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장. 하나도 안 평화로울걸 (5)
카이리스 북부의 겨울은 혹독하다.
하츠아라는, 눈 좋아하는 시스파니안을 위해 그 큰 대륙의 북쪽에 도시를 세웠다. 이쯤되면 시스파니안이 인간 남자 한 명을 아주 호구로 삼은 악독한 드래곤이라 보여질 수 있겠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시스파니안은 그저 하늘에서 내리는 눈이 아름답다는 말을 한 번 했을 뿐이고, 그것을 기억해내어 카이리스 북쪽의 추운 지역을 수도로 삼은 것은 하츠아라였다. 인간 사는 곳이 너무 비좁고 답답해서 너랑은 절대 결혼 안할거라는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왕궁을 그렇게 거대하게 지은 위인이니 오죽했을까.
아무튼.
그렇게 추운 곳이 바로 카이리시스다. 그러니 한 겨울의 세뉴강은 말 그대로 꽁꽁 얼어붙는다.
그런 세뉴강을 '툭' 건드리면, 과연 파열되는가.
언 바위를 밟는다 해서 그것이 깨지는가.
당연히 그렇지 않다. 아무리 카이리시스가 춥다고 해도 얼어붙은 강과 바위가 조각날 만큼 급속도로, 그리고 극저온으로 얼어붙지 않으니까.
"이, 이게 대체······."
산산조각난 대리석 테이블을 보며 저도 모르게 경악한 말을 꺼냈던 그레이 브리센 변경백이 급히 입을 다물었다. 지금 상황에서 놀란 소리를 꺼내봐야 스스로에게 좋을 것이 없었다.
"이게 대체 얼마 짜리인 줄 알고 부숴놨단 말이냐!"
그래서 이렇게, 자연스러운 척 말을 돌렸다. 겁을 먹는 놈보단 물건 아끼는 속 좁은 놈 되는 것이 나을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돌아오는 아르센의 참담한 눈빛을 보며 잠시 후회했다.
"대답 해주십시오, 변경백님."
아르센은 대리석 테이블과 한눈에 보아도 장인의 손길이 느껴지던 범상치 않은 고급 찻잔 값에 대해서는 한 마디 언급도 하지 않은 채 이렇게 말했다.
칼리안의 따까리를 자처하고 있을 때에나 칼리안의 이름도 팔고 급여도 팔았지, 지금의 일은 칼리안이 감당해줄 수 있을 일이 아니었으니까. 물론 1플로린으로 내려간 급여에서 뭘 더 제할 수도 없는 일이었지만 말이다.
자신의 마차를 폭발시켰을 때부터 정상적인 놈이 아닌 것은 알았으나 이 정도일 줄은 몰랐던 그레이가 침음을 흘렸다. 아무 말 없이 그레이의 대답을 기다리던 아르센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시겠지만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 겁니다. 오래지 않아 1왕자님께서 스무 살이 되실 테니까요."
오래지 않아 세자위가 결정되는데, 이대로 두면 누가 세자가 되든 그레이에게 돌아올 것이 전혀 없었다. 플란츠가 세자위에 오른다 해도 에반이 좋을 일이지 그레이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니까. 그러니 지금이라도 어딘가에 숟가락 하나 얹어놔야 수도로 갈 길이 생기는 것이다.
"일단 생각을 좀 해보겠다."
실리케나 란델이 불렀을 때에도 족히 사흘은 고민을 했던 그레이였다. 멍청해서 그렇지 즉흥적으로 행동하며 살지는 않았었다. 칼리안을 마주했을 때에도 나름대로 꽤 인내하지 않았던가.
"얼마나 시간을 드리면 되겠습니까."
"사흘이면 되겠군."
그레이는 이전에 고민했던 시간과 똑같이 사흘을 달라 말했다. 아르센은 선뜻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럼 내일 다시 오겠습니다."
그 무엇이든 그레이의 요구를 따라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주도권은 무조건 아르센 자신이 쥐고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뭐, 마법사들 성격 급한 것이 하루 이틀도 아니니 그레이가 이해해야지 별 수 있겠나. 언제든지 테이블 대신 그레이를 얼릴 수 있는 마법사를 앞에 두면 없던 이해심도 무럭무럭 생기는 법이니까 괜찮다.
물론 아르센의 입장에서 괜찮다는 소리였으니, 그다지 괜찮지 않은 그레이는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사흘을 달라고 했지 않나."
