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밀그렘
한 시간 후, 많은 사람이 들어와 있는 창고는 사람 수에 비해 적막했다.
총 스무 명 남짓한 깡치 패거리가 손발이 결박된 채 무릎을 꿇고 있었고, 그 앞에는 학교의 사람들이 팔짱을 낀 채 분위기를 잡았다.
일을 마치고 합류한 위제니아와 호루스까지 포함한 레지스탕스들은 깡치 패거리의 처분을 두고 골머리를 썩였다.
“자네들끼리 이런 일을 벌인 걸 뭐라 하려는 게 아니야. 하지만 지금은 위에서도 이런 왈패들을 교화시킬 여력이 없어. 하칸이 총수님을 잡아들이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어. 극도로 조심해야 하는 때다.”
호루스가 굳은 얼굴로 깡치를 노려보았다.
분위기가 안 좋게 흐르자 깡치는 험악한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이놈들……. 우리를 어떻게 하면 너희들도 무사할 것 같으냐?”
“안 무사할 건 뭐지?”
미넬라가 비웃었다. 깡치는 억지로 두툼한 입술을 끌어올렸다.
“우리는 하칸 님의 보좌관인 높으신 분 명령을 받고 있는 자들이야. 하칸 님이 얼마나 무서운 분이신 줄은 알고 있겠지. 이제 보니 노예 상인이나 우리 같은 것들이 아닌 모양인데. 다른 목적을 갖고 있단 게 황궁에 알려지면 좋을 게 없을걸?”
야비하게 입꼬리를 실룩거리며 하는 말에 위제니아를 비롯한 모두의 얼굴이 굳어졌다.
미넬라의 눈빛이 독해졌다.
“죽이죠.”
“…….”
“살려 두면 오히려 해가 될 거예요. 죽여 버리는 게 깔끔하긴 깔끔하죠. 모두 죽인다면 황궁에서도 꼬리를 잡기 쉽지 않을 거고, 거처도 옮기면 돼요.”
“하지만…… 모두 죽이는 건 사람들의 공감을 얻지도 못할뿐더러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될 수 없어요.”
위제니아가 반대표를 던졌다.
“후환은 없애는 게 나아.”
“이 많은 수를 다 죽이자는 거야?”
의견은 반으로 갈렸다.
시간이 지나도 의견이 통일되지 않자 분위기가 다소 소란스러워졌다.
관심에서 소외된 깡치가 눈치를 보며 손목을 꿈틀거렸다. 낡은 동아줄이 조금씩 뜯어지고 있었다. 밀라니아가 한쪽 눈썹을 찌푸렸다.
“하나 묻자꾸나. 너희 일당들은 정녕 윗사람의 명령 때문에 이런 짓을 한 것뿐이냐?”
조용히 반격의 기회를 노리던 깡치가 흠칫했다.
“나, 나한테 한 말이냐?”
“덩치만큼이나 미련한 놈이로고.”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그녀를 보자 이상하게 위축된 깡치가 얼굴을 구겼다.
“그, 렇다. 수인 수장들이 인간을 노예로 부리는 걸 얼마나 좋아하는데. 어린 인간들을 보내지 않으면 이 구역에서 살아남을 수 없어. 이제까지 내쳐진 놈들처럼 팽 당할 수도 있는데 명령을 안 듣고 배길 수 있겠어? 내 자리를 탐내는 놈들이 호시탐탐 노려보고 있는데! 지금은 영역 다툼의 시대야. 죽고 밟고 올라서지 않으면 내가 먹잇감이 되는 약육강식의 시대!”
말을 하다 보니 감정이 격해진 깡치의 왕방울만 한 눈이 시큰하게 달아올랐다.
“그렇다고 죄 없는 어린애들을 노예로 만들어?”
트루크가 굳은 얼굴로 쏘아붙였다.
“수인인 내가 인간을 왜 불쌍해하겠냐? 나와 입장이 바뀌면 너희도 어떻게 할지 궁금하군그래. 과거엔 수인들을 노예로 마구잡이로 부렸던 너희들이 할 말은 아니지?”
“우리도 하고 싶어서 그런 것만은 아니오.”
깡치의 왼편에 있던 곰 수인이 눈치를 보며 말했다. 카닛트의 발길질에 나가떨어졌던 그 곰 수인이었다.
“직접 농사를 지으려고 해도 무슨 일인지 다 열매를 맺기도 전에 죽는데 어쩌란 말이오? 나는 원래 산에 사는 수인이었소. 농사는 지어 본 적도 없고 짓는 방법도 몰라요. 수장을 따라 고향을 떠난 이후로 후회하지 않는 날이 없어! 수장에게서 버려진 지금은 이렇게 사는 방법밖에 모른단 말이오.”
“그렇게 사는 게 더 편해서 그런 건 아니냐?”
밀라니아가 혀를 차자 억울함을 호소했던 곰 수인이 입을 다물었다.
“인간을 사냥했을 뿐이오. 산에서 그러했듯이.”
수염이 튀어나온 살쾡이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항변했다.
“난 다른 방법이 있었다면 그렇게 했을 거예요. 사냥하는 재주밖에 없는데, 화마가 휩쓴 산은 짐승이 살 수 없어요. 나만 바라보는 내 무리를 죽일 수는 없으니, 힘없는 자를 약탈하는 수밖에요.”
맹수과에 속하는 수인들이 너나 할 것 없이 한마디를 보탰다.
“힘이 없으면 도태되는 시대예요.”
“과거에 인간은 어떠하였소. 우리 수인들을 탄압하고 노예로 부리고 괴롭힌 것들은 그들이오. 이제 와 우리가 그들을 노예처럼 부린들 그들이 우리에게 죄를 묻겠소?”
“차라리 영역 다툼이라 말하시오. 천하의 못된 악당을 대하듯이 구는 것보다는. 가증스럽소.”
“약한 자는 잡아먹히는 게 자연의 이치.”
수인들이 아우성쳤다. 그들의 항변에 학교의 선생들이 반응하기 이전에, 몸을 웅크리고 눈치를 보던 아이들이 눈을 위로 찢어 올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우리가 언제 너희를 노예로 부렸어? 나는 태어나서 평생 너희들의 노예로 부려진 적밖에 없어!”
한 아이가 원망스럽게 소리치자 이를 갈던 다른 아이들도 기다렸다는 듯이 욕설을 퍼부었다.
“그게 더 편하다고? 개새끼들. 너희 때문에 배고파서 굶주리는 사람이 몇 명인 줄 알아!”
“다 너희 때문이야!”
“우리 탓하지 마. 약한 건 우리 죄지만 그렇다고 너희가 잘한 건 아니지.”
방금까지만 해도 덜덜 떨던 아이들이 주먹이라도 휘두를 것처럼 악에 받쳤다.
흉흉한 분위기에 깡치 패거리들은 당황했다.
“서로들 맺힌 원한이 깊구나.”
밀라니아는 답답한 복면을 벗었다. 복면에 눌린 은빛 머리카락이 살랑거리며 흩어졌다. 촛불 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머리카락에 시선이 모였다.
