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장. 그 심장(2)
칼리안은 늘 그렇게 생각했다.
일을 하나 벌이면 그에 대한 이득은 둘 이상이어야 한다고.
쏟아붓는 정신력과 낭비되는 체력이 있는데 그 정도는 되어야 셈이 맞지 않겠나. 고양이 브로치 하나로도 얻은 것이 그리 많은데 고양이 한 마리라면 말해 무엇할까.
입 밖에 꺼내두기 마뜩찮은 사과의 말도 대신하고, 지키며 사는 법도 배우게 하고. 거기에 더해 하나 더.
"내 형님께서 워낙 똑똑하신지라······."
에메랄드 깨뜨린 일, 추숭식 날 오전에 그레이가 란델을 찾아온 일. 더 거슬러 올라가 칼리안이 드미레아에게 티아라와 비슷한 장신구를 씌운 일, 에반이 레넌을 되꺼낸 일, 숲에서 칼리안이 앨런과 대련했던 일 등등.
똑똑한 플란츠가 혹시 그 모든 것들 중 단 하나라도 생각을 할까봐.
살짝 고개를 움직여 플란츠 무릎 위의 새끼 고양이를 본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덕분에 생각까지 참 많으신 형님께 부족한 동생이 어떻게 도움을 드려야 할까 고민을 많이 했는데 여러모로 잘 됐다 싶네요."
"사람 말이 부족하시기는 하지."
사람 말이 부족한 놈과 그냥 아예 말이 부족한 놈 중에 어느 쪽이 더 문제가 큰지 재어보던 칼리안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유일하게 자신있던 것마저 부족하다 하시니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무 말씀을 안하면 되겠는데."
생글생글.
어여쁜 웃음이 하얀 얼굴에 활짝 피었다.
"싫은데요. 저도."
짤막하게 대꾸한 칼리안이 손가락을 올려 플란츠의 심장을 가리켜 보이며 계속 말했다.
칼리안 일생일대 가장 힘든 고민이 바로 루시 이름짓기 아니었던가. 그러다 결국 삶은 완두콩이 이름을 지었지만 아무튼.
"심장 쇠약하신 형님께서는 다른 고민 마시고 고양이 이름이나 생각해주세요."
물론 텐실 왕세자의 조사 자료를 쥐어주며 중간에 멈추었던 텐실에 대한 확인을 계속 해보라 말했지만, 그리고 지금 발칸의 일을 엄청나게 늘려 두었지만, 그래도 혹시나 생각을 할까봐.
이미 내 놓은 심장 제 손으로 또 쥐어 뜯을까봐.
그러지 않도록.
"고양이 이름도 정하시고, 앞으로 무슨 색 옷을 입어야 하는지도 고민하시고, 당장 급해진 고양이 털 떼는 마법 배우시려면 마력 느끼는 것도 열심히 연습하시고. 나중에 나가서 고양이 잘 키우시려면 검술도 열심히 수련하시고. 그 정도만 하셔도 좋겠네요. 지금은."
플란츠가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무슨 일을 해결하려 저러는지 알 것 같아서 그에 대해 더 생각하지도 않았다. 자신을 얌전히 모셔다 두고 또 한 발 앞으로 나가려는 심산임을 알았음에도 이번에는 싫다고 하지 못했다.
대신, 그래도 고양이 이름을 지은 뒤에 선물해주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나마 남아있는 세심함을 박박 긁어모아 히나한테 쏟아붓는 동생 놈이라면 이번에야말로 나비라고 지었을 것이 분명하지 않나.
······ 사과라거나.
"알았어."
그러니 지금은 시키는대로 조용히 고양이 이름이나 고민해야지.
"말 잘들어주시니 좋네요. 편하고."
"가."
"네."
고양이 두 마리 때문에 꼼짝 못하는 플란츠를 그렇게 놔둔 채로, 오늘도 바쁘게 고민하고 움직여야 할 칼리안이 자리에서 발딱 일어났다.
그리고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예를 보인 뒤 제 방으로 돌아갔다. 언제나 빠르고 편리한 테라스 창문 통해서.
금세 비어버린 맞은편 자리를 멀뚱히 쳐다보며 되돌아온 고요함을 만끽하던 플란츠는, 다시 한동안 가만히 있다가 푸딩을 한 스푼 떠서 입에 넣었다.
