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장. 대외 홍보용이라(2)
놀라고, 기쁘고, 혹은 안도하고.
그리 되어야 했는데.
그저 미안했다.
나를 어떻게 알고 있는지, 언제부터 알고 있었는지, 왜 그동안 기다리기만 했는지, 짧기도 하고 길기도 한 그 질문들을 하나도 꺼내놓질 못하고 미안하기만 했다.
보고 싶었다 하는 그 말 때문에 내내 미안하기만 했다.
당신은 나를 내내 보고 싶어 하였는데 나는 내내 잊고 살았던 탓에. 내가 사는 것이 아팠다는 핑계로 당신이 아팠던 것도 잊고 그 짧은 안부조차 묻지 않다가 얼굴을 본 뒤에야 다시 만나게 되어 좋다 여겼던 탓에.
그것이 그리도 미안하여서.
고개를 들기가 미안하여서.
어머니.
작고 좁은 당신의 어깨에 이마를 대고 한참동안 그저 미안해하였다.
- 달칵.
초록빛의 단풍잎차에서는 신 맛이 난다.
빨간빛의 단풍잎차에서는 단 맛이 난다.
민트도 아니고 커피도 아닌 차.
투명에 가까울 옅은 갈색의 찻물 속에 초록색도 아니고 빨간색도 아닌 단풍잎들이 띄워져 있었다.
주황색 같기도 하고 노란색 같기도 한 지금 이 단풍잎차에서는 온갖 맛이 다 났다. 그것이 재밌다. 그것이 온전히 신 맛도 아니고 또 그렇다 해서 온전히 단 맛도 아니고 어쩐지 쓴 맛도 조금 나는 것 같아서, 재밌게도 자몽이 생각났다. 다른 이유도 없이 그냥 괜스레 생각이 났다.
'돌아가면, 란델 형님을 좀 만나 봐야지.'
이곳에 오느라 미뤄두게 된 란델 형님의 심장을 풀어줘야지. 완두콩같은 분만 챙기지 말고 마른 갈대 줄기같은 그 분도 이제는 좀 살펴봐야지. 돌아가면.
그래.
돌아가면.
이런 생각이 들었으니 다행이었다.
단풍잎차 때문에 자몽이 생각나고, 그것 때문에 란델이 떠올라서 다행이었다. 정말 다행이었다.
아니었다면 자칫 이 나라 이 왕궁이 내가 머무를 곳이라 착각할 뻔했다. 새로운 형제와 새로운 아버지가 있다는 것을, 이 나라 이 땅을 지나쳐 다시 내 나라로 돌아가야 함을, 아주 잠시였지만 내가 그만 잊을 뻔했다.
잠시 잊고 안주할 뻔했다.
"베른."
작디 작은 목소리가 내 발을 붙들어서.
* * *
키리에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
루이즈가 들어간 뒤 방 안에서 오간 이야기를 전부 들었지만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
어느 날인가부터 칼리안은 키리에가 근처에 있다면 꼭 키리에가 있는 곳을 포함하여 사일런트를 펼쳤다. 다른 이들이 듣지 말아야 할 대화가 오간다 하더라도 키리에는 함께 들을 수 있도록 했다. 키리에가 그 좋은 귀로 칼리안의 대화를 훔쳐 듣는다 생각하지 않도록 그렇게 신경을 썼다.
이번에도 마찬가지.
칼리안은 키리에가 있는 곳까지 사일런트 막을 만들었다. 그래서 키리에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무슨 말이 오갔는지 다 들었지만 아무것도 듣지 못한 척했다. 생소한 기억에 잠겨드는 꿈을 꾸게 된 지 이제 한 달 남짓이 되었다는 말도 들었지만 그 역시 듣지 못한 척했다.
- 베른.
그 이름으로 칼리안을 부른 이가 있다는 것 역시 듣지 못한 척했다. 그런 말을 듣게 되리라고는 칼리안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라서. 만약 알았다면 키리에가 그 말을 함께 듣도록 사일런트를 넓혀두지 않았을 것이라서.
