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242화 (243/527)

제43장. 멈추지 마시고(3)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많이 닮아있었다.

너무 닮아서, 언젠가의 플란츠가 떠오른 바람에 갑작스러운 혼란이 찾아들었다.

그 혼란 때문에 말도 안되는 혼돈을 겪고 말았다. 에반의 검을 머릿속에 집어넣느라 예민하게 열어두었던 기억이 뒤섞였다.

순식간에, 혼돈 속에 떠오른 또 다른 기억의 편린이 찾아들었다. 플란츠에 대한 기억 말고 칼리안이 가지고 있던 베른의 기억이 올라왔다.

- 그 아이가 아버지께 무슨 방해를 하였습니까.

- 이미 휘두른 검에 이유를 물을 필요가 있겠느냐.

- 이미 죽여 없앴다 해도 이유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 이제 와서 그것을 알면 달라지는 일이 있느냐.

- 대답 안하시면 저기 서 있는 호위부터 그 아이와 똑같이 만들어놓고 다시 질문할 겁니다. 그 아이가 아버지께, 무슨 방해가 되었습니까.

- 지난 달에 네가 다녀왔던 곳의 후계자니라.

후계자. 그리고 어린아이.

겨우 그것을 생각했을 뿐인데.

막을 새도 없이 기억 속의 한 때가 머릿속을 잠식해버렸다.

- 그래서 너를 다시 보냈다. 후환은 미리 없애두어야 하지 않겠느냐.

- 고작 그런 이유 때문에······.

- 고작이라니. 그 아이를 그대로 두었다가 너처럼 사납게 자라면 어찌하려고.

갑자기 나타난 저 아이와 왕궁에 자빠져 있을 어떤 망할 놈이 닮아서. 그리고 하필이면 저 아이와 비슷한 나이였을 또 다른 어린아이에 대한 기억이 떠올라서.

숨을 한 번 들이킬 만큼도 되지 않을 짧은 시간이었으나, 분명 시선을 빼앗겼다. 생각이 많으면 안 된다고 그렇게 말을 해왔으면서도 생각을 했다.

그리하여.

그 생각이 만들어낸 찰나의 틈. 그것을.

- 푸욱!

에반은 놓치지 않았다.

"······ 하."

이······.

망할 집안 같으니.

이 놈이나 저 놈이나 죄다 파릇파릇하니까.

잠깐······ 헷갈렸잖아. 내가.

"환장하겠네······."

풀밭이야 뭐야.

* * *

아무래도 너무 늦는 것이 불안하여.

도무지 자리에 앉아있을 수가 없으니 이를 어찌해야 하나.

에반이 죽으면 앨런의 심장에 걸린 맹세의 인도 함께 풀릴 터였다. 그러니 굳이 이렇게 창을 보지 않더라도 상황이 끝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가에 선 앨런의 눈이 창 밖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서성이는 발걸음이 창문 앞을 떠나질 못했다.

올 때가 되었는데.

'칼리안.'

르메인의 곁을 떠날 수도 없었다.

칼리안의 스승이었으나 앨런은 발칸의 군단장이었다.

왕궁 수비가 줄어든 틈을 타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으니, 아무리 마법사들이 있다지만 르메인의 곁에는 일단 앨런이 있어야 했다. 이성적으로는 알고 있었다.

"백작."

아무 말 없이 소파에 앉아있던 르메인이 앨런을 불렀다.

앨런이 가만히 고개를 돌려 자신을 불러세운 이를 쳐다봤다.

"나 역시 더 기다리기에 힘이 드니 그대가 다녀왔으면 좋겠는데."

그저 소파에 앉아있을 뿐 마음만은 앨런과 같았던 르메인의 시선 역시 창 밖을 향하고 있었다.

"별 일 없을 겁니다."

당장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을 지금까지 수천 번 억누르면서, 왜 이 곳에 있어야 하는지를 수천 번 생각하면서, 다시 한 번 창 밖을 확인한 앨런이 조용히 대답했다.

