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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라니아는 결심했다.
인간 대륙이라 불리는 2대륙과 달리 1대륙은 이종족이 모여 사는 땅이다.
마녀족, 늑대 수인족, 박쥐 수인족이 각자의 땅을 수호하며 평화롭게 살고 있었다.
‘처음에만 그랬지.’
시간이 지나 일족의 수가 늘어나면서 영토 전쟁이 벌어지기 시작했는데, 그건 점점 더 치열해졌다.
서로가 서로를 본능적으로 혐오하는 종족 특성 탓이었다.
그중에서 대마녀 밀라니아는 마녀족을 수호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고 늑대족이든 박쥐족이든 싸움이 일어날 때 말고는 관심도 없었다.
그러니까, 그들이 자신의 심장을 노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지금쯤 아마 땅을 기어 다니고 있을 터인데.’
20년 후에는 강대한 힘을 가지게 되어, 말도 안 되게 어린 나이에 종족의 수장이 되는 이 세상의 주인공.
모든 이종족이 1대륙에 모여 사는 건 아니었다.
소수의 이종족은 2대륙에서 인간들과 섞여 지냈다. 그중에 희귀종 요정족이 있다.
요정족의 하나 남은 귀한 딸, 앨리지가 바로 이 세계의 여주인공이다.
희귀병으로 시한부 판정을 받은 요정 앨리지. 중요한 건 그녀가 로드 늑대와 로드 박쥐가 집착하는 대상이라는 사실이다.
사실 그러든 말든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밀라니아의 심장이 그 병의 특효약이 아니었더라면.
‘하필이면 내 심장이란 말인고.’
운명의 장난이 아닐 수 없다.
여주를 물고 빨기에도 바쁜 남주들이 밀라니아의 목숨을 노리는 건 여주인 앨리지가 앓고 있는 병과 관련이 있었다.
치료할 방법이 없어 ‘마녀병’이라 불리는 앨리지의 희귀병은 대마녀의 심장으로만 치유할 수 있다.
‘심장을 뜯겼으면 그대로 죽어야 되는데.’
어찌 된 일인지 자신은 계속해서 돌아오고 있었다.
눈을 뜨면 익숙하게 협상 테이블에 앉아 있고, 익숙해서 지겨운 원수의 혈육들이 털을 올올히 세운 채 캉캉대고 있다.
‘막막한지고.’
어차피 이 세계는 완전히 망가진 게 분명하다.
창조주가 죽었는지 돌아 버렸는지 알 길은 없으나 이 세계는 망가졌다. 그래서 같은 시간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해결 방법을 찾아야 하느니.’
말이 회귀지 벌써 열 번째 20년의 똑같은 세월을 보내고 있다. 이제는 지겨워서 미쳐 버릴 것 같았다. 바라는 건 하나뿐이었다.
죽음.
정상적이라면 벌써 영면에 들어 흙으로 돌아갔을 거다. 밀라니아는 그저 피곤했다.
같은 시간을 수없이 많이 반복한 지금, 모든 것이 무료하고 재미가 없었다.
남주들에게 죽는 게 아니라 온전히 수명을 채우고 죽는다면 이 삶도 더는 이어지지 않을까.
‘역시 남주들을 손에 넣어야…….’
근본적으로 원하는 건 그들을 무력화시키는 것.
물론 이 생각도 한두 번 하는 것이 아니었다.
몇 번이나 회귀했다는 것과, 회귀의 이유, 이 세계의 진실을 깨달은 이후부터 계속 생각했던 거다.
시도한 방법도 다양하다.
첫 번째에는 힘을 길러 남주들을 상대하려고 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남주들은 기억 속보다 훨씬 힘이 강해져 있었다. 그런 둘이 협공하니 당해 낼 수가 없어 죽었다.
두 번째 회귀한 후에는 곧장 남주들을 찾아가 독약을 먹였다. 위협이 될 싹을 뿌리부터 제거했다고 만족해했다.
하지만 남주들은 정해진 시간이 되자 어디 숨어 있었는지 일제히 튀어나와 그녀를 습격했다.
‘복수한다며 더 잔인하게 죽었지.’
세 번째 회귀한 후에는 아예 종족을 멸종시키려고 했다. 그래서 마녀족을 훈련시켜 두 종족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
그녀의 성향과 매우 어긋나는 일이었음에도 감행했지만 불행히 효과는 없었다.
‘그때는 마녀족 자체가 멸족했고.’
네 번째에는 여주 앨리지를 찾아갔다. 분명 영영 얼어붙는 저주를 걸었는데, 지나가던 인간족 마법사가 개입하여 여주를 살렸다.
