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243화 (244/527)

제43장. 멈추지 마시고(4)

란델이 잠긴 눈으로 히나를 보다 입을 열었다.

"거두거라."

칼리안의 말이 뜬금없다면 플란츠의 말은 머리 꼬리가 없거나 그냥 다 없었고 란델의 말에는 배려가 없었다. 아무튼 어딘가 하나씩은 부족한 언어 구사력으로 서로가 형제임을 증명하고 있는 왕자들의 맏이가 하는 말을 들은 히나가 고개를 들었다.

"저희 치유사는 하던 일 계속 할 테니 신경쓰지 마시고 하실 일 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것을 보던 아르센이 이렇게 말했다.

일단 해를 끼치지 않겠다 하였으니 들여놓기는 했지만 히나의 치료까지 중단하라는 말을 들을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 까닭이었다.

이 참에 발칸이 1왕자의 말을 따라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것도 알려주면 좋고.

그런데 히나가 천천히 움직였다.

플란츠가 눈을 뜨기 전까지는 절대로 떼지 않을 것 같던 손을 거뒀다.

- 베른 경, 굳이 그러지 않아도 괜찮네.

- 반발력이 생길거예요. 저처럼 마나를 쓰시는 게 아니라서요.

란델이 가진 힘을 아직 잘 모르는 파란 머리 마법사가 히나의 말 뜻을 채 이해하기도 전에, 란델의 손 끝에 빛이 모여들었다. 그것을 본 아르센이 순간적으로 주먹을 쥐었다.

란델을, 공격 할 뻔 했다.

붉은 빛.

치유사의 하얀 빛 혹은 히나의 금빛과 완전히 다른 붉은 빛.

숲에서 만난 늑대들이 떠올라 다시 한 번 어깨가 욱씬거리는 느낌이 든 아르센이 손 끝에 모여든 마력을 감추듯 주먹을 쥐며 가까스로 흩어냈다.

그 붉은 힘 덕에 신력 뿐 아니라 살기도 잘 느끼고 마력도 느끼는 란델은 뒤에서 뭐가 모였다 사라졌는지 신경쓰지 않았다. 아르센이 말한 것처럼 그냥 제 할 일을 했다.

- 베른 경. 이게 무슨 상황인지 나는 도무지 모르겠네.

- 플란츠 왕자님 치료해주고 계시는 거예요. 색이 왜 빨간지는 모르겠는데 칼리안 왕자님이 신력의 일종이라고 말씀해주신 적 있어요.

- 아까는 아무도 못 믿겠다더니?

- 저희가 왕궁에서 제일 못 믿을 사람이 란델 왕자님이잖아요. 원래 제일 의심스러운 사람은 진짜 나쁜 일은 잘 못한다고 베로니카가 그랬어요. 의심 받을 것 알면서 직접 오셨으면 이상한 일을 하시지는 않을거예요.

이렇게 대답한 히나가 곧 눈을 감으며 휴식을 취했다.

플란츠를 치료중인 란델이 혹시라도 마음을 바꾸어 다른 공격을 하려 든다면 아르센이 잘 대처할 터였다. 그러니 지금 히나가 해야 할 일은 란델의 감시가 아니라 쉬는 것이었다.

- 자네 방금 좀 마법사 같았네.

결국 아르센은 란델의 속내를 더 고민하지 않고 그냥 두기로 했다.

란델의 치유술은 모여드는 빛의 색을 제외하면 히나의 것과 특별히 다르지 않았는데, 플란츠의 몸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힘을 불어넣고 있다는 정도의 차이만 있었다.

'손도 대기 싫어하면서 대체 왜 오셨는지.'

소리 없이 헛웃음을 지은 아르센이 시퍼런 두 눈을 시퍼렇게 뜬 채 란델이 하는 양을 계속 지켜보기 시작했다. 란델을 그냥 둔다는 것이 믿는다는 의미는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란델이 치유를 시작하고 히나가 휴식을 취하고 아르센이 두근두근해하는 시간이 어느 정도 흘렀다.

