 도대체 어떤 놈일까?’

그는 약간 상기된 얼굴을 한 채 경제를 담당한 최광수 기자를 비롯한 관련이 있는 인물을 죄다 불러 모아서 회의했다.

갑자기 열린 회의에서 나온 X 보고서를 읽은 이들은 마치 총알을 맞은 사람처럼 다들 침묵했다. 경제 관련 파트에서 경험이 많은 이들은 딱 보고서를 본 것만으로 안색이 굳어버렸다.

특히 최광수 기자는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누가 이 보고서를 만든 것인지 모르겠지만 가볍게 생각할 일은 아닙니다.”

“최 기자도 그렇게 생각해? 혹시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 없어?”

당연히 있기는 있었다.

“고작 KM 전자 보고서 하나 가지고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 아닐까요?”

“정말 그렇게 생각해? 요즘 들어서 한국 경제 상황이 점점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다는 이야기는 계속해서 나오고 있어. 그런데 재정경제원에서 일방적으로 무시해서 이슈가 되지 않을 뿐이야.”

한국 경제 위기에 관한 이야기는 어제오늘 나온 것이 아니었다. 경제 연구소에서도 다들 끊임없이 주장 해왔던 것이다.

“그런데 이 X 보고서는 이야기가 달라. KM 전자를 근간으로 해서 만든 것이라서 자잘한 것을 제외하면, 딱히 흠잡을만한 것은 없어.”

“하지만 이건 KM 그룹을 저격하는 기사인데, KM 그룹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KM 전자에게는 미안하지. 그런데 지금 정부 정책대로라면 경제 위기는 점점 나빠질 거야. 언론으로서 이럴 때 바른 소리를 해야지!”

이 말을 액면 그대로 믿는 기자는 아무도 없었다. KM 그룹과 타협해서 얼마나 돈을 더 뜯어낼 수 있을까 계산만 했다.

최광수 기자가 손을 들었다.

“그렇다면 굳이 고민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시간이 별로 없는 만큼 바로 움직이겠습니다.”

“범 기자도 들었지? 내가 위에는 따로 보고 해서 일면 특집 기사로 내보낼 테니, 다들 움직여!”

***

[매년 적자가 쌓여 가는 KM 전자는 도대체 어떻게 앞으로 5년 동안 6,000억을 차입할 수 있을까?]

기사에서 주로 다루는 것은 KM 전자의 몇 년간의 적자와 앞으로 7년 후까지 매출을 토대로 기사를 만들어서 내보냈다.

X 보고서에 적혀 있는 내용을 토대로 딱히 기존 기사처럼 크게 과장도 하지 않았고, 무덤덤하게 이 사실을 내보냈다.

거기에는 한국 사람이라면 이름만 되면 아는 한부철강, 삼민그룹, 지로그룹, 기영그룹이 두루 다 망라되었다.

당연히 이 보고서를 본 시민은 의혹을 드러냈다.

자산이 있다고 해도 특별하게 두드러진 활동이 없는 기업인 KM 전자는 정상적인 과정을 거친다면 아무리 KM 그룹 지원을 받는다고 해도 6,000억 차입금을 받을 수는 없었다.

만약 KM 전자가 파산한다면 결국 세금으로 메꿔야 하는데, 이걸 두고 볼 사람은 많지 않았다.

더 심각한 것은 KM 그룹과 같이 언급된 기영그룹은 국민 기업으로 오르내리는 대기업인데, KM 그룹과 비슷하게 몰락할 것으로 예측 했다.

비록 찌라시라고 욕설하는 사람조차 기사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KM 그룹 본사는 마치 폭탄이라도 터진 것처럼 난리가 났다. 주가에도 영향을 미쳐서 KM 전자 주가는 5천원 초반을 계속 횡보하다가 4천원 밑으로 폭락했고, 전체 KM 계열사는 거의 다 영향을 받아서 20% 가까이 추락했다.

주말에 세컨드와 오붓하게 즐긴 최문경 부회장은 아침 늦게 출근하다가 핸드폰 전원을 켜자마자 울리는 전화로 이 사실을 알았다.

그는 본사에 도착해서 신문을 확인하기가 무섭게 고함부터 질렀다.

“이 무슨 개 같은 소리야!”

KM 전자 비서실은 발칵 뒤집혔고, 그들은 겁에 떨었다.

참다못한 최문경 부회장은 한영일보 부사장 이동수에게 전화를 걸어서 욕을 잔뜩 퍼먹였고, 결국 이 기사를 낸 주범인 최경진 편집장에게 전화했다.

[최경진 이 개새끼야, 너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야?!!!]

***

수화기를 통해서 들리는 욕설은 차마 보통 사람이라면 듣기 힘든 내용이었다.

최경진 편집장은 전화를 끊지는 못해서 수화기를 책상 한쪽에 올려두었다.

