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32화 (32/1,021)

< #032 >

조성돈 팀장은 왜 자신이 기획팀장이면서 이렇게 중요한 일을 머리 한쪽 구석에 내버려둔 것인지 자신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긴 그 보고서를 작성할 때와 비교해서 우리 회사 상태가 더 나빠졌으니까. 그리고 위의 압력도 상당했었고, 전 실장님이 앞장서서 싸우다가 튕겨 나간 후에는 다들 침묵했어.’

“저기 조 팀장님?”

“아, 미안합니다.”

“잠깐 이야기 좀 하죠.”

“네.”

***

KM 전자 옥상은 평소와는 달리 침울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가끔 담배를 물고 이야기하는 이들 목소리는 침울했다.

“정말 괜찮은 겁니까?”

커피를 마시자 조금 정신이 겨우 돌아와서 걱정이 가득한 박상기 차장을 마주했다.

“네.”

“도대체 왜 그러시는 겁니까?”

그는 잠깐 갈등했지만, 최민혁 실장이 굳이 주의하라고 하지 않아도 그 압박을 새삼 떠올렸다.

“죄송합니다.”

“좀 답답하지만 그만큼 중요한 일이라고 이해하겠습니다. 다만 이거 하나만 말해주십시오. 회사에 문제가 없겠죠?”

그는 뒤늦게야 최민혁 실장의 고민을 어렴풋하게나마 깨달았다.

“그렇게 되도록 하는 겁니다.”

“그러면 최 실장님 엠바고가 풀리면 저에게 먼저 가장 말해주실 거죠?”

“당연합니다.”

“좋습니다. 뭐 필요한 일이 있으면 말만 하세요. 저도 최선을 다해서 돕겠습니다.”

“네.”

박상기 차장은 호기심 때문에 참을 수가 없어서 마지막으로 넌지시 질문했다.

“우리 최 실장님이 나이는 어리지만 정말 대단한 분이지 않습니까?”

“대단하다는 말로도 부족합니다.”

예상을 넘어선 대답에 박상기 차장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저도 이제야 알았습니다. 최 실장님이 하는 한 마디 한 마디가 그냥 하는 말이 아닙니다. 다 깊은 뜻이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이해할 수가 없어서 그저 간과할 뿐입니다.”

“그건 좀 지나친······. 아부 같습니다만?”

“박 차장님은 상상도 못하실 겁니다.”

“그렇습니까?”

박상기 차장은 더 질문하려고 했지만 최훈열 전무조차 무시하는 조성돈 팀장이 최민혁 실장을 인정하자 멍하니 서서 그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도대체 실장님에게 무슨 작업 지시를 받았기에 저렇게 태도가 바뀐 것일까?’

***

박상기 차장도 침묵하는 조성돈 팀장이 아쉬웠지만 참았다.

다만 지금 상황에 불안한 배종대 과장이 다른 팀원을 이끌고 몰려와서 사무실로 내려가려는 박상기 차장을 막아섰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조 팀장님이 말을 안 해.”

“혹시 최 전무 일에 대해서 질문하신 거죠?”

“지금은 그게 핵심이니까.”

“그건 그렇다고 하죠. 저희가 정말 알고 싶은 것은 새로운 기획안입니다. 기존 사업부에서 하던 모델에 대해서 수정하는 것 외에 딱히 특별하게 하는 것이 있습니까?”

“아, 미안, 조 팀장님이 하도 단호해서 내가 깜빡하고 말았어.”

배종대 과장 목소리가 바로 올라갔다.

“박 차장님, 그것은 아닙니다. 솔직히 전무랑 실장님이랑 싸우는 게 우리에게 뭐가 중요합니까. 정말 중요한 것은 앞으로 회사의 미래 비전입니다!”

“아, 알았어. 내가 시간 나면......”

“아뇨. 답답해서 못 봐주겠습니다. 지금 당장 가서 같이 이야기하죠. 이거 정말 중요한 겁니다. 지금까지는 최 실장님이 업무 적응기간이라서 넘어갔지만 이대로 두고 볼 수는 없습니다!”

“알았어.”

그도 따가운 기획팀 팀원의 눈초리에 두 손을 들고 말았다.

