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8장. 과할수록 좋으니(3)
바람이 불어드는 것을 몰랐다.
연두빛을 넘어 녹빛으로 물들어가는 온갖 것들의 푸른 내음이 섞인 바람을 눈치채지 못했다. 잠시 흐트러진 연한 빛의 머리카락이 속눈썹 끝을 스쳤을 때에야 바람이 지나갔음을 알았다. 그 머리카락이 눈을 찔러들고도 한참이 남을 만큼 자랐다는 것도 그제야 깨닫게 되었다.
- 저벅, 저벅.
저도 모르게 불어든 바람에 흘러내린, 저도 모르게 자라난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발을 옮겼다.
영주성의 지하감옥.
다시 마주하기 버거웠던 휘트린이 있는 곳. 언제 어떻게 참을성을 잃게 될지 모르니 차라리 란델에게 취조를 도와달라 하자고, 칼리안과 그런 말을 나누게 한 이가 들어앉아 있는 곳. 그런 곳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저하를 말려드리러 가는 겁니다.'
풀 내음 대신 퀘퀘하고 음습한 냄새가 잔뜩 맺힌 지하로 들어서던 앨런이 그렇게 말했었다. 그 말에 플란츠는 고개를 끄덕였다. 뿐만 아니라 짧은 계산도 마쳤다.
- 저벅······ 탁!
그리고 휘트린이 가둬진 복도에 들어서기 직전에 발을 멈춰 섰다.
앞서 가던 앨런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플란츠는 가타부타 다른 설명을 하지 않고서 팔찌의 힘을 운용했다.
칼리안에게 소용없는 말을 걸어본 것은 아니었다. 칼리안이 사라진 이후로 휘트린에 도착한 이후까지 그렇게나 숱하게 부름을 보냈어도 대답이 없었다. 그래서 더 이상 동생 놈을 부르는 헛수고는 하지 않았다. 상황이 된다면 어떻게든 연락을 취할 칼리안임을 알았으니까.
그러니 플란츠가 사용한 것은 통신을 위한 팔찌 말고 또 다른 마법 용품, 이제까지 참 유용하게 잘 써먹었던 것. 바로 변장용 팔찌였다.
- 스르륵!
누군가의 모습을 가능한 상세히 떠올리며 마법 변장을 시작했다. 그 뒤에는 소매 길이와 품이 모자라게 될 것이 분명한 흰 재킷을 벗어들고 셔츠 소매를 걷었다. 다만 은사로 장식된 옅은 하늘색의 베스트는 굳이 벗지 않았다.
- 투둑!
대신 지금 변장하려는 그 누군가와 절대 어울리지 않을, 옅은 하늘색의 얕은 바다를 담은 듯한 타이 핀은 풀었다. 부드러운 실크로 만들어진 은색의 타이도 풀어 손에 쥐었다. 그날 아침 그것을 본 칼리안이 '세크리티아에 그렇게 생긴 길다란 은색 생선이 있는데 형님 모르시죠' 하고 놀리던 말을 어떻게든 신경쓰지 않으려 애쓰면서.
그 사이에도 외견의 변화는 계속되었다.
"무리하시는 것이 아닌지요."
"아니야."
플란츠가 누구로 모습을 바꾸는지를 알아본 앨런이 표정을 굳히는 것도 모르는 척하며 멈추지 않고 다른 이의 얼굴을 만들어보였다. 그 뒤 마지막으로 허리춤의 시나스타를 풀어 복도 벽에 세워두었다.
- 슈욱!
시나스타를 본 앨런이 잠시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벽에 기대져 있던 시나스타, 플란츠의 손에 들려있던 재킷과 타이 핀, 그리고 타이가 한꺼번에 사라졌다.
그 많은 것들이 전부 다 앨런의 공간 속으로 사라졌으리라는 것을 잘 아는 플란츠는 다른 말 없이 제 손을 움직였다.
그 손에 굳은살이 있는지, 흉터가 있는지, 그것까지는 단 한 번도 자세히 보지 않아 알지도 못했기 때문에 본래 플란츠의 것을 그대로 닮은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그러자 안그래도 길어졌던 머리카락보다도 조금 더 길어진 짙은 청록색의 머리카락이 적당히 정돈되는 것이 느껴진다.
"닮았나."
굵직하고 낮은 음성이 앨런을 향했다.
거울이 없었으니, 지금 바뀐 모습이 어떤지를 확인해달라 말하는 것이리라.
'플란츠'의 얼굴을 가만히 지켜보던 앨런이 사일런트를 펼쳤다. 그리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닮은 구석이라고는 일절 없습니다."