다시 눈을 뜬 히나가 란델의 치유술이 꽤 안정적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아르센은 란델이 한참동안 팔을 뻗고 있음에도 힘들어하지 않는 것에 놀랄 즈음.

아르센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란델의 손에 모여있던 힘이 사그라들었다.

잠시 플란츠를 살펴 본 아르센이 안도한 듯 말했다.

- 우리 왕자님께서 해결을 하셨나 보군.

맹세의 인.

그것이 드디어 사라진 것이다.

란델이 손을 치우자 얼른 플란츠에게 손을 올렸던 히나가, 더 이상 플란츠의 심장이 요동치지 않는 것을 확인한 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셋째가 오거든 잠시 보자 전하거라."

란델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담담하게 말했다.

그리고는 아르센이 무어라 대답을 하기도 전에 밖으로 나가버렸다. 지금 자신의 행동을 다른 곳에 말하지 말라는 등의 뻔한 소리는 아예 하지도 않은 채였다.

* * *

책임이란다.

칼리안 걱정으로 타들어가는 마음에 기름 끼얹는 르메인의 말에, 앨런이 관자놀이를 부여잡았다.

"책임질 테니 데려오라니······."

지금 왕궁 어디에 또 누가 섞여있는지 알 수가 없는 일이다. 이를테면, 무려 아르센을 죽음 직전까지 몰아갔던 제온의 기사 혹은 마법사같은 이들 말이다.

게다가 앨런이 맡고 있는 발칸은 군대였다. 뭐가 되었든 과거인지 미래인지 모를 그 언젠가에는 한 나라를 불바다로 만든 군대의 수장이 바로 앨런이었다. 앨런이 움직인다는 것은 일국의 대마법사 한 명이 움직이는 것과는 달랐다.

"무슨 생각으로 후원 화단 비료로도 못 써먹을 그런 소리를 하십니까."

아르센이 손 끝을 움찔하는 정도면 이미 세뉴강 건너편에 잘 도착해 있을 그런 분이, 날이 밝기 전에 완전히 사라질 에반 브리센 후작의 집에 왕자 한 명도 모자라 앨런까지 보내려 하다니. 대체 이게 어느 머리로 생각해 낸 개똥만도 못한 소리란 말인가.

때문에 이번에도 가차없이 르메인을 타박한 앨런이 저벅저벅 걸어 집무실 문 쪽으로 갔다.

"어디 가나?"

"아드님 데리러 갑니다."

소 새끼 말고 내 새끼 데리러 가겠다는 뜻이었으나 그 깊은 뜻은 알아먹지 못한 소가 눈을 꿈뻑이다 말했다.

"비료로도 못 써먹을 소리라더니."

"국왕 전하께서 시키시는데 다녀와야지요."

"그대가 언제부터 내 말을 그리 잘 들었다고."

"지금껏 들어 본 전하의 쓰잘데기 없는 소리 중에 그나마 몇 되지도 않는 듣기 좋은 말인데 듣지 않고 넘겨서야 되겠습니까."

카이리스 출신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앨런도 마법사인지라 복잡한 계산 다 때려치고 그냥 가겠노라 대답을 했다.

마법사란 모름지기 머리 아니라 가슴으로 일평생을 사는 이들 아니던가.

"그래도 이 쪽을 비워둘 수는 없고 전하 들춰 업고 나갔다가 두 왕자님 중 한 분이 왕궁 문이라도 닫아버리면 마음이 좀 허전하실 터이니, 일단 헤르츠 부군단장을 불러다 앉혀 놓겠습니다. 둘째 왕자님 신변은 제이아 경이 보아 드리면 될 겁니다."

르메인이 비공식적으로 왕궁 밖에 나갔을 때 왕궁 문이 닫히면 슬레이만처럼 온천이나 며칠 다녀와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르메인의 형이 머무는 곳 아래층에 르메인 방이 생길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알겠네. 그렇게 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순순히 대답한 르메인을 뒤로 한 앨런이 집무실 문을 열었다. 그리고 밖에 서 있던 마법사 한 명에게 아르센을 불러와 달라 말한 뒤 잠시 기다렸다.

