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81화 (82/527)

제17장. 그 걸음 (1)

실리케.

그리고, 에반 브리센.

과연 누가 더 먼저인가.

르메인이 사냥을 하겠다며 기사단 카에라 앨런까지 모두 대동하여 궁 밖으로 나가자, 실리케가 기다렸다는 듯이 기사단 라온과 카렌의 단장들을 불렀다.

당연히 둘은 최근 파벨의 기사들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되도록 실리케의 눈에 띄지 않으려 나름대로 몸을 사리고 있었다. 그런데 실리케가 직접 이들을 찾은 것이다.

결국 명을 거절하지 못한 두 기사단장이 실리케의 온실을 찾았다. 그리고 예상했던대로의 말을 듣게 되었다.

- 돌아오는 월요일 마법사단 발칸의 창단식.

그 자리에서 실리케가 시키는대로 일을 해 준다면 충분한 보상을 하겠다는 소리였다. 무엇을 시킬 것인지 무엇을 보상할 것인지는 알려주지 않았다.

두 기사단장은 우선 생각할 시간을 달라 답한 뒤 헤이시아 궁에서 나왔다. 깊은 수심이 그들의 얼굴에 가득했다.

"난감하기 이를 데 없군."

"나도 그렇네."

아직 무슨 일을 해주길 원하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실리케는 그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 말했을 뿐이었다.

깊은 한숨이 섞인 목소리가 카렌 단장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내일 아침까지 답을 달라 하셨는데. 자네는 어찌 할 생각인가."

라온의 단장이라고 다르지는 않았다.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젓더니 말했다.

"본래는 후작님의 명만 듣는 것이 맞겠네만."

"하지만 이 곳은 왕궁이 아닌가. 왕비님의 명을 어찌 거역하는가."

그들은 왕실의 기사단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르메인의 명을 들어야 하는 이들이었다. 그렇지만 이들의 대화 어디에서도 르메인의 이름은 없었다.

실리케의 말을 들을 것인가 혹은 에반을 따를 것인가.

오로지 그것 뿐이었다.

결국 둘은 답을 내지 못하고 헤어져 각자의 집무실로 향했다.

그리고 둘 모두 책상 위에 편지 한 통이 놓여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발신인 역시 같았다.

바로 에반 브리센 후작으로부터 전달된 편지였다.

같은 사람으로부터 두 기사단장에게 전해진 편지.

각자의 자리에서 바쁘게 눈을 움직여가며 편지의 내용을 읽어내려가는 두 단장의 얼굴이 똑같이 심각하게 굳어져갔다.

* * *

절대 잊지 말았어야 할 일이었다.

그러니 그것은 분명한 칼리안의 실수였다.

"애옹!"

장미 정원이 누구의 것인지를 알려주었어야 했다.

사냥 대회에 참석하느라 아무리 정신이 없었다지만 그 정도는 꼭 일러주고 출발을 했어야 했다.

"애옹, 애오옹!"

무슨 이유에서든 고양이가 그 곳에 가면 안 된다고 말을 했어야 했다.

그러니.

칼리안이 아직 베른의 모습을 다 버리지 못했을 때 만난 탓에 누나라기 보다는 제 동생처럼 여기면서 보호하게 된 히나가 칼리안의 눈에는 불한당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플란츠와 엮이게 된 것은.

모조리 칼리안의 잘못이었다.

* * *

그 일은 사냥대회가 있던 그 날의 조찬에서 주고 받은 대화로부터 시작됐다.

식당에 가장 먼저 도착해 혼자 앉아있던 칼리안은 이제 막 들어서는 플란츠의 얼굴을 보자마자 이렇게 물어왔다.

"심한 몸살에 걸리셨다 들었습니다. 괜찮으십니까."

플란츠는 사실 그 어떤 날보다 컨디션이 좋았다.

몸살은 커녕 재채기 한 번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플란츠는 칼리안을 향해 왜 아침부터 짖는 소리를 하는지를 묻는 대신 그냥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사냥이나 할 상태는 아니군."

아주 대놓고 사냥에 오지 말라 하고 있는데 이 외에 어떤 말을 더 하겠나.

플란츠는 칼리안이 사냥대회를 왜 이렇게 서두르는지 그 이유 정도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따라서 자신이 왜 그 자리에 가면 안되는지 역시 어느정도 이해를 했다.

귀족들을 반 브리센과 친 브리센 세력으로 나누어, 칼리안은 회유를 하고 르메인은 겁박을 주고자 만든 사냥대회.

