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234화 (235/527)

제42장. 그 심장(1)

가을 하늘은 유난히 맑다.

여름 바람에서는 일렁거리는 물 냄새가 났는데 가을 바람에서는 낙엽 냄새가 났다.

새로 피어나 자라고 물을 머금어 살아내고 끝내 생을 다해 떨어진 그 많은 기억을 담아서 조곤조곤 바스락거리는 냄새가 났다. 그리하여도 제가 보듬던 나무는 겨울을 지내고 다가오는 다음의 한 해를 또 잘 보내리라는 것을 알아서 가볍게 나풀거리는 냄새가 났다.

아직 단풍도 채 들지 않았는데 호숫가에 부는 바람에서 바스락거리고 나풀거리는 낙엽 냄새가 나는 것 같아서 칼리안이 작은 소리로 웃었다.

"비슷해서 그런가보다."

옛 칼리안도, 베른도, 꼭 낙엽같아서.

그리 많은 기억을 안고 맞이한 겨울 같은 여름을 지낸 칼리안이 다시 또 생을 이어가리라는 것을 아는 낙엽같아서.

"바람 냄새는 좋고, 나는 괜찮아."

그래서 칼리안은 누구에게 하는 것일지 모를 기분 좋은 말을 잠시 건넸다. 여러 명의 모습으로 하루를 보냈던 예전의 어느 날에는 사실 괜찮지 않았었는데 여러 명의 아들로 하루를 보낸 오늘은 정말 괜찮았으니까.

어쩐지 혼잣말이 조금 늘어날 것 같지만 뭐 어떻겠는가. 누구든 어떻게든 들어줄텐데.

그리고 또 한 사람.

언제든 무엇이든 들어 줄 사람이 있지 않나.

그런 사람으로부터 답이 오기를 기다리며 낙엽 냄새 많이 담은 맑은 가을 바람을 잠시 마주하던 칼리안이 말 없이 눈을 감았다.

- 칼리안 왕자······?

호숫가에 부는 바람이 유난히 맑다.

드미레아를 기다리던 그 날에 비할 바 없을 만큼 맑다.

그 맑은 바람에 비로소 마음을 먹었다. 그래서 비로소.

- 네. 맞습니다.

비로소 연락을 했다.

그리하여도 괜찮을 날이어서 연락을 했다.

- 혹여 무슨 일이 있습니까.

칼리안의 연락이 오기만을 바라왔으면서도 혹시 무슨 일이 있다는 말일까봐 차라리 아무 연락 없이 지내기를 바라왔을 목소리에도 맑은 바람 냄새가 담겨 있었다.

그렇게나 기다려왔을 연락에 기뻐하기보다는 걱정을 먼저 한다. 그러니 이 얼마나 체이스다운 반응인지, 하는 생각에 선선한 웃음을 짓던 칼리안이 대답했다.

- 아무 일 없습니다. 그냥······ 네. 아무 이유가 없어서 연락을 드렸습니다.

칼리안은 거추장스러운만큼 무겁고 조심스러웠던 예복을 입은 그대로 호숫가 바위 위에 앉은 채였다. 어렵사리 만든 옷을 이렇게 다루는 것을 섀틴이 안다면 조금쯤 서운해할지도 모를 일이지만 아무렴 어떻겠나.

무엇을 하여도 그저 좋을 가을이니.

- 내가 축하를 해 주어도 좋을까요. 칼리안 왕자.

- 알고 계셨습니까.

- 날지 못하게 된 새들이 많아졌다 해도 나는 여전히 유능합니다.

춥지 않다고 그렇게나 말을 하였는데도 얀이 한사코 건네주고 간 따뜻한 담요를 만지작거리던 칼리안의 웃음이 조금 더 선선해졌다.

- 네. 축하해주세요. 받고 싶네요.

- 축하합니다. 진심으로.