갸름한 턱과 시원스럽게 뻗은 이목구비, 하얀 피부는 모난 데 없이 조화로우면서도 어딘지 이 세상의 것 같지 않은 신비함을 풍겼다.
밀라니아는 산책로를 설렁설렁 산책하듯이 여유로운 얼굴로 걸어 나갔다. 그러자 모두의 시선이 그녀를 따라 움직였다.
얼굴을 드러낸 그녀를 처음 본 깡치 일당은 멍청한 표정으로 눈을 끔벅였다.
그레칸은 인상을 찌푸렸다. 밀라니아가 위험한 분위기에 나서는 게 싫은 것이었다. 한 팔로 그녀를 끌어안고 쳐다보는 놈들을 노려보았다.
“뭐 하는 것이야. 놔 보거라.”
“싫어.”
오히려 더 단단히 허리를 끌어안는 그레칸의 손힘에 밀라니아는 하는 수 없이 그는 내버려 두고 깡치들을 응시했다.
습관적으로 혀 차는 소리가 새어 나갔다.
“이 꼴을 보니 다른 곳 역시 다를 바가 없을 것 같구먼. 사방에 너희 같은 왈패들이 득시글할 것 아니냐. 모든 왈패들을 만나는 족족 다 죽일 수도 없는 노릇이니 그렇다면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합당한 처리를 하는 게 낫지 않겠누.”
스파크가 튀던 트루크와 깡치가 밀라니아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럼 어떻게…….”
무심코 입을 연 미넬라는 조언을 구하려는 상대가 밀라니아란 걸 인식하고는 말끝을 흐렸다.
호루스가 이견을 냈다.
“그게 말하는 것처럼 쉽지가 않소. 이들을 죽이지 않고 놓아주면 우리에 대한 정보가 황궁에 새어 들어갈 것이오. 그런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지.”
“그럼 정말로 다 죽이겠다는 게냐?”
“하지만 이대로 내버려 두면 이들은 인신매매단 일을 계속할 테고, 고통스러워하는 이들이 나오게 되오. 우리는 그걸 막아야 하고.”
밀라니아의 금안이 싸늘해졌다.
“수인을 다 죽이려는 게야?”
호루스가 한쪽 눈을 찡그렸다.
“……그렇지는 않소.”
“그럼 살리는 것이로군.”
한 줄로 정리한 밀라니아의 시선은 다시 깡치들에게 향했다.
“너희들.”
“예, 예?”
당황한 깡치가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곰 수인이 어깨로 툭 치자 정신을 차리고 험악하게 얼굴을 구겼다.
“우리가 왜?”
한심하다는 뉘앙스에 깡치의 이마에 주름이 자글자글 졌다.
“질서가 없고 먹을 건 부족하니 매일 다툴 수밖에 없지.”
“…….”
불만스러운 얼굴들을 보며 밀라니아는 눈꼬리를 치켜올렸다.
“그게 싫다면 다른 길을 택할 것이야?”
척, 그레칸이 검을 빼 들었다. 불시에 허리춤에서 검을 빼앗긴 호루스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그레칸을 바라보았다.
“히, 히익!”
어쨌든 그레칸의 위협은 효과가 확실했다. 검신에 어린 광포한 검은 기운에 깡치 패거리는 엉덩 걸음으로 물러나 덜덜 떨었다.
타이밍 적절한 그레칸의 행동에 밀라니아는 한결 편하게 말할 수 있었다.
“무질서 속에서 너희 같은 자들이 나오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지. 약육강식은 나쁜 게 아니지만 너희, 그저 살아남는 데만 만족하는 것이냐? 적자생존의 기치가 팽배하면 지성체는 예민해진다. 행복감을 느낄 수 없어.”
“…….”
“예전에는 인간뿐만이 아니라 수인들도 노래를 곧잘 즐겼느니라. 악기의 음률과 노랫소리를 사랑했지. 오로지 살기 위해 먹고 마시는 것만이 아니라, 여유를 즐기며 식음하는 행복을 누렸느니라.”
잔잔히 흐르는 물처럼 온유한 목소리에 누군가 입술을 깨물었다.
“나도 패악질이나 하면서 살 생각은 없었어요! 인간들처럼 호의호식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는데……. 차라리 예전이 나았을 거야! 그때는 그래도 초목이 푸르러 먹을 걸 구하는 데는 무리가 없었으니까!”
우렁우렁한 곰 수인의 목소리에 살쾡이 수인이 빈정거렸다.
“너 미쳤냐? 정말 그렇게 생각해? 인간들이 영토를 넓히려고 발악했던 건 기억나지 않아? 세상이 뒤집히지 않았다면 우리는 우리 땅을 잃고 변방으로 쫓겨났을 거야!”
“하지만, 지금이라고 나아진 것도 없잖아. 하이로드를 원망해. 세상을 뒤집어 놓고 어떻게 되든 신경 쓰지 않잖아.”
곰 수인이 울먹거리자 슬픔은 전염되어서, 가장 어린아이 하나도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나도, 나도 총통이 미워요…….”
인간이 많다며 도니 옆에 딱 붙어 있던 도나티가 펄쩍 뛰었다.
“왜 죄 없는 하이로드에게 화살을 돌려?”
“도나티 님, 가만히 계세요!”
기겁한 도니가 끌어당겨서 다시 자리에 앉은 도나티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투덜거렸다.
밀라니아는 슬쩍 그레칸을 흘끗했다. 무덤덤한 표정이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구먼.’
부하들의 떠미는 눈초리를 받은 깡치가 떨떠름한 얼굴로 나섰다. 즉각 깡치 패거리는 물론이고 학교의 선생과 아이들의 시선까지 밀라니아에게 몰렸다.
심지어 그레칸까지.
밀라니아는 미미하게 인상을 썼다.
그녀는 하는 수 없이 머리를 굴렸다.
이미 서로를 미워한 지 오래인 양측이니만큼, 서로가 한편이라는 동질감부터 심어야 할 터.
“……일단 이 거리를 깨끗하게 만드는 것부터 시작해야겠느니라. 온 거리가 똥통인데 역병 창궐밖에 더 있겠느냐. 환경이 더러우면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법이야.”
눈들이 어리둥절해진다.
갑자기 청소라니. 그게 이거랑 무슨 상관이라고.
공감하지 못하겠단 좌중의 반응에 밀라니아는 쯧쯧 혀를 찼다.
100년 전 도시의 거리 역시 신발을 벗고 다닐 수 있을 만큼 깨끗한 건 아니었지만 이것과 비교하면 청결 그 자체였다.
100년 전의 도시를 모르는 이들이 얼떨떨해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마냥 한심해할 건 아니구먼.’
생각을 고쳐먹은 밀라니아는 친절하게 설명을 이어 나갔다.
“거리를 청결하게 만드는 일이 첫째. 물자를 약탈하거나 누군가를 쥐어짜는 일 없는 규칙적인 식량 보급소를 만드는 일이 둘째로다. 이를 위해서 인간과 수인은 서로의 지혜를 이용하여 사냥과 낚시, 농사를 지어야 한다.”
