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생명의 마법사
그 뒤로는 일사천리였다.
지렁이가 땅속을 자유롭게 누비며 활동을 시작하자 몇 가지 잡초를 제외하고 어떤 식물도 살기 어려웠던 토양이 기름지게 변해 갔다.
농사 기술이 있는 인간들이 퇴비를 만들고 수인들이 밭을 갈며 인간들이 씨를 뿌렸다.
싹을 틔운 밀은 푸릇푸릇하고 건강했다.
밀라니아가 대마녀의 권능을 담아 속삭여 주자 밀과 감자와 고구마. 각종 채소들은 가공할 속도로 자라기 시작했다.
신과 마법사의 기적이 사라진 시대에 나타난 새로운 기적.
생명의 마법사.
그즈음, 사람들은 그녀에게 다른 호칭을 붙여 주기 시작했다.
* * *
100년 전 그날.
깎아지를 듯 험준한 절벽 아래, 갑작스럽게 태풍이 분 땅은 거인이 손바닥으로 쓸어 낸 것처럼 엉망이었다.
강한 바람을 견딜 수 없는 나무는 뿌리째 뽑혔고, 묵직한 바위는 데구루루 굴러갔다.
바람에 휘말린 풀과 꽃잎을 잃어버린 꽃들이 땅에 납작 엎드린 그 땅에 그레칸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서 있었다.
달빛이 흩어져 내리는 대지에 드러난 그의 모습은 썩 엉망이었다.
여기저기 옷이 터지고 드러난 살은 피를 흘리고 있었지만 그는 자신의 상태에 대해서는 조금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의 까만 눈은 오로지 거대한 나무 앞, 풀잎이 바닥으로 엎어진 땅에 고정되어 있었다.
[밀라니아.]
대답은 없었다. 포기하지 않고 기감을 널리 확장했다.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넓어지고 예민해진 기감이 날카롭게 벼려졌다.
거미줄처럼 촘촘하고 세심하게 뻗어 나간 감각에도 밀라니아 특유의 청명하고 서늘한 기운은 감지되지 않았다.
밀라니아가 사라졌다.
대마녀의 죽음은 육신의 자연화. 먼지가 되어 버린다는 말이다.
그는 떠올리기도 끔찍한 가정을 생각해 버리고 말았다.
밀라니아가 죽었다.
그 생각은 피륙을 녹이는 독처럼 끈질기게 그의 마음에 생긴 틈을 파고들었다.
[아.]
덜덜 떨리는 두 손은 뭐라도 움켜쥐려는 양 허둥댔지만 태풍이 가라앉아 한층 들뜬 공기만 할퀴었다.
공기가 진동했다.
[아아아아아아악!]
살아 있는 모든 생물체의 등골을 오싹하게 하는 괴성이 절벽을 뒤흔들고, 영문을 몰라 웅성거리는 인간의 군대의 고막을 터뜨렸다.
[아아아아악!]
인간들은 속절없이 무너져 귀를 틀어막았다. 손가락 사이로 피가 꾸물꾸물 새어 나왔다.
단지 그레칸의 비통함을 맞닥트리는 것만으로도 군대는 전의를 상실했다.
그런 와중에도 포기하지 않고 전열을 가다듬는 인간들이 있었다. 군대의 총사령관과 마탑주, 그리고 소수의 백인장들과 십인장들이었다.
능력과 직감이 뛰어난 그들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 자리에서 벗어나야 한다!’
후퇴하라! 퇴각하라!
맹렬하고도 조급한 명령들이 바들바들 떠는 군사들을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엉망이지만 전열을 갖추고 떠나려는 군대 앞에 누군가 내려섰다.
표정 없는 얼굴에 피눈물을 흘리는 남자.
바로 앞에 있는 몇몇은 텅 빈 눈동자를 들여다보고 심장이 멎을 듯한 충격을 받았다.
[너는…….]
그레칸을 확인한 총사령관은 얼굴을 굳혔다.
불길함을 느꼈지만 그는 그것을 저 수인과 연결시키지는 못했다.
고작 수인 하나.
충분히 제압하리라 생각했던 이종족 몇을 상대하는데 예상외의 피해를 입었다. 팔도 하나 잃었다.
황태자에게 질책받을 생각에도 머리가 지끈거리는 참에 나타난 수인은 불난 집에 기름 넣는 격이었다.
[치워라!]
명령을 받은 병사가 앞으로 나섰다. 세 발자국을 채 떼기도 전에.