그런데 플란츠는 브리센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사람이다. 따라서 이런 분위기를 알아챈다면 실리케에게 전해야만 하는 입장이었다. 브리센 쪽에 칼리안의 정보를 전달하지 않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전달할 수도 없다. 그러니 중간에 껴서 치이지 말고 속 편하게 방에나 있으라는 말인 것이다.

"전하께는 저도 잘 말씀을 드릴테니 푹 쉬십시오."

시종들의 이목이 있으니 그 이상의 자세한 이야기는 오가지 않았다. 플란츠는 그 길로 제 방에 돌아왔다.

덕분에 르메인이 플란츠를 위해 마련한 사냥대회는 당일에 갑작스럽게 불참을 알려온 플란츠를 제외하고 치뤄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 오후.

아침 내내 꼼짝 않고 방에 틀어박혀 있던 플란츠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간단한 옷으로 환복한 뒤 체르밀 궁 밖으로 나왔다. 후원에 마련된 수련장에 갈 생각이었다. 남들의 눈에 몸살을 좀 떨쳐냈다 여겨질만 할 때 쯤이 되었다 싶었던 것이다.

"애옹!"

그러다 아침에 창 밖으로 언뜻 보았던 은백색 털뭉치가 어디론가 열심히 달려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거기까지만 봤으면 신경을 안 썼을텐데 잠시 뒤에는 같은색 머리를 한 시녀 한 명이 그 쪽으로 가는 것을 보고야 말았다.

하필이면 정원에 란델이 있을 시간이었다.

"······하."

플란츠가 발을 움직였다.

칼리안의 고양이가 벌일 사고의 뒷치다꺼리를 위해서였다.

그것이 무슨 이유에서건 상관 없이 지금의 이런 시점에 칼리안과 란델이 대치하는 일은 절대 없어야 했으니까.

* * *

왕자들의 산책을 위한 길이었으니 그 곳은 시종이나 시녀들이 홀로 드나들 수 없었다. 때문에 히나는 정원에 가 본 적도 없었고 그 정원이 어떤 곳인지도 제대로 듣지 못했다.

새끼 고양이가 히나의 품을 빠져나가 도망쳤을 때, 히나는 곧장 정원에 가지 않고 메를린을 찾아가려 했다. 그러다 메를린이 얀을 대신해 회의에 참석 중임을 떠올렸다.

왕자가 선물한 고양이를 하루도 채 되지 않아 잃어버릴 수는 없었으므로 히나는 어쩔 수 없이 정원으로 향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왕자들이 모두 사냥에 간 줄로만 알았으니 빨리 들어가서 고양이만 찾아 나올 생각이었다.

"애옹!"

인공호수를 지나니 고양이 울음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 소리를 따라가는 바람에 마주치게 되었다.

'아······.'

정원 한 구석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 장미를 손질하는 중이던 첫째 왕자와 그 옆으로 가 흙장난을 친 듯한 고양이. 그리고 그런 고양이를 우악스럽게 잡아 든 채 경계심 가득한 얼굴로 히나를 노려보는 첫째 왕자의 호위 시종을.

"누구냐."

히나가 깜짝 놀라 허리를 숙였다.

'큰일났다.'

란델의 상급 시종 역시 회의에 참석했을 터.

그런 그를 대신해 란델과 함께 나와있던 호위 시종이 물었다. 몇 번 마주쳤을 법도 했으나 히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눈치였다.

"누구냐고 묻지 않았느냐."

란델의 호위 시종은 키리에와 많이 달랐다.

덩치가 컸고 무섭게 생겼고 말은 위협적이었다. 수어를 해보여야 할지 품 속의 수첩을 꺼내 글을 써야 할지, 결정할 시간을 주지 않고 히나를 다그쳤다.

"이것도 네 짓이겠구나. 감히 이 곳이 어디라고 이딴 것을 들이느냐."

고양이를 들어보이며 그렇게 물은 시종이 히나에게 한 걸음을 다가왔다. 결국 히나는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수첩을 꺼내려 했다.

그런데 이 곳에 새로 도착한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가 히나의 행동을 멈추게 했다.

- 저벅.

시종과 히나 사이에 플란츠가 걸어와 섰다.

시야가 캄캄하게 막힌 것에 깜짝 놀란 히나가 고개를 들었다가 옅은 에메랄드 색 머리카락을 보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진짜 큰일······!'