‘이때에는 남주들이 몇 배로 분노했었다.’
다섯 번째 회귀했을 때에는 이 세계에 정해진 운명이 있고, 그 흐름이 망가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아무리 여주와 남주를 죽여도 소용이 없다는 것 또한 알게 되었다.
‘빌어먹을.’
그러고도 믿기지 않아서 아등바등 노력했지만 이제는 아무리 해도 안 된다는 걸 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
열 번째 회귀한 지금, 밀라니아는 무료한 눈으로 어느새 개판이 된 회의장을 바라보았다.
“그래, 이 박쥐 새끼야. 어디 한번 해 보자.”
“흥. 천박하게 주먹이나 들이대기는.”
“교양 운운하려면 네 그 더러운 송곳니나 감추지 그래? 피에 미친 괴물 같으니.”
“어머? 착각도 유분수지. 개 냄새 나는 피는 전혀 탐나지 않는데 이걸 어쩌나.”
왈왈대고 캉캉대는 두 존재를 보니 마음먹기가 쉽지는 않다.
그래도 밀라니아는 그동안 내키지 않아 생각만 하고 있던 계획을 이번 생에서는 실행해 보기로 결심했다.
“그만하거라.”
“밀라니아. 이건 다 그대 마녀족들이 나댔기 때문에……!”
“입.”
두 사람이 입을 다물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거 안 풀어?’, ‘어디서 저주를!’ 표정으로 말하며 으르렁대었다.
육체의 늑대, 암흑의 박쥐, 그리고 저주와 마법의 마녀. 거기다 대마녀에겐 자연 속성이 하나 더 붙는다.
밀라니아는 두 수장의 입을 봉하고 먼저 회의장을 나섰다. 이후 벌어질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
우당탕!
콰당탕!
어차피 수장을 향해 건 마법은 효과가 오래가지 않는다. 고작해야 하루 정도.
자신이 떠나자마자 싸움이 일어났을 회의장은 이미 그녀의 머릿속에서 밀려나 있었다.
오늘의 회의는 세 종족의 싸움이 잦아져서 생긴 것. 싸움판이 된 회의 자체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오늘 저들을 상대하는 건 무의미하느니.’
지금 밀라니아의 머리를 꽉 채운 건 남주들에 관해서였다.
“아이, 밀라니아 님. 잠깐만 멈춰 보세요.”
중립 지대 건물을 나서는 밀라니아를 쫓아온 심복 체라가 약초 물을 밀라니아에게 뿌려 댔다.
밀라니아는 놀라지 않았다. 회의가 끝난 후 아무리 빨리 가도 체라는 그녀를 쫓아왔다.
이것도 벌써 열 번째다.
“냄새를 없애야 한다구요. 마녀들을 토하게 만들 생각이세요?”
밀라니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저벅저벅 걸어갔고, 체라도 끈질기게 쫓아와 밀라니아의 몸에 약초 물을 뿌렸다.
“체라.”
“남주들을 거둬야겠다.”
“남주들이 누구예요?”
‘이름이 특이하네요.’ 중얼거리는 체라는 밀라니아에게 묻은 냄새를 없애느라 혈안이었다.
남주들이 바로 늑대족 수장의 아들인 그레칸과 박쥐족 수장의 아들인 르베리안즈란 걸 알면 기겁을 하다못해 미쳤냐고 하겠지만.
남주들이 밀라니아를 찾아왔을 때마다 체라가 보이던 반응을 떠올려 보니 음, 설명은 나중에 해야겠군.
‘그렇다면 언제 시도해야 할까.’
‘지금!’
놈들이 가장 힘이 없을 때. 아직 앨리지를 만나지도 않은 핏덩이 상태인 지금밖에 없다.
밀라니아는 입꼬리를 우아하게 말아 올렸다.
* * *
마녀의 성은 2대륙의 인간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괴기스럽게 뾰족하지만은 않았다.
그건 오히려 뱀파이어족의 소굴이나 그렇고, 마녀성은 보다 자연 친화적이었다.
살아 있는 나무가 성을 칭칭 감아 수문장 역할을 한다.
밀라니아가 다가가자 입구의 나무가 스멀스멀 물러난다.
허가받지 않은 사람이 앞에 서면 단단히 굳어져 움직이지 않는 천연 수문장이다.
밀라니아는 무표정한 얼굴로 안으로 들어가다가 움찔했다.
“밀라니아 님!”
나무의 속삭임을 전달받은 체라가 달려 나오고 있었다.