푸슉!
피 분수가 터졌다.
병사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제대로 본 자는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제국에서 한 손가락에 꼽는 검사인 총사령관도 그랬다.
[이, 이게 무슨!]
그게 시작이었다. 그와 대치한 수백 명 군사들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터져 나갔다.
그레칸은 그 자리에 서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강물처럼 흐르는 피가 그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적셨지만 그의 피눈물은 그치지 않았다.
마침내 평원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
[아.]
그레칸은 울었다. 밀라니아가 없다.
쓸모없는 몸뚱이였다.
[아아아아!]
절망에 찬 포효. 감응한 맹수들이 날뛰었고, 초식 동물은 몸을 숨겼다. 인간은 왠지 모를 불안감에 몸을 떨었다.
밀라니아가 사라진 이 순간, 그레칸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이 땅의 절대자였다.
그를 내쳤던 늑대족이 몸을 숙여 엎드리고 일신의 힘이 가장 강력하다는 워터드래곤까지 그 앞에 머리를 조아렸지만 그는 조금도 행복하지 않았다.
고독하고 고통스러웠다.
100년간 어느 누구도 잊지 못하게 된 라즈흘 평원 참사의 발단이었다.
피에 젖은 악귀 같은 몰골로 그레칸이 도착했을 때 사방에 흰 천을 걸어 둔 황궁은 악에 받친 슬픔에 잠겨 있었다.
황제의 방에 찾아가자 끔찍한 얼굴로 울부짖는 황후가 있었다.
그녀는 그레칸이 사신처럼 다가오는데도 저항하지 않았다.
푸슉!
쉬웠다.
다음은 황태자였다.
[이, 이러지 마라. 이러지……!]
도망가려던 황태자는 유언조차 남기지 못했다.
그레칸은 제게 소생의 권능이 없음을 한탄했다.
몇 번이고 되살려 몇 번이고 죽이고 싶은 황태자를 다시 죽이지 못한다는 게 원통했다.
그래서 황태자를 모시는 인간들까지 모두 그의 뒤를 따르게 만들었다.
외로움과 공허가 심장에 빼곡하게 각인되었다.
마녀를 다시 만나기 전까지.
* * *
학교의 정원은 대체로 그늘진 편인데, 딱 한 곳만은 볕이 잘 들었다.
그 자리는 언제부터인가 밀라니아의 지정석이 되었다.
그날도 밀라니아는 소파에 누워 한낮의 따사로운 햇볕을 쬐고 있었다.
그레칸이 가져다준 소파는 학교의 낡은 소파보다 훨씬 널찍하고 푹신해서, 황궁의 침대를 그리워하는 그녀의 마음을 흡족하게 했다.
안대를 쓰고 볕을 쬐던 밀라니아는 문득 주변이 조용하다는 것을 인지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그레칸의 숨소리가 들려왔는데.’
안대를 내리자 돌담 벽 쪽에 너른 등판이 보였다.
밀라니아는 안대를 완전히 벗고 몸을 일으켰다.
한참 아래를 바라보던 그레칸이 몸을 숙이고 뭔가를 들어 올렸다.
슬쩍 다가간 밀라니아는 어깨 너머로 상황을 살피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니야아.
가녀린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그레칸의 큼지막한 손 위에 몸을 웅크린 고양이가 있었다.
호박색의 아몬드형 눈동자는 지쳐서 끔벅거렸고 현 상황이 불안한지 자꾸만 물러서려 했지만 그레칸이 목덜미를 덥석 붙잡았다.
밀라니아는 새끼 고양이를 유심히 바라보는 그레칸을 흘끗했다.
“묘족?”
돌담벽 아래에는 주먹보다 좀 더 큰 개구멍이 있었다.
쥐구멍이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크기였다.
“따뜻한 곳을 찾아 안쪽으로 기어 들어왔나 보구나. 어제 온 비를 맞은 모양이로고. 집이라도 잃은 겐가.”
그레칸은 손바닥 위에 다시 고양이를 올리고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고작 그의 손 두 개를 합친 정도로 작은 고양이는 불안함에 귀를 자꾸 쫑긋거렸다.
그레칸이 손끝으로 고양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양이가 슬그머니 머리를 뒤로 물려 그의 손길을 피해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별난 일이로다.’
그녀는 그의 무심한 눈동자를 살폈다.
귀여워하는 것도 아니면서.
“어?”
