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장. 대외 홍보용이라(1)
작은 손짓.
조용한 말.
그것을 보고 들은 데블란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그 뒤에는 먼 길을 오느라 고생한 귀빈들을 두 번째 별관으로 안내하도록 이른 뒤 집무실로 돌아갔다.
같은 것을 마주한 체이스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리고 칼리안은 웃었다.
웃음의 의미를 알아볼 얀은 이곳에 없었고 어떤 날의 칼리안이 그런 웃음을 지었는지 기억해 낸 플란츠는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한 가지 분명한 점은, 그날 칼리안이 왕실 문양을 새긴 붉은 망토를 착용한 것도, 전 왕비 디에나가 사망한 그 추운 밤 베른이 겪은 일을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다시 보게 되었던 것도, 덕분에 전에 없을 만큼 돌아버린 것도, 그런 상태를 눈치챈 플란츠가 차라리 '칼리안'의 목줄을 놓는 것으로 제 동생이 그자리에서 데블란을 죽여버리지 않도록 막은 것도, 전부 다 칼리안의 계획에는 없던 일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플란츠의 작은 손짓과 조용한 말, 그것 역시 칼리안의 계획에는 없던 일이었다.
"상대의 패를 가져오려면 걸어야지. 내 것을."
멀리 왕궁 안으로 들어서는 데블란의 등을 보던 칼리안의 입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플란츠가 그려낸 긴 호선이 칼리안의 얼굴에 고스란히 떠올랐다.
* * *
언젠가 르메인이 그랬다.
나라의 크고 작음으로 위 아래를 정해서는 안된다고.
칼리안에게 했던 말은 아니지만 플란츠에게는 그렇게 이야기를 했었다. 카이리스까지 찾아온 체이스를 혹시라도 내려다보려 하지 말고 싸우지도 말고 잘 지내라 했었다.
사실 르메인의 말이 아니라 하더라도 세 왕자 모두 모르는 이야기는 아니다. 세크리티아든 텐실이든 리베른이든. 어느 하나도 카이리스의 공국이 아닌 상대적으로 땅덩이가 좀 작은 옆 나라일 뿐 어느 면에서든 카이리스보다 낮은 위치가 아니라는 정도의 상식은 숱하게 배워왔다.
문제는 내 아들들 거기 가니까 잘 좀 챙겨달라 부탁하던 르메인이 그 상식을 잠시 잊은 듯 하다는 것에 있었다. 르메인의 편지는 보고 외워 곱씹는 재미는 있었으나 확실히 유쾌하지는 않았다.
아무튼 르메인의 그런 편지를 기억하는 탓에.
'원하는 것을 가져오려면······ 나의 것을 먼저 걸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의 것이라.
존중이고 나발이고 진작부터 사람 말 하기를 집어치운 듯한 셋째 왕자가 스스로를 어떻게 부르던 그 쪽은 일단 신경쓰지 않았다. 다만 그나마 입은 참 예의바르다 생각되던 둘째 왕자가 스스로를 데블란과 동등하게 칭하는 이런 화법이 르메인이 자식 교육을 망친 결과인지 아닌지 잠시 고민을 해야 했다.
그러다 호기심이 커졌다.
그 성품이 올바르고 품위가 남다르다 했던 것이 셋째였고 성미가 사납고 기질이 좋지 않다 했던 것이 둘째였음을 상기하게 된 까닭이었다.
"재미있는 형제로구나."
잠시 기침을 하던 데블란이 짧은 감상을 꺼내자 곁에 서 있던 시종장이 고개를 숙여 보이며 입을 열었다.
"항의 서신을 보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전하."
"무엇에 대한 항의 서신을 말함이더냐."
"한낱 왕자들이 전하의 앞에서 스스로를 그리 칭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납니다. 이에 대하여 분명한 항의의 뜻을 밝히심이······."
"되었다. 그 나이에는 다 그리 크는 법이니."
데블란의 대답을 들은 시종장이 잠시 무어라 말을 하려 입을 열었으나 곧 다시 다물었다. 같은 이야기를 두 번 하지 않는 성격이며 한 번 정한 일을 번복하지 않는 사람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저는, 전하께서도 같은 생각을 하셨으리라 여겼습니다만.'
