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228화 (229/527)

제40장. 감당 못 할 텐데(5)

드미레아와 대련을 하고 앨런과 플란츠를 만났다.

앨런에게 부탁할 거리 하나를 가져갔다가 제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이제는 앨런이 잊고 살았으면 좋겠다 여겼던 일에 대해 결국은 부탁을 하게 됐다. 엘린느를 다시 찾는 일이 앨런의 신 귤임을 알았지만 그에 대해 제 아들이 미안하게 여기지 않았으면 하는 아비의 마음이 너무 절절해서 기어코 아무렇지 않은 척 대화를 마치고 돌아왔다.

그 뒤에는 왕세자위에 관심 없다는 플란츠의 생각이 바뀌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결코 바뀌지 않으리라는 것을 최종적으로 확인했다.

"그런데 나 아직도 결정을 못했어. 큰 개를 키울지, 작은 개를 키울지. 검은 개를 키울지, 하얀 개를 키울지."

결국은 카밀론에 가서 개 키울 사람도, 르메인의 뒤를 이어 카이리스를 연명시켜야 할 사람도 자신임을 허락받은 셈이 됐다. 진작부터 못내 돌아있던 이가, 그 자리를 지키다 끝내 미쳐버렸던 이로부터.

우습게도.

"무슨 개를 키울지 고민하시느라 밤을 새셨어요?"

"설마. 내가 그 정도로 이상한 사람은 아니야."

"그런데 왜 못 주무셨어요. 불러주셨으면 우유라도 데워드렸을텐데 그러시지도 않고요."

걱정이 반, 나무람이 반 섞인 말이 데운 우유보다 따뜻했다.

"그냥. 생각할 게 많았어."

전날.

치료를 마치고 다시 찾아 온 드미레아와 식사를 했다. 그리고 드미레아로부터 그레이 브리센을 대신할 새로운 변경백의 자리에 걸맞을 네 명의 귀족을 추천받았다.

'고마워. 전하께 얘기드려서 넷 중 한 명으로 결정할게.'

그 후에는 지그프리드 저택에서 몰래 숨겨주고 있는 기사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들은 플란츠의 심장에 걸린 속박이 풀리는 날 일제히 왕궁에 들어올 것이다. 혹시라도 날뛸지 모를 발칸의 기사들을 견제하며, 아르센이 포함된 발칸의 마법사들을 도와 르메인과 플란츠의 입지를 지켜 줄 중요한 병력이었다.

때문에 드미레아에게 지금 생각중인 계획의 일부를 알리며, 염치없지만 다시 한 번 도움을 요청했다.

'맹세의 인만 사라지면 왕궁 안의 일은 형님께서 알아서 처리하실 수 있으니 지그프리드에서 왕궁의 일에 관여해야 할 일은 생기지 않을 거야. 그런데 내가 그 때 자리를 비울지도 몰라서, 혹시 내가 없으면 지금 얘기한 것을 형님께 전해드리는 것까지만 부탁해도 될까?'

에반 브리센을 몰아낼 계획을 지금 플란츠에게 이야기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때가 되면 숨겨주던 기사들을 플란츠에게 인계하는 것에는 드미레아 역시 동의를 했었다. 거기에 더해 말 한마디 전해주는 것은 지그프리드의 신념에 문제될 것 없을 일이었다. 때문에 드미레아는 칼리안에게 빚을 하나 더 지우는 것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이야기를 마치고 드미레아를 돌려보낸 뒤부터 지금까지 생각을 했다. 어둠에 잠긴 창 밖이 밝아지고 새들이 다시 울기 시작하는 것들을 잊은 채로 생각을 했다.

"조금만이라도 쉬세요. 어제 무리하셨잖아요."

"대련 한 번 정도는 무리 될 것 없어. 밤 샌 것도 괜찮아."

슬레이만을 보아 왔으니 소드마스터의 체력이 어느 정도일지 모르는 것이 아닐텐데도 쉬라 이야기하는 얀이 칼리안의 얼굴 면면을 살폈다. 무슨 고민이 그렇게 많았는지 걱정을 하고 있는 것이 빤했다.