- 지키는 것도 배워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우유가 가득 들어간 부드러운 푸딩에서 딸기 향이 났다.
단 냄새를 맡았는지 새끼 고양이가 테이블 위로 머리를 내밀어보려고 부단히도 애를 썼다. 조그만 잿빛 머리가 쏙 올라오더니, 잠시 뒤에는 새하얀 솜방망이같은 루시 앞발이 쑥 올라와서는 잿빛 머리를 꾹 눌러 내렸다.
"애오옹!"
그건 먹는 거 아니야, 라고 가르쳐주듯이.
그러더니 답답해하는 새끼 고양이를 다시 끌어안고 재우기 시작했다. 세상에서 제일 편한 플란츠의 무릎 위에서.
"무거운데."
그런 모습이 참 평화롭고 무겁다.
어여쁘면서 무겁고 귀여우면서 무겁다.
숨 쉬고 심장이 뛰는 작은 놈들이 둘이나 무릎 위에 올라있으니 그 무게가 검 만큼이나 무겁다.
그리 무거운 것이 어찌나 신기하던지.
선선한 바람결 타고 드는 이런 생각에 피식 웃던 플란츠가, 무언가가 떠올랐다는 듯 짧은 소리를 냈다.
"······ 아."
망할 동생놈.
고양이 털 안 떼주고 그냥 갔다.
* * *
계란 한 알.
진짜 한 알.
"어제 사드리려고 했는데 연회가 생각보다 늦게 끝났습니다. 계란 파는 곳이 없더라고요."
딱 한 알.
"그래서 눈 뜨자마자 사 왔습니다, 협회장님."
"발칸 마법사들은 아침부터 집 앞에 찾아와서 일단 어디든 끌고가는 것이 취미인가봐."
언젠가 앨런에게 비슷하게 끌려와서 교장 자리 하나 얻게 되었던 에우리아가 이번에는 계란 하나를 얻게 되었다.
에우리아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기 어려운 보랏빛 눈으로 하얀 계란을 뚫어져라 보다가 술잔에 가득 따라진 히몰리카를 한 입에 털어 마셨다. 문을 일찍 연 것인지 아직 안 닫은 것인지 모를 어느 술집에 들어와 아르센과 마주앉은 채였다.
잠이 덜 깬 덕분에 아르센 튀기는 것은 잊어버리고 일단 따라온 것이 후회스러워서, 보랏빛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 에우리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백작님께서 내가 계란 사오랬다고 그러셨어?"
"군단장님께서 제가 계란 안 드린 것을 아십니까?"
"어. 내가 말했어."
"왜요?"
"그냥. 말하면 안돼?"
"아닙니다. 하셔도 됩니다."
어쨌거나 앨런이 아르센에게 말을 전한 것은 아닌가보다.
하긴, 말을 전했으면 이 아침에 저 꼬맹이랑 계란을 앞에 두고 히몰리카나 쭉쭉 들이킬 일은 없었을 테지.
맞은 편에서 탄산수 홀짝이던 아르센이 계란을 가리켜보이며 말했다.
"아무튼 저는 사드렸습니다."
"그래. 사왔네."
"네, 계란."
"어. 계란."
테이블 위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새하얀 계란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에우리아가 큭큭거리며 웃었다.
"너 진짜 또라이구나."
진짜 계란을 사올 줄이야.
그것도 딱 한 알을.
이름보다 익숙한 것 같은 또라이 소리는 아예 귀에 들어오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별 대수롭지도 않은 말이라는 듯 고개만 끄덕인 꼬맹이 또라이가 출근 직전에 안주도 없이 히몰리카를 들이키고 있는 대장 또라이를 보며 말했다.
"안주 하십시오. 익혀달라고 하겠습니다."
"그냥 둬."
"날로 드시게요? 저희 이제 날 것 함부로 먹으면 안 되는 나이인데요. 제가 얼른 익혀달라고······."
"둬. 계란 대신 너 굽기 전에."
"네. 두겠습니다."
"병아리 만들거니까."
"네?"
"그냥 두라고."
"네. 두겠습니다."