두 발을 열심히 놀리며 달려오는 체라의 붉은 머리가 삐죽삐죽 섰다.
빨갛게 성난 방울토마토 같았다.
‘화가 났구나.’
체라의 반응이야 예상하고 있었다.
몇 번째인지 모를 전생에서 늑대족 남주 그레칸을 죽이러 나갈 때도 혼자 빠져나갔었는데, 돌아왔을 때는 체라가 입에서 불을 뿜으며 그녀를 찾고 있었다.
그때는 성질 사나운 레드 드래곤이 체라로 현신한 줄 알았다.
“밀라니아 님! 도대체 어디를 가셨던 거예요? 아무도 밀라니아 님 행방을…….”
가까이 다가오면서도 침을 튀기며 흥분하던 체라는 밀라니아의 손을 보고 말을 뚝 끊었다.
“내가 애도 아니고. 자리 좀 비운다고 무슨 일이 있다고 그러느냐.”
밀라니아는 다소 소심하게 중얼거렸다.
“그걸 말이라고 하세요? 작년에는 말없이 사라졌다가 중립 지대에서 발견되었잖아요! 그것도 잠든 채로! 마녀가 아닌 다른 종족이 발견했다면 큰일이었을 거라구요.”
“음, 함부로 공격하지는 않을 텐데…… 아, 아직 협정을 맺지 않았을 때던가?”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협정을 맺지 않은 현재는 다른 종족을 발견하면 각자 발톱이나 지팡이 따위를 꺼내는 상황이다.
‘계속 싸우면 피곤하니까, 협정을 빨리 맺는 게 좋겠구나.’
짐승 노린내와 피비린내를 다시 맡겠지만…….
얼마 전의 정기 회의가 난장판으로 끝났다는 걸 상기했다.
예전에는 좀 참을 만했던 것도 같은데 지금은 모여서 아웅다웅하는 게 아주 귀찮다.
살아온 시간만 따지자면 이미 흙으로 돌아갈 때가 한참 지났으니 무기력한 것도 무리는 아닌 몸.
그러니.
‘……좀 미룰까.’
슬쩍 생각을 바꾸는데, 사위가 조용했다.
체라는 아까부터 밀라니아의 손에 시선을 못 박고 있었다.
“밀라니아 님.”
“응?”
“저기, 혹시 말해서 묻는 건데, 그거 개는 아니죠?”
체라가 머리카락보다 붉은 입술 한쪽을 삐죽 올렸다. 웃고 싶지 않은데 분위기상 웃어야 할 것 같아서 웃는다는 표정이다.
체라의 말에 밀라니아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손가락 두 개에 매달려 대롱거리던 작은 짐승은 시선을 받고 이빨을 드러냈다.
기진맥진하던 얼굴이 순식간에 사나운 표정으로 덮였다.
다른 이는 뭐 그렇다 치고 네 개의 송곳니는 평범한 개의 것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크고 날카롭다.
설마설마하던 체라의 얼굴이 푸르죽죽해졌다.
“개…… 아니잖아요!”
반신반의했지만 아무리 밀라니아라도 설마 ‘이런 짓을 할까’ 생각했던 체라가 펄쩍 뛰어올랐다.
발이 땅에서 족히 1m는 떨어져 올라갔다.
‘공중 부양 수양이라도 하고 있는 건가?’
밀라니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체라가 너무 펄펄 뛰어서 설명부터 시작했다.
“응. 비슷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개는 아닌지고.”
“그럼…….”
“늑대.”
“정확히 말하셔야죠!”
“늑대족.”
“꺄아아아아악!”
밀라니아가 눈을 깜박였다. 그 무구한 얼굴에 속이 터진 체라가 양손으로 머리를 싸매고 비명을 질러 댔다.
비명에 놀란 늑대족 새끼가 바둥거렸다.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손이지만 기세가 제법 거칠었다.
아기 늑대의 손톱이 밀라니아의 손등을 긁었다. 붉은 실선이 생겼다.
“이미 많이 당하셨잖아요?”
넋을 잃은 체라에게 밀라니아가 투덜거렸다.
육체의 늑대족.
힘으로 따지자면 이종족 수인 중 순위에 손꼽힌다. 아기 늑대가 이를 크게 벌리고 이빨을 드러낸다.
그러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입을 뻐끔거리지만 숨소리도 흘러나오지 않는 늑대를 유심히 살핀 체라가 밀라니아를 흘끗했다.
“침묵 마법을 쓰셨네요?”
“응.”
‘욕이라도 하고 있는 건가?’