앞에 놓인 맑은 물 한 잔을 내려다보는 동안 데블란의 기억 속에 플란츠의 그 다음 말이 떠올랐다.
의도했다는 듯 바꾸어 강조한 호칭.
별 것 아닌 일이니 그저 불쾌한 일을 겪었다 생각하고 넘겨도 좋을 텐데 데블란은 그렇질 못했다.
- 상대의 패를 가져오려면, 나의 것을 먼저 걸어야지.
플란츠가 자신을 데블란과 동등하게 본 것이 아니라 데블란의 말버릇을 고스란히 읊어준 것뿐임을, 그러니 그 입에 올렸던 '나'는 플란츠 스스로를 칭한 것이 아님을 알아들은 까닭이다.
"실로 재미있는 형제다."
어느 순간 갑자기 소드마스터가 되어 세크리티아 기사의 검술을 그대로 사용한다던 셋째. 데블란의 손버릇을 똑같이 그려 보이던 둘째. 데블란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정적을 상대하던 셋째. 데블란의 말버릇을 그대로 따라한 둘째. 드러내어 체이스를 챙기던 셋째. 뒤에서 지켜보기만 하던 둘째.
하나는 가짜.
하나는 진짜.
"지켜 보면 곧 알게 되겠지."
어느 쪽이 더 흥미로울지를.
어느 쪽이 정말로 '나'를 닮았는지를.
* * *
역설.
칼날 위를 사는 세 왕자가 그나마 가장 편히 잠에 빠져들 수 있던 곳은, 역설적이게도 형제들이 모두 함께 지내는 체르밀 궁이었다.
누군가는 독이 든 차를 받고 누군가는 베개 밑에 검을 숨기고 또 누군가는 그 속에 갇혀 홀로 메말라갔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안전한 곳이 체르밀이었다.
마찬가지.
이 세크리티아에 방문한 이방인들에게 있어 가장 안전한 곳은 바로 세크리티아 왕궁이다. 어쩌면 체르밀 궁보다 더 안전할지도 모를 일이다.
데블란은, 두 왕자는 물론이거니와 이들을 따라 온 가장 말단의 기사에 이르기까지 그것이 누구든 어느 한 곳도 상하지 않도록 호위를 보아주고 음식에 독이 섞였는지 철저히 확인을 하도록 지시했다.
세크리티아를 찾은 카이리스의 손님 중 누구에게라도 탈이 생겨 두 왕자의 신상에 문제가 생긴다면 르메인의 말마따나 '마음이 아파진' 발칸이 허해진 마음을 좀 추슬러보려 이 땅에 발을 디디게 될 테니까.
두 나라가 서로 동등하다는 것이지 지닌 힘의 차이마저 없다는 뜻은 아니지 않나.
"그다지. 걱정 안 되는데."
그것을 참 잘 아는 똑똑한 플란츠는 두 번째 별관으로 안내 받아 오게 된 직후 별관 후원으로 산책을 나섰다. 보란듯이, 마법사들은 물론 호위기사들도 대동하지 않은 채로.
"이곳 국왕은 브리센이 아니지 않나."
"겁이 없다 해야 할지. 내 아버지에 대한 믿음이 과하다 해야 할지."
홀로 나와 돌아다니는 파릇한 왕자를 찾아 온 체이스가 나름의 방법으로 플란츠를 우려했다.
"······ 당신 입에서 나올 말 아닌데."
"물론 나도 카이리스 왕궁에서 홀로 돌아다니기는 했습니다만 그곳의 전하께서는 내 아버지와 다르지 않습니까."
"산책 중인 왕자에게 검을 보낼 만큼 앞뒤 안가리는 성격은 아닌 것 같아서."
이 말을 들은 체이스의 목소리가 플란츠의 머릿속으로 들려왔다.
-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제온에 심장을 맡길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의외라 여겨질 만큼 꽤 조급해하는 중이라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 알아.
그 동안 체이스 역시 마나 다루는 것을 배웠음을 눈치챘으나 그에 대해서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은 플란츠가 아무렇지 않게 곧장 대답을 전해왔다.