겁대가리 안잃어버리고 얌전히 대답한 아르센이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더니 멀찍이에 멍하게 앉아 있던 점원을 찾아가 무언가 말을 전했다.
얼마 뒤, 아르센 대신 노릇노릇 잘 튀겨진 닭 한 마리와 아르센 대신 노릇노릇 잘 구워진 감자 세 알이 테이블 위에 올려졌다.
맛 좋은 향을 내는 음식들을 흐뭇하게 보던 아르센이 말했다.
"드십시오. 오늘은 안 얼리겠습니다."
그리고는 탄산수 들어있는 유리잔을 톡 치며 싱긋 웃었다. 그 꼬락서니가 너무 웃겼던 에우리아는 끅끅거리며 웃었다.
곧 에우리아는 감자 한 알과 이 아침에 절대 안 넘어갈 듯한 튀긴 닭 한 조각을 나름대로 맛있게 먹어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론 히몰리카 한 병도 싹 비운 채로.
"더 안드십니까?"
"아침 먹었어."
"아침 드시고 또 드신 겁니까?"
"또 먹지, 그럼. 시켜주는데 안 먹나."
대충 대답한 에우리아가 주섬주섬 품을 뒤졌다. 계산을 하려는 모양새였으므로 아르센이 얼른 말했다.
"제가 사 드리는 겁니다, 협회장님. 계란 잊어버린 것 죄송해서요."
"됐어. 급여도 없는 놈이 사주는 거 먹으면 찝찝해."
"저 급여는 없어도 돈은 많습니다. 왕자님께 용돈 받거든요."
"자랑이다."
그 말에 아르센이 아주 뿌듯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시키는대로 잘 부수고 자존심 세웠더니 급여 없어지고 용돈이 늘었습니다."
"······ 너 진짜 카이리스 마법사의 가장 우수한 표본인 거 같다."
"제가요?"
"어. 또라이가 아니라 상또라이였어."
"아. 그런 말 많이 듣습니다."
"자랑이다."
성의라고는 눈을 씻고 쳐다봐도 찾아볼 수 없을 말로 대답한 에우리아는, 돈 많다는 아르센을 싹 무시한 채 점원을 불러다 계산을 했다.
"용돈이 얼마든 내 앞에서 돈 자랑 하지 마."
칼리안에게 용돈을 얼마나 받는지는 몰라도 직업이 세 개라 급여도 세 번을 받는 자신만 할까.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하얀 계란을 들어 자신의 공간과 연결된 작은 가방 한 구석에 잘 넣은 에우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술집 밖으로 나갔다.
얼른 따라 나온 아르센이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를 내려다보는 에우리아를 향해 물었다.
"많이 늦으셨습니까?"
"어. 바로 가야돼. 왜?"
"숲에서 돌아온 뒤로 처음 뵙는데 아쉬워서요."
"아쉽기는."
그게 아쉬울 놈이 이 시간에 사람을 끌고 오나 싶던 에우리아가 아르센을 잠깐 쳐다봤다. 그러자 아르센이 숲에서 다쳤던 어깨를 가리켜보이며 다른 질문을 했다.
"그런데 어깨 괜찮은지는 안 물어보십니까?"
"다 나은 거 보이는데 뭘 물어봐, 입 아프게."
"숲에서 돌아온 뒤로 처음 만나는데 걱정하셨는지 궁금해서요."
에우리아가 아주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곧 대답했다.
"했어."
아르센이 시원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괜찮습니다, 협회장님."
"그래."
그렇게 대답하고 나니 더 해야 할 말이 생각나질 않는다. 때문에 잠자코 선 채로 아르센의 파란 머리를 한참 쳐다보던 에우리아가 입을 열었다.
"다음에 볼 땐 꽃 사와. 보라색 꽃 싫어하니까 다른 색으로."
다들 보라색 사오더라고. 식상하게.
중얼거리며 덧붙인 에우리아는 대답 못하고 서 있는 아르센을 내버려 둔 채로 기다리고 있던 마차에 올랐다.
"진짜 늦었어. 간다."
그리고는 간단한 인사만 한 뒤 휙 가버렸다.
파란색 마법사 얼굴이 빨갛게 변했다.
보라색 마법사를 태운 마차가 안 보일 때까지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얌전히 서 있던 아르센이 천천히 입을 열어 혼잣말을 했다.