밀라니아가 늑대의 주둥이에 시선을 고정하는 동안, 정신을 차린 체라가 팔짱을 꼈다.
“늑대 새끼는 왜 데리고 오신 거예요? 식사거리는 아닐 테고.”
밀라니아는 저녁 반찬으로 새끼 늑대가 올라오는 상상을 해 버렸다.
그 노린내……. 욱, 속이 울렁거렸다.
메스꺼운 표정이 된 밀라니아는 체라 역시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런 건 분명 아니시겠죠. 늑대 새끼들이 길바닥 흔한 잡초도 아닌데 어떻게 들키지 않고, 아니 그것보다 왜 그런 짓을, 무슨 생각으로 그러신 거예요?”
“뭘 묻고 싶어 하는지 모르겠구나, 체라.”
“그럼 내 방에서…….”
“아뇨.”
체라가 지팡이를 휘두르자 멀리 있던 테이블과 의자가 쑤욱 날아왔다. 파괴의 마녀답게 날아오는 폼이 폭풍처럼 거칠다.
체라의 기분을 반영하기라도 했는지 평소보다 더 우악스럽다.
얼굴을 노리며 달려드는 의자를 본 밀라니아가 서둘러 손가락을 튕겼다.
밀라니아가 사색이 된 얼굴로 체라를 쏘아보았다.
“날 공격하려던 거였느냐?”
“……얼른 앉으세요.”
단순히 컨트롤 실패였던지라 민망해진 체라가 의자로 척척 걸음을 옮겼다.
밀라니아는 얌전히 의자에 앉았다. 새끼 늑대는 바닥에 내려놓았다.
‘무슨 얘기부터 해야 할까.’
체라의 부담스러운 눈빛을 받으며 생각에 잠기는데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스륵, 시선을 돌리자 바닥에 내려놓은 새끼 늑대가 열심히 문 쪽으로 기어가고 있었다.
‘쯧쯧, 도망갈 수 없다는 걸 알 터인데 포기하지 않는구나. 새끼인데도 저런 건 여전한지고.’
전생에서 남주 그레칸은 아무리 공격받아도 지치지 않고 달려들었다.
밀라니아의 심장을 노리는 집요한 검은색 눈은 이글이글거려서 빨갛게 보일 지경이었다.
‘집착’은 그레칸과 르베리안즈가 공통적으로 보이는 속성이지만 르베리안즈가 음습했다면 그레칸은 대놓고 집요했다.
밀라니아가 손가락을 튕겼다.
드래곤은 용언 마법의 지배자, 대마녀 밀라니아는 핑거 마법에 능했다.
“크릉!”
바뀐 광경에 어리둥절한 것도 잠시, 곧장 이를 드러내는 그레칸을 보며 다시 손가락을 튕겼다.
쾅!
순식간에 갇혀 버린 그레칸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이거 비비가 쓰던 철창 아니에요?”
심장이 떨어질 듯 놀란 그레칸과 달리 체라와 밀라니아는 태연했다.
“맞느니.”
비비는 밀라니아가 부리는 매였다. 지금은 어린 인간 정도의 크기가 되었지만 어릴 때는 딱 지금의 그레칸과 비슷한 크기였다.
새장에 갇히게 된 그레칸이 창살을 이빨로 잘근잘근 물었다.
경악이 가시자 신기한지 체라가 감탄을 터뜨렸다.
“새끼 늑대는 처음 봐요. 그놈들이 제 새끼들은 끔찍하게 여기잖아요.”
핏빛의 체라. 별명과는 다르게 아기를 좋아하는 체라가 무심코 새장 안에 손가락을 집어넣었다가 그레칸이 물어뜯으려 하자 식겁하여 손가락을 빼내었다.
딱!
손가락을 물지 못하고 입을 다문 그레칸이 아쉬운 눈으로 입맛을 다셨다.
질린 표정으로 체라가 밀라니아를 바라보았다.
무언의 압박에 밀라니아가 눈을 깜박였다. 곤란할 때 드러나는 특유의 버릇이다.
“밀라니아 님.”
“어…… 이 늑대 새끼 이름은 그레칸이란다.”
“잠깐만, 머릿속으로 정리해 보고.”
체라는 씩씩댔지만 침착한 밀라니아를 보고 조금 마음이 놓였다. ‘저렇게 침착하시니, 생각보다 큰일은 아니겠구나.’ 하는 생각에.
잠시 후, 밀라니아가 설명을 시작했다.
“내가 나간 건 새벽이었느니…….”
* * *
해가 완전히 떠오르지 않은 하늘은 아직 어슴푸레했다.