체이스의 생일에도 차마 건네지 못했던 축하의 말을 도리어 이렇게 듣게 되었다. 겪어보지 않아 낯설었을 속박에서 벗어나 다시 왕비의 아들이 된 것에 대해서.

- 감사합니다. 축하해주셔서.

- 다행입니다. 이제야 제 자리로 돌아온 것 같이 보여서.

짧은 몇 마디 말 뿐이었는데.

여름을 다 보내고 가을을 맞은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신기한만큼 여전히 감사한 마음이 든 칼리안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려다 멈추고 대답을 전했다.

- 네. 덕분에요.

- 나는 칼리안 왕자를 길에서 빗겨나가게 한 일 밖에 생각이 안 나니 내 덕분은 아닐 것 같고. 누구 덕분일까.

- 아닙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 거짓말 같은데.

- 저 거짓말 못합니다. 누구보다 잘 아시면서 그러십니까.

체이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 그래도 못 믿을 말이라서. 내 덕이라 생각하지 않더라도 미안하게 여기지는 않겠습니다.

고집과 타협의 적당한 사이에 서기로 한 체이스가 이렇게 말했다.

칼리안이 마음을 잡은 것은 자신의 덕이 아님을 알지만 돌연 칼리안의 앞에 나타나 근본부터 흔들리게 만든 것에 대해서, 세렌티의 장난질을 숨기지 못한 것에 대해서, 그리고 참 많은 과거의 잘못들에 대해서 전부 다, 미안하게 여기지는 않겠노라고. 칼리안이 가장 원하고 있을 그런 말을 했다.

- 거짓말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 나도 만만치 않은 것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 그런 말을 합니까.

- 하긴 그렇네요.

- 거짓말 아니니 걱정 말아요. 칼리안 왕자.

지금 둘의 머릿속에 온통 가득한 데블란의 일은 미뤄둔 채로, 아무 이유 없이 연락을 했으니 아무 이유 없이 그냥 가벼운 농담들만 주고 받았다. 그렇게 체이스에게도 알려주었다. 이제 괜찮으니 체이스도 좀 더 괜찮아졌으면 좋겠다고.

- 알려주어 고맙습니다. 정말로.

체이스는 그것을 이해했다.

- 네.

칼리안은 세크리티아에도 곧 가을이 찾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득 담은 짧은 대답을 전했다.

하늘은 높았고, 바람은 선선했다.

실로 기꺼운 가을이었다.

* * *

- 톡, 톡, 톡.

욕조 모서리에 올려 둔 손가락 끝에 어느새 버릇이 든다.

생을 이어나가려면 여전히 생각은 많아야 했으니 짧은 순간에도 고민이 이어진다.

'새벽에 폴룬 남작이 왕비님의 일을 축하드린다며 선물을 보냈다고 합니다.'

'준비 마치면 확인해볼게.'

'네. 그리고 밤 사이에 본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아버지로부터요.'

조금 전, 칼리안이 이제 막 눈을 뜬 새벽 무렵.

욕조에 물이 채워지는 동안 메를린을 만나고 온 얀, 아니 시로이안이 이렇게 말하며 서신 하나를 건넸었다.

- 저택 내 의심요인이 있거나 사라진 인원 없음. 영내에 머무르던 새들은 이미 떠난 것으로 확인됨.

왕자에게 전해지는 서신의 모든 내용은 상급 시종이 먼저 확인을 하기 때문에 슬레이만이 알려온 내용도 칼리안보다 앞서서 보게 된 얀은 조금 어두워진 얼굴이었다.

'혹시 로젤리타 기간 중에 다른 문제가 있었나요?'

오래 전부터 칼리안이 자신을 습격했던 무리를 추적중이라는 것 정도는 얀도 알고 있었다. 내용을 읽고 태워 없앤 칼리안이 살짝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걱정도 많고 정도 많은 새끼코끼리를 잘 안심시켜주는 것은 늘 칼리안의 몫이었으니까.