"시간 낭비할 것 있겠습니까. 어차피 결론은 난 것 같은데요."
아르센의 말대로였다. 어차피 그레이는 아르센의 말을 절대로 거절 할 수 없을 터였다. 이것이 마지막 기회라는 것은 그레이가 더 잘 알고 있을 테니까.
"내일. 다시 오겠습니다."
할 말을 마친 아르센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가볍게 고개 숙여 인사한 뒤 밖으로 나갔다. 대화가 끝났으니 이만 나가도 좋다는 허락같은 것은 구하지도 않은 채였다.
* * *
가벼워지는 만큼 무거워진다.
그것이 검이며, 그래야 하는 것이 검이다.
키리에와 플란츠의 사이에 끼어든 검붉은 검이 살짝 비틀어졌다. 크지 않은 동작이었으나, 키리에의 검은 칼리안이 의도한 방향으로 미끄러져 바닥을 향해 떨어졌다.
칼리안의 뒤에 서 있던 플란츠는 말 없이 검을 집어넣었다. 겉으로는 별다른 표정의 변화가 없었으나 머릿속으로는 조금 전의 일이 고스란히 되풀이되고 있었다.
'달랐는데.'
키리에의 눈빛에 분명한 변화가 있었다.
그 뒤 플란츠가 따르지 못할 속도로 검이 쇄도했고 막으려 했을 땐 이미 칼리안이 플란츠의 앞에 서 있었다.
아마 칼리안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그대로 심장을 찔렸겠으나 방금 전 죽을 뻔했다는 것에 대한 대단한 감상이 생기지는 않았다. 어쨌거나 칼리안이 있었으니 무슨 일이 있든 어련히 알아서 살려뒀겠나 싶어서였다. 실제로도 안 죽었으니 그것이 과한 믿음은 아닐 것이다.
아무튼 플란츠는 키리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다만 대련 중 키리에의 무언가가 변했고 칼리안이 축하한다는 말을 했으니, 분명 한 단계 성장을 이룬 것이리라는 정도로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 키리에."
그런데 분위기가 평소와 조금 달랐다.
칼리안의 농담 섞인 말에도 키리에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칼리안이 개입할 정도로 플란츠에게 살의를 느낀 것에 대한 사과는 애초부터 바라지도 않았다. 그래도 칼리안의 말에 아무 대답을 하지 않는 놈이 아닌데 너무 조용했다.
게다가 대련이 끝났음에도 검을 집어넣지 않았다. 무엇보다, 살기가 가라앉지 않았다.
- 스윽
플란츠의 생각이 맞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칼리안이 살짝 더 옆으로 움직였다. 그러니까, 조금 더 옆으로 움직여 플란츠의 앞을 완전히 막아섰다는 소리다.
그 말은 곧 키리에가 아직은 위험한 상태라는 뜻일 터였다.
'내가 어지간히도 싫었나보군.'
이런 생각에 플란츠가 피식 웃었다. 그것을 보지 못한 칼리안은 여전히 앞을 보며 입을 열었다.
"키리에."
다시 한 번 이름을 부른 칼리안이 잠시 말 없이 키리에를 쳐다봤다. 그리고는 짧게 한숨을 쉬며 자신의 검으로 키리에의 검을 툭 쳤다. 날붙이가 부딪히는 소리가 짧게 들렸다.
그 소리와 함께, 앞을 보고 있으나 또 다른 무언가를 함께 보고 있던 키리에가 칼리안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키리에."
"네."
그제야 대답이 돌아온다.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조금 전과 똑같은 얼굴로 웃으면서, 조금 전과 똑같은 말을 했다.
"축하한다고 했어. 내가 너한테."
"아······."
대답이 바로 이어지지 않았다. 키리에의 얼굴에는, 믿기 어려운 것을 본 듯도 하고 또 어딘가 다른 생각이 많은 것 같기도 한 그런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감사합니다, 왕자님."
한참이 지난 뒤에야 뒤늦은 감사 인사가 돌아왔다. 칼리안은 짧게 고개를 끄덕여보인 뒤 키리에의 눈을 응시하며 말했다.
"뭐가 보이는지 알아."
베른이 검의 길에 오르기 전에 겪었던 현상이었으나 누구나 그것을 보지는 않았다. 그래서 베른의 설명을 들은 체이스는 그것에 '가름'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반드시 목숨을 끊어낼 수 있을, 생과 사를 가르는 선이니 그리 부르자 했다.
