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323화 (324/527)

제57장. 부디(2)

파란 별이 내렸다.

"오랜만에 보네. 지난 번에 세크리티아에 왔을 때에는 세렌티의 시간이 없던 해여서 결국 못봤었는데."

"저는 처음 봐요. 뭐라 말이 안 나오네요."

레이첼과 에우리아의 말, 둘에 더해 키리에와 에일라까지 함께 모여 주고받는 대화 소리, 어느새 다시 만발한 시나스타의 옅은 향기. 완연한 봄임에도 쌀쌀하게 느껴지는 밤 바람이 하나로 어우러진다.

얀과 나란히 앉은 히나가 손을 움직이며 웃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품에서 빠져나간 코코를 잡으러 시나스타 만발한 정원으로 뛰어가는 파란 머리 미친 마법사를 잠시 쳐다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정말로, 파란 별이 내렸다.

책에서 설명하던 그 수많은 단어와 문장을 전부 다 꺼내보았으나 지금 저 모습을 온전히 표현한 것은 단 하나도 없다는 생각을 했다.

"저는 먼저 들어가볼게요. 왕자님 바닷바람 맡고 오실 텐데 목욕물 준비해둬야 되겠어요."

한 삼십 분쯤이 지났을까.

식은 홍차 대신 연녹빛의 다른 차 한 잔을 더 가져다 준 얀이 모여있는 사람들을 보며 말한 뒤 안으로 들어갔다. 그 후로 에일라가, 잠시 뒤에는 홍차의 쌉싸름한 향기를 맡다 말고 알싸한 알콜 향기가 궁해진 에우리아와 레이첼이 아르센과 키리에, 그리고 히나를 끌고 들어갔다. 실컷 봤으니 이제 같이 들어가자 하였으나 플란츠는 그냥 고개를 가로저었다.

세렌티의 시간이 내려앉는 이 모습을 언제 또 볼 수 있을지, 한 번이라도 더 볼 수 있기는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니 어쩐지 아쉬워서.

그래서 혼자 조금을 더 앉아있었다.

오래지 않아 연녹빛 차도 미지근하게 식었을 즈음.

"내년은 아니고 내후년에 다시 오시면 또 볼 수 있습니다."

자박, 하는 발소리가 목소리보다 나중에 들려왔다.

본래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다니는 것에 익숙한 놈이라 일부러 소리를 내고 걸어서 그렇다.

새카만 머리에 푸른 빛이 몇 번이고 떨어지다 사라지는 것을 보던 플란츠가 미련없이 고개를 끄덕이곤 일어났다. 또 볼 수 있다 하니, 그 때 다시 와서 보면 될 일이 아니겠나.

"혼자 계시지 말고요. 여기 카이리스 아닙니다."

"알았어."

방금 전까지 참 많은 사람들과 함께 있었다 얘기하는 대신 고개만 한 번을 더 끄덕였다. 그러다 잠시 칼리안의 손에 들린 것에 눈이 닿았다. 곱게 포장된, 붉은색의 긴 박스였다.

"바질리카입니다. 체이스 형님이 주셨어요."

유난히 무더웠던 어느 해, 어느 양조장에서 일반적인 때보다 많이 발효되었던 술. 덕분에 대부분을 버리고 간신히 만들어낸 아홉 병의 바질리카.

그 바질리카가 완성되었을 때 유난히 짙은 향과 부드러운 맛이 그야말로 일품 중의 일품이었다. 비슷한 온도를 일부러 맞추어 발효를 해 만들어낸 다른 바질리카들에서는 도무지 그 맛이 나질 않았다. 덕분에 그 해 그 양조장에서 만들어진 바질리카는 보석보다 귀한 취급을 받으며 이곳 저곳으로 팔려나갔다.

그렇게 한 병 두 병 애주가들의 목을 타고 사라져간 그 바질리카가 얼마 전까지 대륙에 딱 두 병 남아있었다. 그 중 한 병이 앨런의 집에 있었는데 바로 그것을 그 아르센이 말아먹었다. 술 잘 모르는 아르센은 그날 앨런이 플레임 스피어를 던질 뻔했다는 것도 아직 잘 모른다.

아무튼. 그 덕에 이제 단 한 병 남은 술.

이제 세상에 없는 데블란의 술 창고에 남겨져있던 그 바질리카를 체이스가 칼리안에게 주었다.

"생일 선물인가보군."