앨런의 말을 들은 마법사가 자리를 떠난 직후, 앨런은 이 순간 떠올리고 있지 않았던 사람이 아르피아 궁에 들어서는 것을 느꼈다.

"혹시 늦더라도 걱정된다고 왕자님 계시는 곳에 찾아 올 생각은 말아달라 하셨습니다."

새끼 코끼리.

앨런을 찾아온 얀이 이렇게, 앨런이 또 칼리안 손바닥 위에 있었다는 말을 했다. 그리고 칼리안이 왕궁을 떠나기 전에 따로 언급한 이야기를 전했다.

"이번 일에는 발칸이 더 개입하면 안된다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이어진 얀의 이야기가 끝났을 즈음.

앨런의 심장에 묶여 있던 맹세의 인이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 * *

- 정신 차리십시오.

생각이 났다.

아니, 불현듯 떠올랐다.

그저 벽에 기대어 서서 잠시 눈을 감았을 뿐인데.

- 멈추지 마십시오.

한 번도 나에게 무엇을 하라 이야기 한 적 없었으면서 하필이면 왜 마지막 날에 그런 말을 해서, 너는.

그래서 나는.

그런 것을 너한테 약속해버려서 어기질 못하고. 내 손으로 내 팔을 끊어가면서, 그렇게 버티면서, 내가. 왜 하필 그런 말을 하고 갔느냐고 너한테 얼마나 툴툴댔는지.

'정신 차리십시오.'

해줬으면 하는 게 있었으면 평소에 말을 하지 왜 하필이면 그렇게 말하고 가버려서. 미안한데 더는 못지키겠다는 말도 못하게 해버려서. 그래서 내가 기어코 그 약속 지키려고 네 말을 얼마나 많이 되뇌었는지 너는 알까.

정신 차리고, 멈추지 않으면서. 그래. 그렇게.

다시 돌아가겠노라고.

다녀왔다 인사를 할 거라고.

'왕자님.'

내가 얼마나. 그렇게.

"칼리안 왕자님. 정신 차리십시오."

너는.

알까.

'키리에.'

너는.

그래.

"······ 키리에."

너는, 이번에도, 나를.

부르는구나.

* * *

더 고쳐야 할 것이 없었다.

플란츠는 이제 그저 잠들어 있는 채였다.

사실 칼리안은 혹시라도 맹세의 인을 없애지 못할 상황을 대비하여 플란츠를 깨우지 말라 했었다. 그 말을 레릭에게 전해들은 아르센은 칼리안의 말 뜻을 알아서 잘 해석하고 알아들었다. 그래서 더 이상 플란츠에게 마력을 쓰지 않았다.

그러던 중 니들렌을 대신 보낼테니 아르피아 궁으로 오라는 앨런의 말이 전해졌다. 치료실 밖 여기저기에 호위를 위한 마법사들이 있었으므로 아르센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벗어났다.

이런 이유로 잠시동안 플란츠 옆에 혼자 있게 된 히나는 플란츠에게 다시 치유력을 불어넣고 있었다.

더 고칠 것은 없었지만 그래도.

괜히 불안해서.

혹시나 일어나지 못하는 것이 어떤 문제가 있어서는 아닐까 걱정이 되어서 계속 손을 떼지 못했다.

그렇게 계속 플란츠를 살피며 시간이 조금 더 지나고 난 뒤에야 비로소,

"왜."

비로소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죽을 뻔했다 일어나도 말 짧은 것은 여전한 사람이, 옆에 있던 이가 히나임을 상기하고 조금 더 말을 보탰다.

"더 고칠 것도 없는데."

고개 돌려 수어를 보기에 힘이 들 것 같아서, 히나는 아르센이 놓고 간 팔찌를 플란츠의 손목에 채워주며 대답을 했다.

- 고칠 것은 더 없는데 일어나지 않으셔서 불안하기도 하고······ 혹시 다른 곳에 이상이 있나 걱정이 되어서요.