그런 앨런을 가만히 보던 르메인이 말했다.

"가서 데려와주게. 그대가 무엇을 하든 내가 책임을 질 테니."

부탁을 했다.

카이리스의 국왕이 발칸의 군단장에게.

무능하기만 했던 남자가 대마법사에게.

칼리안 아버지가 칼리안의 아버지에게.

* * *

하.

헛웃음인지 헛숨인지 모를 소리가 한번 더 새어나왔다.

"어린애 앞에서······ 못하는 짓이 없네."

뚝, 뚝, 뚝.

바닥에 끝이 닿은 검붉은 검과 같은 빛의 굵은 핏방울이 점점이 떨어져 내린다.

복부 한 가운데에 깊숙이 박힌 날붙이를 살짝 내려다 본 칼리안이 자신의 검을 쥔 손에 힘을 줬다. 아주 잠시 한눈을 팔았음에 대한 대가 치고는 꽤나 아픈 것을 선사한 에반이 답했다.

"말했잖나. 이 곳에서 못 나간다고."

칼리안은 에반의 말에 반응하지 않았다.

속을 헤집어 놓은 검에서 시선을 뗀 칼리안이 멀찍이 서있는 녹빛 눈의 어린아이를 보며 예쁜 웃음을 지었다. 지금 상황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꿈 꾸는거야."

꿈이라고 생각해.

[슬립]

"악몽이니까······ 기억하지마."

- 털썩!

크게 벌어진 눈으로 에반과 칼리안과 에반의 손에 들린 검과 그 검에 꿰뚫린 칼리안을 보던 아이가 바닥에 엎어졌다.

누구인지도 잘 모를 그 아이가 잠든 것을 확인한 칼리안은, 그제야 온 몸을 보호하던 오러를 모아 에반의 검이 더 이상 몸 속으로 들어오지 않도록 막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에반은 칼리안의 몸에 박혀있던 검을 비틀어 뽑아냈다.

- 후두둑!

상처를 막고 있던 검이 사라졌음에, 한 웅큼의 핏덩이가 그대로 바닥에 쏟아졌다.

순간적으로 칼리안의 몸이 휘청였다.

에반의 두 검이 칼리안의 목과 심장을 향해 휘둘러졌다.

- 카아앙!

칼리안이 가까스로 검을 세워 들고 에반의 공격을 막았다. 그리고 웃었다.

인상을 찌푸리던 에반이 바닥을 박찼다. 어느새 칼리안이 바람을 일으키며 달려들고 있었다. 방금 전 자신의 몸에 무엇이 들어왔다 나갔는지 잊은 사람처럼.

에반이 심장을 노려오는 칼리안의 검을 다급히 몸을 돌려 피했다. 아니, 피하려 했다.

생각한 것 이상의 빠르기로 찔러 들어오는 검붉은 공격을 모두 막지는 못했다. 칼리안의 검이 몸을 비트는 에반의 왼쪽 심장 위에 깊이 갈라진 상처를 냈다.

- 촤아악!

에반의 상처에서 터져나온 핏방울이 복도 벽에 점점이 흩뿌려졌다. 뚝뚝, 선홍빛의 핏방울이 바닥까지 흘러내렸다.

- 타앗!

그 깊은 상처로부터 오는 아픔에 익숙해질 새도 없이, 칼리안의 발이 지면을 박차는 것이 보였다.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왼쪽으로 공격하기를 미룬 에반이 오른손에 들려있던 검을 들어올렸다.

몸을 날리던 칼리안이 툭, 하고 에반의 검 끝을 밟으며 다시 뛰어올랐다.

칼리안의 검이 조금 더 빨랐던 탓에 에반은 검을 든 자세 그대로 몇 걸음을 다급히 물렸다. 멀찍이 물러나려 했으나 좁혀진 거리가 쉽게 벌어지지 않았다. 날카로운 통증이 계속하여 등줄기를 따라 머리를 흔들어댔다.