'아니. 아무 문제 없었대. 걱정하지 마.'

'혹시 왕자님과 제 본가에 관련된 문제가 생기면 저한테도 꼭 알려주세요. 도와드릴게요.'

'그래, 꼭 얘기해줄게. 고마워.'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 지그프리드의 입장에서는 다행한 일이었고 칼리안에게는 조금 아쉬울 일이었지만 말이다.

- 톡, 톡, 톡.

얀을 내보내고 좋은 온도의 물 속에 온 몸을 누인 채로 생각을 이어 나갔다.

데블란이 칼리안의 정체를 가늠할 수 있을 정보를 전한 사람, 칼리안의 검술을 보았을 사람. 그런 사람이 지그프리드 저택의 기사 혹은 사용인 중에 포함되어 있지 않을까 하는 의심을 했었다.

그리고 슬레이만은 그런 이들이 없었다 알려왔다.

"설렁설렁 조사하지는 않았을테니 정말 의심될 것 없다는 말인데."

아무리 슬레이만이라 해도 그 지그프리드를 이끌어나가는 사람이다. 세크리티아의 세작이 숨어들어 무엇을 꾸미든 그냥 내버려 둘 위인일지언정 세작이 있는 것도 파악 못할 사람은 아니었다. 에반과는 달랐으니까.

"그럼 어디에 있을까."

답이 나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계속 생각을 하려 애를 썼다. 그리하여 또 얼만큼을 보냈는지, '위잉' 하고 온도 조절 장치가 작동하는 소리가 들렸다. 창 밖이 완연히 밝아졌음이 느껴진다.

커튼 사이로 한 줄기 내려오는 햇살을 가만히 보던 칼리안이 피식 웃었다.

"또 조급해하고 있었네."

아직은 시간이 있지 않나.

데블란은 칼리안이 굳이 매를 통해 답을 하리라고 생각하진 않을 것이다. 자신의 말에 칼리안이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을 터였다. 하루하루 생명이 줄어듦에 애가 타겠지만 그 때문에 서두르다 일을 그르칠 사람은 아니다.

궁지에 몰린 칼리안이 생각하고 답을 정하기까지. 답이 적힌 서신을 다리에 맨 새가 자신을 찾아가기까지 조금쯤은 기다려줄 테니, 아직은 시간이 있다.

"순서대로. 일단은 에반 먼저."

에반의 문제를 해결하고 엘프를 만나면 될 일이다.

본래에는 제온을 경계하느라 에반을 두고 볼까 하였으나 데블란이 끼어들었다. 그러니 에반부터 해결하고 혹시라도 문제가 생기면, 그래. 아르센을 믿어야지. 나 하나쯤 못 지키겠느냐 장담했으니 나도 이제는 믿고 맡겨둬야지. 텐실의 왕세자는, 뭐. 에반 치워주면 완두콩이 알아서 하겠지.

그 쪽도 이제는 믿어봐야지.

* * *

아니.

도대체 그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하는거냐고.

칼리안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었다.

어깨가 흔들림과 동시에 곁에 서 있던 메를린과 다른 시녀들의 고개가 얀 쪽으로 획 돌아갔다.

'혹시 화 나신 겁니까?'

이런 뜻이 가득 담긴 눈들을 한 채였다.

때문에 일단 얀은 칼리안을 그냥 둔 채 태평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는 조금 질책하는 표정으로 모두를 한 번씩 쳐다봤다.

'우리 꽃 같은 왕자님이 얼마나 착하고 여리신 분인데 다들 왜 자꾸 화 나셨냐고 묻는지 모르겠네요. 그리고 기분이 좋으신 건지 화가 나신 건지 왜 아직도 알아보지를 못하는 겁니까? 저렇게 티가 나는데요.'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네, 정말.