과거의 키리에는 죽음을 맞이하기 불과 몇 달 전에 가름을 보았었다. 그러니 지금 그에 비해 훨씬 빠른 시기에 그것을 마주하게 된 셈이다. 때문에 칼리안은 지금 당연히 뛸 듯이 기뻤으나 마냥 축하만 할 수는 없었다.
지금이 얼마나 중요하고 또 위험한 순간인지를 알았으니까.
"우선 검을 집어넣었으면 좋겠는데, 키리에."
칼리안은, 늘어뜨린 채 여전히 손에 들려 있는 검을 가리켜보이며 이렇게 말했다. 여전히 살기를 지우지 못하는 키리에를 향해서.
"······ 죄송합니다."
그제야 짧게 사과한 키리에가 검집에 검을 집어넣었다. 그 과정을 칼리안의 눈이 조용히 지켜봤다. 탁, 하고 검집에 검이 완전히 들어간 것을 본 칼리안의 손에서도 비로소 검이 사라졌다.
플란츠는 아직 몰랐으나 칼리안은 알고 있었다. 지금 저 살기가 비단 플란츠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저 앞에 플란츠가 있었을 뿐, 칼리안이 플란츠를 가로막은 뒤에는 칼리안에게도 같은 기운이 닿았다. 그러니 조금 전 키리에는 상대를 구분하지 않은 채 죽음을 내리려 했던 것이었다.
"검, 이리줘. 키리에."
칼리안이 키리에의 검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자신이 내렸던 검을 돌려달라고 말한 것. 검사에게 검을 빼앗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키리에가 모르지 않았다. 검을 잡지 못하게 하겠다는 의미였다.
"네."
그것을 알면서도, 키리에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리고 칼리안에게 검집에 든 검을 건넸다. 아무런 망설임도 의문도 없는 행동이었다. 칼리안이 돌려달라 했으니 돌려주었다.
"잠깐 어디 좀 가자."
검을 받아든 칼리안이 이렇게 말하며 부드럽게 웃었다.
* * *
기어코 에우리아의 고운 이마가 살짝 찌푸려졌다.
맥주 네 잔.
아니 어떻게 사람이 맥주 네 잔을 마시고 취할 수가 있느냔 말이다.
큰 잔이면 이해나 하지, 물컵보다 조금 클까말까한 맥주 네 잔에 고주망태가 되어버린 얼음 마법사를 보며 짜증 가득한 목소리를 냈다.
"술 찾을 때 알아봤어야 했지."
아르센이 술 약한 것을 모르지는 않았다. 그랬으면서도, 그레이를 만나고 나와서는 입이 썩을 것 같다느니 혀에 뭐가 난 것 같다는 말을 해 가며 결국 술을 먹자 했을 때 말리지 못한 에우리아가 잘못했다.
상급 히몰리카 한 병을 비우고도 멀쩡한 에우리아가 입을 열었다.
"야, 꼬맹이."
"저어는요, 협회장님."
에우리아의 부름에 반쯤 혀 꼬인 목소리가 돌아왔다. 그리고 시작됐다.
"저는 이럴 생각이 없었는데요, 협회장님. 왕자님이 시키셔서 하기는 했는데요. 그 놈이 너무 싫었거든요, 협회장님. 그런데 그 놈 앞에서 왕자님의 형님되시는 부군단장님 편에 서자고 한 게요, 협회장님. 저는 그럴 생각이 없었는데요, 협회장님. 그래도 시키셔서 하기는 했는데요. 그런 말 한 게 딱 너무 싫어서요, 협회장님."
"어, 그래."
아르센은 에우리아의 성의 없는 말에도 개의치 않았다.
아르센이 안주로 시켜둔 감자 튀김을 손에 댔다. 그러자 그 손에 닿은 감자튀김이 살짝 얼어 딱딱하게 굳었다.
그것을 본 아르센이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아, 얼었네."
"네가 얼렸잖아."
에우리아는 참았다.
아직 얼지 않은 감자튀김이 남아있었다.
"그런데요 협회장님."
"어, 그래."
얼지 않은 감자튀김을 잡으려는 손이 계속 새로운 감자튀김을 얼려댔다. 에우리아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늘어난 만큼 언 감자도 늘어났다.