안으로 들어왔던 범용구 기자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수화기에 귀를 살짝 기울였다가 질겁하곤 슬그머니 제자리에 내려놓았다.

최경진 편집장은 십 분 정도 지난 후에 다시 수화기에 귀를 기울였다.

[최경진 편집장은 도대체 나에게 무슨 원한이라도 있는 거야? 기사 내기 전에 사전에 전화 한 통화를 할 수 있잖아?!]

[저희는 진실을 국민에게 알리는 언론사입니다. 그 원칙에 충실......]

욕설로 겨우 이성을 차린 최문경 부회장은 다시 폭발했다.

[야, 씨팔 새끼야. 말이 좀 되는 소리를 해야 할 것 아냐. 너희가 광고비를 원하는 것은 말 안 해도 알아. 그러면 그렇게 말을 해야 할 것 아냐. 이렇게 대문짝만 하게 기사를 내고 난 다음에 이 지랄 하면 날 보고 어쩌란 거야?!!!]

[자꾸 욕하시면 그냥 전화 끊겠습니다.]

평소 감정 기복이 심한 최문경 부회장은 분노하자 주변 눈치를 보지 않았다.

[너 이 개새끼, 지금 한영일보에 있지? 기다려, 내가 이십 분이면 도착하니까!]

결국 전화를 끊어버린 최경진 편집장은 피식 웃으면서 마침 편집장 사무실 안으로 들어오는 이동수 부사장을 발견했다.

한영일보 로열패밀리인 이동수 부사장은 책상 위에 엉덩이를 걸친 채 범용구 기자가 가져온 커피를 홀짝였다.

“제가 살면서 푸른 집에서 전화를 받아보기는 또 처음입니다.”

최경진 편집장이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설마 그쪽에서 전화가 온 겁니까?”

“네. 그런데 참 기분이 좋았습니다. 제가 부사장 자리에 오면서 단 한 번도 이 일에 즐거움을 느끼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성취감마저 느꼈습니다. 전율 같은 거죠.”

“아, 네.”

최경진 편집장은 괜한 걱정을 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는 마치 마약이라도 한 것처럼 흥분한 이동수 부사장의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주었다.

“후속 기사도 있죠?”

“물론입니다.”

“아쉽지만 그 기사는 그만 홀딩하세요.”

“네? 아니 왜?”

“푸른집에서 대놓고 그만하라고 지시를 내렸습니다.”

“......이상하군요. 그쪽하고 딱히 연관된 내용이 없을 텐데......”

“한부철강 때문일 겁니다. 그리고 오늘 판매 부수가 전년 대비 25% 가까이 늘어났습니다. 그러니 거기까지만 합시다. ”

“한부철강이라......”

이동수 부사장은 꽤 만족스러운 얼굴로 카드 한 장을 내놓았다.

“그리고 KM 그룹 쪽은 제가 알아서 할 테니, 그쪽 전화는 받지 마세요. 이건 제 법인카드입니다. 가서 밑에 직원이랑 회식이나 하세요. 오늘 하고 싶은 거 다 하시고요. 이번 기사 최고였습니다!”

“네.”

최경진 편집장은 자기 앞에 놓은 법인카드를 보다가 문득 최문경 부회장이 온다는 것을 떠올리자 벌떡 일어나서 직원을 불러 모았다.

[꼭 필수적인 인원은 빼고, 당장 하던 일 다 내려놓고, 회식하러 간다!]

함성이 한영일보를 쩌렁쩌렁 울렸다.

***

한우 식당은 한영 일보 직원으로 잔치 분위기였다.

분위기에 젖은 최경진 편집장 역시 얼큰하게 취했다가 뒤늦게 소리쳤다.

“참 핸드폰 전원 다 꺼!”

오늘같이 좋은 날에 반대하는 이는 없었고, 다들 전원을 껐다.

그런데 범용구 기자가 실수로 전화를 끄지 못했고, 계속 울리는 전화를 받고 말았다.

수화기에서 나오는 소리는 시끄러운 욕설과 소란으로 가득했다. 다만 의사를 대략 범용구 기자에게 전했다.

“최 부회장이 지금 본사 사무실에서 행패 부린다고 하는데, 어떻게 할까요?”

“그냥 내버려두라고 해. 나중에 손해 배상을 청구하면 되니까.”

“알겠습니다. 그런데 이대로 괜찮을까요?”

“어차피 내일 후속 기사는 못 나가. 그러니 큰 문제는 없을 거야. 그리고 나머지 협상은 부사장님이 다 알아서 할 거야.”

“네.”

최경진 편집장은 범용구 기자 핸드폰 전원이 꺼진 것을 보자 손바닥을 쳐서 시끄러운 회식 분위기를 일단 진정시켰다.

“오늘 기사 수고했다. 그런데 알다시피 기사가 하루 천하로 끝날 것 같다. 하지만 실망할 것 없어. 이미 우리 기사는 그만한 힘을 발휘했으니까.”

< #03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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