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168화 (169/527)

제29장. 감당할 수 있는 일 (1)

맥주 세 잔.

거기까지는 기억이 난단다. 그리고 네 잔 째의 술을 한 모금 마신 그 순간부터 기억이 안난단다.

"어. 딱 그때부터 감자튀김을 얼렸어."

잠깐씩 겁대가리 내려놓는 것이 일이던 마법사가 상황을 파악해보려 애쓰며 물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혹시 실수는 안 했습니까?"

"감자튀김을 얼렸지."

감자튀김을 얼렸고 말을 조금 많이 하기는 했다.

아르센이 이곳까지 무슨 일로 찾아왔는지는 대충 들어 알고 있었다. 칼리안 부탁받고 이 곳에 온다 했으니 그냥 그러려니 하고 말았었다. 힘든 것은 잘 해도 하기 싫은 것 못하는 마법사가 무슨 마음을 먹고 왔던 것인지는 어제가 되어서야 알았다.

에우리아가 살짝 미간을 찌푸린 채 물었다.

"기억이 정말 안나?"

"네 정말 안 납니다. 제가 매번 세 잔만 마시는데 어제는 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항상 맥주 세 잔만 마시고 귀가하는 아르센의 대답에 에우리아는 결국 피식 웃었다.

아르센 스스로는 하기 싫은 일이지만 칼리안의 부탁이니 하고 싶은 일. 그래서 거절하지 않고 이 곳에 와서 그레이와 얘기를 나눴지만 사실은 정말 싫었던 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돕고 싶었을 일.

하기 싫은데 하고 싶은 그 모순된 마음의 사이에 껴서 결국은 술을 마셨으니 취해서 나온 진담이 어디 실수겠는가. 감자튀김 얼린 것은 용서 못할 실수였지만 징징거린 것은 실수가 아니었다.

그래서 에우리아는 가볍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다른 실수 안 했어. 닭은 안 얼렸으니까."

"닭 드셨습니까? 혼자서?"

"혼자 먹지, 그럼. 너 잤잖아."

정확히는 재운 것이지만 중요한 차이는 아니니까.

과한 술에 머리가 아픈지 관자놀이를 주무르는 아르센의 앞에 코코넛 과육이 가득 들어간 주스가 놓였다. 숙취 해소하라며 에우리아가 주문해 준 것이었다.

안 그래도 갈증이 심했던 탓에 그것을 한 입에 비운 아르센이 말했다.

"저 술 냄새 납니까?"

"안 나. 맥주 네 잔 마시고 술 냄새 나면 그게 사람인가."

바로 앞에 히몰리카 두 병을 싹싹 비우고도 술 기운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찾아볼 수 없을 멀끔한 마법사가 그렇게 대답했다. 그 말을 듣고 나서도 못미더웠는지 이미 두 번 클린 마법을 썼던 아르센이 다시 한번 마력을 낭비했다.

그레이를 다시 만나러 가려는 것이다.

그것을 보던 에우리아가 넌지시 물었다.

"몇 시에 간다고 했어?"

이미 해가 중천이었다. 어차피 속이 쓰려서 다른 것은 못 먹겠다 싶은 마음에 그냥 지금 다녀올 생각을 한 아르센이 대답했다.

"그냥 오늘 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럼 밥이나 먹어."

일어나려는 아르센을 도로 앉힌 에우리아가 가벼운 말투로 말을 이었다.

"천천히 가도 돼. 그게 낫기도 하고."

분명 칼자루는 아르센이 쥐고 있는 상황이니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속이 타는 것은 그레이일 터였다.

"꼬맹이 네가 꿀릴 게 없다는 걸 알텐데 뭐하러 빨리 가. 늦게 가는 만큼 그놈 요구조건이 줄어들테니 그냥 더 놀다가 가."

빨리 가면 아르센 역시 그레이와 손을 잡는 것을 기대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증명 밖에 안 된다. 그러니 그냥 천천히 가서 '나는 너랑 손을 잡아도 그만 안 잡아도 그만' 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쓸데 없는 욕심을 안 부릴 터였다.

"아. 그게 낫겠네요. 감사합니다, 협회장님."

"당분간 나한테 협회장님이라고 안 해도 될 것 같아. 귀에 딱지가 좀 앉아서."

구운 감자에 버터를 삭삭 펴바르며 대꾸한 에우리아가 보들보들한 감자 속을 한 스푼 떴다. 영문 모를 아르센의 눈빛이 스푼을 따라 에우리아를 향했다.