"생각해보면 왕자님의 형님되시는 부군단장님이 저런 집안 놈들이랑 얽혀있는게 또 괜히 짜증나서요, 협회장님. 부군단장님이 그래도 영 나쁜 새끼가 아닌 것은 저도 아는데 자꾸 우리 왕자님이 부군단장님 챙겨주시는게요, 협회장님. 그게 부군단장님 탓이 아닌건 아는데 그래도 짜증나고 싫어서요."
"뭔소리야."
"아, 다 얼었네."
"네가 얼렸잖아."
아르센이 남은 맥주를 입에 털어넣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더 먹을 수 있는 감자튀김이 없음을 확인한 뒤였다.
"그게 다 저 망할 집안 탓인데요, 협회장님. 우리 왕자님이요 얼마나 좋은 분이시냐면요, 협회장님. 아 제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는데요, 협회장님. 마차 태웠더니 잘했다 하시고 건물 부쉈더니 급여 올려주신 분이거든요, 협회장님."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포인트가 조금 이상한 것 같은데."
"아닌데요. 스승님만큼 좋은 사람 맞는데요."
여기까지 들어주고 그냥 포기했다.
사일런트 켜놓고 아르센의 주절거림을 듣다듣다 못하겠어서, 에우리아는 그냥 사일런트 끄고 슬립만 걸었다.
- 풀썩!
그제야 좀 조용해졌다.
나무 테이블에 코 박고 잠든 아르센의 고개를 돌려 죽지만 않게 해둔 에우리아가, 술주정에 죄 얼려버린 감자튀김 하나를 들어올려 씹어보려다 포기하고 집어치웠다.
시퍼런 마법사 옆에 얼어붙은 감자튀김 다 밀어놓은 에우리아는 테이블에 엎어져 잠든 아르센을 잠깐 쳐다보다 피식 웃었다.
아무튼 비는 그쳤고 창 밖에 달이 밝았다. 옆에는 술 약한 얼음 마법사가 잠들어 있고, 테이블 앞에는 얼어버린 감자튀김만 가득했으니 어찌하겠나.
"여기 히몰리카 한 병이랑 닭 튀김 하나요."
검은 돌이고 붉은 힘이고 정치고 뭐고.
오늘은 그냥 술이나 마셔야지.
* * *
칼리안의 미친 따까리가 감자튀김을 얼리고 있을 그 무렵.
칼리안과 키리에를 태운 두 마리의 말이 숲으로 들어섰다.
가는 동안 칼리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옆에 앉은 키리에 역시 다른 말 없이 칼리안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하도 비가 많이 왔던 탓에, 숲에서는 여전히 비 비린내가 났다. 그 좋은 향기를 마음껏 들이마신 칼리안이 입을 열었다.
"어때?"
조금 전보다는 그나마 마음을 가라앉힌 듯한 키리에가 조용히 대답했다.
"평화로운 곳입니다."
"아마 조금 있으면 하나도 안 평화로울걸."
이렇게 대꾸한 칼리안이 조용히 웃었다.
그 말대로였다.
달빛을 가득 받은 바위가 있는 곳까지 들어선 키리에가 깜짝 놀란 얼굴을 하며 주변을 둘러봤다. 온통 파헤쳐진 흙, 잘려 베어나간 나무와 자잘한 바위들, 불에 그을린 것이 분명한 흔적들까지.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그것을 가만히 보던 칼리안의 웃음소리가 조금 더 커졌다. 이 난장판이 자신 때문에 생긴 것임을 잘 알아서였다.
"네가 배운 것이 내 검이라서 그런 것을 본 거야."
가벼워지는 만큼 무거워져야 하는, 검.
검의 무게가 버겁지 않을 만큼 검에 익숙해질수록 검이라는 것이 결국 무언가의 목숨을 취하기 위해 만들어진 물건인지를 여실히 느끼게 된다. 언젠가 드미레아가 말했던 것처럼 검이란 결국 살인을 위한 도구이니, 검의 이치를 안다는 것은 결국 살인의 방법을 배우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닌가.
그러니 검을 드는 것이 가벼워지게 될 수록 오히려 그것이 얼마나 무거운 물건인지를 느껴야 했다.
그런데 베른에게 있어 검이란 한없이 가벼운 것이었다. 가벼운 만큼 더 가벼운 것이었다.