"말고."
"닮았습니다. 꼴을 마주하기도 싫은 것을 보니."
누가 속내가 닮았는지를 물었나.
외견이 닮았는지를 물었지.
아무튼 생각하는 것도 제 아들과 참 많이 닮은 앨런의 대답을 들으며 속말을 삼킨 플란츠가 피식 웃었다.
"됐어, 그럼."
"휘트린은 진작부터 저하께서 온 사실을 알고 있을 겁니다."
"알아."
"마법으로 변장한 것을 못 알아 볼 인사도 아닐 터인데······ 괜히 그리 나서서 저하 혼자서만 쓴 것을 집어드시는 꼴이 되지는 않을는지."
청록빛의 머리와 눈을 하고 되물어오는 남자.
'그레이 브리센'의 얼굴을 한 플란츠를 보던 앨런이 혀를 쯧쯧 찼다.
"다른 이라는 걸 알아도 동요하던데. 아닌가."
플란츠의 말이 틀리지 않음을 안다.
앨런 역시, 실제와 정말 많은 부분이 달랐을 뿐더러 이미 죽은 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로닐'을 보며 동요했었으니 말이다.
그러니 휘트린도 다르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지금의 이 모습이 실상은 그레이가 아닌 플란츠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하더라도 아예 동요하지 않을 수는 없으리라고. 그리 대답한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아델리아가 실레스티안과 만난 적이 있다고 했는데. 그리고 내 아우님이 실레스티안과 관련이 없다는 말을 믿고 아우님을 살려놓는 것이라 말했다 했어. 그 백발 마법사를 믿는 건 아니지만 누굴 그렇게까지 싫어할만한 사람이 아닌 건 알아. 그런데 실레스티안을 싫어한다잖아."
"그리 말했습니까."
"아델리아가 싫어할 정도면 좋은 성미를 가진 용은 아닐 것 같은데. 마법사 당신이 했던 것보다 몇 배는 더 숨막히게 굴 게 뻔하지 않나."
"······ 그래서 서두르려 이렇게 무리를 하십니까."
"내 아우님의 그 성질머리에 성미 나쁜 용이라 해서 굽히고 들어가시지는 않을 테니. 또 숨도 못 쉬고 오기를 부리실 것 아냐."
앨런의 것과는 비교도 안 될 드래곤의 피어를 앞에 둔 칼리안이 어떻게 나올지는 굳이 안 봐도 뻔한 일이니까. 성격 나쁜 용을 만난 칼리안은 더 성격 나쁘게 굴 테고, 그렇게 되면 성격 나쁜 용은 더 화를 낼 테니까.
그런 이유로, 꿈에서도 마주하기 싫었던 그레이의 외견을 뒤집어 쓴 플란츠가 다시 저벅저벅 발을 옮겼다.
"······ 저 겁 없는 놈들을 대체 어찌해야 할는지."
손을 들어 관자놀이를 잠시 주무른 앨런이 중얼거렸다.
- 스르륵!
그리고 한 번 더 워프를 하여 플란츠의 앞에서 걸음을 옮겼다. 플란츠가 섣불리 휘트린을 죽이지 않도록 말려주겠다 약속을 했었으니까.
* * *
설명은 거기까지였다.
"······ 그렇게 됐으니까. 가자고."
플란츠가 그레이 브리센으로 변장을 하고 휘트린을 만났다는 것. 키리에를 향한 플란츠의 자세한 설명은 거기까지였다.
"그 사람이 그레이 브리센으로 변장한 저하를 보고 흔들렸다는 겁니까."
"별로. 바로 눈치 채던데."
"그래서, 진짜 그레이 브리센을 만나게 해 줄 테니 입을 열라 말씀하셨습니까."
"그래."
휘트린은 실레스티안의 둥지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었다 했다. 그레이 브리센의 맞은편 방이 아니라 아예 사이좋게 얼굴을 마주하게 해주겠다는 플란츠의 말에 순순히 입을 열었다 했다.
오래도록 보지 않았던 그레이 브리센의 얼굴을 마주 보게 되었으니 새삼스레 그 해묵은 분노가 다시 떠오른 까닭이리라.
"그렇게 해서 둥지의 위치를 알았다면 마나실 경이 왜 혼자 가신 겁니까. 저희는 아니더라도 발칸을 이끌고 나서실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그렇게 많은 야만족이 카이리스 국경을 계속 침탈했어도 우리가 대사막을 상대로 전쟁을 걸지도 않고 그냥 막기만 하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는데. 대사막 한가운데에 군대를 데리고 가면 굳이 피해왔던 전쟁을 거는 거잖아. 카이리스 군사의 몇 배는 되는 전사들을 상대로."
