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164화 (165/527)

제28장. 하나도 안 평화로울걸 (2)

그저 살고자 했을 뿐인데.

길을 나서면 비가 내리고 손에 쥐고 나면 놓게 되고 간신히 벗어나 올라오니 다시 내려오라 부른다.

선택이 잘못된 것인지.

운명이 잘못된 것인지.

하기사.

그토록 증오하던 놈까지 굳이 살리고자 살고 있으니, 틀어질대로 틀어진 삶을 두고 무언가를 탓하겠다 말하기도 힘겹다.

"하······."

그래서 칼리안은 그냥 한숨만 한 번 쉬었다.

그리고 바로 조금 전 미련 없이 돌아섰던 헤이시아 궁의 지하로 다시 내려갔다. 그래도 베른을 떠올리며 잠겨드는 기분을 또 느낀 것은 아니었으니 그것 하나만은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아래로 내려가자 조금 생소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늘 닫혀 있던 석문이 열려 있었다.

항상 잠시동안만 열렸다가 곧 닫히던 문이었는데 지금은 활짝 열려 있었다. 마치 초대한 이를 기다리는 것처럼. 그 갑작스러운 초대에 응한 칼리안이 한 발자국 안으로 들어서니 이제는 익숙해진 듯한 소리와 함께 석문이 닫혔다.

칼리안은 그것만으로도 다시 한 번 깨달을 수 있었다. 정말로 이 곳의 주인이 찾아와 있다는 것을.

문 앞에 선 칼리안이 내딛으려던 발을 멈췄다. 그리고 말 없이 앞을 바라봤다. 예상치 못한 무언가를 발견한 까닭이다.

날갯짓.

이 비와 절대로 어울리지 않을 한 생명의 가느다란 날갯짓.

- 팔랑.

나비였다.

작고 검은 나비 한 마리가 칼리안의 앞을 지나쳤다. 그리고는 팔랑 팔랑 날갯짓을 해 가며 방 안의 이곳 저곳을 날아다녔다. 석벽의 조각을 제멋대로 둘러보듯이, 하지만 뒤따르는 눈길을 충분히 잘 알고 있다는 것처럼 날고 있었다.

나비의 뒤를 따라 반짝이다 사라지는 까만 빛무리에 시선이 머무른다. 만약 저 하늘 어딘가에 검은 별이 있다면, 그 별의 발자국을 흩뿌리는 것 같다고 칼리안은 그렇게 생각했다.

- 팔랑, 팔랑.

곧 검은 나비는 날아다니는 것이 진부해진 것처럼 굴었다. 그리하여 그 날갯짓이 조금 느려진 것이 확연히 눈에 뜨일 때 쯤, 나비는 방향을 돌려 축의 파편을 향해 날았다.

그리고는 칼리안이 무슨 수를 써도 들어가지 못했던 벽을 쉬이 지나 파편의 위에 보란듯이 내려앉았다.

그것을 보던 칼리안이 나비의 날갯짓같은 가느다란 호선을 입가에 그려냈다.

"검은 나비는."

그 작고 검은 나비를 향해 이렇게 말을 건넸다. 고작 나비 한 마리를 앞에 두고 꺼내진 것이라 하기에는 지나치게 정중한 목소리였다.

"죽음을 뜻합니다. 그래서 그리 환영받지 못합니다."

마치 그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나비가 날개를 한 번 팔락였다.

그러자 지금껏 나비의 뒤를 따라 반짝이던 검은빛의 입자가 나비의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마치 나비를 중심으로 작은 우주가 만들어진 것 같은 모양새를 냈다.

밤을 담은 색이 어찌 저리도 찬란하게 빛날 수 있을까!

칼리안은 진심으로 감탄하는 눈을 한 채 칠흑의 반짝임을 잠시 지켜봤다. 조금씩 모여든 빛무리가 어느새 작은 나비의 몸을 가릴 만큼 늘어나더니 점점 더 그 크기를 부풀려 나갔다. 그리고는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이며 형태를 빚어나갔다.