"큰 문제 생긴 것 아니니까 그렇게 걱정 안해도 돼."

"걱정을 안하게 해주셔야 안하죠. 걱정하지 말라는 말씀이 제일 걱정되는 건 알고 계세요?"

또 한 번 걱정과 나무람을 섞은 말로 대답한 얀이, 대답 없이 웃기만 하는 칼리안을 보며 작은 숨을 푹 내쉬었다. 그 뒤에는 칼리안의 의복과 머리 정리를 모두 마친 시녀들을 밖으로 내보냈다.

그렇게 모두가 나가고 방문이 닫힌 뒤, 얀이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란델 왕자님의 시종이 왔었어요."

"조금 늦으셨네."

드디어 란델로부터 답이 왔다.

"화요일 오전, 이라는 내용만 전달이 되었습니다."

참으로 란델다운 간단한 답이 왔다. 이런 모습을 보면 란델 역시 시스파니안의 후손이 맞긴 맞는 모양이다.

"혹시 자세한 내용을 확인하셔야 한다면 제가 다시 한 번 여쭤볼게요."

"무슨 말인지 알아. 다시 확인 안 해도 돼."

가타부타 설명 없이 전달된 말이었으나 이해는 어렵지 않았다. 후궁 프레이야의 추숭 행사가 시작되기 전에 그레이 브리센을 만나보겠노라는 소리였으니까.

"날짜 잘 잡으셨네."

칼리안도 이렇게 가타부타 설명 없는 감상을 내놨다.

안그래도 많은 귀족들이 왕궁에 들 테니 그들 중 그레이 브리센이 섞여 있어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러니 다른 이들의 눈을 피해 자연스럽게 만나려 의도한 것처럼 보여지기 딱 좋을 날이다.

적당히 머리 좀 굴려보려는 에반으로 하여금 그레이가 자연스러움을 가장해 란델을 몰래 만나려 했다 오해하게 만들기에는 그보다 나은 날이 없을 것이다.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았음에도 칼리안의 의중을 파악한 것처럼 날을 잡아 전해온 란델에게 소리 없는 칭찬을 한 번 더 보낸 칼리안이 말했다.

"오늘 전하를 좀 뵈어야 할 것 같아."

"네. 아르피아 궁으로 사람을 보내 확인해 보겠습니다."

"고마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 칼리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아스트리샤 거리에 도는 소문들 중에 나와 관련된 것 빠짐 없이 다 전달해줘. 지금처럼 간단하게 말고 전부 다."

"귀족들이 내는 소문 중에 왕자님과 관련되지 않은 것이 없을 걸요. 소식 모이는대로 전해드릴게요."

"응. 고마워."

다시금 고맙다는 말을 하는 칼리안을 얀이 물끄러미 쳐다봤다. 왜 그러는지를 묻는 눈이 된 칼리안을 향해 얀이 말했다.

"그런 말씀 이제 줄이세요."

"무슨 말?"

"고맙다, 미안하다, 이런 말씀이요."

칼리안이 웃었다.

국왕은 고마워하지 않고 미안해하지도 않아야 한다. 모든 것을 당연히 여기고 모든 것에 당당해야 한다는 소리이기도 했다. 예전의 르메인이 그랬듯이.

그러니 얀의 말은, 르메인의 자리를 이어갈 길이 명확해지고 있으니 이제부터라도 조금씩 감사와 사과의 말을 줄여보도록 하라는 조언이었다.

"싫어."

연두색 놈한테 말이 옮았는지 이런 대답이 절로 나온다.

얀이 슬쩍 웃었다.

왕자의 시종으로서 해야 할 말을 했고 칼리안의 사람으로서 마음에 드는 대답을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그렇게 변하면 감당 못 할 텐데. 아무도."

"네. 알아서 하세요, 그럼."

칼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마주 웃었다.

그 뒤에는 도대체 무슨 개를 키울 것인지를 다시 진지하게 고민해보기 시작했다.

* * *

대장장이 긱스가 허허 웃었다.