지키고자 배운 검으로, 누군가를 지켜내기도 전에 하염없이 생명을 끊어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한없이 가벼워졌다. 검에 얹혀진 생명의 무게 따위는 느껴지지도 않았다.
그렇게 가벼워진 검으로 검을 수련하다 가름을 봤다.
상대방의 목숨을 반드시 끊어낼 수 있을 길이 보였다. 지극히 베른다운, 베른의 검에 딱 어울리는 깨우침이었다.
"지금도 안 없어지는 것 알아."
그런데 문제는.
처음 마주한 그 세상에서 쉬이 벗어날 수 없다는 것에 있었다.
"내 위로도 보일 거야."
상대를 구분하지 않는다는 것도 문제였다.
과거 체이스의 위에 나타난 혈선이 보였던 것을 떠올린 칼리안이, 칼리안을 향한 붉은 선이 그려지는 것을 보며 혼란스러워했을 키리에를 조용히 바라봤다.
"당분간 푹 쉬면 괜찮아질거야. 네 검은, 가름이 보이지 않게 될 때 다시 돌려줄게."
그렇게 키리에를 안심시킨 칼리안이 주변을 둘러보며 짧은 한숨을 쉬었다.
단순히 베른의 검을 배웠기 때문만이 아니라, 베른과 비슷한 길을 걸었기 때문에 같은 것을 보게 되었음을 알고 있었다. 칼리안이 시켰던 일들 때문에 그 많은 피를 묻혀서, 그래서 같은 길을 걷게 되었음을 이제야 깨달았다.
"미리 신경 못 써서 미안."
사람을 베어내는 것이 어떤 일인지를 잊고 살아서.
"네 속도 이곳 같은 줄 내가 모르고 있었네."
할 수 있느냐는 말에 할 수 있다는 대답이 오기에, 늘 평화로운 겉모습을 보여주기에, 괜찮으리라고만 생각해서. 키리에 속도 이 숲처럼, 칼리안 때문에 난장판이 되었을 줄을 몰라서.
"미안, 키리에."
그렇게 검을 휘두르고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해서 미안하다고.
너무 큰 짐을 혼자 감당하게 해서 미안하다고.
축하의 말 뒤에 칼리안은 그렇게 미안하다는 말을 전했다.
[외전] 검은 나비
지나간 시간을 회상한다.
나의 회상은 반갑고, 기쁘고, 행복하다.
그리고 아련하고, 우울하고, 슬프다.
그 뒤에는······.
* * *
바람 소리에 눈을 떴다.
비가 내렸고 기분은 좋지 않았다.
대체, 왜 이런 날에 눈을 떴을까.
그것 하나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얼만큼을 잠들어 있었는지도 가늠해보지 않은 채 밖으로 나섰다.
- 너를 내가 불렀어.
궁금증에 대답해주듯 목소리가 들린다. 기억나지 않는 긴 시간을 살아낸 뒤에 만났던 이의 목소리.
때로는 어린 아이의 모습이기도, 또 때로는 성숙한 여인의 모습이기도, 변덕 심한 어느 날에는 붉은 새의 모습이기도 한, 하나이자 전부인 존재의 목소리였다.
"왜 이런 날에. 싫어하는 것 알면서."
비오는 날은 싫다.
내가 이런 날을 싫어한다는 것을 분명 안다. 이 세상에 모르는 것이 없는 이였으니 알아야만 했다.
- 생겼어. 모르는 것. 이상한 것. 그래서 불렀어.
그때까지만 해도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세렌티에게도, 나를 만든 신에게도 모르는 것이 있구나 하는 정도의 감상 뿐이었다.
그것이 시작인 줄은 '몰랐다'.
이 세상에 모르는 것이 없어야 할 이 역시 몰랐으니 나라고 알았을까. 물론 그것에 위안을 삼기에는 지나치게 큰 문제였으나 아무튼 그때는 알지 못했다.
양신전쟁이라는 거창한 이름이 붙게 될 그 일은 그렇게, 비 오던 어느 날 잠든 나를 깨워낸 세렌티의 작은 부름으로부터 시작됐다.
- 시스파니안. 돕도록 해, 나를.
거꾸로 되었다.
누군가에게 늘 도움을 구걸받던 세렌티가 나에게 도움을 구걸했다. 거부하지 못할 신의 언어였으나 그것은 분명 구걸이었다. 그 어느때보다 절박한 목소리였으니까.