머릿속으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듣던 플란츠가 천천히 일어나 앉으며 살짝 눈을 감았다 떴다.

일어났고, 눈 떴으면, 걸을 수 있다.

그리고 일단은 상황 확인이 먼저다.

- 칼리안은.

- 아직 안 오셨어요.

속박이 풀렸다는 것이 곧바로 느껴졌다.

'······ 미친 새끼.'

그렇게 하리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다지만.

미친 동생 놈이 정말로 뛰쳐나갔다.

또.

살려놨다.

잠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짧은 한숨을 쉰 플란츠가 비틀비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누워 하루 이틀은 쉬어야 한다 말해야 할 히나는 그 대신 다른 말을 했다.

- 아르피아 궁에 마나실 군단장님이랑 헤르츠 부군단장님 계세요. 같이 가드릴게요.

플란츠가 고개를 돌려 히나의 얼굴을 한참동안 쳐다봤다. 거울이 없으니 지금 자신의 몰골이 어떤지는 몰라도 지금의 히나보다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을 하다 그렇게 됐는지 모를 플란츠가 아니었다.

그러니 이제 쉬라는 말을 해야 할까.

왜 그렇게 무리를 했느냐는 말을 해야 할까. 아니면.

그것을 한참 고민하는 플란츠를 향해 히나가 먼저 말했다.

- 네에. 제가 플란츠 왕자님 살려 놓느라 고생 많이 했어요. 힘도 많이 들었고 신경도 많이 썼고 알고 보면 화도 많이 났어요. 저한테 고맙고 미안해하시는 것도 아니까 못하시는 말 굳이 안하셔도 돼요. 혼은 나중에 낼 거고요. 일단 급한 것 먼저 하시고 다시 봐요.

쓸데 없는 데 시간 낭비하지 말라는 소리였다.

그리고 청천벽력같은 말 하나를 툭 전했다.

- 그리고 란델 왕자님께서도 플란츠 왕자님 치료하신다고 많이 애써 주셨어요.

그 의외의 말에도 플란츠는 놀라지 않았다. 단지 옮기려던 걸음을 잠시 멈췄을 뿐.

- 내가 왜 이렇게 됐는지 전해들으셨나보군.

- 네. 알고 계시는 것 같았어요.

플란츠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에는 짜증 가득한 얼굴로 다시 발을 움직였다.

- 그래.

이번에 플란츠는 형제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 최선의 방법을 택했다.

란델이라면 그것이 자신만을 위한 친절이 아니었다는 것 정도는 알았겠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빚을 지기 싫다는 의미일 것이다.

'어차피······ 갚으시라 할 생각도 없었습니다.'

원치 않은 도움을 받은 것에 대해 원치 않을 도움을 주고 간 형제의 뜻을 잘 알아들은 플란츠가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 * *

기사 한 명이 아이를 안아들었다.

자신이 어느 집안의 핏줄인지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 같은 녹빛 머리의 여자아이.

후작저에 에반 브리센과 아이 외의 다른 브리센 가문 사람은 없었다. 그레이는 칼리안이 다시 부를 때까지 변경백령에 돌아가 있는 상태였고 레넌은 수도 안에 자신의 저택이 있었다.

그래서 기사는 연고 모를 그 아이가 깨기 전에 일단 조심스레 안아들고 피 냄새 가득한 곳에서 빠져나갔다. 함께 들어온 다른 기사들은 여기저기 널브러진, 하나같이 같은 곳에 상처를 입고 죽은 시신들 사이에 혹시 있을지 모를 생존자를 찾으려 수색을 했다.

그렇게 분주한 기사들 사이로 물빛 머리의 기사 한 명이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채 누군가를 조심스레 눕혔다.

"제가 히나를 데려오지 못했습니다."

눕기라도 하시지.

앉기라도 하시지.

왜 이렇게······.

"제가 궁으로 모시겠습니다. 제가 모실테니, 정신 잃지 마시고 조금만 버티십시오."