새벽 시간을 택한 건 늑대들이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전을 노렸기 때문이다.
아무리 남주를 납치해서 세뇌시킨다는 계획을 세웠어도 들키면 되돌이표다.
이 망가진 세상은 자신에게 좋게 작용하지 않는 것 같으므로 밀라니아는 신중하게 움직였다.
신중이라고 해 봤자, 투명 마법 하나 걸고 기척을 죽이는 마도구를 착용하는 게 다였지만.
밀라니아는 모습과 기척을 죽이고, 늑대 소굴을 돌파했다.
계획이라고 하는 게 민망했다.
어쨌든 밀라니아는 눈을 형형히 뜨고 경비를 서고 있는 늑대 수인의 곁을 유유히 스쳐 지나갔다.
멋들어진 성을 짓고 사는 마녀족, 박쥐족과 달리 늑대 소굴은 거대한 절벽이다.
정확히 말하면 절벽 면에 수많은 동굴이 뚫려 있는데, 그 굴방 하나하나가 늑대의 쉼터다.
늑대 수장이 거주하는 동굴은 특히나 거대하고 높은 절벽에 뚫려 있었다.
‘새끼 늑대가 있는 동굴이 어디였더라.’
남주가 새끼들일 때 처리하겠다 생각한 건 이번 한 번만이 아니다.
그것도 벌써 몇십 년 전이라 선명하게 떠오르는 건 아니었지만 기억을 되새기자 곧 어렵지 않게 찾아냈다.
늑대족은 박쥐족과 더불어 혈족에 대한 집착이 유난히 강한 편이다. 그러므로 새끼들이 있는 동굴은 보다 꼭꼭 숨겨져 있다.
밀라니아는 절벽의 가장 아래쪽 중앙에 있는 동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저기가 아마…….’
주변에 성체 늑대족이 있어 누군가 침입하면 바로 알아차릴 수 있는 구조였다.
밀라니아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멀끔한 동굴을 지나쳤다.
수장의 자식들이 중앙 동굴에 살고 있는 것은 맞다. 그러나 그레칸은 그곳에 없다.
대신 그녀는 외곽의 허름한 동굴로 들어갔다.
늑대 수인들이 애지중지하는 새끼가 살기에는 다소 걸맞지 않은 초라한 동굴.
여기가 그레칸이 유년 시절을 보낸 곳이다.
명색이 늑대족 수장의 아들이 이런 곳에서 사는 건 그레칸이 그의 아비에게 버림받았기 때문이다.
늑대족 수장에게 가장 중요한 존재는 그의 배우자. 늑대족의 순애보는 다른 일족에도 유명했다.
늑대 수인은 반려가 죽으면 평생 다른 반려를 맞지 않는 경우가 빈번한 편이다.
일족을 이끌어야 하는 수장은 새로운 배우자를 맞이하기도 하지만, 그레칸의 아버지 발칸은 그러지 않았다.
배우자를 잃은 수장의 분노는 천덕꾸러기 막내아들에게 향했다.
“크릉…… 그르릉…….”
동굴로 들어간 밀라니아는 약하게 코를 골고 있는 자그마한 늑대 앞에 멈추었다.
딱딱한 돌바닥 위에서 몸을 웅크리고 잠들어 있는 새끼 늑대의 얼굴은 상처투성이였다.
털은 한 번도 그루밍 받지 못했는지 지저분하게 엉겨 있었다.
부친인 발칸의 미움을 받고 자란 그레칸은 나중에 상처 입은 채로 앨리지를 만났다가, 그녀에게 치유받게 된다.
누구의 사랑도 받아 본 적 없던 그레칸은 앨리지에게 집착하고…….
‘내 심장까지 뺏어 갔지.’
살짝 연민을 띠었던 밀라니아의 금색 눈이 뾰족해졌다.
인간형으로 충분히 탈태할 수 있을 텐데도 저 모양이라는 건 힘이 약하다는 증거.
어린 그레칸은 비실비실했다. 그러나 방심하면 안 된다. 약한 건 지금뿐이니.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약한 육체를 벗어던지고 새롭게 태어난 그레칸은 순식간에 수장의 자리까지 차지하게 된다. 그게 그의 운명.
그러니까 그때가 되기 전에 교육을 잘 시켜 놔야 한다. 자신을 노리지 않도록.
‘늑대족은 독립한 후에도 부모를 찾아올 정도로 효심이 깊으니, 잘 키워 놓으면 나를 부모처럼 대하지 않겠느냐.’