눈을 찡그린 그레칸이 밀라니아를 힐끗했다. 그러고는 몸을 돌리며 그녀를 마주 보았다. 비웃듯이 입꼬리가 올라간다.
밀라니아가 피식 웃자 그레칸의 얼굴이 뾰로통해졌다.
“왜 웃어?”
“옛날 네 모습이 떠오르는구먼.”
형제들끼리 옹기종기 모여 있는 다른 새끼들과는 다르게 차가운 동굴 속에서 홀로 지친 몸을 웅크리고 있었던 그레칸.
덜덜 떨고 있는 묘족 아이를 보니 그때의 그레칸이 생각이 난다.
아련한 그녀의 눈동자를 보고, 반박하려던 그레칸은 슬며시 입을 다물었다.
“부모를 찾아 줄까?”
불쑥, 밀라니아가 말했다.
의외의 말을 들은 것처럼 눈썹을 올린 그레칸은 곧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부모에게서 버림받은 놈일 거야.”
“그건 모르지 않누. 원래 이렇게 어린 개체들은 길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왕왕 있느니라.”
“그렇게 멍청하다고?”
납득하기 어려워하는 표정이 어쩐지 우스웠다. 밀라니아는 고개를 저으며 헛웃음을 흘렸다.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 하느니라.”
“나는 이 나이 때 사냥을 나서기도 했어.”
“혼나야겠다 하니 나뭇가지를 꺾어 온 천진한 아이는 누구였더냐.”
할 말이 없어진 그레칸은 침묵했다. 흥, 웃은 밀라니아가 놀리듯 말했다.
“귀여웠던지고.”
눈을 크게 뜬 그레칸이 입술을 달싹였다.
“……워.”
“뭐라 했느냐?”
잘 듣지 못한 그녀가 고개를 갸웃하자 그레칸이 또렷하게 반복했다.
“지금도 귀여워.”
말문이 막힌 그녀를 보며 그레칸이 고개를 살며시 기울였다.
초롱초롱한 눈동자가 영롱하게 빛났다. 그러더니, 특유의 무뚝뚝한 어투로 말한다.
“그러니 귀여워해 줘, 지금도.”
장난스레 간살을 떨면 농담이겠거니 할 텐데 평소와 같은 목소리로 말하니 장난으로 넘기기가 퍽 애매했다.
주춤, 저도 모르게 한 발짝 물러난 밀라니아는 겸연쩍어서 몇 번이고 헛기침을 했다.
그럼에도 그레칸이 그 영롱한 눈빛을 거두지 않자 미간에 빗금을 그었다.
괜히 역정을 내고는 묘족 아이를 가리키며 입구를 향해 걸음을 뗐다.
“그 아이 부모나 얼른 찾아 주어야겠으니. 부모가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게 아니냐.”
먼저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이 사뭇 조급했다.
냐아아, 냐아아. 그레칸은 도망가려는 새끼 고양이의 콧잔등을 툭 쳐 주고 밀라니아를 쫄래쫄래 쫓았다.
처음 밀라니아는 말 못 하는 새끼 고양이가 거처를 찾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이 넓은 곳을 직접 뒤져 본다는 건 귀찮은 일은 최대한 피하는 밀라니아에겐 있을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녀에게 호의적인 생물, 이를테면 100년 전에 비해 부쩍 늘어난 쥐 떼와 곤충들에게 묘족의 행방을 맡기고는 설렁설렁 움직였다.
냐아아아아.
도망치는 걸 포기하고 그레칸의 팔에 축 늘어져 있던 새끼 고양이가 간드러지는 소리로 길게 울기 시작했다.
“호오.”
“왜 이러는 거지?”
“아무래도 이 근방에 집이 있는 모양이다.”
새끼 고양이는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더 잦게 울어 댔다.
학교와는 꽤 먼 곳이라서 어린 개체가 어떻게 거기까지 왔을까 의문이 들었다.
아무것도 없는 사방을 휘 둘러보며 그레칸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헛수고야. 버려진 게 분명해.”
과연 여기가 맞을까 의심할 무렵, 넝쿨이 드리워진 동굴이 나타났다.
그 앞에 키가 작고 통통한 여인이 서성이고 있었다.
그녀는 갑자기 나타난 밀라니아와 그레칸을 보고 경계하다가, 그레칸의 품에서 우는 새끼 고양이를 보고는 눈을 홉떴다.
“체샤!”
냐아아아아아아.
냐아아, 냐아아.
새끼 고양이가 그레칸의 팔을 박박 긁어 댔다.