"말 해."
그 부름으로부터 마주하게 된 현실은 결코 우습지 않았다.
악신, 그 이름조차 입에 올리기 힘들 이가 눈을 떴다. 한 번도 보지 못한 존재가 세렌티의 눈을 가리고 생명을 취했다.
섣불리 개입한 나의 동족들은 허망하게 죽었고 나는 어린 동족을 숨겼다. 대륙이 나뉘어 멀어지고 남은 대륙의 절반은 아름다움을 잃은 채 삭막하게 바뀌었다. 여러 종족이 사라져 전설이 되는 것을 내 눈으로 보았다.
악신의 가장 마지막 먹이가 된 것은 가장 나약한 인간이었다. 그것을 막겠다며 가장 강하다는 인간 몇몇이 모였다. 그래보아야 나약할 뿐이었다.
- 그들이 기회라는 걸 나는 알아.
세렌티는 인간을 마지막 기회라 불렀다. 그들에게 힘을 내렸다.
그렇게 모인 일곱 명의 인간. 그리고 내가 악신의 발을 묶었다. 조촐하되 창대한 마지막 전투가 시작됐다.
우리와 함께 했던 세렌티가 의지를 드러냈다. 모두 죽는 것보단 세렌티가 사라지는 것이 낫다 하였다. 우리는 반대하지 못했고 세렌티는 악신과 함께 잠들었다.
넷이 살았다.
아니, 넷이 죽었다.
그렇게 마지막 전투가 끝났다.
그리고 세렌티가 잠들었음을 모두가 알았다.
신을 잃은 생명들의 혼란은 지나치게 컸다. 그래서 나는 차마 다시 잠들지 못했다.
* * *
시간이 조금 흘렀다.
우리는 영웅이라 불렸다.
인간들은 죽은 영웅의 이름 위에 희생이라는 글자를 덧붙였다. 결국은 죽어 사라졌을 뿐임에도 그들의 죽음은 그렇게나 멋드러지게 포장되었다.
그리고 잊혀졌다. 인간들은 살아남은 영웅을 찬양했다. 그래야 자신들이 살아남을 수 있음을 터득했기 때문이다. 죽음을 기리며 슬퍼하기에는 사라진 것이 너무 많았으니까. 그것을 모두 슬퍼하려면 미쳐버리고 말 테니까.
"시스파니안."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전쟁이 끝났으니 살아남은 영웅은 죽은 영웅처럼 잊혀져야 마땅했으나 그는 그리하지 않았다. 앞으로 나섰고 살아남은 이를 모았다. 죽은 이들에 대한 기억을 묻고 삶을 격려했다.
"비는 싫고 눈은 좋아해요?"
그리고 나를 졸졸졸, 쫓아다녔다.
누군가에게 분명 영웅이라 불리는 인간. 그 어떤 인간보다 날카로운 검을 지녔던 인간. 말 한 마디로 다른 인간들을 부릴 수 있는 인간. 가장 강인했던 인간.
그런 그가 나를 쫓아다녔다.
결국 인간인 그가 인간 아닌 나를 끊임없이 쫓아다녔다.
"또 어떤 것을 싫어해요?"
이렇게 물어오는 의도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지켜낸 세상을 보며 아름답다 하기에, 나는 지금 내려오는 눈이 더 아름답다고 말했을 뿐. 비가 싫다는 말도 눈이 좋다는 말도 한 적 없었다.
그런데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늘 그렇게 물어왔다. 또 어떤 것을 싫어하느냐고.
"너."
그런 그가, 싫었다.
* * *
세렌티는 알고 있었을까.
그로 인해 세상이 어떻게 변할지를, 내가 어떻게 변할지를, 나의 세상이 어떻게 변할지를.
그것이 내 생의 서막이자 종막이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
아니면 몰랐을까.
만약 알았다면 나의 생이 끝나는 날까지 원망해줄텐데.
알고 있었을까.
아니면 몰랐을까.
만약 몰랐다면 나의 생이 끝나는 날까지 원망해줄텐데.
* * *
"나비를 좋아해요."
관심 없었다.
내가 관심이 없다는 것에 그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제멋대로 와서는 제멋대로 주절거리고 제멋대로 돌아갔다.
"좋잖아요. 꽃이 피어 있을 것 같으니까. 그러니 언제든 봄이 오는 것 같고. 그래서 좋아해요."