그것을 앨런과 함께 마실 생각에 신이 나서 들고 온 참이었던 칼리안이 조금 놀란 얼굴이 됐다.

"네. 맞습니다."

사실 선물은 이 술이 아니라 저 아래 멀리 보이는 바닷가였다. 그것을 또 받았다. 물론 카이리스의 왕자였으니 땅의 소유권을 넘겼다는 의미는 아니었지만 이번에도 체이스는 그 바다를 다시 선물했다.

생각해보면 체이스는 참 재미없는 사람이다. 이미 주었던 것을 또 준 셈이니.

"제가 언제 말씀드린 적 있었습니까."

"있었어."

플란츠가 고개를 들어 여전히 내려오고 있는 푸른 빛을 쳐다봤다.

- 파란 별이 내립니다.

지난 여름, '칼리안'의 생일을 축하하는 연회에 참석하고 돌아온 칼리안이 플란츠에게 그런 말을 했었다.

그날. 축하연의 주인공은 칼리안이었고 주최자는 르메인이었다. 그리고 그곳에 자리한 다른 모든 이들은 초대를 받고 참석한 이들이었다. 그래서 그날의 칼리안은, 초대받지 않은 자리에 찾아간 유일한 손님이 되어 있었다.

초대받지 않은 자리에 찾아가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닌 축하 인사를 받고 돌아온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번 여름에는 그런 얼굴을 하지는 않겠으나 작년에는 그랬다. 그리고 이야기를 했었다. 세크리티아에는 파란 별이 내리는 날이 있다고.

- 가끔 오기도 하고 오지 않기도 해서 축하를 받기도 했다가 받지 못하기도 했다가. 그랬습니다.

칼리안에 대한 미안함.

잊혀져버린 사람을 떠올려버린 서러움.

플란츠조차 다 눈치채지 못할 복잡한 속내를 모두 감추지도 못하고 그런 이야기를 했었다. 그날 축하 받아야 할 사람은 따로 있었고 자신이 축하 받아야 할 날은 그날이 아님을 알아달라는 듯이.

그래서 플란츠도 알고 있었다.

2월 30일. 달력에도 적히지 않은 날. '칼리안'은 카이리스의 여름이 아니라 세크리티아의 봄에 태어났음을.

"쓸데없는 말을 했네요. 제가."

"그게 왜."

칼리안이 다른 말 없이 웃었다.

그리고 이만 들어가라는 듯 별장 쪽을 가리켜보일 때.

불쑥, 하고.

무언가가 칼리안의 눈 앞에 쑥 들이밀어졌다. 순간 저도 모르게 그것을 쳐낼 뻔 했던 칼리안이 플란츠를 쳐다봤다.

"이건 왜 돌려주십니까."

"돌려주는 것 아니고 주는 건데."

"제가 드렸던 건데요."

"그게 뭐."

"······ 아닙니다. 그런데 왜 '주시는' 겁니까."

수정판이었다.

고양이들 보면서 집에 돌아갈 생각 하라고, 칼리안이 플란츠에게 생일 선물로 건넸던 물건이었다.

"카이리스에 있던 건 내 아우님 옛 형님한테 보냈으니까."

이제 즉위식을 보고 나면 다시 카이리스로 돌아갈 테니까, 그렇게 되면 플란츠가 고양이들 못 보듯이 칼리안도 체이스를 못 보게 될 테니까.

"보고 살라고."

플란츠의 생일 선물이었다.

빨리 받으라는 듯 플란츠가 수정판을 한 번 더 칼리안의 눈앞에 내밀었다. 얼결에 그것을 받아든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형님 저하께서 이렇게 무럭무럭 잘 크고 계셔서 저는 참 기쁩니다."

"기어코 짖지."

칼리안이 씩 웃었다.

작년 생일에도 선물을 챙겨주더니 이번에도 받았다. 이미 준 선물 또 준 체이스나 선물 받은 것을 도로 건넨 플란츠나 둘 다 어쩐지 좀 선물 돌려막기를 하는 게 아닌가 싶은 기분이 들긴 하는데 어쨌거나 받긴 받았다.

"란델 형님 선물은 챙기셨습니까. 란델 형님 탄생일 지난지 두 달 되어 가는데요."

"너도 안 했잖아."

"전 스승님 편에 보냈습니다. 아직 열어보지도 않으셨을 것 같기는 하지만요."