인간의 것에 비견되지 않을 존귀함을 지닌 이의 모습으로 변화해갔다.

"그러니 오직 너에게만은 환영받을 수 있지 않겠느냐."

구불구불한 긴 머리카락의 끝에 그 반짝임이 잠시 머물다 천천히 사라져 갈 때 쯤. 나비이기도 했고 밤하늘이 담긴 빛이기도 했으며 스스로 위대한 존재이기도 한 시스파니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칼리안의 말에 대한 답을 전했다.

칼리안은 깊은 미소를 드리운 채 고개 숙여 예를 보였다.

"지극히 위대한, 시스파니안을 뵙습니다."

자신이라면 죽음을 반겨주리라는 말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였다.

칼리안의 앞에 다시 한 번 나선 태고의 고룡, 지그문트 칸 시스파니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말 없이 칼리안의 눈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이해하고자 했다. 하여 다시 너를 불렀다."

지금 시스파니안은 그 존재 자체를 드높일 피어를 전혀 내보내고 있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고개 숙이고 무릎 꿇어야 할 것 같은, 스스로의 목을 졸라야 할 것 같은 그 대단한 공포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생명이 있다는 가장 근원적인 존재감조차 드러내고 있지 않았다. 마치 이 곳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그래서 칼리안 홀로 이 곳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덕분에 칼리안은 잠깐 고민할 수 있었다.

당신이 살던 궁을 부숴버린 이유를 변명해서 이해시켜 드려야 할지, 혹은 시스파니안이 지나치게 사려깊어서 축복의 힘이 너무 약하다 욕했던 점을 사죄하는 것으로 이해시켜 드려야 할지에 대해서.

"무엇에 대한 이해를 말씀하십니까."

시스파니안이 고개를 돌려 칼리안을 봤다.

칼리안은 이제 막 방 안에 들어선 참이었다. 그리고 시스파니안은 발을 옮겨 마지막 조각이 새겨진 벽화 앞에 선 채로 대답했다. 둘의 거리가 꽤 멀었으나 마치 칼리안의 귓가에 속삭이는 것 같은 작지만 또렷한 음성이었다.

"무엇이어도 좋겠지."

아······.

초대왕 하츠아라시여.

도대체 저런 분이 어디가 좋아서 청혼을 하셨습니까? 제대로 된 대화가 불가능한 분인데요.

이쯤되니 알겠다. 말이 짧은 것은 유전임이 분명하다. 르메인도 말이 길지 않고 란델은 아예 말이 없다. 심지어 나머지 한 놈은 삶은 완두콩이다. 놈에 대해서는 생각해봐야 머리만 아프고 말해봐야 공기가 아깝다.

그런 칼리안을 본 시스파니안이 조금 웃는 듯한 얼굴을 했다. 표정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으나 어쩐지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러니까 방금 전 칼리안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말이다.

다행히 시스파니안은 자신이 살던 옛 궁을 시원하게 없애버린 것을 힐난하려 들지는 않았다.

"재앙의 파편이 있는 곳에 걸음을 해도 될 이를 구분하지 않더구나."

재앙의 파편.

시스파니안은 시간의 축의 파편을 그렇게 불렀다. 시간의 축을 재앙이라 이름했다.

그것이 너무나 정확한 표현이라서 칼리안이 저도 모르게 웃음 소리를 냈다. 그 후에 시스파니안이 꺼낸 말의 뜻을 가늠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뒤, 지금 시스파니안은 칼리안이 이 곳에 플란츠를 데려온 것을 질책하는 말을 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시간의 뒤얽힘과 무관한 이에게 사실을 알리고 시간의 축을 보여준 일에 대해서. 그 행동의 경솔함에 대해서.

"제게는 치유 받을 권리조차 없는 것입니까."