"그래. 감자는 뜨거워야지. 언 건 못먹겠더라."

잠깐 딴 소리를 하며 호호 하는 입으로 감자를 씹어 삼킨 에우리아가 여전히 들어가지 않는 아르센의 의문에 대한 느긋한 대답을 덧붙였다.

"그냥 그런 게 있어."

그 말이 끝남과 함께 점원이 다시 둘을 찾았다. 그리고 양배추와 소고기를 넣고 매콤하게 끓여낸 스튜를 아르센의 앞에 놓았다. 특별히 그것이 아르센을 위해 주문한 것이라 말하지 않았음에도 점원은 알아서 척척 요리의 주인을 찾아냈다.

히몰리카 두 병을 혼자 해치운 다음날 버터 바른 감자나 먹고 있는 여자 쪽보다는 맥주 네 잔 먹고 잠들어있다 실려간 뒤 다음날 비척비척 걸어와 앉아 오만상을 쓰고 있는 남자에게 필요한 음식일 것이 분명했으니까.

점원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한 에우리아가 스푼 끝으로 스튜를 가리켜보이며 아르센에게 말했다.

"아무튼 그거나 먹어. 먹고 쉬다가 나랑 같이 가."

"브리센 변경백 만나는 자리에 같이 가주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브리센 놈들 멍청해서 싫다는 에우리아 아니던가. 그래서 전날 만날 때도 아르센이 혼자 그레이를 만났었다. 그러던 에우리아가 변덕을 부리니 묻는 소리였다.

"어. 심심해서. 오늘은 내가 얘기하지 뭐. 어차피 더 나눌 말도 없겠지만."

후배 마법사가 하기 싫어하는 일 또 하게 두는 게 싫어서가 아니라 그냥 심심해서.

의외로 섬세하게 챙겨주는 협회장의 말에, 아르센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분명 어제 술 취해서 말 실수를 한 것일 터였다. 그러지 않고서는 에우리아가 저렇게 나올 리가 없지 않나. 이런 생각에 아르센이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 꼴을 보던 에우리아가 아르센의 스튜에서 제일 큰 고기 하나를 뺏어먹으며 웃었다.

* * *

칼리안이 웃음을 터뜨렸다.

"다 돌아있는 건 알았는데 정말 다 돌아있었구나."

그 웃음소리에 찻잔 두 개를 내려놓던 얀이 칼리안의 안색을 살폈다.

발칸의 마법사를 입에 올리면서 웃는 것이 진짜 웃는 것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였는데 다행히 이번에는 진짜 웃음이었다. 그래서 얀은 안심한 표정으로 살짝 고개숙여 인사한 뒤 밖으로 나갔다.

- 웃을 일이, 아니에요. 정말로, 마흔 아홉 대를, 맞고 왔어요.

보무도 당당한 마법사 한 명이 여기저기 얻어터진 얼굴로 찾아왔을 때 히나가 얼마나 놀랐는지 칼리안은 절대로 모를 것이다.

"이긴 놈이 맞았을 거야. 괜찮아."

마주 앉아있던 히나가 결국은 고개를 도리도리 가로저으며 찻잔을 들어올렸다. 자상한 왕자님도 결국은 마법사구나 해서.

체리와 딸기로 만든 청을 넣은 차에서 좋은 향이 났다. 정확히 히나가 좋아할 만한 달달한 향기와 맛의 차였다. 그것을 들어 한 모금 마시려는데 우다다다 하는 소리와 함께 고양이가 달려와 히나의 팔을 탁 건드렸다. 반가운 마음에 안기려 한 듯 했다.

'찻물······!'

덕분에 몇 방울의 빨간 차가 새하얀 로브 위로 툭툭 떨어졌다. 그것을 본 칼리안이 고양이를 안아들며 말했다.

"사람 좋다고 그렇게 달려오다 다친다, 너."

"애옹!"

또 대든다.

어느새 좀 컸다고 말대꾸를 하는 것 같아서 칼리안이 다시 웃었다. 그리고는 간단히 입을 열어 빨간 얼룩이 진 히나의 로브를 깨끗하게 돌려놓은 뒤 아직 마시지 않은 자신의 차를 히나 쪽으로 밀어주며 입을 열었다.

"히나. 당분간 키리에와 마주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해줄 수 있을까?"

빨간 얼룩이 진 것을 지워준 것과 쏟아진 차 대신 새 잔을 건네준 것에 대해서 고맙다는 말을 하려는데 생각지 못한 말이 들렸다. 그래서 히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칼리안을 쳐다봤다.