과거, 텐실이 남쪽 대사막을 향해 전쟁을 선포했을 때. 순식간에 모여든 전사들이 사막의 모래를 뒤덮었다는 이야기는 이미 많이 들었다. 상상 이상의 전력과 머릿수에 놀란 텐실이 자신들의 핏줄이기도 한 란델이 있는 카이리스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실리케에 의해 거절되었다 했던 이야기는 키리에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궁금증이 해결되지 않았다.
때문에 키리에는, 드미레아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짧은 시간 동안 플란츠를 향해 질문을 계속 했다.
"그런데 그 사람······ 휘트린은 실레스티안의 둥지를 어떻게 알고 있던 겁니까. 하피를 이용한다 했다 한들 제온이나 휘트린이 실레스티안과 만날 이유가 없습니다."
"그 백발 마법사가 흑마법을 쓰던 것은 알고 있나."
"네. 압니다."
"비둘기들이 사람 말을 듣고 편지를 배달하는 것도 흑마법이라는 건."
"금지되지 않은 유일한 흑마법이라 들었습니다. 비둘기와 매를 조련시키는 것에 대해서만 허락된 마법이라고······."
"그런데 하피가 다 죽어가면서까지 내 아우님 하나를 노렸잖아."
"그렇습니다."
"꼭 누구의 명령을 듣는 것처럼."
키리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키리에를 올려다보던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아델리아가 흑마법을 썼어. 하피들이 사람의 말을 듣는 건 흑마법의 일종인 것 같고. 그런데 아델리아는 하피에 대해 몰랐어."
여기까지 듣고 나서야 연관성을 찾아낸 키리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델리아는 실레스티안에게 마법을 배웠다 들었습니다."
"흑마법을 실레스티안에게 배웠을 지도."
아델리아는 흑마법을 쓴다.
상대의 두려움을 비추는 마법. 앨런의 앞에는 검은 나비를 만들어내고 칼리안의 앞에는 그 어떤 것도 만들어내지 않았던 마법. 칼리안을 데리고 그레이 브리센 후작저에 숨어들어 있을 때, 칼리안을 찾으러 왔던 왕실의 기사단 엘라자르의 눈을 가렸던 환각 마법. 그런 것들을 배워 익혔다.
거기까지는 앨런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과 실레스티안을 연관짓지는 못하고 있었다. 다른 사실을 모르는 채 아델리아가 그저 재미삼아 사라진 흑마법을 어떻게든 배워 익혔으리라고만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플란츠로부터 다른 내용을 더 전해 듣게 되었다. 휘트린과 제온, 제온과 실레스티안이 연관됐단 이야기 외에 또 하나. 실레스티안과 아델리아의 관계에 대해 알게 된 것이다.
아델리아에게 마법을 가르쳤다는 실레스티안도 흑마법을 사용할지 모른다고. 그 흑마법을 통해 죽은 하피를 되살려내고 조련시킨 것을 제온이 가져와 썼을지도 모른다고. 그런 이야기를 말이다.
'제온의 뒤에 대사막의 미치광이 용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씀이 아닙니까.'
'······ 맞아.'
앨런의 생각이 이렇게 이어지는 것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도 않았다.
"그래서 혼자 갔다고. 마법사가."
다시 터져나왔던 앨런의 피어를 떠올리며 눈을 찌푸린 플란츠가 대답했다.
- 절그럭!
그때 조금 떨어진 곳에서 묵직한 쇳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니 검은 사슬 갑옷을 챙겨입고 걸어나오는 드미레아가 보인다. 그 모습을 일별한 뒤 다시 플란츠를 향해 선 키리에가 마지막 질문 하나를 더 했다.
"그 외에는, 제가 알아야 할 사실이 더 없습니까."
"······ 일단. 가자고."
키리에가 시선을 살짝 내렸다. 그리고 제 앞에 선 플란츠를 한동안 뚫어져라 쳐다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일단 모시겠습니다. 저하."
"그래."
플란츠의 말 에스티나의 고삐를 붙든 채 플란츠가 안장에 앉기까지 기다린 키리에가 자신의 말 이리스의 등에 올랐다. 그리고 드미레아가 그 거대한 흑마의 위에 가뿐히 오르는 모습을 지켜본 뒤 이리스를 출발시켰다.
