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82화 (83/527)

제17장. 그 걸음 (2)

늦은 밤, 혹은 이른 새벽.

무엇이라 해도 좋을 그 어두운 시간.

실낱같은 바람이 방 안을 한 번 맴돌자 침대에 누워 있던 플란츠가 조용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바람결에 눈을 뜰 줄 아는 이가 비단 칼리안만 있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플란츠는 베개 밑에 두었던 검을 꺼내드는 대신 입을 다문 채 어둠 속을 살폈다. 예상한대로 창을 통해 들어온 달빛에 동생의 붉은 눈이 비춰지는 것을 본 플란츠가 피식 웃었다.

"마법사. 한가하군."

플란츠는 창문을 열어두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리안이 플란츠의 침실에 들어설 수 있던 이유는 단 하나. 시스파니안의 경보 마법이 누군가에 의해 작동을 멈추었기 때문이었다. 이 카이리스에 그런 짓이 가능할만한 사람은 물론 앨런 마나실 외에는 없었다.

"스승님께서도 두 번은 못하겠다 하셨으니, 또 올 일은 없을 겁니다."

이 비범하기 짝이 없는 형제간의 만남을 위해 잠시 동원되었던 쓰임새 많은 스승을 생각하며 칼리안이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플란츠가 짧게 물었다.

"왜 왔는데."

칼리안은 그 말에 대답하는 대신 침실 안에 놓인 작은 소파로 가 앉았다. 그리고 한동안 말 없이 플란츠의 얼굴을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물어볼 것 하나, 권해줄 것 하나, 그리고. 고마운 것 하나."

아마 절대로 입에 담고 싶지 않았을 '고마운 것' 때문에 잠시 뜸을 들인 모양이었다. 칼리안의 얼굴에 딱 그렇게 쓰여 있었다. 내가 저런 놈한테 고맙다는 말을 해야 할 날이 오다니, 라고.

물론 칼리안이 고마워 할 일이라고는 딱 하나였다. 칼리안의 시녀를 도와준 혹은 살려준 일을 말하는 것이리라.

란델의 앞에 선 시녀가 아무 말 없이 품 속에 손을 넣어 무언가를 꺼내려 했다. 그것이 수첩일지 아니면 암기일지 호위가 어찌 알겠는가. 그러니 플란츠가 그 앞에 서지 않았다면 무슨 결과가 생겼을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다만 플란츠 역시 칼리안같은 놈한테 고맙다는 말을 듣고 싶지는 않았다. 그 시녀 히나에게 이미 듣기도 했고.

그래서 플란츠는 곧바로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마지막 것은 관심 없는데."

그 말에 칼리안이 실소하며 '물어볼 것'을 먼저 입에 담았다.

"혹시 저와 손잡은 것을 란델 형님께서 눈치채셨습니까."

"그래."

플란츠는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고 칼리안은 낮은 한숨을 쉬었다. 플란츠와 손을 잡은 것을 가능한 오래 숨기려 했는데 예상치 못한 일로 틀어진 까닭이었다.

"왜들 그렇게 눈치가 빠른지."

말은 그렇게 하지만 하루하루 목숨을 내놓고 사는 것과 마찬가지인 왕자들이니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을 이미 잘 알았다. 당장 칼리안만 보아도 카이리스에서 살기 시작하면서 단 하루도 마음을 놓은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반응은요."

"그다지, 별로."

왕위를 포기한 것이 둘 중 누구였든 란델에게 손해가 될 일은 없었다. 그러니 둘의 동맹을 공개하여 두 세력을 하나로 합치려 하지 않는 이상은 경계하지 않을 터였다.

"네. 어쨌거나 저는 행동에 더 조심을 해야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말한 칼리안이 두 번째 말을 꺼냈다.

"오늘 하루만 더 아프실 생각은 없습니까. 발칸의 창단식에도 나오시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요."