'대체 저 놈은!'

에반이 입은 상처가 깊었다.

칼리안에게 준 상처는 치명타였다.

굳이 눈으로 보지 않아도 상처의 깊이가 다를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하는 짓만 보면 칼리안의 상처가 훨씬 경미한 듯한 착각을 일으키는 것이다.

- 휘이익!

짧은 도약으로 에반에게 다가온 칼리안이 검을 휘둘렀다. 에반 역시 잘 움직여지지 않는 팔을 강제하며 대응했다.

오른손에 들린 검을 가로로 베어냄과 동시에 왼손의 검을 틀어쥐고 내리찍었다. 위에서 짖쳐드는 검을 쳐낸 칼리안이, 움직이는 방향 그대로 칼을 계속 휘둘렀다. 빠르게 베어 들어오던 검이 바닥을 향해 내리쳐지며 방향을 잃었다.

- 카아앙! 카강!

오히려 더 거세진 공격.

명백히 달라진 검붉은 검의 움직임에 에반의 자세가 조금씩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다시 집중하여 칼리안을 상대하던 머릿속도 조금씩 헝클어지기 시작했다.

- 카아앙, 캉, 카앙!

뚝, 뚝, 뚝.

시뻘건 속을 드러낸 에반의 상처에서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검은 옷 때문에 잘 보이지 않는 칼리안의 상처에서 핏줄기가 쏟아져내렸다. 검은 옷이 더 짙게 젖어든지 오래였다.

한 번을 휘청이고 다시 몸을 바로 세운 칼리안이 버릇처럼 입을 열었다.

"아, 맞다."

여유롭던 모습은 어디가고 어느새 숨을 몰아쉬고 있던 에반이 칼리안을 쳐다봤다.

"아까 내가 눈치 챈 이유를······ 제대로 말 못했는데."

이 와중에 대체 무슨 말을 한단 말인가!

자신에게 상처를 내 놓은 이의 유언을 들어줄 마음은 조금도 없던 에반이 인상을 찌푸리며 발을 내딛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저 놈을 죽여 없애야 되겠다는 마음 밖에는 드는 것이 없었다.

- 쉬이익!

깊이 베인 쪽의 팔을 더 쓰지 않아도 되겠다 여겼는지, 에반은 오른손에 들린 검만 칼리안에게 뻗어냈다.

그것을 보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난 칼리안이 잡고 있던 검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바닥을 향해 양 팔을 떨구듯 내리며 다시 움직였다.

칼리안의 모습이 여지없이 사라졌다.

피인지, 오러인지, 이제는 구분도 되지 않는 것들이 후두둑, 바닥에 흩뿌려진다.

서늘한 기운이 뒤에서 뻗어나오는 것을 느낀 에반이 빠르게 몸을 틀며 검을 들었다.

- 우우웅!

- 우웅!

두 번의 소리.

원하는 형태로 언제든지 바뀌는 검.

이번에는 장검 대신, 단검 대신, 방패 대신, 또는 몽둥이나 루시 장난감 대신.

평소의 것보다 더 얇은 검이 칼리안의 손에 들려 있었다.

에반이 두 개의 검을 교차시켜 칼리안의 검을 막아섰다.

- 카아앙!

에반이 칼리안의 공격을 막았다.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검붉은 검이 허공에서 멈춰섰다.

- ······ 콰직!

하나만, 막았다.

"안, 쓰는, 거지."

순식간에 형태를 바꾼 두 자루의 검이 칼리안의 양손에 하나씩 들려 있었다. 하나는 막혔고, 또 하나는.

"······ 못 쓰는 게, 아니라서. 나도."

에반의 심장을 정확히 관통한 두 번째의 검붉은 검을 바라보며 칼리안이 말을 맺었다.

천천히.

에반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칼리안을 쳐다봤다.

선연한 붉은 빛.

그 날에 입은 붉은 망토가 함께 생각났다.