- 무슨 일이, 있어요?

지금의 키리에는 누구를 보아도 가름이 함께 보일 것이었다. 그래서 당분간은 무조건 혼자 있는 것이 나았다. 칼리안 자신은 물론 심지어 히나까지 되도록 키리에의 앞에 나서지 않는 편이 더 낫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아서 하는 말이었다.

"미안."

이유가 있을 테지만 칼리안은 그에 대해서는 설명해주지 않은 채 대신 이렇게 사과만 했다. 그런 칼리안을 잠시 쳐다보던 히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움직였다.

- 잘은 몰라도, 자상한 왕자님이, 미안하다고 생각하실 일이면. 오빠도 똑같이 잘못을 했을거예요.

정확히는 몰라도 그럴 것이라고.

- 그러니까, 왕자님 탓으로만, 생각하지는 말아요.

무슨 일인지도 모르면서.

히나는 그렇게 말해주며 웃었다.

그리고는 칼리안의 품에 안긴 '나는 플란츠 왕자님을 더 좋아하는 칼리안 왕자님의 고양이입니다.' 고양이를 보며 말했다.

- 고양이 이름. 지어주세요.

키리에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면서 정작 칼리안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했기 때문에 꺼낸 말이었다. 큰 일이 아니라면 칼리안도 너무 걱정하지 않도록 다른 고민할 거리를 건네주는 것이다.

미안해하는 마음을 잠시 접어둔 칼리안이 물었다.

"네가 불편하지 않겠어?"

이 말에 히나가 생긋 웃었다.

정말로 히나가 생각한 이유 때문에 이름을 지어주지 않았던 것이 맞았음을 확인한 탓이다. 이 다정하고 자상한 왕자를 향해 히나가 포근한 얼굴로 대답했다.

- 예쁜 이름으로, 지어주세요.

히나는 그 똑똑하고 멋있는 말에게 칼리안이 지어준 이름이 겨우 검은색 혹은 커다란 까마귀라는 뜻임을 아직 몰랐다. 그랬으니 마음 편히 칼리안에게 부탁을 한 것이리라.

"알았어. 고민해볼게."

칼리안이 걱정 말라는 듯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그리고 이틀이 지났다.

고양이 이름을 못 지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히나의 부탁이었다. 절대 허투루 지을 수가 없었다. 신중에 신중을 기하다 보니 마음에 드는 이름이 단 하나도 없었다.

"대사막 인근 지역에 야만족이 다시 출몰한다 들었는데. 병력 지원이 필요한가."

덕분에 회의에 든 르메인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하나도 새겨듣지 못하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누구보다 진지하게 경청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음에도 말이다.

내용과 결과를 대충 알고있는 그리고 늘 반복되었던 야만족 침입 문제보다 히나의 고양이가 중요했다. 굳이 칼리안이 끼어들지 않아도 이제는 르메인이 알아서 잘 처신하고 있었기도 했으니까.

회의는 계속 이어졌다.

"사망한 하울핀 남작의 위를 이을 이가 없다 하던데. 내게 그것을 제일 먼저 알려야 할 가빈 백작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군."

이런 르메인의 말에 칼리안의 옆에서 피식 웃는 작은 소리가 들렸다. 근신 중인 란델은 이 자리에도 참석하지 않았으니 분명 삶은 완두콩이 낸 소리일 것이다.

가빈이라는 백작이 주인 없는 땅을 혼자 차지하려 했으리라는 것을 알아서 웃은 것일 터였다. 칼리안 외에는 그 소리를 들은 이가 없었으니 다행한 일이다. 귀족들 앞에서 비웃는 것 역시 좋은 버릇이 아님을 알려줘야겠다는 생각을 잠시 접어둔 칼리안이 다시 고양이 이름을 고민했다.

이름이 호명된 백작은 곧바로 르메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전하 그것은······."

"새로운 남작을 조만간 보내도록 하지."

칼리안은 다른 일정은 몰라도 귀족들이 모이는 정기 회의에는 꼬박꼬박 참석을 했다. 에반 브리센 후작을 따로 만날 기회를 만들 수는 없었으므로 회의에 에반이 참석하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를 만나보아야 오러를 가늠해볼 테니까.

"이런 일이 두 번 있지는 않기를 바라네."