"아니, 소공작님. 하루 새 무슨 싸움을 하셨으면 검이 이렇게 상합니까?"

넉살 좋은 성격 답게 그 사이 드미레아를 대하는 것이 많이 편해져 있었다.

"3왕자님의 검을 받아내느라 그렇게 됐습니다."

"어이쿠."

참 많은 말이 함축된 감탄사 하나를 내뱉은 긱스가 다시 허허 웃으며 팔을 걷어올렸다. 그리고는 어디를 어떻게 고쳐놓아야 하는지 꼼꼼하게 살핀 후 말했다.

"저녁까지는 싹 고쳐서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내가 다시 오겠습니다."

저택의 한 켠.

쇠 두드리는 소리도, 붉디 붉은 불꽃도 참 마음에 드는 곳이다. 그러니 굳이 한 번 더 와서 이 곳을 구경하는 것이 수고로울 것이 없었다.

게다가 그 많은 기사들의 검을 죄 관리해주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긱스가 아니던가.

"바쁘실텐데 소공작님께서 매번 직접 오십니까."

"어차피 오늘 하루는 전부 다 미루고 쉴 생각이니 괜찮습니다."

지금의 말처럼, 차도 마시고 책도 읽으면서 여유있게 보낼 생각이었다. 어제 이미 히나 덕분에 평화로운 시간을 보냈기는 하지만, 그 후 칼리안을 만난 뒤 또 마음이 복잡해진 까닭이었다.

"어제 3왕자님과의 대련이 많이 피곤하셨습니까?"

"피곤하다기보다는."

- 내가 그 때 자리를 비울지도 몰라서.

"생각이 많아져서 그렇습니다."

누구에게 하는지 모를 말을 주워듣게 되어 버린 긱스가 자신의 뜻대로 드미레아의 말을 해석한 뒤 입을 열었다.

"생각이 늘어나실 만도 합니다. 검술에 대해 아는 것은 하나도 없지만 참 대단하신 분이라는 것은 압니다. 독에 당해 근육을 다 손해보셨던 분이 불과 1년 만에 그것을 다 이겨내고 경지에 오르신 것 아닙니까. 그런 분과 대련을 하시면 그게 누구든 생각이 많아질 겁니다."

독에 당해 근육이 다 망가졌었다고?

"그것이 무슨 말입니까."

"정혼자시면서 그것을 모르셨습니까? 실리케의 독 말입니다. 피를 토하고 쓰러지셨던 일이 있기 얼마 전에 왕자님께서 제 가게를 처음 오셨었는데, 그때 이미 검을 채 들지도 못하시는 상태셨습니다. 그런데도 검을 살피는 눈빛이 어찌나 꼼꼼하셨는지 모릅니다. 아무튼 그렇게 큰 일이 터지고 나서 1년 쯤 뒤에 소드마스터가 되셔서 다시 가게에 찾아오셨죠. 저에게 실리케의 독 때문에 검을 들지 못하셨던 것이었다고 말씀해주고 가셨습니다. 그야말로 검술의 이치를 깨닫고 역경을 이겨내신 것 아니겠습니까? 세상에, 검을 그렇게 많이 다루셨을 분께서 얇은 검 하나 마음대로 들지 못할 만큼 몸이 상하셨다니 대체 얼마나 지독한 독을 드셨던 것인지 제 머리로는 도무지 상상도 못하겠다 싶었습니다."

드미레아는 대답 없이 긱스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대단한 칼리안과의 추억 아닌 추억을 회상하느라 드미레아의 표정도 채 살피지 못한 긱스가 말을 이었다.

"그랬으니 왕자님께서 얼마나 마음 고생이 심하셨겠습니까. 그래도 지금은 저렇게 어엿하게 자리도 잡으시고 또 이번에 프레이야 후궁님을 왕비님으로 올려주신다 하니 그게 다 그 동안 겪으신 고생에 대해 세렌티께서 보답해주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독에 당한 것은 당연히 알았다.

그것을 모를 이가 카이리스에 있겠는가.

그런데 어딘가 석연치 않은 기분이 든다.

