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502화 (503/527)

제88장. 과할수록 좋으니(2)

축하를 해달라 할까.

아니면 서로 위로부터 해주자 할까.

키리에를 만나면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 그것을 두고 꽤 오랫동안 고민을 했었다.

- 오빠. 오랜만이야.

"몸은 어때. 괜찮아?"

- 튼튼해졌어. 괜찮아.

키리에는 히나에게 휘트린이 살아있었음을 알린 직후 엘프들의 도시로 떠났었지 않나. 히나는 그 이후에 찾아와 휘트린을 따로 만났다. 그랬던 둘이 이제야 다시 만나게 된 참이었다.

따라서 제온이 카이리시스로 찾아든 일을 막게 한 것에 대한 공로로 백작위를 받았다며 축하를 해달라 말하거나 휘트린의 일을 두고 서로 위로부터 해주자는 말을 꺼낼 법도 했다. 그러나 히나는 다른 것을 물었다.

- 자상한 왕자님은, 왜, 안 오셨어?

그렇게나 오래도록 고민을 한 것이 무색할 만큼 자연스럽게 칼리안에 대한 안부를 먼저 묻게 된 것이다.

"잠깐 일이 생겼어, 히나."

- 무슨 일?

그런데 사실 히나는 키리에에게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에 대해서만 고민했던 것은 아니었다.

칼리안이 돌아오고 나면 당연히 히나부터 걱정을 할 테니, 칼리안과 손을 잡고 아스트리샤 거리에 가서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으로 '정혼자들의 배신'에 대해 복수를 해주려던 계획부터 알려줘야지.

그 말을 들으면 칼리안은 그렇게나 많았던 걱정을 미뤄놓고 일단 웃음부터 터뜨릴 테니 그때 얘기를 해야지. 휘트린을 만난 일은 이제 괜찮다고, 쓰러졌던 일도 별 것 아니었다고, 그렇게 말을 해줘야지.

이렇게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그 역시 뜻대로 하질 못하게 되었다.

- 자상한 왕자님이, 대사막의 용에게, 잡혀가셨어?

키리에가 전한 상황 설명을 다 들은 히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그러자 키리에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아마도 그런 것 같다고 하셨어. 저하에게 잠시 연락이 됐었나봐."

- 나, 그런 얘기, 많이 들어봤었는데.

"무슨 얘기?"

- 납치되는, 얘기.

문득 리리에가 들려주던 이야기들이 생각난다.

어여쁘고 가녀리고 착하디착한 사람이 어디론가 붙들려 가 사라지고 나면 어디선가 짠 하고 나타난 용사가 멋지게 구해주더라는 그런 이야기 말이다.

- 수도에서도 납치됐었고, 여기에서도, 그랬었고, 엘프들의 어머니 나무에게도, 붙들려 가셨다 하더니. 이번에는, 대사막의 용이, 범인인 거면······.

다누가 더는 참견하지 않도록 해결을 하자마자 이제는 대사막의 용이라니.

- 다음은, 그럼, 못된 마왕님이야?

어지간한 이야기 속 사람보다 더 예쁘장할 것이라고는 해도 어지간한 용사보다 더 잘 싸울 뿐더러 어지간한 나쁜 놈보다 몇 배는 더 성질 나쁜 사람이 어쩌다 그렇게 고이고이 잡혀다니는 신세가 됐담.

"다음은 없을 거야, 히나."

- 아무튼 자상한 왕자님은, 사람이 너무 좋아서, 문제야. 누구를 만나든 다, 믿어 주니까, 그렇게 매번, 탈이 나지. 아무튼 돌아오시고 나면, 이번에야말로 군단장님에게, 혼나시겠네. 그래야 오빠 말대로, 다음에는, 그럴 일이, 없지.

오는 길에 잠시 일이 생겨 어딘가에 들렀다 온다는 얘기를 들은 것처럼, 히나는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칼리안이 돌아오지 못하게 될 지도 모른다는 가정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듯이.

덕분에 불안함을 조금 가라앉힌 키리에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것을 본 히나가 손을 움직였다.

- 어디, 가려고?

"공자님과 소공작님께 얘기 전하고 마나실 후작님 쪽에 가 있으려고. 필요하면 다시 나가야 하니까."

이런 말에 히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이제 막 일어난 키리에의 팔을 붙들어 앉혔다.

- 차라도 다, 마시고 가.