마지막 전투에서 죽은 영웅 네리아드.
네리아드의 아이를 가졌음을 알고 떠났던 그녀의 소식이 전해진 날이었다. 그는 또 무턱대고 나를 찾아와서는 봄같은 얘기를 했다. 꽃이 필 것 같은 얘기를 했다.
"세크리티아. 그런 이름으로 지었대요."
비밀을 간직한.
이런 의미를 가진 새로운 나라, 세크리티아.
그녀가 그런 이름의 나라를 세웠다는 이야기를 나에게 전해주며 좋아했다. 그녀를 감싸고 죽어간 네리아드가 끝끝내 보고싶어 하던 바다를 곁에 둔, 분명 아름다울 나라를 만들었다며 기뻐했다.
"나는 그 소식이 나비같아서 좋았어요. 꽃이 핀 것 같아서. 다행히도."
그녀가 죽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살아있으니 다행이라고. 사람들을 모으고 나라를 만들어 다시 일어났으니 다행이라고. 그것이 꽃이라고.
그리 말했다.
"시스파니안. 당신은 뭘 좋아해요?"
"너 가는 것."
"내가 아는거 말고 다른 거요."
"너 안 오는 것."
그리고 여전히 귀찮게 굴었다.
제멋대로 충성스러운 퀴트로스 지그프리드와는 너무나 다르게, 제멋대로 말을 안 들었다.
"아무튼. 나도 퀴트로스 데리고 나라 하나 만들까봐요."
그리고 이렇게 개국선언을 했다.
* * *
그는 자신이 한 말을 잘 지켰다.
앞으로 나서겠다 하더니 정말 사람들을 모았다.
세상을 구하겠다 하더니 정말 모두를 살렸다.
나라를 세우겠다 하더니 정말 만들어냈다.
카이리스.
봄이 오는 곳.
그에게 딱 어울리는, 그가 지었을 수 밖에 없을 그런 이름을 가진 나라를 세웠다. 다 무너진 옛 왕국과 망가진 옛 영토 위에 새로운 영웅이 다스리는 새로운 나라를 만들었다.
"나 당신 좋아하는데요. 시스파니안. 아마도 꽤 오래 전부터요."
그리고는 이렇게 나를 붙들었다.
나는 유희중인 고룡이 아니었다. 인간의 삶을 흉내내며 지독하리만치 긴 세월의 한 조각을 흘려보내던 중이 아니었다.
나는 나의 존재 그 자체로 머무르고 있었다. 그 역시 그것을 알았다. 알면서도 제멋대로 굴고 있었다.
"나는 아니야."
단 한 번도 그의 이름을 부른 적 없었고, 제대로 된 말 한 번 해준 적 없었다. 나는 그저 세렌티를 대신해 인간들의 버팀목이 되어주고 있었을 뿐.
나는 인간이 아니었다.
잠든 세렌티를 되찾아올 방법을 찾는 것만으로도, 어린 동족이 죽지 않도록 지켜내는 것만으로도, 이 세계를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바빴다.
"인간들이 사는 곳은 너무 비좁고, 답답해."
너무 비좁고 답답하다. 게다가 시끄럽고 짜증나고 비가 내린다. 비좁고 답답하고 시끄럽고 짜증나고 비가 내리는 곳에서 산다. 인간은 그런 곳에서 산다.
그런 곳에서 너무 짧은 생을 산다.
"그래서 너랑은 절대로 결혼 안 해."
싫었다.
당장 둥지로 돌아가 백 년 쯤 잠들고 싶을 만큼, 그렇게 해서라도 그가 찾아오지 못하게 하고 싶을 만큼 싫었다.
"음. 알겠어요."
항상 말을 안 듣던 그가 어쩐 일로 이렇게 대답했다.
그리고는 마을 하나 크기의 왕궁을 짓기 시작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날.
나는 세상을 구한 영웅을 죽여버릴 뻔했다.
* * *
대부분의 인간은 편협하고 자만했으며 나약했다.
그는 편협하지 않았고 자만하지 않았으며 강인했다. 자상하고 생각이 깊고 잘 웃었고 말을 예쁘게 했다.
그리고 이기적이었다.
지독할만큼 이기적이었다.
"결국 너는 떠날테고, 결국 나는 남겨질텐데."
그렇게 끝날 것을 이미 다 알면서 왜 그렇게 나를 붙드는지 물었다.