- 당신이 해를 입으면 전쟁은 날지언정 치유사도 오게 될 테니 그 쪽으로 마음을 먹게 될 지도 모릅니다. 아버지가 지금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양국의 원만한 관계 유지가 아닌 치유사임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 나는 내 아우님이 알아서 살려두실텐데. 당신 아버지는 알아서 살려둘 사람 없는 것 같고. 그럼 된 일 아닌가. 위험하다 생각했으면 따라나왔겠지. 내 아우님도.
누군가 플란츠를 습격해온다면 칼리안이 데블란을 잡아낼 빌미를 줄 뿐. 플란츠는 아무 해도 입지 않으리라는 소리였다.
- 내 동생을 여러모로 믿고 있는 듯 한데. 혹여 그런 생각에 미끼라도 되겠다는 심산은 하지 않길 바랍니다.
- 안해.
정원에 가득한, 이 겨울에 어울리지 않을 꽃향기에 안그래도 심기가 불편한데 긴 잔소리까지 듣게 되어 짜증이 난 플란츠가 짤막한 대답을 한 뒤 한 발을 앞서 나갔다. 그러다 발을 멈추고 다시 체이스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히나 올 일 없어. 내가 당신한테 존댓말 쓰기 전까지는."
누군가 들어도 상관 없다는 듯 꺼내진 말.
데블란이 죽기 전에는, 무슨 일이 생겨도 치유사 불러올 일은 없으리라는 말.
작게 실소한 체이스가 마주 입을 열었다.
"칼리안 왕자는 어디 있습니까."
"왜."
- 아무리 그래도 함께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의외라서. 혹여 무슨 일이 있습니까.
- 없어. 아무 일도.
이런 말과 함께 체이스가 손에 들고 있던 것을 플란츠에게 건넸다.
"직접 돌려주고 잠시 이야기라도 나누어 볼까 했는데 아무래도 어려운가보군요. 플란츠 왕자가 좀 전해주시겠습니까."
칼리안이 넘겨주었던 붉은 망토였다.
플란츠가 고개를 끄덕이며 망토를 받았다.
한동안 그런 플란츠를 보던 체이스가 다시 한 번 소리 없는 말을 건넸다.
- 헌데 이곳에 정말 올 줄은 몰랐습니다. 내 동생 말고, 플란츠 왕자와 발칸의 그 마법사까지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니까요.
통찰로도 짚어내지 못하는 것이 있다.
플란츠도 도무지 짐작하기 어려운 칼리안의 비정상적인 속내가 그렇다.
- 내 아우님이 워낙 관대하셔서.
체이스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생겼다.
그것이 꼭 앨런의 얼굴을 떠오르게 하는 바람에, 인상을 찌푸린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됐고. 왜 왔는데."
"망토 주러 왔습니다."
"말고."
- 생각이 깊어질 땐 눈을 내리뜨기도 하고. 손 끝으로 테이블을 두드립니다. 테이블이 없다면 무릎이라도.
- ······ 다른 건.
- 내기를 좋아하고. 하나의 일에 하나의 득만 보려 하지 않습니다. 사냥감이 생기더라도 상대를 탐색해 명확히 파악하기 전까지는 움직이지 않는 편이고, 차근차근 조금씩 덫으로 밀어넣기도 하지만 어느 순간 마음이 틀어지면 물어 죽이기도 잘합니다.
데블란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 모든 내용은 플란츠가 이미 다 알고 있는 부분이기도 했다. 차이가 있다면 데블란의 성향이 아니라 칼리안의 특징이라는 정도랄까.
"많이도 닮았군."
"네. 재밌게도. 참 많이 닮았습니다."
이런 말을 꺼낸 체이스가 한동안 플란츠를 들여다보다 다시 말을 이었다.
- 위험한 일에 손을 대려는 것 같은데요. 플란츠 왕자.
- 알면서 묻는 건 안 좋아하는데.
- 굳이 플란츠 왕자가 나설 일 아닙니다.
- 방금 전에 그 버릇 다 알려준 사람이 할 말 아니야.