“같이?”
호루스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자 밀라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같이. 강건한 수인들과 육체 튼튼한 인간들은 사냥을 나서거나 몸을 쓰는 일을 맡고, 머리를 쓸 줄 아는 이들은 사냥과 농경을 용이하게 하는 도구를 만들어라. 효율적으로 식량을 확보할 수 있을 게야. 먹을 것이 충족된다면 마음의 미움도 사그라질 것이다.”
꼬르륵.
얼굴을 붉힌 한 아이가 두 팔로 배를 감쌌다. 밀라니아는 눈을 내리깔아 아이를 훑어보았다.
“돌아가면 식사부터 챙겨야겠으이.”
“너희 인간들의 사냥과 농경 도구에 관해서는 내 의견을 보태마. 알고 있는 게 좀 있으니.”
“하라면 하라는 대로 해 보겠는데, 분명히 말하지만 우리도 몇 번이나 시도해 보았어요. 감자고 고구마고……. 다 제대로 크지 않고 죽어서 문제지.”
“농사에 관해선 인간들이 일가견이 있지. 같이 시도해 보거라.”
할 말이 없어진 곰 수인이 입을 다물었다.
“화술이 뛰어나고 힘이 센 자들은 대륙을 돌며 의견이 같은 자를 모으고, 의견이 다른 자는 설득하거라.”
“무슨 의도인지 알 것 같지만 문제가 있소. 일단은 겁먹은 수인과 인간들을 설득하고 하나로 모으는 건 쉬운 일이 아니오. 정말로. 우린 100년 동안이나 싸워 왔단 말이오.”
호루스가 진지하게 문제를 제기했다. 밀라니아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럼 세상을 바꾸는 일이 쉬울 줄 알았느냐? 성격 한번 급한 자로고.”
호루스가 홱 고개를 돌려 노려보니 트루크가 웃음기 싹 지운 얼굴로 차렷 자세를 취했다.
“이름을 새로 만들 것이니라. 인간과 수인을 모두 통합시키는 이름. 지성체는 같은 이름 하에 소속감을 느끼고 행동하지. 이름을 짓는 것이 첫 번째이니라.”
밀라니아는 차분히 말했다.
“……이름이요?”
의문 어린 눈빛에 그녀는 당장 떠오르는 이름을 뱉었다.
“밀그렘.”
밀라니아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사방에서 모여든 은색의 빛무리가 공중에 ‘밀그렘’이란 글씨를 만들었다.
다들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이름으로 세상을 바꾼다.”
“엑?”
깡치가 쇳소리를 토했다. 곧장 시선이 꽂히자 금세 풀죽은 얼굴이 되어 눈을 내리깔았다.
“왜, 뭐가 이상한고?”
“그게 아니라……. 이 인원으로 세상 운운을 하니.”
깡치가 미심쩍은 눈으로 장내를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어른만 서른 명 남짓한 수는 창고 안을 거의 꽉 채우고 있었지만 ‘세상을 바꾼다’는 말과 어울리는 인원은 아니었다.
“지금 누구와 있는 줄 모르고…….”
작은 읊조림을 듣지 못한 깡치가 귀를 터는 시늉을 했다.
“뭐라고요?”
“됐느니. 모든 위대한 일도 시작은 미약한 법이니라.”
깡치는 아직도 공중에 떠 있는 흐린 글씨와 밀라니아를 번갈아 흘끗거리며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기회가 있으면 도망가려는 눈빛이구먼.’
밀라니아가 가느스름한 눈으로 깡치를 훑어보는데,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황궁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
심각하게 생각에 잠겨 있던 위제니아의 염려였다. 다른 이들도 수긍하며 고개를 수그렸다.
모두의 머릿속에 강하게 박혀 있는 공포의 존재가 또렷하게 떠오른 것이었다. 황궁에 도사리는 절대자.
“총통…….”
“하이로드.”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인간과 수인이 흠칫해서 서로를 바라보았다가 얼굴을 구기고 고개를 돌렸다.
“그레칸의 위명에 너무 겁을 먹고 있구먼.”
혀를 하는 밀라니아를 보고 깡치가 기겁했다.
“허어?”
밀라니아의 시선을 받은 깡치는 시무룩하게 시선을 수그렸다.
“앞으로 총통은 생각하지 말고 행동하거라.”
밀라니아는 뒷짐을 지고 점잖게 말했다. 좌중이 수런거렸다. 밀라니아는 한쪽 눈을 찌푸렸다.
기대하던 ‘올커니’ 하는 태도가 아니라 ‘그게 되겠어?’라는 분위기였다. 수런거리는 모습들이 썩 보기 좋지 않았다.
“말은 쉽죠.”
누군가 볼멘소리를 하는 소리까지 들렸다. 밀라니아는 눈썹을 꿈틀했다.
그녀는 다시금 마르지 않는 강물처럼 마력량이 풍부하던 과거가 아쉬워졌다.
‘예전 같았으면 폭풍 한번 일으켜 줬을 터인데.’
쩝, 밀라니아는 입맛을 다셨다.
* * *
그레칸은 미묘하게 튀어나온 그녀의 입술을 힐끗거렸다. 웃음이 샜다. 귀여워서 심장이 아팠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이해는 가지 않지만.’
밀라니아가 인간들과 수인들에게 꽤 신경을 쓰고 있다는 건 분명했다.
그녀의 성격은 누구보다 자신이 가장 잘 안다.
어지간한 일에는 잘 움직이지 않고,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일엔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게으름뱅이.
그런 그녀가 친히 하찮은 것들과 대거리를 하고 있다. 신경 쓰지 않는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해는 안 가도, 집중하는 얼굴이 너무 귀여워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예전이었다면 기분이 좋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다른 곳에 쏟는 관심 한 조각이 아까웠으니까.
지금은 괜찮았다. 그녀의 관심이 아쉽지 않은 게 아니었다.
‘그냥, 보기 좋네.’
황궁에서의 무기력했던 표정보다 지금의 생기발랄한 얼굴이 훨씬 보기 좋아서.
그녀의 이 모습을 지켜 주고 싶다.
그레칸은 창고 안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지저분한 환경. 그녀가 마주 대하는 수인과 인간 역시 형편없는 모습들이다.
전이었다면 길 가다가 발에 치이는 돌멩이만큼이나 관심이 없었을 존재들.
그들의 융성함이 밀라니아의 기쁨이라면, 그녀의 책임감이라면.
‘내게도 역시 기쁨이고 책임감이 될 것이다.’
멸망밖에 남지 않았던 절대자의 가슴에 싹을 틔웠다.
마녀가 심은 싹이었다.
* * *
“내가 괜한 말로 너희를 충동질하겠느냐? 그런 귀찮은 일을?”
“…….”
퉁명스러운 밀라니아의 말에 수런거림이 잦아들었다. 시선이 집중되자 밀라니아는 단호히 말했다.