새끼 고양이가 바둥거릴 때마다 목덜미를 잡아 눌렀던 그레칸은 새끼 고양이가 떨어질까 반사적으로 목덜미를 붙잡았다.
“체샤, 체샤.”
묘족 여자는 그레칸을 경계하여 섣불리 움직이지 않고 새끼 고양이를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누가 보아도 그녀가 새끼 고양이의 어미라는 것을 알 수 있을 듯 간절하고 애틋한 눈빛이었다.
그레칸은 묘한 얼굴로 그녀와 새끼 고양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밀라니아는 말 없는 그레칸을 의식하고 입을 다물었다.
냐아아, 냐아아.
새끼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한층 애처로워졌다.
밀라니아는 그레칸에게 새끼 고양이를 놓아주라고 하지는 않았다.
그저 그가 어떻게 하는지 지켜볼 요량으로 한발 물러선 채 상황을 주시했다.
‘발칸을 생각하고 있을런가.’
아니면 그가 태어났을 때 죽었다는 라미에를 생각하고 있을까.
새끼 고양이의 목덜미에서 손을 놓자, 고양이는 땅에 가뿐히 착지하고 기다렸다는 듯이 묘족 여자에게로 달려갔다.
바스락.
“여보, 아무래도 체샤는 여기에……. 체샤!”
반대쪽에서 전속력으로 뛰어온 사내가 여자에게서 체샤를 안아 들었다.
“대체 어디 갔었니. 얼마나 찾아다녔는데!”
따뜻하게 안아 주는 것도 잠시, 엄하게 혼내는 사내의 품에서 새끼 고양이는 애처롭게도 울어 댔다.
묘족 여자가 말리자 말을 멈춘 사내가 그녀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밀라니아와 그레칸을 발견한 그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통상적으로는 제 새끼를 찾아 줬다고 생각할 테지만 그건 평화로운 때나 통하는 말이고 요즘은 낯선 이를 보면 경계하기에 바빴다.
“먼 땅까지 와서 헤매기에 집을 찾아 주는 중이었느니라. 여기서 거기까진 어찌 갔는지 모르겠구먼.”
사내는 부인과 딱 붙어서 조심스레 고개를 숙였다.
“아이를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정신없이 찾던 참이었어요. 혹시 사례를 원하신다면 무엇을…….”
“됐느니. 아이나 잘 간수하거라. 요즘 시대에 누가 보면 당연히 버려졌다고 생각할 테니.”
그레칸이 움찔했다.
당연히 사례를 원할 것이라 생각했는지 묘족 사내는 그제야 얼굴의 경계심을 풀고 당황했다.
붙잡으려는 그들을 손을 홰홰 저어 물리친 밀라니아는 그레칸과 함께 산기슭을 내려왔다.
유독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인기척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닌 걸 보면 구석구석에 숨어 사는 듯했다.
말없이 걷는 사이 광장이 나타났다.
한때는 악단의 공연으로 썼을 법한 넓은 단상이 가운데 있고 주변은 낡은 천막이 즐비했다.
밀라니아는 다른 때보다도 말이 없는 그레칸의 손목을 붙잡고 단상으로 걸어갔다.
그레칸은 눈을 휘둥그레 떴지만 순순히 따랐다.
“좀 쉬었다 가자. 오래 걸었더니 피곤하구먼.”
내내 걸었더니 온몸이 축축 늘어졌다.
밀라니아의 앓는 소리에 그레칸이 진지하게 말했다.
“내가 안아서…….”
“됐느니라.”
그대로 앉으려는 밀라니아를 만류한 그레칸이 손을 튕기듯 휘저었다.
세찬 바람이 불어와 단상의 쓰레기와 먼지 따위를 멀리 몰아냈다.
그러고는 망토를 벗어 바닥에 깐 그레칸이 그제야 밀라니아를 그 위에 앉혔다.
얼떨떨하게 눈을 깜박이며 밀라니아는 저도 모르게 한마디 했다.
“편하구먼.”
그레칸의 입가에 웃음이 맺혔다. 옆에 앉는 그를 물끄러미 보며 밀라니아는 잠깐 망설였다.
바람에 스치듯 얼굴에 번졌던 그레칸의 미소는 금세 사라지고, 또다시 무뚝뚝한 얼굴이 되었다.
밀라니아는 손을 뻗어 그레칸의 어깨를 감쌌다. 워낙 어깨가 넓어 끝까지는 가지 못했어도, 온기를 전하는 덴 충분했다.