그리하여 이렇게 물었다.

그것조차 할 수 없느냐고.

"아무도 모를 칼날을 끌어안아 상처입고 짓무르고 곪아서. 썩은 것을 도려내고 도려내어 끝내 아무것도 남지 않도록, 그리 살아야 할까요. 저는. 그래야 합니까."

원망.

그래 원망하였다. 화풀이를 하였다.

많은 것을 알면서 아무것도 말해주지 못하는 시스파니안에게, 사실은 시스파니안의 귀를 빌려 세렌티에게. 화풀이 같은 원망을 전했다. 이미 잘 알고 이해하고 결정하여 받아들인 것임에도 그렇게 말했다.

- 사락······.

시스파니안이 칼리안을 향해 몸을 돌려 섰다.

길게 내려온 머리카락 끝이 석벽을 스쳤다. 그 작은 소리가 심장 박동만큼 크게 들렸다.

시스파니안은 생명의 힘이 가득 담긴 듯한 그 붉은 눈으로 칼리안의 핏빛 눈을 쳐다봤다. 결국 자신과 같은 색의 그 눈을 깊이 내려다보다 고요한 바람결에 떨구어진 나뭇잎 같은 대답을 내려놓았다.

"내가 이해하였다."

그렇게만 대답했다.

자신의 질책에 대한 칼리안의 대답을 이해했다고. 다 짓이겨지도록 힘껏 품어두었던 속마음을 이해했다고.

- 원망도 화풀이도 못하게 되어서 곤란해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제야 조금 전 플란츠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시스파니안은 시간의 축이 있는 곳에 재앙이 있는 곳에 플란츠를 데리고 들어온 칼리안을 보았다. 그 속내마저도 함께 보고 들었다. 그래서 이렇게 와주었다. 그 누구에게도 꺼내놓지 못할 원망과 화풀이를 들어주려고.

그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이 사려 깊은 고룡이 이 곳에 왜 왔는지를 이제야 이해한 칼리안이 고개를 숙였다.

"······ 감사합니다."

* * *

마법사의 옷은 하나도 젖지 않았다.

단지 그것이 신기해서, 제 손으로 우산을 든 것이 조금쯤 어색했던 플란츠가 앨런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칼리안이 형제의 미친짓에 겁을 먹기를 그만두었다던 말을 집어던지듯이 건네고 사라진 앨런이었다. 그 후로 이렇게 맞닥뜨린 것이 처음임을 깨달았다. 물론 그동안 발칸의 일로 몇 번을 만나기는 했으나 그 때마다 정신머리가 온전하지 않은 것이 분명한 마법사 한 명이 꼭 끼어 있었으니까.

"안녕하십니까, 플란츠 왕자님. 이런 곳에 홀로 무슨 일이신지요."

플란츠를 본 앨런이 예를 보이더니 곧바로 질문을 했다.

카이리스에서는 왕족이 예를 받기 전에는 먼저 입을 열 수 없었고 리베른에서는 아니었다. 다만 앨런이 그 정도의 예법을 혼돈해서 이렇게 말을 건넨 것은 아니었다. 물론 그렇다 해서 무례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신경을 안 쓰는 것일 뿐.

그래도 될 정도의 능력은 있는 사람이니까.

사실 플란츠 역시 예법을 잘 지키고 있다 보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랬다면 얇은 가디건 차림으로 밖에 나오지도 않았을 테고 제 손으로 우산을 들고 서 있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 비에 맞을지언정 제 손에 들린 것 하나 없이 늘 꼿꼿이 서 있어야 하는 왕족이 아닌가.

플란츠는 앨런의 태도를 지적하는 대신 잠시 입을 다물었다.

빗속에 멀뚱이 서서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해야 할지, 같이 오다 훌쩍 가버린 동생놈 덕분에 어디로 가야할까를 다시 결정하고 있었다 해야 할지, 갑자기 왕궁을 찾아온 전설 속의 조상님이 헤이시아 궁의 지하에서 살아 숨쉬고 계시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깊이 고민중이었다 해야 할지.