카이리스 가기 전에 세자위 떨구고 가는 것이 란델에게 있어 최고의 선물이 되리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절대로 안 떨구고 갈 생각인 플란츠가 저벅저벅 걸어 별장 안으로 들어갔다.

만약 란델이 열어 봤다면 손대지 않고는 못 배길, 최고급 정원수 손질용 가위 세트를 보냈던 칼리안이 플란츠 뒤를 졸졸 따라갔다.

"선물 보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제라도요."

"싫어."

"사이좋게 지내셔야죠. 형님 저하 이제 다 크셨는데요."

"그렇게 보이시면 내 이름 뜻이나 알려주시던가."

"아. 그걸 말씀드리기엔 형님 아직 어리셔서,"

"그리 장성하신 내 아우님께서 자꾸 짖으시는데."

"잘 쓸게요. 선물."

"······ 알았어."

"즉위식 마치면 대구 먹으러 가요. 사드릴게요."

"알았어."

어느새 내리던 별이 그쳤다.

푸른 빛 대신 새하얀 별이 다시 뜨고, 은빛의 달이 시나스타 가득한 정원을 비춘다.

"대구 먹으러 간 김에 란델 형님 드릴 선물도 사시는 건,"

"그만."

"네."

그 어느 날보다 반짝이는 하루가 지나간다.

하얀 꽃 사이사이로 푸른 빛이 하늘을 향해 올라간다. 세렌티의 시간이 끝난 뒤 이어진 시나스타의 빛이었다.

* * *

셔츠 단추를 채우다 고개를 돌리니 얀이 울상이다.

"괜찮다니까."

"그래도요. 볼 때마다 신경이 쓰이네요."

우리 꽃같은 왕자님 등짝 누가 이래놨냐고 울고불고 난리를 피운지도 벌써 두 달이 넘어간다. 그럼에도 여전히 옷을 갈아입을 때마다 매번 같은 얼굴을 한다.

그 놈을 곱게 죽인 것이 한이란다.

그냥 살려서 지그프리드로 보내지 그랬느냐고 무시무시한 말을 했었다.

"나 늙어 죽을 때까지 맨날 그럴거야?"

"네. 그럴 거예요. 왕자님 옷 갈아입으실 때마다 맨날 이럴 거예요."

"너 무서워서라도 더 늘리지 말아야겠다."

"그러니까요. 조심 좀 하세요. 왕자님 흉터 또 늘어나면 저 진짜 시종 일 그만 둘 거니까요."

무시무시한 말을 또 한다.

코끼리들 다 불러다 세뉴강이 마르고 닳도록 복수해주겠다는 뜻이다.

"그래, 알았어. 조심할 테니까."

결국 실소한 칼리안이 재킷을 가리켜 보였다. 고개를 끄덕인 얀이 재킷 소매에 팔 넣는 것을 도와주며 입을 열었다.

"참, 레릭은 제 때 잘 도착했어요."

"다행이네."

그 사이 또 키가 컸다.

둘 다, 키가 컸다.

다른 옷은 이곳에서 새로 맞추면 될 일이니 괜찮았으나, 문제는 오늘 입어야 할 왕자와 왕세자의 정복이었다. 덕분에 고양이들과 새끼 코끼리를 따라왔던 레릭이 얼마 전 카이리스로 잠시 돌아갔었다.

칼리안을 위한 왕자의 정복보다 훨씬 많은 자수와 장식이 들어가는 왕세자의 정복이 더 늦게 만들어졌다. 그래서 레릭은 어제 잠시 이곳에 와서 칼리안의 정복을 먼저 두고 다시 돌아갔다가 오늘 이른 새벽에 도착했다 했다.

"스승님도 오셨겠네, 그럼."

"오늘 카이리스 왕궁에도 행사가 있는 날이잖아요. 그래서 왕자님 주무시는 것만 그냥 잠깐 보고 돌아갔어요. 깨우지 말라면서요."

앨런은 대륙 최강의 마법사가 된 이후 어쩌다보니 대륙 최고의 특급 운송 담당자가 된 듯하다. 이곳 저곳으로 사람도 나르고 고양이도 나르다 이제는 옷까지 나르고 있으니.

"그러고보니 오늘이 세뉴강에 물고기 먹이 뿌리는 날이던가."

"네. 3월 첫날이니까요."