그 이름은 체이스에게 전해들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기억을 찾았음에 대한 가장 확실한 증명이 아닌가. 그러니 체이스가 아닌 누군가가 기억을 찾았음을 알게 된다면 키리에 역시 같은 것을 바라게 되리라는 사실을 칼리안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칼리안은 키리에가 기억을 찾게 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키리에가 만약 베른에 대한 기억을 찾는다면 히나에 대한 일도 정확히 알게 될텐데, 칼리안은 키리에가 그런 기억을 또 가지는 것을 바랄 사람이 아님을 키리에도 잘 알았다.
그래서 키리에는 듣지 못한 척했다.
한참이 지난 뒤 루이즈가 밖으로 나왔고 키리에는 고개를 깊숙이 숙여 오랫동안 인사를 했다. 마치 앨런이나 르메인을 보았을 때처럼.
"네가 그곳에 있다는 말을 전해들었단다. 어여쁜 동생이 함께 있다지."
"네. 그렇습니다."
"이제는 네 이름이 되었으니 저 아이를 그리 부르면 안된다는 것을 내가 오늘에서야 알게 되었구나. 세자가 그런 소식까지는 전해주질 않아서."
카이리스에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할 즈음부터 돌아왔다는 루이즈의 기억. 그래도 이번에는 체이스가 곁에 있었기 때문에 루이즈는 오래 앓지 않았다 했다.
키리에는 루이즈를 모르지만 루이즈는 키리에를 알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키리에가 베른의 곁을 떠나 있었을 리 없으니 루이즈도 키리에를 많이 보았으리라.
"그래. 참으로 다행하고 감사한 일이다."
그리고 루이즈는 칼리안과 똑같은 말을 했다.
히나가 곁에 있게 된 대신 사라진 한 사람을 계산에 넣지 못하는 칼리안의 바보같은 셈 버릇은 아마도 루이즈를 닮았나보다고, 키리에는 그렇게 생각을 했다.
"세자가 나에게 신신당부를 하였다. 이곳에 오지 말라 그렇게나 이야기를 하였는데 결국 걸음을 하게 되었구나. 다만 왕자들의 일행이 이곳에 머무는 동안 고맙다 인사하러 올 일이 다시 생기지는 않을 터이니, 내가 그 아이를 그리 부르는 실수도 다시 하지 않을 터이니, 혹여 밖에서 나를 다시 보게 된다면 그리 인사하지 말거라."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오늘처럼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해 이야기를 나누거나 인사를 건넬 일이 없으리라. 그러니 키리에 역시 티를 내지 말아야 했다. 루이즈를 칼리안의 모친처럼 대하지 않도록 주의를 해야 했다.
곧 키리에의 주변까지 닿아 있던 사일런트가 사라졌다. 그래서 루이즈는 그 이상의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때처럼 지금도 잠을 설치지는 않는지, 그래서 늘 새벽에 잠들고 늦은 아침에 일어나지는 않는지, 잘 먹고 잘 웃으면서 지내왔는지, 먼곳에서의 생활이 불편치는 않았는지, 그곳의 사람들은 잘 대해주는지, 그렇게나 많은 곳에 들켰는데 탈이 생기지는 않았는지, 그리고 앞으로도 아프지 않고 잘 지낼 수 있겠는지.
칼리안에게 꺼내지 못한 많은 말들을 키리에에게라도 묻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어서 루이즈는 그냥 고개만 끄덕이고 뒤로 돌아섰다. 하지 못한 많은 말들은 나중에 하면 될 테니까.
- 또각, 또각.
평정심을 되찾은 작은 구두소리가 멀어진다.
- 저벅, 저벅.
누구에게도 감출 필요 없는 구두소리가 가까워진다.
- 또각.
루이즈의 구두소리가 멈췄다.
- 저벅.
플란츠의 구두소리가 멈췄다.
키리에가 짧은 숨을 들이켰다.
사람들 앞에서의 루이즈는 플란츠를 마주하고도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못할까봐. 지금이라도 루이즈를 따라가서 둘 사이에 서야 하나, 짧은 고민을 했다.
- 또각, 또각.
- 저벅, 저벅.