“밀라니아?”
“네 어미도 널 갖고 행복했을 게다. 아까의 묘족 가족들처럼.”
“…….”
“발칸은 지나치게 슬퍼서 비뚤어진 것이야. 널 진심으로 증오했다기보다는.”
누군가 상담을 신청할 적에도 감정적인 공감보다는 현실적인 해결책을 들려주곤 했었던 만큼 감정적으로 위로하려니 멀쩡하던 혀가 꼬이는 것 같았다.
“나는 부모가 없어 그런 건 잘 모른다만…….”
“위로할 필요 없어. 난 발칸을 미워하지 않으니까.”
“뭐라?”
그레칸을 돌아보려던 밀라니아는 툭, 어깨에 얹어진 무게에 행동을 멈추었다.
그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그레칸에게서 담담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예전에는 몰랐어. 하지만 지금은 알아. 나 같아도 그랬을 거야. 사랑하는 사람이 얼굴도 본 적 없는 새끼 때문에 죽었다면, 나 역시 모든 걸 용서하지 못했을 테니.”
“…….”
나직하게 중얼거린 그레칸은 밀라니아의 손가락에 제 손가락을 얽었다. 쉬이 풀어지지 않을 만큼 단단하게.
“그들이 날 사랑하지 않고, 아끼지 않았어도 상관하지 않아. 난 밀라니아가 있었으니까.”
“…….”
“사랑해, 밀라니아.”
그것만이 중요한 진실이라는 듯 단단한 음성은 미풍처럼 가볍게, 돌덩이처럼 굳건한 모습으로 밀라니아에게 건네졌다.
“혹시 말이다.”
밀라니아는 퍽 조심스러운 태도로 말했다.
“…….”
그레칸은 입을 꾹 다물었다.
밀라니아가 괜히 압박감을 느낄 만큼 무겁고 긴 침묵 이후, 그레칸의 입이 열렸다.
“내가 네 말을 우습게 보아서가 아니니라. 하지만 사랑은 너와 나 같은 사이에서 통용되기에는 계면쩍은 감정이지 않으냐.”
단호한 말에 머쓱해진 밀라니아는 억지로 이맛살을 찌푸렸다.
“어허, 이래 봬도 넌 나에게 엄연히 감정 수업을…….”
도중에 말을 끊은 그레칸은 어딘지 억눌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가 밀라니아보다 더 잘 알아.”
이번에는 밀라니아가 입을 다물었다.
반박하고 싶은 마음이 그득한데 마땅히 생각나는 말이 없어서, 괜히 억울해졌다.
* * *
그레칸이 조금 변한 것 같다.
밀라니아는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찻잔을 느리게 기울였다.
향이 좋고 따뜻한 게 나쁘지 않지만 어딘지 아쉬운 느낌이 드는 것이, 어느새 단맛에 길든 혀끝이 초콜라떼를 그리워하는 탓이었다.
‘인간들의 발명품은 물건이든 음식이든 중독적이란 말이야.’
입을 냠냠 다신 밀라니아의 훤히 뚫린 창문 너머 그레칸을 향했다.
“하앗, 하앗!”
“하체 힘이 풀렸다. 고작 그거 했다고 자세가 틀어지나. 하체가 부실하군.”
“휘, 휘두른 지 한 시간이나 됐는데요.”
“고작?”
울상을 짓고 다시 칼을 휘두르는 아이들을 지도하고 있는 것은 그레칸이었다.
아무리 봐도 낯선 풍경이다.
“요즘 다정해지신 것 같아요.”
책상에 다과가 든 쟁반을 내려놓은 위제니아가 빙그레 웃었다.
“누가?”
“칸 씨요.”
“……어디가?”
“후후.”
달콤한 향을 풍기는 찻잔을 양손에 쥔 위제니아가 밀라니아처럼 창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마녀님이랑 칸 씨가 학교에 들어오신 후로 형편이 점점 나아졌어요. 다과도요. 박차에서 벗어나 이렇게 향 좋은 차도 마실 수 있게 됐잖아요.”
“도모하는 일이 잘되면 모두의 형편이 나아질 게다.”
“마녀님은 저희에게 귀인이세요.”
진심을 담은 위제니아의 눈동자가 따뜻하게 빛났다.
“아, 칸 씨도요. 예전에는 마녀님 말고는 누구와도 말을 섞지 않았는데 요즘은 곧잘 대화를 하세요. 물론 긴 말은 안 하시지만.”