이것은 칼리안에게 득이 될 이유가 있어서라기보다는 세번째 목적이었던 '고마움'과 연관된 소리였다. 즉 히나를 도와줬으니 플란츠를 한번 배려해주기 위해 건넨 말이었다.

실리케가 무언가를 하기 위해 마음을 먹었다면 발칸이 창단되기 직전에 일을 벌일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칼리안에 대한 복수심이 부글부글 끓고 있을 테니 칼리안이 그렇게 추진해오던 일과 칼리안을 한꺼번에 망쳐놓기로 결심을 했을 터였다.

그러니 플란츠가 발칸의 창단식에 나온다면 실리케가 일을 벌이는 것을 목격하게 될 터였다. 그러느니 그냥 보지 않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플란츠는 한참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한참이 지난 뒤 낮게 내려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주제 넘는 짓은 거기까지."

"굳이 참석을 하시려는 겁니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칼리안은 그런 플란츠를 더 설득하려 하지 않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다만 칼리안은 그대로 물러나지 않고 경고의 의미를 담은 말을 덧붙였다.

"대신 이번에는 무슨 일이 생겨도 끼어들지 마십시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돌아갔다.

고맙다는 말은 진짜 생략한 채로.

* * *

- 사락······.

청포도 빛의 아름다운 드레스 위로 실리케의 에메랄드 색 머리가 흘러내렸다.

결 고운 머리를 빗겨 내려가는 시녀의 얼굴이 잔뜩 경직되어 있었다. 며칠 전 칼리안이 다녀간 이후로 망가진 실리케의 기분이 좀처럼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금만 심기가 틀어져도 소리를 지르기 일쑤였다.

아니 소리만 지른다면 다행이었다. 그동안 벌써 몇 명의 시녀가 실리케의 손찌검에 당하고 또 실리케가 던진 물건에 맞아 다쳤는지 모른다.

"머리를 올리겠습니다."

실리케는 대답하지 않았다. 거울 속에 보이는 자신과 눈을 맞추고 있을 뿐이었다. 그 모습을 스치듯 쳐다본 시녀는 곧 실리케의 머리를 굵게 땋아 틀어올리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문득 이런 날을 계속 견디느니 집으로 돌아가 아버지가 마음에 들어하던 젊은 남작과 결혼이나 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 남작 부인도 나쁘지는 않아.

결혼해서 살다보면 그런 생활도 익숙해지겠지.

그런 상념이 너무 깊어서였을까.

순간적으로 시녀의 손이 방향을 잘못 찾아가고 말았다.

- 툭.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작은 소리가 났고 그 후에야 상황을 파악한 시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머리를 고정할 핀을 집어들다 실리케의 머리를 손 끝으로 툭 건드리고 만 것이다.

거울 속에 보이는 실리케의 눈이 시녀를 향해 치켜 떠졌다.

실리케는 사과할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돌렸고 세차게 손을 휘둘렀다.

- 짜악!

실리케가 시녀의 뺨을 후려치는 소리가 침실을 날카롭게 훑고 지나갔다. 몸을 휘청이던 시녀는 맞은 곳의 아픔을 느낄 겨를도 없이 무릎을 꿇었다. 방금 전 자신을 노려보던 그 연두색 눈이 너무 무서워서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 짜악!

실리케의 손바닥이 다시 한번 시녀의 뺨을 내리쳤다. 지금껏 말 한마디 하지 않은 채였다.

곧 실리케는 옆에 서 있던 시녀장을 향해 고갯짓을 했다.

그 의미를 아는 시녀장은 실리케가 시녀에게 다시 손을 대기 전에 얼른 밖으로 보냈다. 그리고 실리케의 앞에 허리를 숙여 보였다.

"죄송합니다. 곧바로 왕궁에서 내보내겠습니다."

실리케는 냉랭한 눈으로 그런 시녀장을 노려보다 자리에 앉았다. 그 뒤 다른 시녀가 다가와 실리케의 흐트러진 머리를 다시 빗기기 시작했다.