하지만 다시 멀어지고, 다시 가까워진다.
여전히 평정심을 잃지 않은 루이즈가 조용한 발걸음으로 별관을 나갔다. 여전히 아무것도 감추지 않는 플란츠가 별관 안으로 들어왔다. 그렇게 누군가는 밖으로 나가고 누군가는 안으로 들어왔다.
그렇게, 낮이 지나가고 밤이 찾아왔다.
* * *
항상 이런 식이다.
도무지, 정말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다.
스스로 가진 이해의 범위가 엘프 도시 앞바다만큼이나 넓어서인지 온 세상을 다 끌어안고도 남을 만큼 깊어서인지 몰라도 항상 이런식이다.
"형님 혹시 높은 곳 무서워하십니까."
이딴 걸 물어봤을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그 개념의 범위가 실로 비범하신 아우님을 둔 것을 잠시 까먹은 플란츠는 별 생각 없이 대답을 했다.
"아니."
라고.
카이리스 왕궁에서는 특별히 높은 곳이랄 것이 없었지만 그래도 엘프 도시의 대장로 나르잔이 있던 곳이 꽤 높았지 않나. 이곳에 오는 길에 바위산 정상에 올라갔을 때에도 특별히 '무서움'을 느껴본 적 없으니 그렇게 대답을 했다.
"네."
똑똑한 플란츠가 칼리안의 그 짧은 대답 안에 '잘됐다. 혼자 가면 심심하고 키리에를 데려가면 술 먹고 싶어질 것 같으니까 그냥 형님 너랑 같이 가야겠다.' 정도의 의미가 있었음을 알았다면 분명히 거짓말을 했을 거다. 높은 곳 무서워한다고.
물론 그랬다 하더라도 결과는 같았으리라는 걸 안다.
놈은 거짓말 하는 것은 못해도 알아보는 것은 참 잘 하니까. 그러니 거짓말을 했더라도 지난 번 언젠가처럼 또 로브로 돌돌 말아 그 높은 곳에 올려다 놨을 테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어찌됐건 플란츠는 거짓말을 했을 거다. 나는 내 미친 동생이랑 같이 안 갈 거니까 너 혼자 가라고.
"정신 나갔지."
"제가 돌아서 사는 게 하루 이틀 아닌 것 잘 아시면서 새삼스러운 말씀을 하십니까."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보란 말이다.
쟤는 어떻게 여길 오면서 나를 데려올 생각을 하느냐는 말이다. 이게 머리가 돌았고 아니고를 떠나서 일단 너도 사람이라면 그런 생각을 못하지 않겠느냐고.
도대체 어떤 말을 해줘야 할지 알 수가 없어진 안 돌은 플란츠는 그냥 첨탑의 난간으로 걸어가 먼 곳을 봤다.
"얘기 들었습니다. 이 곳에 오도록 체이스 형님께 부탁해주셨다고요."
"계속 보길래."
수도의 첨탑에 올라간다 해서 특별한 것을 보지는 못한다. 칼리안이야 새들을 부렸으니 카이리시스의 거리와 새들의 거점들 하나하나를 모두 다 외워두었다지만, 그 정도가 아니라 하더라도 플란츠 역시 세크레타의 지도 정도는 외우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아스트리샤 거리의 어느 서점이든 세크리티아와 세크레타의 지도책 정도는 구비해두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세크리티아도 마찬가지. 고작 그런 것이 기밀이라 하기에는 두 나라 모두 지나치게 오랜 세월을 이어왔지 않나.
그러니 지금 두 왕자가 첨탑 위에 올라 있는 것을 데블란이 알게 된다 하더라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내일 즈음이면 왕궁 견학을 이유로 둘러보러 오게 될 테니까.
"네. 그래서 같이 오자 했습니다. 혹시 형님께서도 궁금해 하시는건가 해서."
"아니야."
"아무튼 좋네요. 오랜만에 오니까."