"나에겐 생의 전부라서. 내가 당신 생애의 일부라도 되었으면 해서. 이기적이라 해도 그랬으면 해서."
내가 절대로 그에 대한 기억을 잊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를 불렀다. 기억하지 말고 추억해달라며 나를 불렀다.
"당신은 잘 모르겠지만. 나중에 언젠가 눈이 내리면 어느날 당신을 귀찮게 했던 내가 생각나서 인상을 찌푸리고, 바다를 볼 때 당신을 쫓아와 시끄럽게 굴던 내가 생각나서 짜증이 나고. 나비를 볼 때 꽃이 필 것 같아 좋다고 했던 내가 생각나서 웃고. 그냥 기억하는 것 말고 그런거요."
그런 것이 추억이라고, 그리 말했다.
"이기적인 건 알지만, 그래도 그랬으면 해서요. 나도 어쩔 수가 없어서."
그 지독함에 사무쳐 떠나려는 나를 붙들어 잡았다.
"대체 내가 너를 얼마나 더······."
"사랑해요."
그는 정말이지.
정말이지 지독할만큼 이기적이었다. 끝끝내 이기적으로 굴었다.
그 손을 뿌리치지 못했다.
언젠가부터 이미, 아마도 꽤 오래 전부터, 나 역시 그러했으므로.
* * *
"시스."
"안돼."
"파니."
"아니야."
새로 만든 나라에서 새로운 왕의 왕비가 되었다. 인간들은 기뻐했고 그는 행복해했다.
그리고, 아이를 가졌다.
그는 이름짓는 것에 정말로, 정말로 소질이 없었다. 나라 이름을 짓고 수도 이름을 지은 것으로 제 할 일을 다했다는 듯 굴었다.
"베른."
"싫어."
잊혀지지 않는 영웅.
잊히지 않는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그래서 싫다 하였다.
인간의 생은 너무나 짧고 또 짧으니 결국 그는 나를 떠날 것임을 알았다. 결국 영웅은 잊혀지고 지워질 뿐이니, 모두가 잊은 뒤에도 나 홀로 기억할 것을 알았다. 그런 이름을 내 아이에게 주고 싶지 않았다.
"카밀론."
나비.
좋아한다고 했던 그 이름이 그의 입에서 툭 나왔다.
"좋아."
"아, 드디어 정했다."
그가 웃었다.
내가 여전히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은 것을 떠올렸을텐데도, 사랑한다는 말 한 번 해주지 않은 것을 알면서도, 아이 이름을 정했다며 웃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아이가 태어났다. 나의 검은 머리와 그의 녹빛 눈을 그대로 닮은 것이 신기해서, 작은 축복을 주었다.
아이가 말을 하고 키가 크고 자라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흘러갔다.
그는 그만큼의 세월 속에 묻혀갔다.
시간을 묶어둘 수 없는 나는 나약했다.
시간은, 세월은.
세렌티가 내려준 인간의 날은 짧았다.
세어보지 못할 시간을 살아낸 나에게, 그 날은.
너무 빨리 찾아왔다.
* * *
하츠아라. 가지 마.
사랑해.
그는 웃었다.
나는 울었다.
* * *
나를 위해 지은 왕궁은 그리도 컸는데.
그를 위해 지은 무덤은 너무나 작았다.
매일같이 그 곳을 찾았다.
더는 만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면서 찾아갔다. 하루하루 시간이 가지 않아서 찾아갔다.
혹시 올까.
혹시 볼까.
나비가 되어 그를 찾아갔다.
우리의 아이도 떠나고 그 아이의 아이가 떠나도록 나는.
검은 나비가 되어 그의 곁을 찾아갔다.
죽은 왕의 곁을 맴도는 검은 나비.
그것이 나였음을 잊은 이들이 새로운 말을 만들어낸 것도 모르는 채 나는.
봄이 오길 기원하는 마음으로.
* * *
그리하여 여전히 나는 지나간 시간을 회상한다.
나의 회상은 여전히 반갑고, 여전히 기쁘고, 여전히 행복하다.
그리고 여전히 아련하고, 여전히 우울하고, 여전히 슬프다.
그 뒤에는 여전히 아프다.
망각을 모르는 기억 때문에, 그것이 추억임을 이제는 아는 탓에.
나 홀로 그리움에 남겨졌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