그 좋은 귀로 칼리안의 숨소리가 달라졌는지 아닌지를 듣고 칼리안의 기분을 파악하는 방법을 터득한 키리에를 제외하고 나면 앨런조차 제대로 못 알아보는 저 웃음의 진위를 그냥 알아내는 네가 되게 특이하다는 생각은 왜 못하시는지. 주변 사람이 전부 다 이상한 것 같으면 그건 그냥 네가 이상하다는 소리라는 걸 왜 모르시는지.

이런 말이 하고 싶지만 건네지 못할 메를린이, 아무튼 기분 나빠 웃는 것은 아니라 하니 일단 안심한 얼굴을 했다. 칼리안이 화가 났다 해서 아랫사람에게 못되게 군 적도 없었건만 괜스레 눈치가 보였던 까닭이다.

"아니, 왜······."

칼리안은 얼굴을 덮었던 짧은 순간 주변에서 무언의 말이 엄청 많이 오고 갔음을 모르는 채로 작게 입을 열었다.

웃음이 터진 것을 간신히 갈무리한 칼리안의 나머지 한 쪽 팔에 안긴 작은 생명이 기분 좋은 소리를 냈다.

"냐옹!"

하고.

멜피르의 선물은 항상 수수께끼 같았다.

언제나 칼리안의 것은 없었고 대체로 의미가 있었다.

이번에도 자신의 것이 아닌 듯한 선물을 보내온 폴룬 상단의 상단주 멜피르를 떠올린 칼리안이, 멜피르가 무슨 생각으로 보낸 선물했는지를 깨닫고 고맙게 잘 받겠다는 말을 전했다.

그리고는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품 속의 작은 생명이 한 번 더 소리를 냈다.

"미안. 놀래켜서 미안해."

짙은 잿빛의 털.

금색에 가까운 호박색의 눈.

분명, 루시가 아니었다.

* * *

아침부터 그렇게 웃고도 지치지를 않는다.

말을 채 잇지도 못할 것처럼 웃어대던 칼리안이 드디어 웃음을 멈췄다. 그리고 짖었다.

"형님 이제 무슨 색 옷 입으십니까."

하면서.

애옹, 냐옹, 므에옹, 니아옹, 하고 무릎 위에서 알 수 없는 대화를 나누고 있는 두 마리를 실로 복잡한 얼굴로 조용히 내려다보던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셋 중 한 마리 쯤은 사람 말 했으면 좋겠는데."

소란스러움 가득한 4층에서 제일 시끄럽게 굴고 있는 까맣고 큰 한 마리가 씩 웃었다. 싫다는 소리다.

그 한 마리만 사라지면 평온함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지금 당장 내쫓고 싶은 마음을 꾹 참아낸 플란츠를 보던 칼리안이 사람 말을 따라했다.

"루시 털 묻어서 옷을 전부 밝게 입으시는데, 재색 털까지 묻으면 어떻게 하실지 너무 궁금해서요. 다 크면 루시보다 털이 길어질거라고 하던데요."

조금 전, 식사 자리에 찾아와서는 뜬금 없이 짙은 잿빛의 고양이 한 마리를 내려놓은 칼리안은 테이블 앞에 앉기가 무섭게 웃기 시작했다.

짜증나는 점은 그 부분이다.

왜 웃는지 이해를 영 못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

"루시가 특별히 형님을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라."

"거기까지."

칼리안이 내려놓기가 무섭게 잿빛의 고양이가 도도도도 달려가더니 플란츠의 다리에 몸을 부비며 인사를 했으니 말이다.

"세상의 모든 고양이가 형님을 따르는 모양입니다."

닥치란다고 닥칠 입이면 세렌티의 영광을 얻은 앨런의 입이 아니고, 그만하란다고 그만할 입이면 그런 앨런의 아들이 가진 입이겠나.

당연히 안 그만두지.

"그래서, 뭔데."

"고양이요."

"무슨 고양이냐고 묻는 거잖아."

"새끼 고양이요."