“내 확신하건대 총통은 너희를 쫓지 못할 게다.”
“예에?”
깡치 패거리들은 그걸 어찌 믿냐고 난리였다. 그러나 그녀가 황궁에서 왔다는 걸 아는 학교의 선생들은 눈빛부터 변했다.
호루스가 진지한 얼굴로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오?”
“뭘 알고 있으신 거예요?”
위제니아도 심각한 표정이었다. 새삼 이들이 얼마나 그레칸을 의식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아서 밀라니아는 끌끌 혀를 찼다.
“내가 말하지 않았누. 대마녀가 황궁에 있다고.”
밀라니아는 가늘게 뜬 눈으로 그를 흘겨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놈은 대마녀에게 푹 빠져 있어서 너희들 일엔 신경 쓰지 않느니라.”
그 눈빛을 눈치 못 챈 밀라니아의 시선은 깡치 패거리와 학교의 선생들에게 닿아 있었다.
깡치가 수하인 곰 수인에게 슬쩍 몸을 붙였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 넌 알겠냐?”
“총통이 대마녀에게 푹 빠져 있다잖아요. 같은 말 들어 놓고 왜 물으세요?”
“당연히…… 거짓말 아닐까요?”
“그래도 뭔가 근거가 있기는 한 거 같지 않냐? 태도가 너무 당당한데. 하이로드에 대해 얘기하는 건데도…….”
학교의 선생들은 생각에 잠긴 얼굴로 입을 꾹 다물었다.
바뀐 분위기를 흐뭇해하던 밀라니아는 뺨이 따가웠다. 무심코 고개를 돌리자 그레칸이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뒤늦게 아차 한 밀라니아는 괜히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왜 그렇게 보냐는 엄한 시선을 보냈지만 그레칸은 그녀의 표정을 위협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어떻게 알았어.”
허스키한 속삭임이 그녀의 귓가를 휘감았다.
“내가 당신에게 푹 빠져 있어서 아무것도 못 하는 거.”
밀라니아는 손을 들어 귓가를 탁 내리쳤다.
흠칫한 그레칸이 고개를 뒤로 물리자 밀라니아는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귓가를 두어 번 더 때렸다.
밀라니아가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렸다. 그레칸의 입가는 여전히 싱글벙글했다.
꿋꿋이 깡치 패거리와 학교의 선생들을 응시하는 밀라니아의 목덜미와 어깨 부근은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그레칸이 속닥거리는 소리가 귓바퀴에 찰싹 들러붙은 기분이었다.
‘요사스러운지고.’
“총통은 당분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내 말했느니. 총통이 없는데도 겁먹고 이런 창고에나 납작 엎드리고 있을 것이야?”
밀라니아는 깡치 패거리와 학교의 선생, 인간과 수인을 가릴 것 없이 돌아보았다.
시선을 받은 이들이 하나둘 입을 다물었다.
밀라니아는 깡치 일당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다른 방법이 있으면 이리 살지 않았을 거란 말은 거짓이었던 게야?”
수인들은 압박감을 느끼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다음으로 그녀는 학교의 선생들을 응시했다.
“평화롭게, 인간과 수인이 화합하는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너희 신념은 수인족 수장이 강하다고 꺾일 만큼 보잘것없는 것이었던고?”
그녀의 금빛 눈동자가 기묘하게 일렁였다.
장장 천 년간 마녀족의 수장으로서 외적의 침입을 막고, 1대륙의 평화를 도모했던 그녀였다.
그녀가 뿜는 박력에 호루스조차 함부로 말을 얹지 못했다. 굳은 표정으로 그가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소.”
“우린 단지 신중하려고 했을 뿐이에요.”
다 죽이는 게 안전하다고 주장했던 미넬라는 얼굴을 붉히고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밀라니아는 손을 가볍게 휘저었다.
“그럼 됐느니라. 너희들이 생각하는 미래를 위해 움직여.”
손가락을 튕기자 공중에 떠 있던 글씨의 빛무리가 사방으로 비산했다.
빛무리가 몸에 닿자 수인들은 뜨거운 것에라도 덴 양 눈을 꽉 감았다.
잠시 후, 아무런 느낌이 없어 슬그머니 눈을 뜬 그들의 눈동자가 확장되었다.
“헉…….”
‘밀그렘’이란 글씨가 사라진 곳에 또 다른 은색 글씨가 떠올라 있었다.
‘미래(The Future).’
“내가 도울 것이니.”
“와아, 예쁘다.”
가늘게 미소 지은 밀라니아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너희는 대자연의 수호를 받고 움직이리라.”
무심코 손을 들어 귀를 만지작대던 사람들이 놀란 눈으로 밀라니아를 응시했다.
이 순간은 학교의 선생이든 깡치 패거리의 수인이든 상관없이 모두가 똑같은 마음이었다.
그녀가 뱉는 말은 격렬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감정이 없는 듯 무감하면서 부드럽기만 할 뿐이었지만 이상하게 가슴을 들쑤셨다.
가슴이 벅차서 입술을 꾹 깨무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미넬라도 그중 하나였다.
밀라니아는 부드러운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때, 따뜻한 손이 그녀의 손을 잡아 왔다.
“나도.”
마주친 검은 눈이 그녀를 온전히 담았다.
“나도 도울게.”
온전히 그녀에게만 들리는 나직한 속삭임.
“당신의 의지가 나의 의지. 당신이 원한다면, 나는 기꺼이 지옥까지 걸어갈 수 있어.”
얽힌 손가락에 힘이 실렸다.
“당신이 없었을 때 모든 게 의미가 없어졌지. 당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라면, 나도 소중하게 여기도록 노력할게.”
그의 시선이 사람들에게 향했다가 돌아왔다.
“비록 나 개인에겐 의미가 없어도.”
밀라니아도 손에 힘을 주었다.
왠지 마음이 울컥했다.
한순간 ‘죽이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하기까지 했던 그레칸이었다.
뿌리 깊은 증오심과 파괴 욕구에 막막하기도 했었다.
증오심 대신 맹목적인 애정을 품었던, 그녀의 그레칸.
마녀의 늑대 소년.
‘뜻하지 않게 감동을 주는구나.’
그녀가 아무 말 못 하고 치밀어 오르는 기억을 삼킬 때였다.
불시에 큰소리가 터졌다.
“분명히 짚고 넘어갈 게 있어요!”
미넬라였다. 온화했던 그녀의 눈은 다시 날카로워져 있었다.
“모든 게 다 좋아요.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행동할지 알겠어요. 수인들을 믿고자 하는 마음도 있죠. 하지만 깡치!”
“저자는 제 입으로 직접 하칸 측의 명을 받았다고 했으니 쉽게 넘어갈 수 없어요. 확실히 하지 않으면 우리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품에 안고 있는 꼴이에요.”
무뚝뚝하고 단호한 그녀의 목소리에는 이건 그냥 넘어갈 수 없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인간의 가장 안 좋은 점 하나는 입이 가볍다는 것이지.”