때문에 두 형님의 호의를 부담없이 받아 이곳에 올라온 뒤 발 아래 펼쳐진 세크리티아의 수도를 내려다보던 칼리안은 아무 걱정 없는 얼굴로 헤실헤실 웃었다. 잔뜩 찌푸려진 플란츠의 얼굴은 아예 안 보기로 작정한 모양이다.
"체이스 형님과는 같이 못 옵니다. 보는 눈이 많기도 하지만 다 괜찮아지면 가기로 한 곳이 따로 있기도 해서 아무튼 여기는 함께 오기 힘듭니다. 그리고 키리에랑은 아직 올라올 마음을 못 먹겠어서."
말을 멈추고 잠시 바람을 삼킨 칼리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못 먹겠어서요."
"아무 말 안했어."
"하실 것 같아서."
"반말."
"······ 같아서요."
바람이 꽤 차가웠는데, 춥지는 않았다.
칼리안은 더위도 추위도 타지 않았고 플란츠는 더위도 추위도 참 잘 탔지만 괜찮았다. 이곳에 오기 전 앨런이 생일 선물이라며 건네줬던 푸른 보랏빛 망토 덕분에 추운 것을 못 느꼈다.
"형님 마음대로 그런 일까지 벌여가며 데블란 시선을 나눠가져가셨는데 정작 이곳에는 저만 와보는 것도 이상하고요."
칼리안이 손가락을 들어올려 플란츠의 눈 앞에 긴 호선을 그려보였다.
체이스가 꿰뚫어 본 것을 칼리안 역시 알아봤다.
플란츠가 누굴 따라했고, 왜 그랬는지.
요컨대 데블란을 속이기로 해놓고 이런 곳에 칼리안 혼자 올라와 청승을 떨면, 답지도 않은 남의 흉내를 낸 것이 누구인지 곧바로 들킬테니 그냥 같이 왔다는 소리다. 참 그럴싸한 핑계다.
"말해. 숨기지 말고."
"저 또 무슨 말씀 드려야 합니까."
"내 아우님의 옛 어머니가 오셨던데."
"······ 아무튼 내 형님은 머리도 좋으시고, 눈치도 빠르시고."
"말을 해. 짖지 말고."
루이즈가 왔다 간 것을 플란츠도 보았다.
자신을 쳐다보며 단 한 마디 말도 꺼내지 못하다 걸어나가는 루이즈를 플란츠도 보았다. 이야기를 전해 들었든 꿈을 꾸었든 눈치를 챘든, 아무튼 루이즈가 정말로 칼리안에게 고맙다는 인사나 전하자고 찾아온 것이 아니었음은 플란츠도 안다.
"제 예전 이름을 기억하시더라고요. 너무 오랜만에 그 이름을 들었는데 낯설지가 않아서, 하마터면 '네' 하고 대답을 할 뻔 했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칼리안은 잊지 않으려고 플란츠를 데려왔다.
"나는 내 아우님 이름이 칼리안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참 뻔뻔하고 한결같이 이런 것을 알려줄 놈이라서 데려왔다. 참 뻔뻔하고 한결같이. 이런 곳에.
"맞습니다. 칼리안."
플란츠가 칼리안이 서 있던 곳 반대편의 첨탑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
루이즈를 마주친 것을 키리에가 봤으니 칼리안도 알 터였다. 그러니 칼리안은 칼리안대로 플란츠는 플란츠대로 서로서로 잠깐 막힌 숨이나 좀 쉬자며 데리고 올라온 것을 안다. 정말 신경쓰지 않으니 플란츠도 신경쓰지 말라고, 그 와중에도 그것을 신경써서 하필 이곳에 이렇게 올라와 있음을 안다.
그래서 플란츠도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본인이 괜찮다 했으니 기억도 없는 곳에 붙들려와서 굳이 마음 불편해하지 말라는 뜻일테니까.
"바람 많이 붑니다."
"어련히 알아서 잡아주실까."
칼리안이 웃었다.
곧 칼리안은 맨정신에 여기 있는 것 진짜 오랜만이라는 둥 날 좋을 때에는 정말 먼 곳까지 보인다는 둥 언젠가 여기서 술 먹고 잠들었을 때 키리에도 같이 잠들어버려서 체이스한테 엄청 혼났다는 둥, 참 많은 말을 두서없이 꺼냈다.