조심스럽게 그레칸의 옷을 잡고 들어 올렸다. 그 순간 새끼 늑대가 눈을 떴다.
까맣고 반질반질한 눈망울에 굳어 버린 밀라니아의 얼굴이 보였다.
[심장을 내놔!]
귀기 어린 눈을 번뜩이며 달려들던 그레칸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졸음기가 어려 있던 그레칸의 눈동자가 상하좌우로 움직이며 밀라니아를 살폈다.
과거의 기억에 갇힌 밀라니아는 침을 꿀꺽 삼켰다.
상황 파악이 덜 되었던 그레칸은 금세 정신을 차렸다. 점차로 사나워지는 눈동자가 침입자를 정확히 응시했다.
‘이러면 곤란한데.’
밀라니아의 입술이 어색하게 굳어졌다.
밀라니아는 재빨리 손을 뻗어 그레칸의 앙상한 목덜미를 움켜쥐려고 했다. 그러나 육체적 능력은 아무래도 늑대족이 한 수 위였다.
“컹, 컹!”
그레칸이 밀라니아의 손을 덮쳤다. 그녀는 간발의 차로 손을 뺐다.
가슴이 쿵쾅거렸다.
완전히 정신을 차린 그레칸이 네 발을 바닥에 내려놓은 채 밀라니아를 경계하듯 바라보았다.
앙상하고 왜소했으나 저 작은 늑대가 얼마나 무시무시하게 커지는지 그녀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밀라니아는 머릿속이 아찔했다.
그러는 사이에도 그레칸의 눈동자는 적의로 불타올랐다.
초면인 것 치고는 과하게 날선 경계심이었으나 밀라니아는 익숙했다.
매 회귀 때마다 그레칸과 르베리안즈를 만나는 건 밀라니아의 운명에서 필연적인 일.
그러나 기억을 하는 건 밀라니아뿐으로, 그레칸은 기억하지 못하는 듯싶었지만 만날 때마다 밀라니아에 대한 적개심이 커졌다.
‘제일 심했던 건 그레칸을 죽이고 난 후의 회귀였지.’
그레칸을 죽였을 때 그녀는 상처를 회복하고 나타난 그에게 심장을 뜯기는 걸로도 모자라서 바다에 던져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다음 회귀에서도, 그다음 회귀에서도 그레칸의 적개심은 이전 회귀와 비할 바가 아니었다.
고심하는 밀라니아를 그레칸이 다시 덮쳤다.
혼비백산해서 옆으로 피하자 그녀의 머리카락만 스쳤던 그레칸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날카로운 이빨이 주둥이 사이로 사라진다.
밀라니아는 오싹 소름이 돋았다.
회의장에서 수장들을 상대로 술이 쉽게 걸렸던 것은 그들이 서로에게 집중하느라 밀라니아를 등한시한 덕분이었다.
지금의 그레칸처럼 밀라니아를 완전히 적대하는 상태로는 마녀의 술을 걸기가 쉽지 않다.
“크어엉!”
그 모습을 보자 심장을 향해 손을 뻗으며 달려들던 전생의 그레칸이 떠올라 버렸다.
절체절명의 순간 그녀는 본능적으로 손가락을 튕겼다.
밀라니아의 손에 벼락 맞은 자작나무로 만든 지팡이가 소환되었다. 대마녀 밀라니아의 독문 병기였다.
밀라니아가 몽둥이 쥐듯 지팡이를 단단히 쥐자, 밀라니아에게 달려들던 그레칸의 눈동자가 찢어질 듯 커졌다.
* * *
체라가 슬쩍 고개를 틀어 철창 안의 새끼 늑대를 흘끗했다.
“그러고 보니 혹이 있는 것도 같네요.”
“응.”
“아무라 늑대라도 새끼인데 대가리를 후려치는 건 좀……. 죽었으면 큰일이잖아요.”
“죽으면 다행이게.”
“예? 뭐라고 하셨어요?”
체라가 귀를 쫑긋하고 되물었다.
“그런 걸로는 안 죽는다고 말했느니.”
“아, 전 또 죽었으면 좋겠다는 줄 알았네요. 밀라니아 님이 그런 과격한 말을 하실 리 없죠.”
마녀치고 온화한 성품으로 알려진 밀라니아는 체라의 태연한 대꾸에 울적한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온화한 성품은 그레칸과 르베리안즈에 대해서만은 절대적으로 예외였다.
아무리 착한 사람도 수십 년간 같은 상대에게 심장을 뜯겨 죽는다면 본래의 성품을 유지하지 못할 터였다.
‘지금은 저렇게 작고 볼품없으나.’