하, 하고 인내심 사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칼리안은 허브 가득한 녹색의 버터가 올려진 소고기 스테이크를 한 입 느긋하게 씹어 삼켰다. 그러더니 허브 버터 없이 검은 소금만 뿌려진 플란츠의 스테이크를 우아한 손짓으로 가리켜 보였다.

"식사부터 하십시오. 설명은 나중에 드릴 테니."

결국 체념한 플란츠가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고 조용한 식사가 이어졌다.

그렇게 얼마 후.

오리 다리살과 호박을 함께 구운 뒤 눈송이같은 하얀 치즈를 올린 것을 마지막으로 플란츠가 식사를 마친 것을 보았으면서도, 칼리안은 여전히 설명을 해주지 않았다.

딸기가 가득 들어간 우유 푸딩과 '아주 따뜻한' 오렌지 차가 놓여졌을 즈음, 놀랍게도 플란츠의 입이 먼저 열렸다. 다만 플란츠는 아직 설명할 생각 없어보이는 고양이 대신 다른 것을 물었다.

"언제 할건데."

사과.

빗자루 취급은 참겠는데 캔버스 취급은 별로라서.

"드렸습니다, 이미."

생글생글 웃으며 대답하는 칼리안을 보던 플란츠의 눈이 무릎 위의 잿빛 고양이에 가 닿았다.

폴룬 상단의 상단주이기도 하지만 발칸과 관련 깊은 마법학원을 운영하고 있기도 한 멜피르는, 2왕자와 3왕자가 서로 등을 돌린 상태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칼리안을 만나기 위해 체르밀 궁도 자주 찾아왔던 터라 루시가 누구를 더 따르는지도 알고 있었다.

때문에 멜피르는 추숭식에서의 일을 전해듣자마자 칼리안에게 고양이를 보냈다. 칼리안이 굳이 입을 열어 사과하지 않아도 되도록 말이다. 캔버스 취급한 건 미안한데 도무지 욕심 없는 그 태도에는 좀 짜증이 나서 멜피르의 뜻을 잘 따르기로 한 칼리안은, 미안하다 말하는 대신 사과의 의미를 담은 선물만 플란츠에게 건넸다.

"고양이 털 떼는 마법보다 조금 먼저 배우셨으면 하는 것이 있어서요."

그리고 멜피르는 의도하지 못했던 또 다른 이유를 사과 대신 전했다.

"그렇다고 루시 차별하지는 마시고요. 루시는 제 고양이지만 히나에게 선물한 고양이라서 형님 못 드립니다."

그럴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괜한 말을 한 칼리안이 향 좋은 오렌지 차를 한 입 마신 뒤 말을 이었다.

"살아 있고, 숨 쉬고, 심장이 뛰고. 작고, 약합니다. 언제 아플지도 모르고, 또. 언젠가는 형님보다 먼저 생을 다할테고."

사람 일 모른다지만 완두콩 네 놈이 또 심장 팔고 다니지만 않으면 어지간해선 네 놈이 고양이보단 오래 살겠지.

"궁금해하고, 욕심내고, 같이 도는 것 말고. 지키는 것도 배워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지키는 것만 하며 살았던 것이 무조건 옳았다 할 수는 없겠지만 또 무조건 헛되었다 할 수도 없었으므로. 그조차도 생을 이어가는 한 방법임을 한번 배워보았으면 하는 마음에.

가느다란 고양이 울음소리가 났다.

꾸벅꾸벅 졸던 루시가 눈을 떴다. 그리고는 어르고 달래듯 새끼 고양이를 보듬보듬 안았다.

그 어린 루시도 저보다 약한 것을 지키는 법을 알고 있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플란츠가 대답했다.

"······ 그래."

플란츠는 사과를 받았다.

플란츠의 고양이가 작은 울음소리를 냈다.

무엇을 하여도 살아가기에 그저 좋을 가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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