셋째 아들이 지금 누구 한 명 목을 없애버릴 생각으로 이 자리에 참석한 뒤 고양이 이름이나 고민하고 있음을 모르는 르메인은 지극히 평범한 회의를 알아서 이어나갔다.

그렇게 시간이 지난 뒤, 조용해진 회의장 안에 르메인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럼 이것으로 마치지."

그리고 르메인은 귀족들 쪽은 보지도 않은 채 예를 보이는 칼리안과 플란츠 쪽으로만 시선을 한 번씩 준 뒤 밖으로 나갔다.

마찬가지로 자리를 떠나려던 칼리안이 잠시 멈췄다. 회의장 안으로 들어오는 얀을 본 탓이다. 정확히는 그 손에 들린 쪽지를 봤기 때문이었다.

"회의 참석하시는 동안 도착했는데 바로 확인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아직 밖으로 나가지 않은 귀족들의 시선이 칼리안 쪽을 향했다.

"아, 고마워."

편지 크기로 보아 분명 전서구 편에 온 것이다. 그리고 지금 칼리안에게 전서구를 보낼 만한 이는 아르센 뿐이었다. 계속 기다리고 있던 내용이기도 했다.

어차피 쪽지 하나 받는 것 쯤 이상하게 생각할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칼리안은 귀족들이 보는 앞에서 다시 자리에 앉아 쪽지를 펼쳤다.

- 1왕자님과 연락하고 있지 않습니다. 회유했고 요구 조건 없습니다. 저는 이번 주 내로 카이리시스에 돌아갈 것 같습니다.

예상한대로 아르센으로부터 온 편지였다.

그레이와 거짓으로 손을 잡았고 그레이가 란델과는 연락하지 않는 상태라는 소리였다.

칼리안이 곧 생각에 잠겨들었다.

'기간이 안 맞는데.'

편지가 온 시기와 돌아오겠다 말한 기간이 조금 이상했다.

새가 날아오는 기간을 제하더라도 수도에서 변경백령에 도착한 뒤 그레이와 대화를 나누기까지 예상보다 조금 더 오래 걸렸다. 일을 마친 뒤 이번 주 내로 온다는 것을 보니 이동 마법진을 이용할 생각인 듯 보였으나 그 예정일도 지금 당장이 아니라 이번 주 내였다.

'가는 길에 무슨 일이 있었나본데. 거기 더 있으려 할 리 없는데도 조금 더 있다 오겠다 하고.'

아르센이 그 일을 얼마나 하기 싫어했을지 잘 알았다.

그럼에도 지금 그 일을 할 만한 그레이를 회유할 수 있을 적당한 이유를 만들어 낼 상황의 인물이 아르센 뿐이었다. 예정에 없던 일이었으니 칼리안이라 해서 미리부터 적합한 인물을 준비할 수가 없었던 탓이다.

그래서 아르센에게 부탁을 했고 아르센은 다른 말 없이 칼리안의 요구를 따라줬다.

그래도 싫은 것은 싫은 것이니 일이 끝나면 곧바로 돌아올 생각을 했을텐데 굳이 이번 주 내로 오겠다 하는 것이 이상한 것이다.

- 톡, 톡.

습관처럼 칼리안의 손가락이 테이블을 천천히 두드렸다.

'마법진이 아직 완성이 안 됐거나 아니면 완성은 됐는데 세이렌 경의 일에 끼어들었거나.'

아르센이 변경백령에 도착하는 시기가 늦어진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으나 수도에 오겠다는 시기가 늦춰지는 것은 그 두 가지 이유 뿐이었다. 그리고 에우리아의 일이라면 아마도 시스파니안이 칼리안에게 언급했던 것과 연관이 있을 터였다.

검은 돌에 대한 조사.

그것을 하러 떠났으니 지금부터 아르센이 에우리아를 도와 함께 조사를 하고 오겠다는 뜻이리라.

마법진이 아직 완성되지 않아서 조금 기다리다 오는 것이면 그리 상관 없었으나 검은 돌의 일에 아르센까지 얽히는 것은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앨런이 에우리아로 하여금 그 일에 더는 신경쓰지 말도록 일러두지 않았던가. 그만큼 위험했으니까.

'주말까지 오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든 나가봐야겠는데.'

일단은 거기까지만 생각을 한 칼리안이 마력을 살짝 운용했다.

- 화르륵!

순간적으로 칼리안의 손 끝에서 조금 큰 불길이 일며 쪽지가 완전히 타 사라졌다. 아직 나가지 않은 귀족들의 시선이 모였다.