밀라니아는 고민이 많은 눈으로 그레칸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를 잡아 죽이겠다는 듯 이빨을 드러낸다.
“크르르르르르! 컹컹! 크헝헝!”
여주 앨리지를 향한 집착을 생각해 보면 뼛속 깊이 ‘복종’을 심어 줘야 할 터.
그러니까 바른 교육을…….
아니지. 교육이란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얘는 짐승이 아니더냐.’
그것도 말 안 듣고 고집 센 새끼 늑대. 인간적인 교육은 통하지 않는다.
사육.
사육을 시작한다.
“크허어어어엉!”
결연히 눈을 빛냈던 밀라니아는 사나운 그레칸의 목울음을 듣고 한숨을 쉬었다.
단순히 죽이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사육’으로 방향을 완전히 튼 건 열 번의 회귀 중에서도 처음이라 눈앞이 막막했다.
“아무튼 얘를 데리고 끝까지 잘 빠져나왔다.”
“…….”
“발칸도 안 만나고. 늑대 수장은 냄새가 더 지독하니까, 잘 피했지 않느냐?”
그거 하나는 뿌듯해서 밀라니아가 싱긋 웃자 체라가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툭 뱉었다.
“뭘 잘하셨다고 뿌듯해하세요.”
“……응?”
체라의 얼굴이 변하기 시작했다. 턱부터 새빨개지더니 이내 이마까지 빨갛게 변했다.
밀라니아가 손가락을 튕겼다. 한기가 흐르는 얼음주머니가 소환되었다.
쉽게 흥분하는 체라 전용 얼음주머니다.
“열 좀 식히거라, 체라.”
걱정하는 말투에 더 화가 난 듯 체라의 머리카락이 꼿꼿하게 섰다.
“생각해 보니까 지금 늑대 새끼들 소굴에 그냥 들어갔다는 거잖아요.”
“…….”
“그것도 대책 없이?”
“없지는 않았지.”
“투명 마법 따위를 대책이라고 하지 마세요.”
“따위라니. 마력의 소모가 얼마나 큰 마법인데. 게다가 안 들켰지 않느냐.”
“그거야 늑대들이 멍청하니까 요행으로 넘어간 거고요!”
체라가 테이블을 쾅 쳤다. 밀라니아는 다리를 꼰 채 딴청을 피웠다.
요행은 아니었다. 예전에도 이런 식으로 늑대 소굴에 들어갔다가 무사히 나온 적이 있으니까.
사실 두 번째로 늑대 소굴에 들어갔을 때는 조금 문제가 있었다.
늑대 수장과 마주쳤던 것이다. 그때는 걸릴 뻔했지만 이번에는 잘 피해서 나왔다.
하지만 밀라니아가 무엇을 믿는지 모르는 체라는 그야말로 속이 터졌다.
“다음부터는 말없이 나가지 마세요. 아셨어요?”
“뭐…….”
“밀라니아 님? 저 열받아요?”
그냥 말이 아니었다. 체라의 얼굴이 더 새빨개졌다. 잘 익은 체리처럼.
밀라니아가 저도 모르게 웃자 체라의 눈동자가 이글거렸다. 밀라니아의 눈이 시무룩해졌다.
“알았느니.”
“됐어요, 그럼. 어찌 됐건 무사히 다녀오셨으니까요. 아무렴, 털북숭이 놈들 백이 달려들어도 감히 대마녀를 다치게 할까요. 그래도 더러운 냄새가 밴다구요.”
체라가 구시렁대며 약초 향수를 밀라니아에게 뿌렸다.
털북숭이 짐승이라며 늑대를 무시하는 체라로서는 당연한 말이었지만, 벌써 열 번째로 최연소 늑대 수장에게 죽은 바 있던 밀라니아는 입술을 조용히 오므렸다.
흥분이 가신 체라의 피부색이 조금쯤 하얘졌다.
그녀의 시선이 철창 안에서 철망을 잘근잘근 씹고 있는 그레칸에게 향했다.
검은색 창살을 따라 투명한 침이 주륵 흘러내렸다.
체라는 떨떠름해졌다.
“응.”
“이놈 고아인가요?”
“응?”
밀라니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털북숭이 놈들의 특성 모르세요? 누가 새끼를 훔쳐 갔다면 범인을 찾으려고 난리 법석을 떨 텐데. 그거 다 생각하고 오신 거죠? 부모가 없다거나.”
체라는 당연한 듯이 설명했다.
그 정도는 다 생각하고 데려오신 걸 거라고 생각하는 얼굴을 보며 밀라니아는 땀을 흘렸다.