"······ 다행이군."
아.
하마터면 식상할 뻔 했네.
* * *
먹는 건 다 좋아한다.
잘 먹어야 쑥쑥 크니까 다 좋아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풀 처먹는 파릇파릇한 놈이 풀만 처먹어서 싫은게 아니라 풀만 깨작거려서 싫은거지 나도 풀을 싫어하지는 않는다. 그냥 고기를 더 좋아할 뿐.
그리고 생굴도 좋아하고 신귤도 좋아한다.
생각 많을 땐 단 음료가 좋고 평소에는 차가운 민트차가 좋다. 그리고 아플 때는 바나나가 최고다.
딸기는 뭐, 그리 즐기지는 않지만 싫은 것은 아니다. 커피도 싫어한다 말하고는 있지만 사실 싫다기보다는 꺼려진다 해야 맞을 것이다. 비슷한데 미묘한 차이가 있으니까.
그러니까 먹는 건 다 좋아한다.
아 맞다.
나 피망 싫어하지.
정정한다. 피망 빼고 먹는 건 다 좋아한다. 그런데.
"자몽······."
자몽 싫다.
지난 번에 자몽 넣은 소르베를 입에 넣고 인상을 찌푸렸던 것을 기억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즐기지 않는 것을 골라 일부러 내어왔음을 알아서 이제는 그냥 싫어하기로 했다.
"싫어합니다."
사라짐을 알아달라는 것처럼 온 하늘을 물들이는 노을 빛이 찻잔 속에 담겨 있었다. 그 맑은 빛의 차를 내려다보던 칼리안의 말에, 눈을 내리 뜬 란델이 조용한 손길로 찻잔을 들어올리며 입을 열었다.
"참고 마시거라. 걸러서야 되겠느냐."
"제가 참는 것을 잘 못해서요."
예쁘게 웃으며 대답한 칼리안이 란델의 시종인 덴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어느새 웃음기가 싹 사라진 싸늘한 얼굴로 말했다.
"다른 차 가져와."
란델은 하나부터 열까지 말을 안 듣기로 작정한 막냇동생이 자신의 시종을 마음대로 부리는 행동까지 제지하지는 않았다. 잠시 그런 란델의 반응을 살피던 덴이 고개를 숙여보인 뒤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덴에게는 미안하지만 어쩌겠나.
옥수수수염 같은 저 놈이 꿍꿍이도 안 보여주면서 틈만 나면 내리누르려고 기를 쓰는데.
"얌전하던 아이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칼리안의 반응을 지켜보던 란델이 무미건조한 목소리를 냈다.
"얌전하다던, 이라고 해주셔야죠. 란델 형님."
"한 번을 안 지는구나."
"지는 것도 싫어해서요. 자몽만큼."
란델은 대답 대신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뒤 다시 돌아온 덴이 홍차가 든 잔을 내려놓고 자몽 차를 거두어 나갈 때까지 둘은 아무 말 없이 서로를 응시하고 있었다.
달칵, 하고 문 닫히는 소리가 나자 란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자주 보니 좋구나."
"그리 좋으시면 종종 내려오십시오. 고양이 많습니다."
"직접 발을 옮길 만큼은 아니니 염려하지는 말거라."
"네."
두 층 내려가는 귀찮음을 감수할 만큼 좋지는 않은 정도의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은 칼리안이 담백하게 대답하며 홍차를 한 입 마셨다.
"또 무엇을 확인하러 온 것이더냐."
"머리 식히러 오라 하셨으면서. 제가 그냥 왔으리라는 생각은 안하십니까."
"그런 생각은 안 드는구나."
입에 남은 홍차 향을 잠시 음미한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다 입을 열었다.
"그레이 브리센 변경백과 무슨 말씀 나누셨습니까."
"너를 온전히 믿지는 말라 하였다."
"란델 형님 심장에도 도움이 될 일이라 말씀을 드렸었는데, 그리 방해를 하셨습니까."
"상관없지 않겠느냐. 어차피 너를 두려워하는 자인듯 보였으니."
이렇게 말한 뒤,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칼리안을 잠시 보던 란델이 질문 하나를 꺼냈다.