"히나, 지금 그럴 시간이······."

- 있어, 그럴 시간. 얘기는, 부군단장님이나 다른 대원들이, 이미 전했을 거야. 자상한 왕자님이 어디 계시는지, 알게 되기 전까지, 오빠도 쉬어. 오빠가 필요하면, 군단장님이 알아서, 찾아 오실 거야. 그러니까 나랑 있어. 나 피하려고, 핑계 대지 말고.

"피하다니. 내가 너를 왜 피해."

- 미안해서, 그러는 거잖아. 엄마가 살아있는 건, 오빠가 나한테, 미안해해야 할 일이, 아니야.

한참동안 히나를 바라보던 키리에가 찻잔으로 시선을 내렸다. 한 모금도 줄어들지 못한 채 식어버린 찻물이 눈에 들어온다.

히나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떨어져 있는 내내 히나와 이야기를 주고 받았으나 휘트린에 대해서는 서로 단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었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히나. 내가 미안해하는 건 그 사람이 살아있어서가 아니야. 내 마음대로 힘든 길을 선택한 게 무용지물이 되어서, 그게 미안한 거야."

- 오빠.

"응."

- 나, 여기 올 때 고양이들을 또, 전하께 부탁드리고 왔어.

키리에의 미안함과는 동떨어진 내용의 말이었다. 그런 말에 키리에는 가만가만 고개를 끄덕였다.

- 고양이들이, 마음대로 돌아다니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밥을 제대로, 먹고 다니는지, 밤에는 제대로, 집에 돌아가는지, 살펴봐 달라고. 전하께 그렇게 부탁을 드렸어. 그랬더니 전하께서, 뭐라고 하셨는지 알아?

"아니. 모르겠어."

- 루,시,는 뭘 좋아하느냐고, 물어보셨어. 안,네,는 괜찮은데 루,시,가 전하를 많이 미워한다 하시면서, 루,시,는 내 고양이니까, 뭐를 주면 좋아하는지, 아느냐고, 물어보셨어.

"그래서 뭐라고 했어?"

- 루,시,는 햇빛이랑, 높은 곳에 매달린, 해먹이랑, 포근한 방석이랑, 좋은 왕세자 저하의 무릎을, 좋아한다고, 말씀드렸더니 전하께서는, 알려줘서 고맙다고 하셨어. 그리고, 혹시 아프면, 나에게 연락을 보내겠다고, 말씀하셨어.

히나의 손이 계속 움직인다.

손 끝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절대로 눈을 떼지 않을 키리에를 향해서.

- 국왕 전하께, 고양이를 맡겨도 괜찮고, 누군가 아플 때, 전하께서, 왕실의 치유사보다 먼저, 떠올리는 사람이, 나야. 이 나라에서 제일 강한, 사람들이, 나 하나 때문에, 수어를 배워. 이 나라의 소공작님이, 나랑 같이 케이크를 먹고, 대륙에서 하나 뿐인 대마법사님이, 나에게 차를 가져다 주셔. 내 정혼자인 왕세자님이, 나한테 잔소리를 듣고, 셋째 왕자님이, 내 생일에, 무슨 선물을 해야 할지, 고민을 해. 그런 사람이, 나야. 그게 오빠 동생이야.

"······ 그래. 맞아. 알고 있어."

- 나는 지금이 좋아. 지금의 내가 좋아. 오빠도 마찬가지잖아. 우리가 만약 그때, 이곳으로, 와서 살았다면, 자상한 왕자님을, 만나지 못했을 거라는 걸, 오빠도 알잖아. 어릴 때 힘들었던 덕분에, 지금 이렇게, 굉장한 사람들이 되어서, 살고 있잖아.

"응."

- 잘못한 건 엄마지, 오빠나 내가 아니야. 나는 억울하다고도, 생각, 안 할 거야. 그러니까, 미안해하지 마, 오빠도.

혹시나 히나에게 원망을 듣지 않을까. 그렇게 되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답을 내기 어려운 문제들이 떠올라 일부러 히나를 피했던 키리에가 천천히 대답을 했다.

"알았어. 히나."

- 나 말고, 자상한 왕자님만 걱정하자. 못 오실까봐 불안해하지 말고, 다쳐 오시지는 않을지 걱정만 하자.