밀라니아가 턱을 쓰다듬자 이때다 싶은 깡치가 외쳤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하지만 저는 인간이 아니라 수인…….”
“하지만 수인들이라고 모두가 입이 무거운 것은 아닌지고.”
깡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흐음, 하고 고개를 갸웃한 밀라니아가 호루스를 응시했다.
“이럴 때 인간들의 마법 중 딱 적절한 것이 있었느니라. 내가 몇 가지 인간의 마법을 부릴 수 있기는 하나 이 마법만큼은 나와 상성이 맞지 않아 펼쳐 볼 수 없었어.”
호루스의 옆에서 위제니아가 미간을 좁혔다.
“혹시…….”
검사와 체술가가 대부분인 학교에서 그나마 마법에 대해 알고 있는 그녀가 반신반의하며 물었다.
“암시 마법을 말씀하시는 거예요?”
밀라니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위제니아의 얼굴이 환해졌다.
“확실히 암시 마법이라면 밀고에 대한 걱정은 줄일 수 있겠어요. 더 좋은 소식은, 스미스 씨가 암시 마법을 할 줄 안다는 거고요. 며칠 후 다시 들른다고 했어요.”
밀라니아가 깡치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들었느냐? 그때가지는 경거망동하지 말고 있거라. 마침 우리가 있으니 잘됐구먼.”
그녀가 어떤 우리를 말하는지 이해한 사람, 덩치가 큰 호루스와 트루크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트루크는 깡치의 거대한 체구를 살폈다.
“저 덩치들을 가두려면 우리를 더 크게 만들어야겠는데.”
* * *
새벽녘, 밀라니아 일행은 나갈 때의 두 배가 훨씬 넘는 일행이 되어 학교로 돌아왔다.
깡치 일당은 스미스가 올 때까지 2층의 방에 가두고 트루크와 데릭이 엄중히 감시했지만, 초반의 경계심이 무색하게 깡치 일행은 도망칠 생각일랑 없다는 양 얌전해서 불상사가 일어나는 일은 없었다.
한가롭게 차를 마시는 밀라니아에게 위제니아가 다가왔다.
“마녀님, 저번에 치유술에도 조예가 있다고 하셨죠?”
“그랬지. 왜 그러느냐?”
“다친 아이들이 좀 있어서요. 치료사를 모셔 보려고 했는데 쉽지가 않네요.”
밀라니아는 창고에서 보았던 아이들의 면면을 떠올렸다.
힘없이 눈을 끔벅이던 아이들은 물 밖에 내던져진 물고기처럼 매가리가 없었다.
“도나티는 배를 곯은 채로 잡힌 거라 찰과상 빼고는 다친 데가 없는데요. 상처가 곪아 염증이 생긴 아이들도 있어서요. 이런 아이들은 원래 다친 상태에서 깡치들에게 잡힌 거라, 상처가 꽤 오래됐어요.”
위제니아의 설명을 들으며 밀라니아는 몸을 일으켰다.
“앞장서거라.”
다친 아이들은 1층에서 검술 훈련을 할 때 쓰던 가장 큰 방에 모여 있었다.
기력이 쇠하여 일어나기 힘든 아이들은 침대에 누워 있었고 나머지 아이들은 소파나 바닥에 앉아 있었는데, 개중 멀쩡한 아이들은 밀라니아가 들어오자 똘망똘망하게 눈을 뜨고 호기심을 드러내 보였다.
그것도 잠시, 밀라니아의 뒤로 그레칸이 따라 들어오자 재빨리 시선을 바닥으로 내리깐다.
“어린아이들은 민감하지.”
밀라니아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위제니아는 무슨 말인지 몰라 고개를 갸우뚱했다.
“내가 아이들의 상처를 보고 있을 테니 위제니아 너는 음식을 만들거라.”
“하지만 제가 도와드려야…….”
“이리 보니 양껏 먹는 것만으로도 병이 나을 아이들이 태반이니, 그럼 먹을 것이 바로 약이니라.”
설득된 위제니아가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자 밀라니아는 우선 편한 의자를 끌어내 앉았다.
위제니아를 밖으로 내보낸 건 달리 이유가 있었다.
‘내 치유술이야 피를 쓰는 것뿐인데. 남에게 보여 봤자 좋을 것이 없지.’
침대 위에 누운 아이는 눈을 감은 채 쌕쌕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어깨엔 낫으로 찍힌 듯한 상처가 있었는데 농사를 짓다 사고를 당한 게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지켜보는 아이들의 눈이 있어서 밀라니아는 손을 의자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 핏방울을 짜냈다.
예전이야 피 한 방울로도 웬만한 상처는 나았지만 몸이 이렇게 되었으니 예전처럼은 안 될 것이었다.
피를 더 짜내려는 찰나였다.
덥석!
“안 돼.”
“어허.”
밀라니아가 엄한 시선을 보냈다.
다른 때와 달리 그레칸은 물러서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밀라니아와 있는 내내 어렴풋하게 걸려 있던 미소는 싹 자취를 감추고 드물게 딱딱한 얼굴이었다.
서늘한 눈동자가 밀라니아를 쏘아보았다.
“안 돼.”
“…….”
“당신은 당신의 몸을 좀 더 소중하게 여겨야 할 필요가 있어.”
“충분히 소중하게 여기고 있느니라.”
대답을 했음에도 그레칸의 눈빛은 도리어 더 어두워졌다.
“안 믿어.”
“…….”
“그때에도…….”
그레칸의 눈이 슬며시 일그러졌다.
“그때에도 그랬지. 손끝이 흩어져 가는데도 앨리지를 구했어.”
“…….”
“그때와 같은 일을 내가 그대로 두고 볼 거라고 생각해?”
바닥에 깔리는 낮은 목소리는 한 치의 물러섬도 없었다.
은은하게 새어 나오는 짐승의 울음소리에 밀라니아는 쉽게 설득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그때와는 다르다. 내 몸은 내가 잘 알아.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아이들을 고칠 수 있느니라.”
“…….”
“너도 들었지 않았느냐? 근방에 의사는 없다. 그리고 이대로 내버려 두면 이 깡마른 아이는 상처가 썩어 들어가 회복하지 못하고 죽을 것이야.”
밀라니아의 손목을 붙잡은 채 그레칸이 침대 위의 아이를 흘끗했다.
밀라니아의 말이 틀리지 않다는 것은 아이에게서 새어 나오는 희미한 숨만 듣고도 알 수 있었다.
“알아들었으면 놓거라.”
“잠깐만.”
밀라니아에게 시선을 돌린 그레칸이 짤막하게 말했다.
“잠깐만 기다려.”
“의사가 있으면 당신이 힘을 쓰지 않아도 되잖아. 당신 몸은 약해진 상태야. 예전과 같다고 생각하지 마.”
“내 몸은 내가…….”
“만약.”
그레칸의 눈빛이 번뜩였다.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문 밀라니아에게 눈을 내리깐 그레칸이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만약 내가 오기 전에 당신이 피를 내어 이들을 치료한다면…….”
“한다면?”