그런 얘기를 두서없이 들어주다가, 아무래도 안되겠어서.
"나중에."
칼리안의 여러 말을 잘라내고 입을 열었다.
칼리안이 왕이 되고 플란츠가 브리센에 가서 고양이를 키우고, 그렇게 심장에 걸린 약속을 지킨 뒤에 다시 돌아와서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서.
"와서 살아. 여기로 다시."
"저 말씀이십니까?"
그럼 너지 나겠냐고.
내가 여기를 왜 오냐고. 피말라 죽을 일 있냐고.
"파란머리 미친 마법사 손에 들려줄테니까 너 와서 살라고. 카이리스 왕궁에도 숨 돌릴 데 많은 것 나도 이제 아니까."
"싫은데요."
말 더럽게 안들어처먹는 것도 너한테서 배운거라는 건 혹시 아느냐는 말을 꾹꾹 눌러담은 플란츠의 귀에 칼리안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
"저는 그냥 쭉 개 키우면서 살 거니까 형님은 고양이나 키우십시오."
"······ 왜."
여기에는 체이스도 있고 아리안느도 있고 루이즈도 있고 세크리티아도 있지만 거기에는 아빠도 있고 얀도 있고 손 많이 가는 두 형님도 있고 목 간당하신 아버지도 있고 카이리스가 있고.
"칼리안이니까."
하고 칼리안이 웃었다.
저놈이 또 반말한다고 해줄까 하다 그냥 뒀다.
내일 모레면 동갑 아니니까 그때까지는 너그럽게 봐주는 마음씨 넓은 형님 노릇 하려고.
* * *
달이 밝고 별이 많다.
- 무슨 일 있어?
- 아니, 그냥.
늦은 밤이 되어 달도 밝고 별도 많고.
세크리티아에 왔고 루이즈를 만났고.
다행이라 했던 그 말이 잊히지가 않았다. 그래서인지 히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 혹시 자고 있었어, 히나?
- 아니야. 나 안잤어.
키리에에게 말을 하는 것은 늘 즐겁다.
손에 들린 것을 내려놓지 않고도 말을 할 수 있고, 언제 어디서든 키리에가 바로 옆에 있는 것 같아서 좋았다.
그래서 히나는 손에 들려 있던 접시에 포크를 가져가며 말했다.
- 저녁을 먹었는데도 조금 출출했는데 여기 사람들도 다들 그랬나봐. 다 같이 케이크랑 쿠키랑 먹고 있었어.
비온 뒤 햇살 비치는 창가에 어린 무지개가 생각났다.
층층이 쌓아올린 무지개색의 빵 사이사이에 달콤한 생크림이 한가득 들었다. 욕심껏 가져온 케이크를 들고 테라스로 나간 히나가, 케이크를 한가득 입에 넣으며 말했다.
- 오빠. 오늘 달도 밝고 별도 많아.
정말 신기하게도 히나가 이런 말을 했다.
키리에가 생각한 것을 똑같이 말했다.
베고니아 향 가득한 정원에 서서 머리 위를 한참동안 올려다보던 키리에가 웃으며 대답했다.
- 그러게. 달도 밝고 별도 많네.
- 응. 반짝반짝하는게 꼭 튼튼이같아.
어······ 그래.
아무리 그래도 속으로 불러줄 때에는 다른 예쁜 이름이 있겠거니 했는데. 아니었다.
칼리안이 생일선물로 주었던 그 대단한 말을 생각하던 키리에가 작게 웃었다.
- 왜? 재밌는 일 있어?
- 아니야. 그런거 없어. 그냥 좋아서.
- 좋은 일 있었어?
소중하다.
문득, 히나가 너무 소중해서 웃음이 났다.
이번에는 잘 지켜줘야지.
소중하게 잘 지켜줘야지.
- 별이 많아서. 반짝여서 웃었어. 히나.
하늘 위에 붉은 별이 하나, 파란 별이 하나.
그리고 그 곁을 지키는 참 많은 은빛 별을 보면서 키리에가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