"둘째에게 브리센의 칼을 정말 쥐여 줄 심산이더냐."
칼리안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게 하려고 합니다."
"브리센의 칼을 든 둘째가 너를 겨누면 어찌하려고."
"말씀 드렸지 않습니까. 란델 형님께 제 등을 보여드리겠다 했던 날에요."
플란츠의 배신은 염두에 두고 있지 않는다고.
란델과 손을 잡기로 했던 날에도 물어보았던 질문을 또 입에 올리는 것에 대해 대답한 칼리안이 말을 더했다.
"거기까지 앞서서 걱정을 하기에는 제가 좀 바쁩니다."
"그렇다면."
답을 들은 란델이 톡, 하고 테이블을 한 번 두드렸다.
자신의 질문에 대한 칼리안의 반응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붉은 눈을 아주 깊숙이 바라보며 질문을 꺼냈다.
"내가 너를 겨누면 어찌하겠느냐."
"탑에 가시게 될 겁니다."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대답한 칼리안의 입술이 긴 호선을 그렸다.
"주저함 없는 점이 마음에 드는구나."
"주저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정말로 겨눌 분이시니."
"그래. 맞는 말이지."
붉은 자몽이 든 찻잔이 들어올려졌다. 정 반대의 색을 지닌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다 도로 내려놓은 란델이 다시 말했다.
"허나 조금 서운하구나. 형제 사이에."
"불편한 말씀을 하시네요."
"그리 생각하느냐."
"새삼스럽고."
지난 번의 란델이 했던 대답을 그대로 돌려준 칼리안을 보던 란델의 입가에 의미 모를 미소가 걸렸다.
"하긴 그렇겠구나. 너 역시."
"네. 다만······ 정말로 겨누지는 않으셨으면 좋겠네요. 형제 사이에."
"그래. 노력해보마."
"감사합니다."
숨긴 것 없는 짧은 대화를 마친 칼리안이 찻잔을 들어올리며 다시 본론을 꺼내들었다.
"그나저나, 전하께서 승마 공연을 그렇게나 좋아하시는데 올해에는 가질 못하셨네요. 그래서 이제라도 한 번 나가보는 것이 어떠하신지 말씀을 드려볼까 합니다."
달갑지 않은 이에 대한 말이었으나 란델은 무표정했다.
홍차 한 모금을 다시 입에 머금었다 삼킨 칼리안의 손 끝에서 달칵, 하고 찻잔 내려놓는 소리가 났다. 향긋하나 끝이 쓴 홍차 같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가게 된다면 브리센 후작이 함께 하겠다며 나서지 않을까 싶습니다. 동행이 될지, 불청객이 될지는 저도 모르겠지만요."
검을 두고 올지, 검을 들고 올지 그것도 모르겠지만.
국왕 일가가 왕궁 밖을 나선다 하면 어떤 식으로든 함께 오지 않겠나.
"브리센 후작이 그 정도로 천지 구분 못할 자는 아니지 않느냐."
"구분을 하든, 하지 못하든 상관 있겠습니까."
살짝 웃은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브리센 변경백은 이런 소식을 들을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칼리안의 눈을 란델이 말 없이 쳐다봤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싶어하는 듯 보여서, 칼리안은 그 눈빛을 거부하지 않고 마주보았다.
에반이 칼리안을 습격할 생각이든 아니든 상관 있겠나.
어차피 증거자료는 그레이가 만들겠다 했으니 칼리안은 적당한 조건만 만들어주면 될 일이다.
물론 칼리안이 나서서 그레이를 만날 수는 없어서 다시 란델을 찾아온 길이었다. 그레이에게, 조만간 국왕 일가가 왕궁 밖에 나설 계획임을 전해달라고.
오래지 않아 란델이 조용한 목소리를 냈다.
"하루 이틀 뒤에는 그 역시 들을 수 있지 않겠느냐."
"다행입니다."
하루 이틀 내로 그레이를 만나 칼리안의 의도를 알려주겠다는 말이었다.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다 웃었다.
까다 만 양파같은 첫째 형님이 긴 설명을 하지 않아도 싹싹하게 잘 알아듣는 것이 꽤 기특해서, 그리고 그리핀 우두머리 잡을 작은 덫을 하나 놓은 것이 설레여서 웃음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