‘고아는커녕 발칸의 아들인데.’
이 말을 하면 체라의 가라앉은 얼굴색이 다시 새빨갛게 변할 것 같다.
“어, 뭐…….”
“왜 이렇게 볼품이 없어요? 고아라서 그런가. 가만 보니 생김새는 귀엽네요. 애완 늑대로 둬도 괜찮을 것 같기는 한데……. 뒤가 구리지만 않다면요.”
“……으응.”
“이렇게 됐으니 어쩔 수 없죠.”
체라가 약간 누그러진 눈으로 그레칸을 관찰했다.
“응, 발칸 아들이기는 하나 내놓은 자식이라 딱히 뒤가 구리지는 않느니.”
“아, 깜짝이야! 사납기는.”
손가락을 가까이 댔다가 악어처럼 입을 딱 다무는 그레칸에게서 손을 물릴 뻔한 체라가 손을 털고는 밀라니아를 힐끗했다.
“뭐라고 하셨어요?”
“어, 응. 딱히 중요한 건 아닌데, 걔 발칸 아들이라고 했느니.”
밀라니아가 다시 한번 속삭였다.
작은 목소리였으나 ‘발칸’이란 이름이 귀에 딱 꽂힌 체라가 고개를 왼쪽으로 기울였다가 다시 오른쪽으로 기울였다.
“뭐라고요?”
“아, 됐어. 뭐 숨길 일이라고 그러느냐. 발칸 아들이란다, 걔.”
누가 들으면 ‘시장 아저씨 아들이야.’라고 말한 줄 알겠다.
체라는 비명을 지르려다가 뻔뻔한 밀라니아의 얼굴에 천천히 뒷목을 잡았다.
“발칸 아들이요? 제가 아는 그 발칸이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리가요? 제가 아는 발칸은 늑대 새끼 수장밖에 없는데? 그 무식한 늑대 새끼?”
체라의 얼굴이 다시 한번 조용히 빨개지기 시작했다.
밀라니아는 얼음주머니를 체라의 볼에 대 주며 걱정스럽게 말했다.
“혈압 조심하거라.”
“밀라니아 님!”
쾅!
철망을 이로 물어뜯던 그레칸이 깜짝 놀라 귀를 쫑긋했다.
“무, 무슨 짓을 하신 거예요! 늑대 수장의 아들을 납치하다니! 전쟁이 하고 싶으셨으면 말을 하시죠! 그럼 차근차근 준비를 했을 텐데!”
체라는 막 전쟁 선포가 떨어진 것처럼 굴었다.
“괜찮다니까. 전쟁은 안 일어난대도.”
“어떻게 확신하세요? 늑대들이 제 새끼라면 환장하는 거 모르시는 거 아니잖아요.”
늑대의 가족 사랑은 아주 유명하다.
“쟤는 괜찮으니.”
“왜요?”
“라미에의 아들이거든.”
“라미에라면 발칸의 아내요? 죽은?”
“응. 그레칸 낳다가.”
그 말에 상황을 깨달은 체라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된 거군요.”
라미에를 잃고 슬픔과 분노에 미쳐 버릴 뻔한 발칸의 사정은 모르는 1대륙인은 없었다.
라미에의 희생을 밟고 태어난 아들을 발칸이 싫어하게 된다는 건 무리가 아니었다.
‘어지간하면 발칸은 문제 삼지 않을 것이야.’
예전에 그를 죽였을 때도, 물론 불사신인지 다시 살아났지만, 발칸은 시끄럽게 굴지 않았다.
그레칸은 늑대족의 골칫덩이 애물단지였다.
“얘도 좀 불쌍하네요.”
“……어, 뭐.”
“일단 그건 두고 보고요. 왜 발칸의 아이를 데려오신 거예요? 굳이 거기까지 가서.”
밀라니아는 눈을 데구루루 굴렸다.
체라는 이성을 잘 잃지만 간혹 이렇게 날카롭게 굴 때가 있어서 곤란하다.
할 수 있는 말은 많았지만 간단히도 말할 수 있다.
‘얘가 나중에 나를 죽이러 오니까.’
그런데 그렇게 말해 봤자 체라를 이해시키긴 힘들 테고. 뭐라고 말하지?
고민하다가 체라의 말에서 힌트를 얻었다.
“네가 말했지 않느냐. 애완 늑대. 한번 키워 보려고 한다.”
‘아, 체라는 다 좋은데 사람을 참 곤란하게 만드는구나.’
밀라니아는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다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귀찮은 질문은 안 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