선 채로, 자신이 흘려낸 피웅덩이 속에 선 채로 벽에 기대 있었다.

피를 쏟아내며 서 있었다.

그런 칼리안을 부축해 일단 깨끗한 곳에 눕혔다. 그랬음에도 바닥에 댄 키리에의 한쪽 무릎이 어느새 축축하게 젖었다.

키리에가 급한대로 걸치고 있던 로브를 찢으려 했다.

"왕족 몸에 그런 것 두르면 체포됩니다."

그때, 이런 말과 함께 깨끗한 붕대 두 개가 눈 앞에 들이밀어졌다.

생사가 오고가는 마당에 그런 것이 죄가 되겠냐만은, 나름대로 키리에를 안심시키기 위해 하는 말임을 알았다. 그래서 키리에는 붕대를 건넨 드미레아에게 감사의 의미를 담아 고개를 숙여보인 뒤 그것을 받았다.

축복의 힘이 있으니 이대로 안정을 취할 수 있을 상황이면 붕대고 뭐고 그냥 두는 것이 낫겠으나.

"바깥 상황은 어떻습니까."

"대치중입니다."

애석하게도 그렇지 못했다.

레넌의 사병이 왔다.

생각보다 너무 빨리 왔다.

- 가능한 빠르게 해결하고 바로 돌아 올 생각이지만, 형님 상태를 브리센 후작도 알고 있을 거야. 어쩌면 브리센 자작이나 다른 귀족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을 수도 있어.

플란츠가 쓰러지고, 카에라의 기사를 공격해 잡은 뒤 키리에를 부르고, 플란츠의 상태를 확인한 이후에 바로 밖으로 뛰었다. 어느새 재빨리 레이븐을 데리고 나온 얀으로부터 고삐를 전해 받은 칼리안은 쓰러진 기사를 제압한 키리에를 만났다.

- 키리에. 너는 형님 모시고 빌헬름 관으로 가. 자세한 건 형님의 시종이 전달할거야. 방금 잡은 저 놈은 발칸에 넘겨. 그리고 지그프리드로 가서 지금 상황 알려줘. 나머지는 드미레아가 알아서 결정할거야. 얀. 너는 밖으로 나가지 마. 대신 스승님께서 분명히 나오시려고 할 테니 그러시지 못하게 해줘. 이 일은 왕자와 귀족의 자리 싸움으로 끝나야 해. 내전이 되어선 안돼.

그렇게 상황을 전달한 칼리안이 먼저 출발했다.

그리고 드미레아에게 내용을 알린 키리에가 저택을 찾았을 땐 어느새 레넌의 사병이 모여들고 있었다.

아직 칼리안을 찾기 전이었다.

'그냥 다 죽여 없앨까. 가능할까.'

그들을 지켜보던 키리에가 이런 고민을 하고 있을 즈음.

드미레아가 기사들을 이끌고 왔다.

칼리안의 기사단을 보낸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사병을 이끌고 직접 찾아왔다. 와주었다.

그 덕에 곧바로 저택에 들어오게 된 키리에가 이렇게, 살아있는지 알 수 없을 모습으로 서 있던 칼리안을 찾아냈다.

"길을 내 드릴 테니 왕궁으로 먼저 가십시오. 저들은 우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창 밖에 어른거리는, 레넌의 사병들이 만들어낸 불빛을 보던 드미레아가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칼리안의 상처를 싸맨 키리에가 칼리안을 부축해 등에 업는 것을 도왔다.

"감사합니다."

"감사할 일 아닙니다."

칼리안의 기사들만 보호해주기로 했던 것을 치우고 직접 나서준 것에 대한 감사 인사에, 드미레아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답했다.

"지그프리드는 지키는 것을 가장 잘 합니다."

그렇게 지켜내서 왕이 되든 말든.

옹립이고 뭐고 이제 다 모르겠고.

내 오라버니가 지키려고 하는 사람 그냥 나도 같이 지키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러니 내 정혼자도 내가 지킵니다."

숙고의 끝에 단단히 선 드미레아가 살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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