주먹으로 입을 가려 웃음을 삼킨 위제니아의 고운 눈꼬리가 둥글게 휘어지자 그녀의 온화한 아름다움이 한층 도드라졌다.
“아이들도 잘 대해 주시고, 저희에게 마음을 여신 것 같아요. 칸 씨를 무서워했던 아이들도 이제는 칸 씨를 잘 따르네요.”
“그렇구먼.”
덤덤히 고개를 끄덕인 밀라니아였지만 입가엔 흐뭇한 미소가 걸렸다.
그녀의 눈에도 보였다. 그레칸이 전에 비해 인간과 제법 잘 어울리고 있다.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어린 인간들을 기꺼이 도와주는 친절해진 태도의 변화가 미세할지언정 그를 유심히 주시하는 그녀에겐 명백히 느껴졌다.
‘그레칸에게 이런 흐뭇함을 느낄 줄은 몰랐느니.’
그레칸을 어찌 되돌려야 할지 몰라 막막했던 때도 있었는데 말이다.
그동안 그레칸에게 따뜻하고 긍정적인 감정을 가르치고자 하나하나를 일깨웠던 일이 성과를 보이는 듯해 뿌듯했다.
“그래서 칸 씨가 인기가 많아졌어요.”
“……응?”
“뭐라 했누?”
“요번에 깡치들이 노예상들을 습격해서 데려온 아이들 있잖아요. 그중에 소녀들이 칸 씨를 그렇게 좋아해요.”
재미있는 이야기라는 듯 눈을 반짝인 위제니아는 소녀라는 말에 심드렁해하는 밀라니아를 보고 손을 좌우로 흔들었다.
“성년이 된 아가씨들도 마찬가지예요. 얼마 전에는 꽃반지도 만들어서 건네줬는걸요? 여자애들은 칸 씨를 훔쳐보기도……, 저기도 있네요.”
위제니아가 손가락을 들어 창 너머를 가리켰다.
밀라니아는 건물 모퉁이에 몸을 숨기고 그레칸을 흘끗거리는 일단의 소녀들을 발견했다.
“호오.”
그레칸의 시선이 닿으려 하면 몸을 홱 숨겼다.
그러고는 그레칸이 시선을 돌리자 슬그머니 얼굴을 내밀어 키득거린다.
발그레해진 볼이 밀라니아의 시야에 콱 박혀 왔다.
“허어, 내 살다가 별일을 다 보겠구나.”
허탈한 탄식이 진실로 어이없어하는 기색이라 위제니아가 실소를 흘렸다.
“왜요. 칸 씨, 잘생기셨잖아요. 좀 무서운 부분이 있어도요.”
“잘생겨?”
그레칸을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어서 밀라니아는 생소한 기분이었다.
‘물론 객관적인 외모를 따져 봤을 때 뒤처지는 편이 아니란 건 알지만.’
그래도 누군가 그레칸을 향해 얼굴을 밝힌다든가 잘생겼다고 칭찬한다든가 하는 것들이 영 익숙하지가 않았다.
‘리비가 여자를 들이민다고 싸움이 난 적도 있었거늘. 내가 눈 감고 있는 동안 세월이 지나치게 빨리 흘렀구먼.’
지금의 그레칸은 누가 봐도 헌앙하고 늠름하다 할 만큼 근사하게 훤칠했다.
[간악한 새끼 같으니. 정확히 얘기하지 못해?]
[키스만 하라고 했어요, 키스만. 다만 여자애가 좀, 적극적이라 아주 약간의 문제가 발생했달까.]
‘그랬던 그레칸이 지금은 여성체가 탐낼 만한 사내가 되었다니.’
과거 일을 떠올리며 피식 웃는 밀라니아에게 어느새 슬그머니 다가온 도니가 물었다.
“근데 두 분은 무슨 사이세요?”
“그게 왜 궁금하느냐?”
“그냥 사이가 유별나 보이셔서요. 계속 궁금했어요.”
눈을 바로 뜬 밀라니아는 잠시 고민하다가 평범하게 대꾸했다.
“보면 모르겠느냐. 너와 나의 관계와 비슷한 게지.”
“교사와 학생?”
“아아…….”
도니가 안도하며 한숨을 쉬었다.
위제니아가 그의 손에 과자를 들려 주었다.
“열심히 공부했으니 많이 먹어. 그러고 보니 도니 너도 요즘 키가 꽤 컸구나.”
“하하, 그런가요? 요즘 잘 먹고 있다 보니 그런가 봐요.”