숨도 쉬기 어려울 시간이 잠시 지나고 머리 손질이 끝났을 때, 실리케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라온의 단장은 도착했느냐."

토요일에 제1기사단 카렌의 단장과 함께 나간 뒤 일요일에 홀로 실리케를 찾아왔던 이였다.

카렌의 단장과 함께 있을 때는 그렇게나 주저하는 얼굴을 하더니 따로 찾아온 뒤에는 완전히 다른 사람인 것처럼 당당한 태도를 보였다. 시키는 일을 할테니 자신을 카렌의 기사단장으로 발령해달라는 요구까지 해온 것이다. 실리케는 당연히 수락했다.

실리케의 질문에 시녀장이 재빨리 대답했다.

"네. 밖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 실리케가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다시 물었다.

"사라졌다던 마법사는 아직인가."

"네. 발칸이라는 집단 내에서도 보이지 않고, 아직 어디에서도 확인되지 않는다 합니다."

"그래."

그 대답을 끝으로 실리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뒤 밖으로 나가려 걸음을 옮기다 문득 떠올랐다는 듯한 얼굴로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아까 그 아이 내보내지 말거라. 쓸 곳이 있으니."

시녀장이 조금 놀란 눈을 한 채 실리케를 쳐다봤다. 한번 실수한 이를 두 번 보지 않는 실리케가 이런 말을 했으니 혹시 잘못 들은 것이 아닌지를 의심하는 것이다.

하지만 실리케는 같은 말을 다시 설명하지 않은 채 밖으로 나갔다.

라온의 단장이 명을 잘 수행했기를, 그래서 준비해오라 한 물건을 가지고 왔기를 바라면서.

* * *

헤이시아 궁에 숨이 멎을 듯한 긴장감이 가득찼던 그 시간.

마찬가지로 옷을 입고 머리 손질이 끝나기를 기다리던 칼리안이 침실 커튼 너머로 보이는 앨런을 향해 물었다.

"오늘 전하께서 스승님께 백작위를 내리실 예정이라 들었습니다. 잘 되었습니다."

공식적으로 언급을 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소문이라는 것이 본디 비공식적이고 출처를 알기 어려울수록 빨리 퍼져나가는 법이 아닌가. 때문에 그 소식이 칼리안의 귀에 들어오는 것에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대단치 않은 일입니다. 발칸의 출정식이 더 중요하지요."

어차피 앨런은 작위가 있든 없든 그 이름 하나만으로 이미 가치를 입증해 온 사람이었다. 그러니 오늘 백작이 되든 말든 그리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다.

"그래도 축하드립니다, 스승님."

"축하를 해주시니 좋기는 합니다만. 아무래도 거저 주시는 자리는 아닌 듯 하여 걱정이 됩니다. 이제 공식적으로 작위까지 받았으니 더 많은 일을 주실 것 같으니 말입니다."

"설마요."

조심스레 대답한 칼리안이 입을 닫았다. 어쩐지 앨런의 걱정이 괜한 것이 아닐 듯한 예감이 무럭무럭 들었다.

잠시 뒤 칼리안이 준비를 마치자 얀이 걸어가 침실을 막고 있던 커튼을 올렸다. 그리고는 시간을 확인한 뒤 말을 건넸다.

"바로 식사를 준비하라 하겠습니다."

그날 칼리안은 조찬에 가지 않았다.

앨런이 갑자기 찾아오는 바람에 그와 함께 아침 식사를 하기로 한 것이다.

"그래. 고마워."

고개를 숙여보인 얀이 밖으로 나간 뒤, 칼리안과 앨런만 방에 남게 되었다. 칼리안은 그제야 앨런을 제대로 보게 되었는데 덕분에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못 보던 옷을 입으셨는데요. 대단치 않은 일이라 하신 분은 어디 계십니까?"