이미 봄을 맞이한지 오래인 세크레타와 달리 여전히 추운 카이리시스는 이맘 때가 되어서야 세뉴강이 녹는다. 그나마도 다 녹지 않고 군데군데 얼음이 있는 때도 있다 했으나 대체로 이 즈음이 되면 물 흐르는 소리가 다시 들렸다.

겨울을 잘 보낸 것을 축하하고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는 의미로, 얼어붙은 강물 밑에서 제대로 먹이를 찾지 못했을 물고기들에게 먹이를 주는 행사가 있는 날이었다. 르메인이 외부로 나가는 날이니 앨런이 호위를 보아야 했을 터였다.

칼 좀 잘 다루는 칼리안도 눈치채지 못하게 살짝 와서 얼굴만 들여다보고 간 아버지 생각에 칼리안이 작게 웃었다.

"곧 돌아갈 테니까. 그때 뵈면 되지."

"네. 너무 서운해하지 마세요."

"그래. 알았어."

오늘 눈에 띄어야 할 사람은 체이스였지 칼리안이 아니었다. 때문에 그리 눈에 띄는 장신구는 하지 않았다. 검은 베스트와 재킷, 그리고 검은 바지로 이루어진 왕자의 정복에 한 쪽 어깨에만 검은 털 장식이 올라간 붉은색 망토를 둘렀다. 겨울 정복에서 코트만 뺀 것이었다.

굳이 겨울 정복을 입을 필요가 없었는데 실로 연약하기 짝이 없는 파릇한 왕세자께서 아직도 추위를 탔다. 도대체 카이리스에서 어떻게 아직까지 살아있던 것인지 알 수가 없는 일이다. 어쨌거나 플란츠가 겨울 정복을 입는데 칼리안이 다른 것을 입을 수는 없는 일이라서, 결국 이렇게 입기로 결정을 한 터였다.

이곳에 없는 메를린을 대신한 얀이 마지막 점검을 한 뒤 옅은 귤 향이 나는 향수까지 몇 번 뿌린 뒤에야 준비가 끝났다. 그리고 밖으로 나갔다.

"마차 말고 레이븐에 타실 것 같아서 준비해뒀습니다."

"맞아. 고마워."

대답하는 시선 끝에 카이리스 왕실 문양이 새겨진 마차가 보였다. 그리 호사스럽다는 마차를 오늘도 못 탔다. 오늘 저 마차를 이용할 사람은 칼리안이 아니었다.

칼리안의 것과 비슷한 듯하지만 금사로 수놓은 문양이 더 많은, 짙은 감청색의 재킷과 검은 바지, 그리고 감청색 털 장식이 달린 검은 망토 차림의 플란츠가 마차 밖에 서있었다. 그리고 흰색 레이스가 가득 달린 청록색의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고 같은 빛을 내는 티아라를 한 어여쁜 히나가 마차 안에 앉아있었다.

히나에 뒤이어 플란츠가 마차에 들어간 뒤, 우리 히나는 너무 예쁜데 속은 시끄러운 상태를 애써 잠재운 칼리안이 레이븐의 위에 올랐다.

- 펄럭!

두터운 망토가 잠시 부풀다 가라앉는다.

오래지 않아 다각다각, 하고.

여섯 마리의 말이 이끄는 마차와 새카만 한 마리의 말에 오른 왕자가 세크리티아 왕궁을 향해 출발했다.

* * *

세렌티의 신전.

텐실처럼, 세크리티아에도 물론 세렌티의 신전이 있다. 신관 역시 있었다.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치유력을 사용하지 않을 뿐이지 세렌티에 대한 믿음을 버린 것은 아니었으니까.

즉위식은 그 신전에서 시작된다.

본래에는 8개의 성물을 모두 받는 의식을 치렀으나 어느새 조금씩 간소화되어 이제는 보주와 왕홀, 보검, 그리고 왕관을 받는 의식만 차례로 진행한다. 그것만으로도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데, 그 이후 광장까지 행진을 하고 광장 앞에서 선언을 한 뒤 왕궁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리고 알현실에서 귀족들의 인사를 받은 뒤 보주와 왕홀, 보검과 왕관을 보관하는 의식을 다시 치른다. 그렇게 즉위식이 끝난 뒤에야 축하연이 이어졌다.

- 다각, 다각.