그런데 조성돈 팀장도 이 부분에 관해서 만큼은 침묵하지 않았다.

그는 박상기 차장과 배종대 과장과 함께 기획실을 찾아갔다.

괜히 최민혁 자존심을 건드릴 것 같아서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하지만 최민혁은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아, 새로운 사업 아이템 말이군요. 당연히 해야죠.”

배종대 과장이 뒤에서 등을 쿡 찌르자 조성돈 팀장은 눈총을 주면서 최민혁 실장에게 다시 분명하게 의사를 표시했다.

“이제 시간이 꽤 지났지 않습니까. 기존 업무에도 어느 정도 익숙해졌으니, 앞으로 미래를 위한 명확한 새로운 아이템이 중요합니다.”

“알아요. 그리고 생각해 둔 게 있습니다.”

세 사람 눈빛은 예상도 못 한 대답에 반짝였다.

“그게 뭔지 알 수 없을까요?”

“흠.”

최민혁은 바로 대답할 수 없었다. 그 역시 너무 늦어져도 곤란하기 때문에 첫째 큰아버지 상황을 지켜보면서 계속 염두에 두었다.

처음에는 벤처를 설립해서 따로 진행하려고 했지만, 연구원이 기술을 빼돌릴 수 있다는 점을 고민했다. 특히 대기업 유혹이 더해지면 이 상황이 심각하다. 따라서 자신을 따르는 뛰어난 인재가 있다면 굳이 그들을 내칠 이유는 없었다.

‘그런데 이들에게 신뢰를 얻는 게 쉽지 않아. 다른 대주주 지분 매입 문제는 이번 보고서 파동을 이용해서 헐값에 사들이면 될 거고, 문제는 지금 이 시점에서는 배터리, 낸드 메모리는 단가와 기술적인 한계 때문에 어렵고, MP3 디코더 자체가 없어서 진행하기 어려워. 결국 MP3 특허 확보와 시제품 개발을 우선으로 해야지.’

MP3 코덱 특허를 비롯한 모든 특허 매입과 MP3 디코더 칩을 비롯한 가능하다면 후일 모바일에 적용 가능한 배터리 제어 전원칩까지 개발할 생각이었다.

‘그 정도면 MP3 분야에 한해서만큼은 오성전자 아닌 한국 대기업이 다 덤벼들어도 박살 낼 수 있지.’

굳이 자기 내심까지 말하지 않은 채 슬쩍 조성돈 팀장에게 빨리 보고서를 만들라는 눈총을 주었다.

“으음, 지금 회사 내부에 여러 가지 문제가 있는 상황에서는 진행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지금 상황이 어느 정도 나아지면 새 프로젝트 기획안을 진행할 겁니다.”

배종대 과장은 자신이 원한 답을 찾자 그제야 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 이미 새로운 아이템 자체를 미리 구상 다 하셨다는 말씀이군요.”

“맞아요.”

“알겠습니다.”

다른 두 사람은 눈치가 있는 배종대 과장이 수긍하자 더는 질문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최민혁이 얼마나 저돌적으로 막 밀어붙였는지 잘 알았다. 즉 뭔가 믿는 구석이 있지 않고서야 그런 행동을 할 리가 없었다.

‘도대체 어떤 아이템일까?’

***

사실 최민혁은 제한된 예지몽을 가지고 있을 뿐이지, 능력이 뛰어나지 아니다. 경영 기획 분야 역시 마찬가지다.

엄밀히 말해서 실무적인 면만 놓고 본다면 조성돈 팀장이 최민혁보다 월등했다.

다만 그 프로젝트 결과가 실패할 것인지, 성공할 것인지 판단하는 능력만 놓고 보면 최민혁이 조성돈 팀장을 압도했다.

그래서 최민혁은 조성돈 팀장이 작업한 보고서 의미를 보면서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믿을 수가 없네.’

IMF 이전에는 국내 연구기관에서 계속 한국 경제 위험성을 경고했고, IMF 이후에는 각 지역 연구 기관을 비롯한 모든 경제 연구소에서 국내 기업 몰락에 대해서 다양하게 연구했다.