백작이 되든 말든 신경쓰지 않는다던 사람이 처음 보는 고급스러운 옷을 쫙 빼입고 앉아 있었다. 작위 수여 이후에는 발칸의 군단장임을 뜻하는 로브를 걸쳐야 했으니 저 멋들어진 옷은 분명 작위 수여를 위한 것일 터였다.

심지어 앨런은 지난 새벽에 칼리안이 플란츠의 방에 들어가는 것을 도왔다. 그 피곤한 몸을 이끌고 저렇게 멋을 부리고 왔다는 소리였다.

칼리안의 웃음에 앨런이 조금 부끄러워하며 말했다.

"레이첼이 마련해 준 것이니 그리 보지 마시지요."

"멋집니다. 잘 어울리시네요."

앨런의 며느리인 레이첼이 새 옷을 맞춰 준 모양이었다. 아침에 새 옷을 입니 마니 꽤나 신경전을 벌였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그것을 상상한 칼리안이 다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그 웃음은 칼리안이 앨런의 맞은편에 앉기 전까지만 이어졌다.

"그래서."

자리에 앉은 후 이렇게 입을 열며 앨런을 마주 보는 칼리안의 얼굴에서는 장난스런 웃음이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앨런과 농담을 주고 받을 때와는 확연히 달라진 눈빛을 한 칼리안이 하려던 질문을 이어나갔다.

"브리센 후작이 전하께 다녀갔습니까."

평소에도 불쑥불쑥 오던 앨런이기는 했지만 이런 바쁜 날 아침에 찾아왔다면 필시 다른 이유가 있으리라 여겼다.

이를테면 실리케가 대체 무슨 일을 벌일지 몰라서 애가 잔뜩 탄 에반 브리센이 갑작스럽게 르메인을 찾아왔다거나 하는 그런 일 같은.

아니나 다를까, 앨런이 살짝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조금 전에 브리센 후작이 전하와 독대를 마치고 갔습니다."

"실리케를 잡는 것에 협조할테니 이번에 실리케가 벌이는 일에서 브리센 가문까지 피해를 입지 않게 해달라. 그런 말을 했을 테고요."

"네. 왕자님의 생각과 똑같은 말을 하고 갔지요."

곧 앨런이 자초지종을 설명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헤르츠 경이,"

하지만 거기까지.

- 콰아앙!

결코 무시할 수 없을 폭발음이 울려퍼졌고, 앨런의 말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테라스의 창문이 우르르 흔들릴 정도의 진동이 함께 느껴졌다. 칼리안과 앨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테라스로 나갔다.

그리고 보여지는 광경에 칼리안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 소리를 냈다.

"내가 아무리 오래 못 있을 것이라 했다지만······."

들은 대로, 그리고 느낀 대로였다.

폭발이었다.

그것도 카이리스 왕궁 안에서 일어난 폭발이었다.

헤이시아 궁에서 검은 연기가 풀풀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것을 보는 칼리안의 입가에 의미를 읽어내기 어려울 미소가 드리워졌다. 옆에 서 있던 앨런 역시 그리 당황하지 않은 얼굴이었다.

"이번에 실리케가 저에게 줄 누명은 꽤 화려하네요. 이걸 고맙다 해야 할지."

과거의 실리케는 옛 칼리안이 자신을 독살하려 했다는 누명을 씌웠었다. 그것을 빌미로 옛 칼리안을 암살했었다.

이번에도 실리케의 사고방식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저 폭발의 범인이 왕자님이라 몰아세우려는 수작을 부린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지 않고서야. 헤이시아에서 폭발이 생길 일이 있겠습니까."

이렇게 대답한 칼리안이 여유로운 얼굴을 한 채 속삭이듯 말했다.

"처음에는 독을 주시더니, 이제 누명까지 주시려 하니."

받기만 해서야 되겠습니까.

이제는 갚아도 드려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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