커튼이 굳게 내려진 마차 대신,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고개는 조금도 떨구지 않은 채 붉은 눈만 살짝 내리 뜬 칼리안에게 수많은 시선이 꽂혔다. 신전 안까지 초대받지 못한 인파들의 눈길이었다. 다른 곳에는 조금도 눈을 돌리지 않는 칼리안과 카이리스 왕실의 마차가 그들 사이를 지나 천천히 나아갔다. 그렇게 신전에 도착했다.

마차 문이 열리자, 마지막으로 의복을 다시 한 번 확인한 플란츠가 먼저 나왔고 히나가 뒤따라 나왔다. 칼리안의 뒤에는 얀과 키리에가, 팔짱을 낀 플란츠와 히나의 뒤에는 레릭과 아르센이 섰다. 정혼자, 그리고 시중과 호위를 위한 이들을 뺀 나머지 인원은 축하연에만 초대되었으니 나중에 왕궁에서 만나게 될 터였다.

신전 측의 안내인들과 기사들의 인도를 받은 카이리스의 손님들이 귀빈석에 자리했다. 멀리 보이는 루이즈와 아리안느에게 살짝 눈인사를 한 칼리안이 자리에 앉았다.

칼리안의 일행이 거의 마지막에 도착한 터라, 이미 모여있던 참관객들의 시선이 다시 한 번 칼리안을 향했다. 데블란의 심장에 검을 집어던진 모습을 여전히 기억하는 이들의 눈에 두려움과 경탄이 함께 섞여 있는 것을 알았으나, 칼리안은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았다.

- 데엥, 데엥, 데엥······.

신전의 문이 닫혔다.

깊은 울림의 종 소리가 일국의 국왕이 정식으로 자리에 오르는 즉위식의 시작을 알렸다.

모두가 자리에 앉아 입을 다문다.

대신관이 가장 먼저 앞으로 나와, 세렌티의 가호가 세크리티아에 영원히 깃들기를 기원하는 기도문을 읊었다.

- 데엥······.

그리고 이어진 또 한 번의 종 소리.

저 멀리, 굳게 닫힌 문의 앞으로 체이스가 걸어나왔다.

세렌티를 상징하는, 붉은색 실로 수놓아진 새하얀 망토가 신전의 창문 새로 들어온 햇빛을 받아 반짝인다. 붉은 천 위로 한 걸음 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길게 이어진 망토가 바닥을 스치는 소리가 조금씩 들려온다. 하얀 바지와 붉은 재킷에는 금사로 수를 놓았다. 금색의 체인과 태슬이 걸음걸음마다 흔들린다.

햇빛을 가르듯 걸어나오는 체이스의 모습을 보던 칼리안이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두 번째.

저 모습을 두 번째로 보게 되었다.

보주를 받고 왕홀을 받고, 보검을 장식한 것이 루비임을 알았을 땐 잠시 숨을 참았다.

- 데엥, 데엥······.

두 번의 종 소리가 울린다.

체이스가 대신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벨벳으로 감싸인 커다란 상자를 들고 온 이의 손에서 그것을 넘겨받은 대신관이 천을 거두었다. 화려한 왕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이아몬드. 그리고.

참 어울리지 않게도.

옅은 빛의 자수정이 왕관의 가장 중앙에 박혀 있었다.

칼리안이 다시 한 번 눈을 감았다.

- 데엥, 데엥······ 데엥······.

세 번의 종 소리가 울린다.

체이스가 몸을 일으켰다.

왕관을 쓰고 뒤로 돌아섰다.

진짜 왕이 되어, 이곳에 모인 모든 이들을 둘러보았다.

- 이렇게 와 주어 고맙습니다. 플란츠 왕세자.

머릿속으로 울리는 체이스 목소리를 듣게 된 플란츠가 미간을 찌푸렸다. 감사 인사가 아님을 알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수정판 주고 반지 뺏어오지 말 걸 그랬다.

- 축하. 드립니다.

딱딱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가 머릿속으로 들려오자, 눈에 띄지 않을 장난스런 웃음을 지어보인 체이스가 칼리안을 바라봤다. 한참동안 그렇게 보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체이스의 발이 다시 움직인다.

신전 밖으로, 광장으로,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던 칼리안의 눈이 잠시 다른 곳을 향했다. 그리고 멈췄다.

'······ 텐실.'

텐실의 왕실 문양, 왕족의 차림.

적국과 다름없는 이곳에 굳이 찾아온 텐실의 귀빈.

칼리안의 얼굴에 알 수 없는 웃음이 그려졌다.

텐실의 왕세자가 그곳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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