그러자 히나는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나 좋아하는 '지금'을 사는 것에 누구보다 큰 도움을 주었던 칼리안에 대해서, 불안해하진 말고 걱정만 하자고.

"그래. 걱정만 하자."

키리에가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히나의 말을 따라서 결과가 나빴던 일은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다른 쪽을 더 걱정해야 할 것 같네."

그런데 그때, 갑작스런 목소리 하나가 찾아들었다.

발소리도 노크 소리도 없이 찾아든 말에 놀란 키리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뒤로 돌아 섰다. 그리고 그 목소리의 주인이 지닌 새파란 머릭카락을 확인한 뒤에 검 손잡이에 얹어져 있던 손을 뗐다.

아르센이었다.

"왕자님 말고 대사막을 걱정하면 될 것 같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텔레포트로 찾아든 것을 사과하듯 양 손바닥을 내 보인 아르센을 향해 키리에가 물었다. 그러자 아르센은 세상에 흥미진진한 일이 이렇게나 많아 다행이라는 듯한 얼굴로 답했다.

"지금 빨리 군단장님 앞길 막으러 가야 한다는 소리네."

아르센의 말에 표정을 굳힌 키리에가 무어라 말을 하려 했을 때 아르센이 다시 입을 열었다.

"군단장님께서 대사막으로 가셨네. 저대로 두면 실레스티안의 둥지를 통째로 태워버리고서 이제부터는 실레스티안을 닮은 눈부신 금발로 살아보겠다 하실 분이니 빨리 가서 막아야 된다는 말이네."

"군단장님께서는 감옥 쪽으로 가셨지 않습니까. 실레스티안의 둥지가 어디 있는지 알아내신 겁니까."

"그런 모양이네."

"대사막에는 이동 마법진이 닿지 않습니다. 마나실 경이 대사막에 갔다 한들 어떻게 뒤를 따라간다는 말씀이십니까."

"대신 지그프리드령에는 닿지."

"······ 설마."

굉장한 계획을 떠올렸다는 듯, 아르센이 씩 웃어 보였다. 그리고 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켜 보이며 말했다.

"동생 잘 둔 덕에 왕좌까지 탄탄대로일 것 같은 부군단장님께서 시스파니안님의 둥지로 가신다 하네. 소공작님과 함께."

"왕세자 저하와 소공작님께서 지그프리드령으로, 말입니까."

"그래. 그런데 소공작님 한 분만 믿고 보내드렸다가 왕세자 저하께서 동생되시는 칼리안 왕자님께 참으로 극적인 방법으로 세자위를 물려주실 일이 벌어지면 내 마음이 찝찝할 것 같으니 자네가 함께 가 달라 부탁하는 걸세."

앨런이 대뜸 대사막에 갔다.

그것을 막겠다며 플란츠가 지그프리드령으로 간단다. 시스파니안을 찾기 위해서. 그런데 가는 길에 플란츠에게 습격이 있으면 큰일이 날 지도 모르니 키리에가 함께 호위를 해달라는 소리였다.

마법 사용이 제한될 수 있을 발칸의 마법사들이나 아르센이 나서기에는 위험 부담이 크고 발칸의 기사들보다는 키리에가 훨씬 우월할 테니 말이다.

"알겠습니다."

거기까지 생각한 키리에가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났다.

"자네 이제 내 부탁도 들어주나?"

"왕자님과 관련된 일이니 듣습니다, 헤르츠 경."

칼리안이 아닌 다른 이들의 말은 절대 듣지 않는 키리에가 가벼운 대답을 남기고 돌아섰다. 그리고 뚜벅뚜벅, 플란츠와 드미레아를 뒤따르고자 발을 나섰다.

- 잘 다녀와, 오빠.

플란츠에게 돌려받은 키리에의 팔찌가 잠시 빛났다. 머릿속으로 들려 온 말에 뒤로 돌아 선 키리에를 향해 히나가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 뒤 히나는 곁에 남게 된 아르센을 향해 생긋 웃으며 말을 건넸다.

- 부군단장님, 차, 드실래요?

플란츠가 드미레아와 함께 나갔다 하니, 칼리안의 손을 꼭 잡고 아스트리샤 거리에 가면 어느 가게의 어떤 아이스크림을 먹어야 할지를 고민하면서. 대신 칼리안에 대해서는 불안해하지 않으려 애쓰면서.