놀랍게도 조성돈 팀장 보고서는 최민혁이 봤던 가까운 미래의 기업 연구 분석 결과와 비교해도 큰 차이가 없었다.

‘......이거야 원 미래 일기도 아니고, 미래 보고서네.’

성장성, 수익성, 자산, 부채를 토대로 해서 만들어진 이 보고서는 마치 IMF 이전에 일어날 일을 예언하듯이 나열했다.

‘......진짜 대단하다.’

최민혁은 한국 제조업 평균 자기자본 비율이라는 기준에 따라서 차입금 의존도가 어떤 식으로 영향을 주는지 다양한 기업 지표를 통해서 이 보고서대로 이루어진다는 것까지 알아봤다.

“조스트라다무스(?)입니다.”

“네?”

의자를 가져와서 옆자리에서 구경하던 조성돈 팀장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닙니다. 으음, 요즘 자주 놀랍니다. 조성돈 팀장님 능력을 제가 과소평가했다는 것을 이제야 새삼 알았습니다.”

“별말씀을.”

“아뇨. 정말 저 감동 받았습니다.”

낮 뜨거운 금칠에 조성돈 팀장은 무안해서 시선을 피했다.

“아닙니다. 실장님이 방향을 구체적으로 정해주지 않았다면 그렇게 만들지 못했을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기업 지표를 기업 방향성과 정확하게 결합해 분석하기 위해서는 많은 경험과 깊은 통찰력과 뛰어난 안목이 필요합니다.”

“그 정도까지는 아닙니다.”

“안색 보니, 주말에 고민 많이 하신 것 같은데, 정말 그렇게 생각합니까?”

“그게......”

최민혁은 보고서 한 부분을 손가락으로 톡톡 치면서 지적했다.

“여기 빠진 것이 있는 것 같은데, 혹시 의도적으로 뺀 것이 있습니까?”

“어떻게 아셨습니까?”

“보고서 흐름을 따라 가다 보면, 나와야 할 것이 없으니까요. 디지털 TV 맞죠?”

“네? 아, 아니 그걸 어떻게 안 겁니까?”

최민혁은 피식 웃었다.

“명색이 기획실장인데, TV 사업의 미래 정도는 읽어야 하지 않습니까. 디지털 TV 때문에 위성 사업부도 진행하는 거죠. 방향은 맞아요. 다만 수익성이 날지는 다른 문제지만.”

“그렇기는 하지만......”

“부족한 부분을 우선 주세요.”

최민혁은 조성돈 팀장이 가져온 원본 보고서 파일을 꺼내서 다시 천천히 읽어보면서 신기한 눈으로 그를 힐끗 쳐다보았다.

‘역시 TV 사업부의 몰락을 정확히 예견하네. 특히 디지털 TV 특허에 취약한 경우에 아날로그 TV 사업부는 공중분해 된다는 점까지 지적하다니.’

“KM 전자가 무조건 파산한다는 이 보고서를 만들고 나서 주말에 고민 많았겠습니다.”

“뭔가 착오가 있습니다.”

“조 팀장님, 정말 그렇게 생각합니까?”

“......”

그가 입을 다물자 최민혁은 이번 기회에 확실히 선을 그어주었다.

“5년 안에 KM 전자는 반드시 파산합니다. 그래서 차입금을 일단 무조건 막아야 합니다. 조 팀장님은 다른 임직원을 위해서 반드시 해야 할 일입니다.”

“......후유,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이 보고서는 제가 손을 좀 보겠습니다. 이대로 밖으로 내보냈다가 혹시라도 조 팀장님 스타일 이야기가 나올 수도 있을 테니, 수치와 형식을 바꾸겠습니다.”

“그건 상관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시려고요?”

“이미 말한 것처럼 언론사 통해서 대대적으로 홍보해야죠.”

“하, 하지만 언론사도 자칫 KM 그룹에 보복조치를 당할 수 있을 텐데, 그 보고서를 기사화할까요?”

“하게 만들어야죠. 그리고 언론사를 무조건 믿으면 안 됩니다. 자기 이익을 위해서 약해진 상대를 공격하고, 뒤늦게 적당히 타협하죠. 그게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이니까.”