"혹시 그 얘기 다른 곳에 한 적 있습니까."

"어이쿠, 제가 누구의 앞에서 감히 3왕자님과의 일을 입에 올리겠습니까. 소공작님께서 왕자님의 정혼자시니 드리는 말씀이죠."

"앞으로도 다른 곳에는 말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왕실 자리싸움이 얽혔던 일이니."

"당연히 그리 하겠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소공작님."

드미레아의 생각이 더 늘어나게 생겼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긱스가 시원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플란츠가 미간을 찌푸렸다.

어제는 희한하게 짖더니 오늘은 쓸데없이 짖는 동생을 앞에 두고 마음에 좀 복잡해졌다.

아무래도 짖는다는 소리를 너무 많이 해서 진짜 짖는 것만 하게 된 것이 맞는 것 같다고, 그렇게 잠깐 자책한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바빠."

아우님께서 고민할 것이 하도 많으셔서 사소한 것을 잠시 잊으신 것 같은데 그딴 것을 같이 생각해주기에는 내가 좀 바쁘다고 답을 했다.

고기 많이 들어간 많은 양의 음식들을 싹싹 먹고 버터 발라 노릇하게 구운 옥수수까지 하나 먹어 치운 칼리안이, 좋은 향기 나는 빵 한 조각과 양송이 버섯이 들어간 오트밀 스프를 반쯤 먹고 스푼을 내려놓는 플란츠를 향해서 이런 질문을 했기 때문이다.

카밀론 가면 무슨 개를 키워볼까요, 라고.

그것이 마치 생애 가장 큰 고민거리라는 듯 진지한 얼굴을 한 채로.

곧, 테이블이 치워지고 두 잔의 주스가 올려지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던 플란츠가 입을 열었다.

"파란 머리 미친 마법사 풀어놓으면 되겠군. 그쪽도 잘 짖던데."

"아. 의외의 방법이기는 하네요."

바쁜 와중에 결국 칼리안의 고민에 대해 생각을 해 준 셈이 됐다. 내용이야 뭐가 되었든 해결책 하나를 내어 놓았다는 것이 중요하니까.

정말 그렇게 해볼까 하는 얼굴이 되었다가 웃음을 터뜨린 칼리안을 보던 플란츠가 짙은 보랏빛 포도주스를 한 입 마셨다. 그리고는 의자에 등을 기대며 물었다.

"뭔데, 또."

아직 살펴보지는 않았으나 에우리아의 조사 결과가 적힌 서류는 이미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헛소리를 하는 꼴을 보니 다른 고민이 있는 것이 눈에 보인다.

"티납니까."

"내 아우님께서 숨기는 재주가 없으시니."

그렇게 말한 플란츠가 고갯짓을 한 뒤 말했다.

"바쁘다고."

안 그래도 전날 하루를 통째로 쉰 셈이 아니던가. 그러니 빨리 말하고 가라는 소리에, 나도 모르겠다 하는 심정이 된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신 귤, 계속 나눠드셔 주실 생각 맞으십니까. 감당 못하실 수도 있는데요."

"말했는데. 이미."

칼리안이 작은 소리를 내며 웃더니 품에서 돌돌 말린 종이 한 장을 꺼내 플란츠에게 건넸다.

"계속 나눠드실 생각이시라 하니. 형님 심장을 위한 안전장치 하나 해두려고요. 뭐, 안전장치가 될 지 안 될 지는 사실 잘 모르겠지만 되면 좋고 안 되면 어쩔 수 없는 거고. 손해 볼 일은 없으실 겁니다."

종이를 묶어 둔 얇은 가죽 끈을 풀어 내용을 확인한 플란츠의 눈이 가늘게 변했다. 대답을 기다리지 않은 채 칼리안이 말을 이었다.

"그러니 어차피 해두신 것 하나만 더 하시죠. 저랑."

이렇게 말한 칼리안이 생글생글 웃었고, 실로 오랜만에 제대로 된 사람 말을 듣게 된 플란츠가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해."

맹세의 인.

또 다른 계약을 위한 종이를 내려다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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