란델의 앞에 보란듯이 달려간 것도 모자라 플란츠까지 이 곳에 나타났다. 메를린이 회의에서 나오기를 기다렸어야 했다는 후회가 물밀듯이 밀려왔다.

"또 뵙습니다."

왕실 예법을 다시 만들기로 작정을 한 것인지, 시종도 없이 혼자 정원에 온 플란츠가 고개를 까딱 숙이며 멋대로 축약시킨 인사를 란델에게 건넸다. 그러더니 란델의 시종을 잠시 쳐다보곤 입을 열었다.

"왕자의 전속 시녀도 못알아보는데. 눈이 나쁜건지 머리가 나쁜건지 모를 호위는 왜 데리고 다니시는지."

란델의 시종을 입에 담는 것임에도 거침이 없었다.

체르밀에서 일하는 시녀도 아닌 왕자의 전속 시녀조차 구분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질책을 한 것이다. 저러면서 어떻게 호위를 하겠다는 것인지 이해 못하겠다는 눈빛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시종이 플란츠에게 허리를 숙여 보였다.

"죄송합니다."

플란츠는 그에 대해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등 뒤에 선 히나를 흘끗 돌아보며 말했다.

"치워."

당연히 고양이를 말함이다.

허리 숙여 인사를 전한 히나가 시종의 손에 들린 고양이를 빼앗듯이 돌려받은 뒤 빠른 걸음으로 정원에서 벗어났다. 철모르는 고양이가 히나의 품에서 애옹애옹 소리를 냈다.

고양이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었을 때 쯤, 천천히 몸을 일으킨 란델이 플란츠를 향해 입을 열었다.

"나에게는 사냥에 오라 하더니. 가지 않은 것이냐."

플란츠의 무례함은 하루 이틀이 아니었으므로 자신의 앞에서 시종에게 한 소리를 한 것에 대해서는 입에 담지 않았다. 그래서 나아질 성격이었으면 진작 고쳤을 것이다.

"그렇게 됐습니다."

플란츠는 간단한 대답만 했다. 란델은 고개를 끄덕여 보이지도 않았다.

"형님이 계실 시간인 줄 모르고 왔습니다. 가보겠습니다."

곧 플란츠는 이렇게 말하며 뒤로 돌아섰다. 란델과 오랫동안 말을 섞어봐야 속내만 들킨다는 것을 알고 있는 까닭이다. 그런 플란츠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란델이 말했다.

"둘의 사이가 많이 좋아진 모양이구나."

플란츠의 발이 제 자리에 멈춰섰다.

호위 시종은 몰랐더라도 란델은 히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플란츠가 굳이 이 시간에 정원에 들른 이유를 눈치 챈 것이다. 왜 플란츠가 칼리안의 시녀를 도왔는지를 말이다.

칼리안과 플란츠가 손을 잡은 것은 아닐까, 라고.

플란츠가 힘주어 눈을 감았다 떴다. 어차피 한 번 의심을 하기 시작한 란델은 더 이상 속일 수 없다. 그리고 란델이라면 이 일을 브리센에 알리지는 않을 터였다.

때문에 플란츠는 무슨 사이를 말하는 것인지를 묻는 대신 비웃음이 잔뜩 매달린 대답만 했다.

"이것도 아쉬우십니까."

그 말에 란델이 다시 돌아앉았다. 그리고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럴 리가 있겠느냐."

그 말이 플란츠에게는 경쟁자 한 명이 줄어 오히려 기쁘다는 뜻으로 들렸다. 플란츠는 더 이상의 말 없이 정원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체르밀 궁의 앞에 서 있는 히나를 다시 보게 되었다.

굳이 자신을 기다리고 서 있었던 것 같은 모양새였으므로 플란츠가 잠깐 히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왜."

그러자 히나가 손에 들고 있던 수첩을 건네왔다. 얼결에 내용을 보니 짧은 문장이 써 있었다.

-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플란츠는 히나가 칼리안의 시녀라는 것은 알았으나 말을 하지 못한다는 것은 이제야 눈치를 챘다. 다만 그에 대해 뭐라 다른 말을 할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그저 고개만 끄덕여보인 뒤 제 방으로 돌아갔다.

그날 밤이 되어 사냥 대회를 마치고 돌아온 칼리안 역시 그 일을 전해들었다. 다만 그에 대해 다른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그렇게 조용한 듯 그렇지 않은 듯한 날이 지나갔다.

그리고 월요일.

발칸의 창단식이 치뤄질 날.

많은 이들이 각자의 이유로 기다려온 그 날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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