"당신은."

그래서 그냥 이렇게 되물었다. 왕자니까. 대답 쯤이야 안 하고 넘겨도 무방한 것이다.

예법을 챙길 때에야 왕족이 아닌 것이 좋지만 또 이럴 땐 왕족인 것만큼 편한 위치가 어디 있겠는가.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그런 플란츠의 꼬락서니를 보던 앨런이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며 이렇게 말했다.

뭐 하냐 묻는 말에 그러는 너는 뭐 하냐 되묻고 그에 대해 실례한다고 대답했으니 아무튼 지금 서로 할 말만 하고 있는 상황이 맞다.

그러거나 말거나 앨런은 실례하겠다 말했으니 하고자 한 일을 계속 했다. 애초에 지금 하려는 일에 허락을 구할 생각으로 꺼낸 말도 아니었다. 플란츠가 왕자라면, 앨런은 앨런 마나실이니까.

- 딱!

경쾌한 소리가 앨런의 손 끝에서 나오자 비에 쫄딱 젖어있던 플란츠의 머리와 옷이 일순간에 마르며 깨끗해졌다.

그러고보니 칼리안은 끝끝내 플란츠의 옷을 말려놓지 않고 내려가버렸다. 애초에 그런 것까지 신경 써 줄 사이도 아니었으니 그건 됐다.

비가 그치지 않으니 곧 다시 젖겠지만 잠시 찾아온 쾌적함이 영 싫지는 않았다.

"마법사. 당신은 여기 왜 왔는데."

그래서 플란츠는 이렇게 쾌적해진 마음을 담아서 조금 더 정확한 질문을 해 줬다.

마법에 대해 잘 아는 것은 아니었으나 칼리안이 자신을 부르고 있다 했지 않나. 그러니 앨런이 시스파니안의 기운을 느끼고 이 곳에 온 것은 아닐 터였다. 만약 그랬다면 앨런이 이렇게 여유를 부리고 있지도 못했으리라. 플란츠에게 있어서는 그냥 좀 오래된 조상님이지만 마법사들에게는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던가.

"잠시 둘러보고자 왔습니다."

플란츠의 생각이 맞았는지 앨런이 이렇게 대답했다. 저 아래 무엇이 있는지 플란츠가 이미 보았음을 몰랐으므로 '벽에 조각된 것을 다시 꼼꼼히 둘러보려 한다'는 방문 사유를 정확히 말하지 않은 채였다.

"나중에 오는 게 좋을 것 같은데."

플란츠가 이렇게 대답했다.

가디건 끝이 다시 젖어드는지 조금씩 묵직해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이렇게 긴 것을 입고 나오지 말 걸 그랬다.

플란츠가 고개를 돌려 계단 쪽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내 아우님께서 먼저 둘러보고 계시는 중이라."

칼리안과 플란츠가 함께 이 곳에 온 것으로 보이는데다 '아래' 무언가 있다는 것을 이미 안다는 듯한 반응이다. 때문에 앨런은 복잡해진 얼굴로 플란츠를 쳐다봤고 플란츠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들었어. 시간의 축. 내가 뭘 했는지도."

어차피 앨런은 칼리안에 대한 모든 비밀을 아는 사람이다. 그것을 플란츠도 알았다. 그래서 플란츠는 적당히 얼버무리지 않고 확실하게 알렸다.

플란츠의 얼굴을 잠시 쳐다보던 앨런이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누어 드셨다더니, 정말이었나 봅니다."

체이스가 카이리시스를 떠났던 날 사제간에 오고갔던 수많은 이야기 중 플란츠에 대한 말이 나왔었다. 체이스가 가져온 신 귤을 세상이 멸망할 것 같은 표정이 된 플란츠가 같이 먹었다는 말도 그 안에 들어 있었다. 그래서 하는 말이었다.