위협적인 기세에 밀라니아가 눈을 치켜뜨자 그레칸은 눈을 들어 그녀를 바라보고는 덤덤하게 말했다.
“나는 이들을 적으로 여기겠어. 내게 적은 당신을 위협하는 모든 것이니까.”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억지냐. 날 돕겠다고 하지 않았어?”
근데 벌써 이리 방해를 해.
밀라니아가 기가 막혀 묻자 그레칸은 여전히 변하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내게 쉬이 사람을 해치지 말라고 했지.”
“…….”
“나는 당신이 당신 몸을 쉬이 해치지 않기를 원해. 좀 더 소중히 여겨 줘. 제발.”
“…….”
“서로 원하는 걸 들어주는 거야. 당신이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나도 안 지켜.”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목을 놓은 그레칸이 한발 물러섰다. 그리고 밀라니아가 그를 부르기도 전에 창밖으로 빠져나갔다.
밀라니아는 그레칸이 붙잡았던 손목을 매만지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워낙 작은 소리로 속닥거렸던 터라 말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했던 아이들은 가라앉은 분위기에 지레 겁먹어 어깨를 움츠리고 있었다.
“하아…….”
밀라니아는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손가락에 엉킨 은빛 머리카락이 위로 삐죽 솟아올랐다.
새액, 새액.
아이에게서 흘러나오는 불규칙적인 숨소리에 마음이 심란해졌다.
아니, 이 심란함이 눈앞의 아이 때문인지 그레칸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한참을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녀의 입술 사이에서 실소가 흘러나왔다.
밀라니아는 손을 내리고 손가락을 내밀었다.
‘네 말을 무시하려는 건 아니다.’
그녀의 신경은 아이의 숨소리에 집중되어 있었다. 상태가 가장 위중한 아이였다.
‘앞으로 15분. 그 안에 반드시 처치해야 후유증 없이 나을 터. 네가 오지 않으면 나는 치료할 수밖에 없느니라. 애꿎은 생명을 죽일 수는 없는 노릇이니.’
그리고 근처에 한 명도 없다는 의사를 그 안에 데려오기는 쉬운 일이 아닐 터였다.
그레칸이 협박과 다름없는 억지를 쓰니 묵살하지 않는 것뿐, 밀라니아는 그다지 기대하고 있지 않았다.
기다리자고 생각했던 15분의 반절, 7분가량이 흐른 뒤였다.
무료하게 기다리던 밀라니아가 회의를 느낄 무렵.
달칵!
창문으로 누군가 미끄러지듯 들어왔다.
“으, 으허억!”
괴이한 비명과 함께 등장한 남자는 덥수룩한 붉은색 수염이 침으로 축축이 젖어 있었다.
바닥에 주저앉은 그는 주변을 휘휘 돌아보더니 떨리는 손으로 비뚜름해진 안경을 고쳐 썼다.
“너는 누구냐?”
밀라니아가 희한한 것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보는데도 붉은색 수염 남자는 뭔가를 찾는 것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의사.”
소리는 창문에서 들려왔다. 붉은색 수염 남자가 경직되었다.
창가에서 가볍게 몸을 날려 들어온 그레칸이 붉은색 수염을 턱짓했다.
“의사 데려왔어.”
붉은색 수염은 사색이 된 얼굴로 납작 엎드렸다.
‘의사라고?’
밀라니아는 미심쩍은 눈으로 벌벌 떠는 붉은색 수염을 훑어보았다.
“일단…….”
붉은색 수염의 시선이 슬그머니 밀라니아에게 향했다.
이 시대에 어지간히 잘 먹고 잘살았는지 볼살이 통통했다.
밀라니아는 손가락으로 침대 위를 가리켰다.
“고쳐 보거라.”
비루먹은 노새처럼 바들바들 떨던 붉은색 수염은 의외로 환자를 앞에 두자 진지해졌다.
“이건 뭐 별것도 아닌데. 내가 올 필요도 없는 건데. 집에서 요양만 하면 될 텐데.”
뭐라고 쉴 새 없이 중얼거리기는 했지만.
안경을 위로 치켜올린 붉은색 수염은 광이 나는 사각 가방에서 점액질의 액체가 든 약병을 꺼내고, 제 살점을 떼어 섞었다.
그걸 아이의 상처에 바르자, 곪아서 속살을 훤히 드러냈던 아이의 피부에 새살이 돋기 시작했다.
‘내 치유술과 결이 비슷한 능력이구먼.’
나쁘지 않은 실력에 마음을 놓은 밀라니아는 팔짱을 끼고 옆을 흘끗했다.
“몰라.”
“근데 왜 저러누?”
지금도, 밀라니아와 그레칸이 속닥거리자 눈치를 보는 붉은색 수염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하던 일 하라는 뜻으로 밀라니아가 아이를 눈짓하니 그제야 슬그머니 아이에게로 고개를 돌린다.
“내 기운이 무섭대.”
“예민한 놈이로고.”
치료하는 모습을 보니 붉은색 수염의 정체를 알 것 같았다.
체라가 만들어 주었던 열에 강한 불도마뱀의 옷. 그 옷을 만든 불도마뱀 일족이었다.
재생력이 뛰어나 신체를 이용하여 치유술을 펼치는 것으로도 유명한데, 효과가 뛰어나 100년 전에도 부유하기로 유명했다.
세상이 달라졌어도 그들 일족의 부유함은 여전한 모양이다.
어쨌든 그레칸과 밀라니아가 가깝게 앉아 서로에게 속살거리자 그게 퍽 분위기가 좋아서, 긴장하며 눈치 보던 아이들도 슬슬 어깨의 힘을 풀었다.
한 아이는 용기를 내어 입을 열기까지 했다.
“마녀님, 총통은 정말 우리를 건들지 않을까요?”
멈칫한 밀라니아가 아이를 바라보았다. 안쪽의 벽에 무릎을 끌어안고 앉은 자그마한 아이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총통이 밉다고 했던, 그때의 그 아이.
“그런 건 왜 묻느냐?”
여린 얼굴이 침울해졌다.
“총통이 나타나면 우리를 모두 다 죽일 거잖아요. 그, 그럼 어차피 죽을 텐데……. 상처를 치료하는 게 다 무슨 소용이에요.”
“…….”
“총통은…….”
“건들지 않을 게다.”
밀라니아의 확신 어린 말에 두 눈에 눈물을 가득 담은 아이가 침을 꿀꺽 삼켰다.
“내 말이 믿어지지 않느냐?”
밀라니아의 시선이 그레칸에게 향했다. 그레칸이 한쪽 눈을 찡그렸다.
아이의 시선이 닿자, 그레칸의 낯빛이 불편해졌다.
“……걱정하지 마.”
내키지 않은 듯 그레칸은 거의 입술을 벌리지 않았다.
그의 입매는 경직된 것처럼 빳빳했고, 밀라니아가 아니라면 평생 입을 열지 않을 것처럼 어색했다.
우스운 얼굴이라 밀라니아는 근엄한 표정을 유지하는 데 퍽 애를 써야 했다.