플란츠가 수도 없이 생각하고 불렀으나 응답하지 않고 있다는 시스파니안. 지그프리드령에 도착하고 나서도 사흘을 더 들어가야 나온다던 시스파니안의 둥지.
그곳을 향해 서둘러 움직였다.
* * *
나이가 들어 이러나.
- 깜빡······ 깜빡.
큰 눈을 몇 번 깜빡인 칼리안이 숨을 들이쉬었다. 그 뒤에는 이미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자세로 꼿꼿이 서 있던 몸을 다시 한 번 되세웠다.
칼리안의 앞에 나타났던 실레스티안이 스스로를 설명할 때 '당장의 칼리안이 가장 갈급히 찾던' 사람으로 보여졌을 것이라 했던 말이 생각났다. 그러고 나서야 그렇게 갈급히 찾는 사람이 왜 앨런이었을지를 깨닫게 되었다.
힘들고 피곤하여서.
그래서 그렇게 앨런이 보고 싶었나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 상황에 졸음이 오다니······ 진짜 내가 나이가 들었나.'
피어를 거둔 실레스티안이 침묵을 유지하는 동안 잠이 몰려들었다. 오래도록 쉬지도 못하고 이곳 저곳에서 싸움을 한 데다 등 뒤에 옹기종기 모아놓고 지키고 있어야 할 형제들마저 곁에 없었으니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 당연함을 깨닫지 못한 척 제 나이만 탓한 칼리안이 마른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시스파니안의 사려와 아르나이젤의 배려심에 새삼스런 고마움을 다시 느꼈다.
실레스티안이 일부러 뻗어내던 피어는 없앴으나, 이 땅에 몇 남지도 않은 이들이 지니는 숨막히는 존재감까지는 내버려두고 있는 것을 안 까닭이다. 칼리안을 계속 괴롭히기 위함이 아니라 인간을 상대하는 것에 조심스러움이 필요함을 잘 모르기 때문이리라.
"사실이냐."
"뭐가."
"네가 한 말. 하피가 그런 식으로 쓰인다 한 말. 그것이 사실인지를 묻는다."
"거짓말 안 해. 거짓말 더럽게 못해서."
"하피의 심장을······."
"생으로 도려내고. 이상한 돌을 심어두고서. 그래. 그렇게."
- 우르릉······!
어둠에 익숙한 붉은 눈으로도 가늠되지 않는 공간이 다시 울리다 곧 가라앉는다.
칼리안이 아닌 다른 곳을 향한 피어였다. 물론 잠시 퍼지다 사라지는 그 기운에 영향을 받는 것은 애석하게도 칼리안 뿐이었지만.
다만 칼리안은 그것에 대해 더 이상의 불만을 내비치지 않았다. 칼리안을 겁주기 위해 일부러 흘려내던 피어가 아니라 실레스티안 스스로도 주체하지 못해 튀어나오는 것임을 알아서였다.
대단하신 드래곤께서 속이 상했다 하시는데 어쩌겠나. 한낱 인간은 그냥 버텨야지. 잠이나 깨게 해 주어 고맙다 생각하면서.
"그들이 그런 짓을 벌이고 있나?"
"그들 누구."
"그 애를 데려간 놈들."
그 애는 아델리아일 텐데.
아델리아가 누가 데려간다 해서 얌전히 끌려갈 사람이 아닌데. 이상하다.
"심장에 돌을 심어 둔 이상한 인간들."
그런데 실레스티안이 이렇게 덧붙였다.
"그래. 그 인간들. 제온이라는 이름의 단체. 거기에서 하피를 그런 식으로 이용하고 있어."
나지막이 대답한 칼리안이 다시 한 번 깜빡, 어둠 속에서 스스로 빛을 내는 듯한 실레스티안의 황금빛 눈과 마찬가지로 어둠 속에서 홀로 타오르는 것 같은 붉은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정말로 잠이 들 것 같다.
"미치광이 실레스티안."
"······ 감히 나를,"
"하피 살리는 일. 네가 도왔지."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할 말이 없을 땐 입을 다무는 것은 누구에게든 마찬가지인 법이라, 실소하며 넘긴 칼리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미 사라진 하피들을 되살려 보겠다며 누군가 너에게 접근했어? 거기에 혹해서 흑마법을 알려줬어? 시스파니안이 금지한 마법인 줄을 알면서도, 하피가 보고싶어서?"
메마른 웃음같은 바람이 불었다.
"하피를 아낀다 하던데. 실레스티안. 그래서 그랬나?"
"그래서. 너 역시 나를 이용하고자 하였나."