정신을 잃기 직전에 보았던, 깊은 물에 잠겨 질식할 것 같은 얼굴을 마지막으로 보여주고 영영 떠날 칼리안은 아닐 테니까. 칼리안이 돌아오지 못할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 * *

일단, 내 아버지.

그리고, 내 형님.

손가락을 꼽았다.

'아버지랑, 형님이랑······ 키리에. 그리고 또.'

갑작스레 또 사라져버린 붉은 눈의 까만 고양이를 찾겠다며 곧장 나설 사람이 누가 있을지를 가만가만 세어보는 중이었다.

'시스파니안께선 오지 않으시겠지.'

당장 실레스티안의 반응만 봐도 이 자리에서 나를 어떻게 할 것 같지는 않으니, 내가 저 무시무시한 발톱 사이에 시간의 축을 꽂아넣고 어떻게 쓰면 되는지를 차근차근 알려주지 않는 이상은 더 참견하지 않겠지.

만약 이 정도 일로 참견을 해왔을 시스파니안이라면 그동안 카이리스의 왕족들이 그렇게 숱하게 죽어나가지는 않았을 테니까.

'어쩌면 완두콩이 시스파니안에게 도움을 요청한다며 둥지로 갈 지도 모르겠는데. 그렇게 되면 내 정혼자님도 합세하게 될 테고······ 지금 발칸은 안 나서는 게 도와주는 거니 얌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을 게 뻔하고······.'

그러므로 누군가가 찾아온다면 앨런과 플란츠와 키리에, 거기에 더해 드미레아. 만약 시스파니안이 생각보다 더 칼리안을 가엾게 여기고 있다면 시스파니안을 금세 다시 만나게 될 지도 모르겠지만 일단은 시스파니안을 제외한 넷 정도.

'넷이나 되는 걸 보면 헛 살지는 않았네.'

칼리안이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들며 다시 생각을 했다.

'아니지. 누가 구하러 올지나 생각하고 있는 놈이 됐으니······ 헛 산건가.'

당장 뒷걸음질을 치라고.

도망가지 못하겠다면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납작 엎드리라고. 무슨 말을 했든 다 잘못했으니 용서해달라 하라고. 그렇게라도 해서, 뼈를 녹일 듯한 이 피어에서 벗어나 보라고.

마치 그렇게 요구하는 것처럼 휘몰아치는 공포감을 버티기 위해 되도 않는 생각들을 끌어다 하고 있었다.

'오러가 아깝군.'

천 살도 채 안된, 어리다면 어린 용의 피어를 감당하질 못해서 잡생각이나 하고 있는 신세가 됐으니. 몸에 담은 오러가 아까울 지경이다.

그래서 생각을 때려치고 입을 열었다.

악을 쓰듯 쥐어짜듯 목소리를 꺼냈다.

"······ 실레스티안."

누군가 제멋대로 하피를 이용하고 있었다는 말에, 겁을 주려 내뻗었던 피어를 잠재웠었다는 사실도 까먹고 다시 화를 내기 시작한 실레스티안을 향해서.

"궁금한 건, 됐고. 앞에 선 인간부터 죽여, 놓겠다······ 이거야?"

"너는 나를 이용하려 들었다."

실레스티안의 답이 들려온다.

"나의 화를 다른 곳에 돌려놓으려, 너는 나의 아픈 곳을 들먹였다. 네가 상대해야 할 적을 내 상대로 만들어두려 입을 놀렸다. 그러니 내가 화가 나겠냐 안 나겠냐?"

정곡을 찔렸다.

대사막의 황금빛 용도 헛 산 것은 아니었나보다. 천년에 버금가는 세월을 손놓고 흘려보내기만 하지는 않은 모양이다. 적어도 말 한 마디에 든 무게와 그 이면에 숨겨둔 것을 재 볼 줄은 알 만큼의 생을 보냈나보다.

- ······ 콱!

이 참에 제온을 손쉽게 잡아볼까 했던 칼리안이 입 안을 콱 깨물었다. 뭉덩 씹혀나간 곳에서 날선 통증과 역한 비린내가 함께 치민다.

그럼에도 여전히 두 발을 바닥에 딱 붙여 둔 채로, 체이스와 앨런을 제외한 그 누구의 앞에서도 바닥에 대었던 적 없던 무릎을 꼿꼿이 세운 칼리안이 말을 꺼냈다.