뒷머리를 긁적인 도니가 밀라니아를 흘끔거렸다. 웃음소리가 새어 나가자 몇몇의 시선이 쏠렸다.
도니와 밀라니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그레칸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레칸의 서늘한 시선이 꽂히자 눈총을 받은 도니가 슬그머니 뒤로 물러섰다.
“전 이만 마녀님이 내주신 과제나 하러 가 볼게요.”
자연스럽게 밀라니아의 옆자리에 앉은 그레칸이 씨익 웃었다.
“무슨 얘기 하고 있었어?”
“재밌는 말을 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웃고 있지만 왜인지 집요함이 느껴져서 밀라니아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그래? 난 잘 모르겠는데.”
고개를 갸웃거린 그레칸이 살짝 웃었다.
“그리고?”
“도니가 너와 내가 무슨 사이냐고 물어서 대답해 주었다.”
“아아.”
설렁설렁 반응한 그레칸은 납작한 쿠키를 집어 밀라니아의 입에 가져다 댔다.
밀라니아는 아무 생각 없이 쿠키를 깨물었다. 아삭아삭. 씹는 소리가 났다.
단맛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주억거리는 그녀를 보며 턱을 괸 그레칸이 지나가듯 물었다.
“그래서 뭐라고 했는데?”
이번에는 그레칸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가 다시 과자를 들어 밀라니아의 입에 가져다 댔다.
단맛이 입에 맞아 무심코 입을 벌리는 밀라니아의 입 속으로 과자가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물러나는 그레칸의 손가락이 밀라니아의 입술을 스쳤다.
이상한 느낌에 과자를 씹는 속도가 느려졌다.
그레칸을 힐끗하자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너, 왜 그러는 것이냐?”
“내가 왜? 어디 이상해?”
“심기가 뒤틀려 보이는구먼.”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밀라니아를 빤히 쳐다보던 그레칸이 시선을 돌렸다.
입을 다물고 있던 위제니아는 그의 눈빛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건조한 부탁에 위제니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아, 네. 알겠어요.”
평소와 달리 허둥지둥하며 위제니아가 자리를 피했다.
멀어지는 위제니아의 뒷모습을 응시하는 그녀의 귀로 그레칸의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잠깐 황궁에 다녀와야겠어.”
“응.”
“어쩐 일로?”
그레칸이 품속에서 양피지 쪽지를 꺼내 두 손가락 사이에 끼웠다.
손가락을 비비자 사이에서 옅은 불꽃이 튀더니 양피지가 순식간에 타 재가 되었다.
“하칸이 보낸 쪽지야. 레지스탕스 총수의 흔적을 발견했다는군.”
고개를 돌린 그레칸이 밀라니아와 눈을 마주쳤다.
밀라니아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어떤 말도 안 했지만 눈빛은 많은 말을 하고 있었다.
얼굴이 굳어진 그레칸이 위험하게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놈은 여기 있는 인간들과는 달라.”
“…….”
뭐가 다르지? 의아한 시선에 그레칸이 비소를 보였다.
“황태자의 핏줄이라고.”
“황태자의 핏줄?”
얼떨떨하게 되뇌는 그녀를 두고 그레칸이 몸을 일으켰다.
“그러니까 당분간은 나 못 볼 거야.”
“…….”
“당신은 별로 아쉽지도 않겠지만 최대한 빨리 돌아올게. 애석하게도 난 당신을 못 보는 게 많이 아쉬워서.”
“무슨 말을 그렇게…….”
그레칸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밀라니아는 그제야 그의 질문에 대수롭잖게 대꾸했던 말이 그의 심기를 상하게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당연하지 않누. 그럼 이들 앞에서 다 얘기해야 했다는 것이야?’
도니와 다를 바 없는 관계라는 건 진실 된 대답이 아니었다.
그저 솔직하게 대꾸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뭐라고 말해야 할지 마땅히 떠오르는 답이 없었던 것뿐이었다.
아무렴, 고작 1년도 채 보지 못한 도니와 제가 같을까. 그레칸은 자신에게…….
‘너는 내게…… 나름대로 소중하단 말이다.’
또다시 머릿속이 혼란해져서, 밀라니아는 더 고민하는 대신 그레칸이 남긴 말을 떠올렸다.
‘황태자의 핏줄이라 했지. 하지만 이상하구나.’
[호호, 제가 천치라서 믿는 건 아니에요. 아무도 모르는 사실이지만, 황태자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몸이랍니다.]