"형님. 빌헬름 관에 가시는 길이면 함께 가도 되겠습니까."

귀족들을 신경쓰지 않은 채 칼리안이 이렇게 말했고 플란츠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마뜩치 않은 것을 보는 듯한 얼굴을 곧 지운 플란츠가 대답했다.

"그래."

일부러 더 크게 피워올린 불꽃.

칼리안이 마법사임을 귀족들이 모르지 않았다. 방금 전의 불꽃은 그저 시선을 모으기 위한 행동일 뿐, 그렇게 시선을 집중시킨 뒤 플란츠에게 빌헬름에 자신이 가도 되는지를 허락받는 것이다.

발칸이 플란츠의 것이 되었음을, 스스로 마법사이기도 한 칼리안이 그것을 인정했음을 은연중에 확인시켜주는 행동이었으니까.

미리 예측하지 못한 쪽지 한 장을 이용해 짧은 퍼포먼스를 마친 칼리안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플란츠가 몸을 일으켰다.

귀족들의 인사를 받으며 밖으로 나온 둘은 말한대로 빌헬름 관을 향해 발을 옮겼다.

"쪽지, 뭔데."

플란츠는 아르센이 이동 마법진에 대한 일로 자리를 비운 것이라 알고 있었다. 때문에 지금 칼리안이 확인한 것이 아르센의 쪽지임을 플란츠가 모를 리 없다. 전서구를 보낼 만큼 멀리 있는 이와 연락할 일이 없었으니까.

"세이렌 경의 일로 일정을 조금 늦춘 것 같네요. 아무래도 그 돌에 대해 조사를 하려는 듯 합니다."

섣불리 사실을 숨기려 하면 또 눈치챌테니 칼리안은 그냥 짧게 설명했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아르센의 편지였고 그에 대해서는 이야기해줄 수 없었으나 편지로부터 추측한 다른 일을 알려주는 것은 상관 없었으니까.

"괜찮겠지. 정신 나간 마법사도 같이 있을 텐데."

플란츠가 이렇게 대꾸했다. 아무리 플란츠라 하더라도 지금 칼리안의 말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네. 오늘은 석찬까지 있으니 저녁에는 수련장 가기 어려울 것 같은데 오늘 검술은 빌헬름에서 보아 드리겠습니다."

플란츠는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런 플란츠를 잠시 쳐다보던 칼리안이 물었다.

"안 궁금하십니까, 키리에가 왜 그랬는지는."

물어보질 않았다.

플란츠는 대답하지 않았고 한동안 걷는 것에 집중하던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미처 받아들이기 전에 감당하기 어려울 피를 묻혀서 누군가를 죽이기 위한 더 나은 방법을 깨우치게 되는, 일종의 환각입니다. 보이는 것에 익숙해지면 다시 나타나지는 않으니 곧 괜찮아질 겁니다."

"그래."

"쪽지 말고 그날 키리에가 왜 그렇게 죽일 듯이 공격을 했는지. 이런 것을 궁금해하셔야죠."

살기는 되받아치면서 정작 그런 공격을 받은 것에는 왜 화를 안내는지. 칼리안이 받은 쪽지가 무엇인지는 궁금해하면서 정작 자신에 대한 것은 왜 궁금해하지 않는지.

이번에도 플란츠는 말 없이 입을 다물었다.

대신 칼리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키리에가 그랬습니다. 형님처럼."

지금의 키리에처럼 '과거'의 키리에도 그랬다.

궁금해하지 않았다.

시키면 시키는대로 알려주면 알려주는대로. 말하지 않으면 모르는 채로. 그냥 무조건 다 알겠다고만 했다. 전부 그냥 받아들이기만 했다.

그러다 결국 가름을 봤었다. 지금보다 그때의 키리에가 더 단단했지만 결국 베른과 같은 것을 보았다.

비단 그것이 꼭 검을 다루는 일에만 속하겠는가.

"그렇게 하지는 마시죠. 형님 일에 대해서도 궁금해하고 물어보고 화도 내고. 죄책감 버리고 살겠다 마음 먹었으면 욕심도 좀 내시라는 겁니다. 그리하지 않으면 결국 탈이 나는 것은 똑같습니다."

플란츠가 칼리안을 쳐다봤다.

그리고 칼리안은 담담한 눈으로 플란츠를 마주봤다.

"욕심내셔도 됩니다."

아무튼 하나부터 열까지 다 가르쳐줘야 하는 손 많이 가는 놈이라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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