"심장이 없었다. 그 자리에 인간들의, 뼈와 살로 만들었다던, 돌을······ 심었다. 그 상태로 내 앞에, 혼자 나섰다. 겁이 많다고, 들었는데. 죽을 때까지 도망치지, 않았다."

그리고 이렇게, 미안하다 사과하고 물러나기는 커녕 더 독한 말을 꺼내들었다.

- 우르르릉!

거대한 용의 강대한 피어가 짓쳐든다.

깊이도 끝도 알 수 없는 공포감이 바다를 불러낸다.

바닷속으로 함께 뛰어든 체이스의 손을 붙들었던 날의 기억이 꿈처럼 펼쳐진다. 그 손을 잡고 고개를 드니, 언젠가 거절하지 못하고 베어낸 어린 아이가 체이스를 대신해 웃음을 보인다. 저도 모르게 그 손을 놓자 다시 바닥으로 몸이 꺼진다. 살려달라 말하던 수많은 이들이 불에 타고 썩어버린 손을 내민다. 흉터 많은 손과 발을 잡아 심연 속에 묶는다. 산 채로 나락에 든 이의 숨통을 막아선다.

- 콰드득!

둥근 손톱 끝이 또 한 번 손바닥을 파고든다. 이미 아물기 시작한 상처 속에 다시 한 번 생채기를 낸다.

"은색에서 시작해 붉은 색으로 끝나는······ 머리카락, 그것과 달랐다. 네가 잃어버렸다 했던, 내 스승의 먼 선조가 죽음을 내렸다 했던, 그, 하피가 아니었다. 그래서, 네가 아꼈다 했던, 하피가 아니라, 다른 하피라서, 그래서 신경이 안 쓰이나?"

- ······ 우르릉!

사과 한 마디, 고개를 조아리는 행동.

고작 그것이 하기 싫어 버텼다.

'무엇을 하시든 잘 하시지 않습니까.'

드미레아의 말마따나 무엇을 하든 잘 하는 사람이니까. 버티는 것도 잘 하는 사람이니까.

'내가 용서한다 하면 괜찮아지나?'

에일라에게도 못 건넨 사과를 저딴 용에게 건넬 수는 없으니 고집이나 부려야지.

'······ 다치지 말고······ 다녀오거라.'

걱정 않고 싸우다 아버지에게 돌아가야지.

그러다 혹여 다치더라도.

'아프면, 말 해요.'

'걱정 말고 쉬십시오.'

세상의 온갖 잔소리를 해 가며 치료해 줄 우리 히나랑, 곱게 업어다 히나에게 데려다 줄 키리에까지 있으니. 걱정할 것이 있겠나.

"그깟 하피 어떻게 되든 말든······ 어차피 네가 아끼던 하피는 진작에 죽어 사라졌으니, 이제 와서는, 아무한테도 신경 안 쓸, 놈한테, 내가, 어쭙잖게 수작을 걸었나? 그래서 화를 내나?"

"입을 함부로 놀리지 마라."

"하피를 궁금해해서 하피에 대해 얘기해 준 건데, 왜. 잘 살아있다는 얘기나 좀 들으려고 했더니 그게 아니라 하니까 머리가 아파? 신경쓰기 싫어? 다시 생각하기 겁이 나? 그래서 내가 그만 떠들고 꺼졌으면 좋겠어?"

일부러 더 크게 만들어낸 비웃음을 입꼬리에 단 칼리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숨, 칼리안.'

죽은 이들에게 묶여 떠오르지 않는 몸을, 붙들 곳 없는 손발 대신 멱살을 부여잡고 우악스레 꺼내놓던 놈이 숨을 쉬라 했었으니.

"웃기고 있네."

숨을 쉬어야지.

숨도 쉬고 그 김에 짖기도 해야지.

"시스파니안께서는, 온갖 인간을 다 신경써주시고, 아르나이젤은, 온 힘을 다해 인어들을 보호하는데, 그럴 깜냥도 못 되면서 겁부터 주지."

칼리안이 고개를 쳐들었다.

자신을 노려보는 황금빛의 눈을 들여다보며 입을 열었다.

"하피 심장이 생으로 뽑혀 나갔다고. 그러니까 화를 내라고, 실레스티안."

정적이 감돈다.

"나한테 말고. 그렇게 만든 놈들한테."

짓쳐들던 피어가 가라앉는다.

칼리안의 입술이 긴 호선을 그려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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