분명 먼 옛날 황후는 그렇게 말했었는데.
그레칸이 떠난 다음 날, 밀라니아는 숨어 있는 인간들을 규합하기 위해 학교의 선생들과 좀 멀리까지 나와 있었다.
“마녀님은 사람 찾기의 대가세요. 어떻게 그렇게 잘 아시는 거예요?”
방금도 노예 상인의 눈을 피해 지하 벙커에 숨어든 두 가족을 구출한 참이었다.
도니는 발긋해진 뺨을 하고 흥분에 찬 말을 뱉어 냈다.
“밀그렘의 이름으로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구하니까요. 이젠 소식이 좀 빠른 이들이라면 알음알음 밀그렘의 이름을 아는 것 같아요. 방금 구한 가족 중 한 명도 밀그렘을 알더라고요.”
“도니, 그렇게 좋아할 일은 아니야. 이름이 알려졌다는 건 적의 귀에도 우리 얘기가 들어갔을 수도 있단 거니까.”
데릭이 진지하게 충고하자 도니의 낯에 경각심이 깃들었다.
시무룩해진 분위기에 데릭은 피식 웃었다.
“그렇게 겁먹을 필요는 없고, 자식아. 네가 마법 공부를 더 열심히 하면 돼. 그럴 때를 대비해서 우리 모두 힘을 기르고 있으니까.”
“열심히 할게요.”
도니의 뒤를 따라 훈련에 성과를 보여 구출 작전에 투입된 아이들도 굳센 표정으로 응답했다.
푸핫 웃은 데릭이 도니와 아이들의 어깨에 어깨동무했다.
“그래. 열심히 해야 돼. 이제는 조직도 꽤 커졌으니 무리를 나눠 지방으로도 보낼 생각이니까.”
“수인들의 횡포에 고통받는 사람은 여기 황도에만 있는 게 아니야. 그 사람들을 구출하고 우리 세력으로 끌어들인다면 밀그렘은 전국적인 조직이 될 거야. 황궁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꼭 그래야 하고.”
몇 달 전의 조심스럽고 위축됐던 태도와 달리 지금은 학교 사람들 모두가 어느 정도 자신감이 붙은 모습들이었다.
전체적으로 활기찬 분위기가 전의 분위기보단 좋다고 여기는 밀라니아의 귀로 위제니아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교수님이 요즘 자주 자리를 비우시는데, 윗선과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아니겠지?”
미넬라가 대답했다.
“한 달에 한 번 있었던 접선이 늘기는 했어. 하지만 윗선도 밀그렘의 창설과 활동을 지지해 주고 있잖아. 문제가 생겼다면 우리에게도 말해 주셨을 거야. 너무 걱정 마라.”
얘기를 듣던 밀라니아는 생각에 잠겼다.
‘안 그래도 요즘 그자의 눈치가 이상했느니라.’
그녀는 요 근래 호루스의 모습을 떠올렸다. 미심쩍었다.
딱 짚어서 뭔가 이상하다고 할 건 없었지만 감이 그랬다.
특히 자신을 볼 때마다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머뭇거리는 게 가장 이상했다.
돌아오면 자세히 살펴봐야겠다고 생각하는데, 길을 안내하던 송골매가 빠르게 날아와 밀라니아의 머리 위를 맴돌다가 어깨에 내려앉았다.
{저어어어기, 저어기 앞에 누군가 있어요. 아주 무서워요. 가까이 가면 꿀꺽 삼켜 버릴 것 같아.}
바르르 떠는 송골매는 작은 머리를 밀라니아의 귀 뒤에 쿡 박아 몸을 숨기려고 했다. 그녀는 두려움에 질린 송골매에게 따스한 기운을 불어넣어 주었다.
“수인이었느냐?”
기운을 받고 진정한 송골매가 부리를 위아래로 움직였다.
{맞아요. 나를 한입에 삼킬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그 옆에, 옆에도 엄청, 엄청, 엄청 무서운 기운을 뿜는 사람이 있어요. 무서워요. 날갯짓을 하는 것도 까먹을 뻔했어요.}
오두방정을 떨기는 하지만 진심으로 두려움에 질린 송골매의 말에 밀라니아는 ‘흐음’ 목을 울렸다.
용맹하고, 설사 위험에 처하더라도 특유의 빠른 속도로 도주할 수 있는 송골매가 이리 두려워한다면 심상찮은 상대가 근처에 있단 뜻이었다.
-6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