“저, 정말요?”
“그래. 그는 너희 같은 어린아이들은 해하지 않을 거다.”
아이는 눈에 띄게 안심한 얼굴을 했다. 밀라니아는 그 솔직한 얼굴에 잇새로 소리를 흘려보냈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이상하게 위협적으로 느껴지는 그레칸의 분위기 탓일까?
아이는 그녀의 말보다 그의 말에 더 마음을 놓았다.
밀라니아는 그럭저럭 받아들이는 학교의 선생들도 그레칸은 친근하게 말을 걸기는커녕 접근조차 않는 실정이니, 그보다 어린아이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밀라니아가 부드럽게 달랬다.
“그러니 걱정 말고 쉬려무나. 잠들지 않은 지 꽤 된 듯한데.”
“……잠이 안 왔어요.”
“왜?”
“혹시라도 총통이 여길 찾아올까 봐, 무서워서요.”
뜻밖의 말이었다.
“황궁에서 인간이 이렇게 모이는 걸 안 좋아한다니까…….”
긴장이 풀리자 참았던 피로가 몰려왔다.
난세의 아이들은 쉽게 철이 든다.
밀라니아는 꾸벅꾸벅 조는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레칸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레칸은 무표정한 얼굴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너.”
“알아.”
입술을 달싹이자마자 돌아온 대꾸에 밀라니아는 멀뚱히 눈을 깜박였다.
“뭘 안다는 말이냐?”
“기분이 어떠냐고 물으려는 거지?”
그레칸이 고개를 돌려 밀라니아와 눈을 맞추었다. 차분하고 침착한 눈빛에 밀라니아는 잠깐 말을 더듬었다.
“어떻게 알았누?”
그레칸이 힘 빠진 웃음을 흘렸다.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계속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
“아까부터 계속 쳐다봤잖아.”
그레칸의 무뚝뚝한 입꼬리가 완만하게 휘어졌다.
“내 반응이 궁금해서.”
밀라니아는 주먹을 입에 대고 헛기침을 했다. 그러고는 치료받는 아이들에게 시선을 옮기며 물었다.
“그래. 기분이 어떠하냐.”
“기분…….”
그레칸은 한층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되뇌다가 대꾸했다.
“별로 안 좋아.”
“…….”
“고작 스무 해도 살지 않은 어린 인간들이야.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지.”
그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무미건조한 어투는 지극히 사실만을 말하는 듯했다.
그레칸의 생각이 궁금했던 그녀는 조금, 그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레칸이 답답해하며 자신을 보았을 때도 이런 마음이었을런가.
예기치 않게 그의 마음을 이해해 버린 밀라니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래.”
다시 한번 시선이 부딪쳤다.
새카맣게 다가오는 눈빛에 밀라니아는 시선을 피할 수 없었다.
“모든 인간이 내 적은 아니라고 답할게. 말했잖아. 도울 거라고. 당신이 축복하는 사람에게 해를 끼치진 않아.”
밀라니아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곧 원래대로 돌아온 그녀의 미소가 짙어졌다.
새삼스러운 감정에 손가락을 의미 없이 꿈지럭거린 밀라니아는 뒤늦게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거면 됐느니라.”
솜씨 좋은 불도마뱀은 오래지 않아 아이들의 치료를 끝내었다.
그레칸이 뭐라고 낮게 속삭이니 사색이 된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것으로 보아, 다른 이들에게 오늘의 일을 발설하진 않을 듯했다.
그가 올 때처럼 창문을 통해 허둥지둥 빠져나가자 방 안은 약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밀라니아는 묘한 기분이었다.
줄곧 누군가 아픈 일이 생기면 제 피를 뽑는 게 익숙했던 그녀였다.
자신이 아닌 다른 의사의 빼어난 솜씨에 낯선 느낌이 들었다.
위제니아를 부르기 위해 나가려던 밀라니아는 뒤에서 들려온 연약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키가 커 작달막한 아이들 무리에선 꽤나 눈에 띄는 아이가 허리를 꾸벅 숙였다.
경미한 상처를 입었지만 불안해하는 아이들을 위해 이 방에 남았던 대장 격 아이였다.
“감사합니다. 치료해 주셔서.”
밀라니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는 그레칸을 향해서도 똑같이 허리를 숙였다.
인사를 받은 그레칸은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의사를 데려온 것밖에 한 일이 없다. 감사 인사는 의사에게나 해라.”
대장 아이의 뒤에 숨어 있던 작은 아이가 고개를 홱 내밀었다.
“의사 선생님껜 말씀드렸어요! 그래도, 선생님들이 아니었으면 의사 선생님이 여기 오지도 않았을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감사해요. 살려 주셔서.”
“이 친구 말이 맞아요. 감사합니다.”
그레칸은 묵묵부답이었다.
위제니아가 환자에게 좋은 음식을 바리바리 싸 들고 오자 밀라니아와 그레칸은 그녀와 교대하여 방 밖으로 걸어 나와 조용히 움직였다.
층계를 내려갈 즈음, 밀라니아는 입술을 달싹였다.
“나쁘지 않아.”
질문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빠른 대꾸에 어안이 벙벙해진 밀라니아의 귀로 작은 웃음소리가 새어 들었다.
“뭐라?”
어이가 없어 홱 그레칸을 돌아본 밀라니아는 잔잔하게 웃고 있는 그레칸을 보고 움직임을 멈추었다.
“너무 걱정 마. 화가 나도 이 애들을 죽일 일은 없을 테니까. 믿기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지만. 믿어 달라 하는 수밖에.”
인간들이 흔히 말하는, 시선을 빼앗기고 청각을 빼앗기고 영혼까지 빼앗기는 것 같다는 그런 미소는 아니었다.
르베리안즈나 말란도르의 마력과는 다르지만, 외려 그들보다도 깊이 뇌리를 파고들었다.
피비린내가 나지 않는 그레칸의 성숙한 미소였으므로, 그녀는 습관적으로 헛기침을 했다.
괜히 머쓱해져서 그녀는 한발 늦게 대꾸했다.
“네 말은 애들을 제외한 다른 이들은 건들겠단 말이렷다.”
“밀라니아가 있으면, 당신이 내 고삐를 쥐고 있으면 아무도 해치지 않아.”
그레칸이 층계 난간에 올라간 밀라니아의 손을 파고들어 꼭 잡았다. 특유의 따뜻한 체온이 그녀의 살결을 덮었다.
“난 밀라니아에게 내 고삐를 줬으니까. 부디 놓지 말아 줘.”
끈적이는 기색 없이 담담하고 담백한 애원.
밀라니아는 눈만 굴려 그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흠, 헛기침을 했다.
“마녀님!”
1층에 거의 다 내려왔을 때였다. 2층 난간까지 뛰어온 위제니아가 헐떡였다.
“아이들 확인했어요. 이렇게 말끔히 나을 줄은 몰랐는데……. 사실 걱정 많이 했거든요.”