- 위험하다 하더라도 내 동생 돕겠다는데 모르는 척 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다만 정확한 이유를 모르겠어서 묻는 겁니다. 왜 아버지가 플란츠 왕자에게까지 관심을 쏟게 하려는지.
솔직한 대답에 플란츠가 피식 웃었다.
- 내 아우님께서 잘 짖으셨으니 뒷감당 해주려고.
계획에 없던 일.
칼리안이 데블란을 죽이지 않도록 말린 대신, 칼리안에게 데블란의 관심이 지나치게 쏠리지 않게 하려고 꺼낸 행동.
손가락 하나 움직이고 말 한 마디 꺼낸 것으로 데블란의 관심도 받고 칼리안 목줄도 다시 잘 쥐게 된 플란츠를 보며 체이스가 말했다.
- 나로 인해 여러모로 고생하게 되었군요.
- 됐어. 당신 말고 내 동생 악몽 깨우려고 온 거니까.
그렇게 말한 플란츠가 칼리안에게 전해주려 건네받았던 망토를 내려다보다 문득 입을 열었다.
"심부름값."
세상에 공짜가 어딨겠나.
플란츠에게 뭔가를 가르쳐 주는 것이 비단 칼리안만은 아니었다. 참 팍팍하게 사는 동생 놈과 동생 놈의 정혼자의 관계에서도 삶의 진리 하나를 배운 플란츠였다.
"가보고 싶어하는 것 같던데."
그런 플란츠가 가리켜보인 곳을 향해 시선을 돌린 체이스가 바다에 잠겨드는 얼굴로 웃으며 대답했다.
"낮에는 어렵겠지만 밤이라면, 올라가 볼 수 있도록 조치를 해놓겠습니다."
"알았어."
첨탑.
성문 앞의 한 곳에 선 칼리안이 첨탑을 하염없이 바라보기에.
그 자리에서 무슨 일을 겪었고 무엇을 보려 했을지 알 것 같아서.
- 내가 같이 가보기에 오늘은 그리 좋은 날이 아닌 것 같군요. 대신, 술 창고의 독주들 중에 괜찮은 바질리카가 한 병 있으니 그것을 보내겠습니다. 키리에와 함께 가지고 올라가라 하면 칼리안이 좋아할 겁니다.
- ······ 말고.
당신의 옛 동생이 더 이상 예전 같지 않음을 어떻게 설명할 길이 없어서, 플란츠는 조금 복잡한 얼굴이 되어 말을 이었다.
- 도수 제일 낮은거.
설마, 하고 말을 멈춘 체이스가 오늘 하루 겪은 그 어떤 일을 마주했을 때보다 더 심각한 얼굴이 되어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 * *
작은 노크 소리.
밖에 서 있던 키리에의 노크 소리에, 가만히 눈을 내리 뜬 채 앉아있던 칼리안이 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손님이 오셨습니다, 왕자님."
그리고 키리에의 말이 이어졌다.
잠시 아무 말 없이 있다 몸을 일으킨 칼리안이 나지막한 대답을 전했다.
"들어오시라고 해."
"네."
곧 소리 없이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온 뒤 다시 문이 닫혔다.
또각, 또각.
조용한 구두 소리가 칼리안의 앞까지 이어지자 가느다란 선의 옅은 베이지색 드레스 자락이 바닥을 스쳤다.
자신을 찾아온 것이 의외였으나 참 반가운 모습이었던 탓에, 고개를 숙여 예를 보인 칼리안의 얼굴에 고운 미소가 그려졌다.
"이곳까지는 무슨 일이십니까."
칼리안의 물음을 들은 후궁 루이즈가 체이스를 많이 닮은 미소를 얼굴에 띄우며 입을 열었다.
"결례인 것을 알지만 오늘 일에 진심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어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결례라니요. 아닙니다. 고맙다 여기실 일도 아닙니다."
데블란을 대할 때와는 완연히 다른 얼굴과 목소리를 들은 루이즈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신의 맞은편을 가리켜보이는 칼리안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칼리안을 품에 꼭 끌어안았다.
이 상황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칼리안의 귀에, 속삭임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보고싶었단다."
내 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