- 내가 누구의 아들인지.

더 오래전의 어느 날에 보았던, 지금 흘러내리는 피와 썩 닮은 빛의 붉은 머리카락이 떠오른다.

"너······."

비슷한 빛을 띤 눈으로 에반을 바라보는 칼리안의 얼굴에 싸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 파악!

하고 싶은 말을 하겠다는 것이었지 대화를 나누겠다는 소리는 아니었으므로, 칼리안은 손에 들린 검을 흩어버렸다.

더 이상 에반의 눈을 마주 보고 설 필요도 없었고 그의 말을 들어 줄 이유도 없었으니까.

"그러게. 가르쳐 주겠다고 하지, 왜 그랬어."

······ 그러지 말지.

- 털썩.

지지할 곳 잃은 에반의 몸이 힘을 잃고 무릎을 꿇었다.

칼리안을 바라보던 눈동자가 살짝 움직였다. 칼리안의 양 손에 들려있는 검을 한 번씩 쳐다보다가 그렇게.

- 쿠웅!

차디찬 바닥에 무너지듯 쓰러졌다.

눈을 감았다.

그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던 칼리안이 긴 숨을 내쉬었다. 길고 긴 숨을 한참동안 내쉬었다.

- 사아아······.

곧이어, 흩어지는 두 종류의 마력이 느껴졌다.

조금 오래 된 것과 더 많이 오래 된 것.

플란츠와 앨런이 에반과 맺었던 맹세의 인이 사라지는 것을 분명히 느낀 칼리안이 희미하게 웃었다.

"지긋지긋했네."

비틀, 한 걸음을 옮긴 칼리안이 에반의 시신 근처에 떨어져 있던 검은 조약돌을 주워 품에 넣었다.

그리고 다시 비틀, 몇 걸음을 더 옮겨 조금 전 벗어두었던 로브를 집어든 뒤 이미 숨이 끊어진 에반의 곁으로 돌아왔다. 잘 움직여지지 않는 팔을 들어 그 검은 천을 펼쳤다.

- 펄럭!

굳이 그렇게 자신의 로브로 에반의 시신을 덮었다.

후작에 대한 예의, 혹은 오랫동안 싸움을 나눈 기사에 대한 예의는 아니었다.

저 복도 끝에 잠들어 엎어진 아이를 다른 곳으로 옮겨놓고 싶었으나 그럴 상태가 되지 못했던 탓이었다. 도무지 저 아이를 어디 둘 수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에반의 시신만 가렸다.

"내가 배려해 줄 입장은 아닌 것 같지만."

그래도.

아무것도 모를 저 아이가, 이 곳을 정리할 이들이 오기 전에 깨어나서 보는 것이 최소한 제 혈육의 시신은 아니었으면 해서.

앞으로 어디에서 어떻게 살지는 몰라도.

악몽이라 믿은 것이 현실임을 벌써 깨닫기에는 너무 어려서. 그건 조금 가혹하니까.

- 뚝, 뚝, 투두둑.

숙였던 허리를 펴니 검붉은 피가 다시 한 번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플란츠······ 이 풀대가리."

어둠 가득했던 창 밖에 아른아른, 불빛이 모여드는 것이 보였다. 그것이 무엇인지 생각을 할 수가 없어서 칼리안은 그냥 계속 발을 움직였다.

복부의 상처를 감싸쥔 칼리안이 비틀비틀 발을 옮기다가, 결국은 멈춰서서 벽에 몸을 기댔다.

"원수같은 형님 같으니······."

칼리안의 심장에 묶인 맹세의 인은 여전했다.

그러니, 연두색 완두콩은 아직 파릇파릇하다.

망할 놈.

말 안듣는 데 도가 튼 새끼.

그래도 설마 또 어디가서 심장 팔고 오지는 않겠지.

그러지만 않으면.

- 투두둑, 투둑.

아무렴.

네 놈이 고양이보단······.

오래 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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