그런 앨런의 말 뜻을 알아들었을 리 없는 플란츠가 미간을 찌푸렸다. 나눠 먹은 게 하도 많아서 대체 뭘 말하는지도 몰랐지만 내새끼한테 친구 생겼다고 좋아하는 것 같은 앨런의 얼굴이 딱 짜증난다는 것만은 잘 알 수 있었다.

그래도 저보다 세 배는 넘는 세월을 산 대마법사에게 짖지 말라는 말을 할 만큼 위아래 없는 성격은 아니었으므로, 플란츠는 그냥 그대로 입만 다물었다.

"알겠습니다. 나중에 다시 오지요."

앨런은 다른 설명을 덧붙이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뭐가 됐건 칼리안이 이미 지하에서 무언가를 확인중에 있고 플란츠가 방해하지 말아달라 얘기하고 있으니 굳이 아래로 내려가 볼 이유가 없었다.

다만 앨런은 바로 돌아가는 대신 잠시동안 플란츠를 쳐다봤다. 그리고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당부하듯 말했다.

"혹여 나중에 악몽을 보시더라도, 그것을 감당하겠다며 스스로 쌓지도 않은 탑에 갇혀 지내지는 마시지요."

현명한 마법사는 제 자식같은 칼리안이 지금 무엇을 가장 걱정하고 있을지 잘 알았으니까.

"탓하고 책임 지우기 위한 길이 아니라 살려놓기 위한 길을 홀로 걷는 분이니 그것을 바라지는 않으실 겁니다."

그것이 세크리티아든 카이리스든 체이스든 플란츠든. 이유가 있어 망가져간 것을 전부 되돌려놓겠다며 끌어안고 있는 이가 아니던가.

"알아. 나도."

플란츠가 짧게 대답했다.

앨런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하면, 알아준다 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니까.

덕분에 앨런은 다시 한 번 내새끼 친구 보듯 플란츠를 쳐다보게 되었고, 덕분에 플란츠는 다시 한 번 인상을 찌푸리게 되었다.

* * *

검은 돌이 누군가 만든 신물인지 물었다.

시스파니안은 누군가 만든 것은 맞다고 답했다.

"이면의 힘을 담았으니 세렌티의 손길이 닿은 것은 아니다."

세렌티의 신물은 아니라는 말이었다.

다만 또 한 번 늘어난 수수께끼 같은 말. 이면의 힘.

"너를 믿는 아이들이 나섰다. 때가 되면 너 역시 알 수 있겠구나."

시스파니안은 그것에 대해 자신의 입으로 전하지 못한다는 말을 대신해 이렇게 일러주었다.

믿는 아이들이 정확히 누구를 의미하는지 알아듣지는 못했으나 문득 에우리아가 떠올랐다. 때문에 칼리안은 에우리아가 여전히 그것을 조사하는 중인지 확인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다가 다시 물었다.

"축의 파편은 혹시 당신께서 찾고 계시는 것입니까."

"세상에 나타난 것을 내가 이 곳에 두었다."

시스파니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고 칼리안은 그 고갯짓을 따라 온 세상이 흔들거리는 기분을 느꼈다.

"다른 조각은 어디에 있습니까."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왜 당신이 이것을 찾아와 이런 곳에 두셨습니까."

시스파니안이 나지막한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마지막 말을 전했다.

"네가 직접 거두어야 할 물건이 되었으니."

칼리안이 이 재앙을 사용하기 위해서 거두어야 한다는 것인지 부서뜨려 없애기 위해서 거두어야 한다는 것인지. 그것만은 알려주지 않은 채.

마지막 조각이 새겨진 석벽 앞에 한동안 머무르던 시스파니안이 고개를 돌렸다.

검은 나비 한 마리가 칼리안의 곁을 스쳐 날아가 눈에서 보이지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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