칼리안의 물음에 대한 부정이 아니었다.
때문에 그것을 멋대로 긍정으로 알아들은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더는 숨길 것도 없다는 듯 대답했다.
"제온 놈들이 뭔 꿍꿍이를 가졌는지도 모르잖아. 내가 가진 패는 많을수록 좋은 법이고. 그래서 널 만난 김에 나한테 좋을대로 부려볼까, 생각은 했지."
솔직함의 끝을 달리는 칼리안의 대답에 순간적인 피어가 훅 몰아치다 가라앉는다.
"······ 했는데."
어깨를 쭉 펴며 숨을 들이쉰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못 써먹겠다, 넌. 한창 때라 그런가 용이라 하기엔 성격이 하도 더러워서."
"그게 지금 네가 할 소리냐?"
"내가 하지 그럼 누가 하냐?"
"작은 놈아. 내가 너를 살려 두는 것은."
"시스파니안 덕분에. 나도 알아. 아는데. 나는 지금 내 핏줄 믿고 까부는 게 아니라. 네가 참고 있는 걸 알아서 나도 화를 좀 가라앉히고 말부터 나눠주고 있는 거다."
아니었으면 너한테 이미 칼 날아갔어.
소근소근 덧붙인 말을 들었나보다.
우릉우릉, 하고. 부글부글 끓는 실레스티안의 속을 내보이는 게 아닐까 싶은 소리가 또 울린다.
하기사. 한 줌도 안 되는 인간 한 명을 데려다 놨더니 도리어 드래곤을 이용해먹으려 들질 않나, 그 일로 화를 냈음에도 미안하다 말 한 마디를 안 하고 기어코 바득바득 버티며 대들지를 않나, 이제는 아예 제가 지금 많이 참아주는 것이라며 바락바락 큰 소리를 내질 않나.
속이 끓을 만도 하지.
"아무튼. 인간들한테 한 번을 이용당했는데 두 번은 못 당할까. 내가 그렇게 생각할 만도 하지 않아, 실레스티안?"
그러거나 말거나.
내 알 바인가.
하늘을 올려다보듯 고개를 치든 자그마한 인간의 물음에 또 한 번 훅, 하고. 온 몸이 떨려오는 공포감이 퍼져나오다 금세 사라졌다. 그것을 느낀 칼리안이 파리한 낯에 기어이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입을 열었다.
"마법도 쓰고 말도 몇 마디 하고 겁도 많고 머리를 쓸 줄도 안다는 하피를 그런 식으로 만들어서 죽이는 놈들이 있다는 얘기 전했어, 난. 그러니까 나는 너한테 더 볼 일 없어."
체이스가 그랬다.
내 동생이 어디서든 함부로 져 줄 사람은 아니라고.
"나를 왜 여기로 불렀는지 제대로 말하든가 그놈들을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지를 묻든가. 내가 예의차리는 만큼 너도 챙겨. 실레스티안."
완두콩이 그랬다.
어딜 가서든 기죽지 말고 잘 짖는 내 동생이 되라고.
"그 애가 왜 너와 가까이 지내는지 알겠다."
"아델리아랑 안 가까워. 오해하지 마. 안 그래도 이상한 오해 때문에 남의 나라 왕족 앞에서 나한테 다이아몬드 달라고 예쁜 짓 하게 생겼으니까. 다른 오해는 더 하지 마."
깜빡, 깜빡.
그 작은 인간의 말을 들으며 몇 번을 깜빡이던 거대한 황금색 눈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럼, 내가."
그러더니 칼리안의 코앞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칼리안이 치켜들고 있던 제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그러자 새로운 모습의 실레스티안이 눈에 보였다.
칼리안보다 조금 더 키가 큰, 그리고 허리까지 내려오는 길다란 황금빛 머리카락을 멋대로 풀어 둔. 상상하던 혈기왕성한 딱 그 나이의 청년으로 모습을 바꾼 실레스티안이 서 있었다.
"내가 묻겠다."
목소리가 들린다.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 때.
- 화르르륵!
이제껏 아무도 없던 동굴 속에 새하얀 불꽃이 치민다.
깜짝 놀란 칼리안이 그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칼리안."
실레스티안의 것이 아닌 낮은 목소리가 들린다.
그래. 완두콩이 왔다.
무시무시한 기운을 뻗어내는 대마법사와, 새파랗게 어린 푸른 용을 대동하고서.
"······ 와."
그래.
용사의 멋짐은, 아무렴.
아무렴.
과할수록 좋은 법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