자신의 차가운 기세에 질려서 말리고 싶어도 입을 다물고 있는 조성돈 팀장을 안심시켰다.

“모든 일은 잘 될 겁니다.”

“......네.”

‘정말 괜찮은 걸까?’

***

최민혁은 조성돈 팀장을 보낸 후에 다시 보고서를 꼼꼼하게 확인했다.

어지간해서는 업무에 끼어들지 않던 김명준 과장이 넌지시 말했다.

“그 보고서가 그렇게 대단합니까?”

“제 말보다는 시간이 답해줄 겁니다.”

“설마 그 보고서대로 사건이 일어난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글쎄요.”

그는 미적거리면서 확답을 주지 않는 최민혁 행동에도 김명준 과장은 하고 싶은 말을 했다.

“조 팀장 능력에 대해서 감명받으셨나 봅니다.”

“네. 저 진짜 놀랍습니다.”

“하긴 기조실에서도 따로 관리하는 인재이니, 그 능력을 만만치 않을 겁니다. 최 전무를 지금까지 견제한 사람이기도 하니까요.”

‘설마 기조실에서 이미 최 전무에 대한 보험을 준비해뒀던가?’

“장 실장님이 겉보기와는 달리 견제와 균형을 잘합니다. 조 팀장조차 그런 점을 느끼지 못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최 전무를 압박했으니까요.”

“그 정도였습니까?”

“네. 그런데 제가 정작 놀란 것은 조성돈 팀장이 설사 오 사장님이라고 해도 저 자세를 취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최 실장님에게는 고개를 숙이더군요.”

“그래 보이지 않던데요?”

“제삼자인 제가 봤을 때 확실합니다.”

묘한 칭찬에 최민혁은 어깨를 으쓱하면서 말을 바꾸었다.

“지금부터 이 보고서를 가지고 수정을 좀 해서 작업을 해야 하는데, 핵심은 타이밍입니다. 구속 영장 발부, 검찰 소환, 그리고 KM 보고서 폭로가 잘 맞아 들어가야 합니다.”

“경제, 언론사 생리, 검찰 성향까지 알아야 하는군요. 그렇다면 마침 적임자가 있습니다. 이제까지 주식을 관리하던 우영민이라는 친구인데, 다방면으로 경험이 많습니다.”

최민혁은 예상치 못한 이름을 듣자 깜짝 놀랐다.

‘가만 우영민이라면,......설마 펀드 천재 우영민이 김명준 과장 밑에서 일했다는 말인가? 이것은 나중에 알아봐야겠어.’

“좋네요. 제가 수정된 보고서에 해야 할 순서를 정리해서 같이 줄 테니, 그것으로 작업을 진행하기 바랍니다. 다만 이번 일은 누구도 외부에서 알아서는 곤란합니다.”

“그런 부분이라면 믿으셔도 될 겁니다. 다만 KM 전자 내부 자료가 너무 세세하면, 내부자 소행이라고 의심하는 것까지는 막기 어렵습니다.”

딱딱한 김명준 과장 말투에 오히려 마음의 안정을 느낀 최민혁은 방긋 미소 지었다.

“상관없습니다. 아마 둘째 큰아버지는 전관을 내세워도 구속당해서 감옥에 갈 거고, 첫째 큰아버지는 그럴 여유가 없을 테니까요.”

***

자칭 KM 보고서는 최민혁 손을 거치면서 많이 변했다.

그렇다고 그 보고서의 바닥에 깔린 흐름마저 사라지지 않았다.

보통 사람은 알아보지 못하지만 한때는 펀드 분야의 천재로 최병문에게 스카우트된 우영민은 금방 알아보았다.

“......이건 좀 놀랍네요.”

김명준 과장은 늘 장난스럽기만 하던 우영민 태도가 진지해지자 호기심을 느꼈다.

“그렇게 대단해?”

“수치 정확성이 떨어지지만 보고서 흐름 자체는 틀리지 않습니다. 즉 차이가 있더라도 이 흐름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도 최민혁에게 애매한 대답을 들은 터라 호기심마저 느꼈다.

“설마 그 보고서대로 사건이 일어난다는 소리를 하는 거야?”

“그게......그렇게 될 수도 있습니다.”

< #03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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