위제니아의 감격에 찬 눈빛을 이해한 밀라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울렁울렁한 눈으로 그녀와 그레칸을 내려다보며 위제니아가 활짝 웃었다.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밀라니아는 그레칸을 흘끗했다. 제 일이 아니라는 듯 쳐다보고 있지도 않았다.
다시 위제니아를 향한 밀라니아는 대수롭잖다는 투로 대꾸했다.
“나머지는 네 일이니라.”
“그럼요!”
활기차게 대꾸한 위제니아는 식탁에 음식을 차려 놨다는 말을 남기고 다시 치료방으로 들어갔다.
티를 내지 않았을 뿐 상태가 위중한 아이들로 인해 적잖이 속을 끓인 듯했다.
다이닝룸으로 걸어가려던 밀라니아는 피부가 따끔거렸다.
위제니아의 목소리가 워낙에 커서 식사 중인 이들까지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뭐, 할 말 있느냐?”
땡그랑!
숟가락을 떨어뜨린 카닛트가 당황한 얼굴로 얼른 숟가락을 주워 들었다. 그 바람에 묘하게 어렸던 긴장된 공기가 깨어졌다.
흠흠, 헛기침을 한 미넬라가 먼저 입을 열었다.
“고마워요, 마녀님. 그리고 그쪽 분도.”
신중한 탓에 아직까지도 때때로 경계하는 시선을 보냈던 미넬라였다. 다른 학교의 선생들도 눈을 끔벅이며 미넬라를 쳐다보았다.
“두 사람이 아니었다면 이번 일은 굉장히 어려웠을 거예요. 보초들…… 처리해 주지 않았다면요. 인사를 하지 못한 게 계속 마음에 걸렸어요.”
미넬라는 진지한 눈으로 다시 말했다.
“고마워요.”
가장 솔직하지 않을 것 같은 그녀가 먼저 시작을 끊자 나머지 학교의 선생들도 진심을 담은 한마디를 던졌다.
밀라니아와 그레칸, 그리고 학교의 선생들 사이에 알게 모르게 그어져 있던 선이 희미해지고 있었다.
단체의 특성상 의심을 버리기 힘들었다고, 앞으로도 그럴지 모르겠다고 솔직하게 얘기하는 호루스에게 밀라니아 역시 솔직하게 충고해 주었다.
“의심해도 괜찮다. 그것이 너희의 일이고, 그것이 너희를 살릴 수도 있음이니라.”
그레칸의 정체를 숨긴 데 대한 그녀 나름의 사과였다.
* * *
황도의 버려지고 망가진 거리. 그 거리에서 농경 생활이 다시 시작되었다.
농사를 지어 보려고도 했다는 깡치 패거리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며칠 전에 심은 밀 싹이 누렇게 말라 가는 것을 확인하는 선생들의 뒤에서 깡치가 인상을 썼다.
“이것 보십쇼. 아무리 심어도 헛수고입니다. 뭘 심든 시들시들 죽어 가니.”
사부작사부작 걸어온 밀라니아가 허리를 숙여 흙을 만져 보았다.
“차라리 배를 만들어 멀리까지 나가 낚시를 하는 건 어떻소.”
농사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호루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바다에는 그래도 고기가 좀 있다 했나?”
“그렇소. 배를 타고 좀 멀리 나가든가 사냥 구역을 넓히든가 하는 수밖에 없지만, 소득도 없는 농사에 매달리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소. 다만 바다는 인어족 놈들이 있어서 전투는 각오해야 하오.”
“…….”
“이 인원이라면 전투를 못 할 것도 없지만, 바다의 주인인 인어족과의 싸움이라면 생각을 해 봐야 하는데.”
허리를 펴 일어난 밀라니아가 말했다.
“그럴 필요 없다.”
호루스와 깡치가 각자 하던 것을 멈추고 그녀를 응시했다. 사방에 흩어져 멀쩡한 게 없나 살펴보던 학교의 선생들과 깡치 일당도 그녀를 흘끔거렸다.
“그럴 필요 없단 건 무슨 소리요.”
“화마에 시달린 대지가 오염되었어. 싹이 크지 못하고 시드는 것은 그 때문이니라.”
“……혹시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했소만.”
한숨을 쉰 호루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도 방법이 없소. 마법으로 정화할 수 있다면 모를까, 그 정도의 마법을 부릴 수 있는 사람은 우리 일행 중에 없어요.”
회의적인 말에 밀라니아는 검은빛을 띠고 있는 땅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러고는 손으로 공기를 움켜쥐는 시늉을 했다.
가볍게 바람이 불었다. 다시 몇 번 반복하자 흙이 미약하게 들썩였다.
사람들은 의문 어린 눈으로 바닥을 둘러보았다.
곧 뽁, 뽁 하고 유선형의 살구색 머리가 땅을 뚫고 나왔다.
“……지렁이?”
그녀의 말대로 스멀스멀 모습을 보인 생물은 지렁이 떼였다.
{누가 부르는 것 같아서 왔는데 누구신가요?}
{나, 나, 나는 들었어요.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어…… 아무튼 할아버지가 봤다고 했어요. 이 느낌은 저 멀리 숲속에 사시는 대마녀님이라고!}
{대마녀?}
{대마녀님!}
되돌이표처럼 읊조리는 지렁이를 진정시킨 밀라니아는 땅을 정화하는 일을 부탁했다.
{할 수 있어요, 할 수 있어. 하지만 못 하는 것도 있어요. 하늘과 가까운 땅은 너무 매워요. 거기 살면 죽어요.}
{거긴 안 돼요.}
{죽을 수 있어요.}
{무셔!}
밀라니아는 고민에 빠졌다. 지렁이들이 말하는 건 지면에 스며든 잿더미를 말하는 것이었다.
‘예전이라면 바람을 불러 할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마력이 부족하다. 어떻게 하면 할 수 있을 것도 같으나.’
누군가 손을 잡아 왔다.
“나한테 말해.”
그레칸이었다.
“지금 생각하고 있는 거, 나한테 말해 줘.”
밀라니아는 혹시 자신이 이상한 표정이라도 짓고 있었나 싶어 얼굴을 더듬었다.
‘잘 모르겠구먼. 어떻게 귀신같이 알아챘을까?’
신기하여 그레칸을 뜯어보다가 입을 열었다.
다 듣고 난 그레칸은 어렵지 않다는 듯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거면 되는 거지?”
그러고는 밀라니아가 했던 것처럼 손을 들고 손날이 아래로 가게 손을 세웠다.
손가락 끝은 땅을 가리켰다.
“뭘 하는 거지?”
좌중이 웅성거렸다.
그 상태로 그레칸은 뭔가를 밀어내듯이 손을 안쪽으로 움직였다.
“헛!”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입을 떡 벌리고, 빵 시트를 말듯이 한쪽으로 말리는 검은 흙을 바라보았다.
흙은 공처럼 굴려져서, 땅 끝에 다다랐다. 그레칸이 주먹을 말아 쥐었다.
스스스스! 팟!
사람 하나만큼 커진 검은 공이 터져 나가며, 공중에서 소멸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