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20화 (21/527)

제5장. 이건 너무 노골적인데 (4)

칼리안이 볼을 긁적였다.

"이건 너무 노골적인데."

칼리안의 옆에 놓인 것은 꽤 많이 쌓여 있는 선물 상자였다.

어제의 무도회에서 르메인이 플란츠에게 벌을 주기는 커녕 무도회장에 함께 등장했기 때문에 칼리안이 느꼈을 상심에 대한 위로의 선물이었다. 물론 명분이 그랬다는 말이다.

칼리안이 들고 있던 포크로 선물인지 뇌물인지 모를 것들을 가리켜보이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벌써부터 줄타기 하는 거야?"

플란츠가 프레이야를 모욕하는 말을 했다는 것은 곧바로 소문이 났다. 시종들과 시녀들, 그리고 기사들이 함께 있었으며 그들에게도 입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르메인은 플란츠와 함께 무도회장에 들어섬으로써 플란츠를 너그러이 용서했다는 것을 알렸다.

문제는 그 직후에 르메인이 멜피르를 불러 공을 치하했다는 것에 있었다.

'오늘의 공연이 매우 인상 깊었다. 이에, 상으로 왕궁과 카이리시스의 기사단에 들어오는 말과 마구 일체의 납품권을 폴룬 상단에 부여하겠다.'

본래 기사들은 자신의 말과 병장기를 스스로 마련한다.

하지만 왕궁과 수도 카이리시스의 기사는 그렇지 않았다. 전력의 상향 평준화를 위해 이 모든 것을 왕실에서 제공했다.

그러니 왕실의 기사단, 카이리시스의 기사단, 외성 경비대, 수도 치안대 등등이 포함된 카이리시스 전력에서 말이 차지하는 비중은 한 번에 셈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당연히 그 거래 가치도 어마어마했다.

르메인이 그것을 폴룬 상단에 넘겨준 것이다.

그런 엄청난 이권을 빼앗겼음에도 실리케와 레넌 브리센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미리 이야기가 되었다는 소리였다.

그저 멜피르 폴룬만 심장이 멎을 만큼 놀랐을 뿐이었다.

'플란츠 왕자를 두고 거래를 한 것이구나.'

이 정도를 이해하지 못할 귀족들이 아니었다. 평소 플란츠가 무슨 짓을 해도 나서지 않았던 브리센에서 이런 피해를 감수했다는 것이 뜻하는 바는 분명했다.

'칼리안이 가진 세력이 실리케가 경계할 만큼이 되었다.'

눈치를 보던 몇몇 귀족이 플란츠로부터 살짝 발을 뺐다. 물론 플란츠가 용서 받지 못했을 경우를 생각하면 확연히 적은 수겠지만 완전히 없을 수는 없었다.

바로 그들이 칼리안을 위로한다며 선물을 보내온 것이다.

"어떻게 할까요, 왕자님?"

"두 개만 빼고 다 돌려 보내. 돌려보내는 선물들은 누가 보냈는지만 적어놔줘."

무도회를 불참한 것과 같은 이유로 오늘의 조찬에까지 참석하지 않은 칼리안이 카이리스의 왕자 생활을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맞이하는 느긋한 아침식사를 즐기며 대답했다.

지금 이름이 적힐 이들은 두 번 다시 칼리안의 선택을 받지 못할 것이다. 단 사흘만의 변화에 바로 마음을 바꾸는 자들은 칼리안에게 필요하지 않았다.

"네. 그럼 어떤 것을 둘까요?"

"마법사 협회, 멜피르 폴룬."

칼리안은 아직 누가 선물을 보냈는지 알지 못했음에도 곧바로 대답했다. 두 곳에서도 선물을 보냈으리라는 것을 당연시하는 말투였고, 명단을 보던 얀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사 협회, 그리고 멜피르 폴룬. 모두 있었다.

얀은 어떻게 알았을지 궁금해하는 표정이 되었으나 칼리안의 말은 모두 끝난 것이 아니었다.

"협회 것은 그냥 받고, 폴룬 남작 것은 뭔지 봐 줘."

"네, 왕자님."

마법사 협회의 선물을 받는 이유는 딱 하나였다. 앨런 마나실을 매개로 마법사 협회와 손을 잡았다는 사실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였다.

곧 선물 상자들의 분류가 시작되었다. 되돌려 보낼 것을 뺀 두 개의 상자가 테이블에 남았다. 그 중 넓적하고 높이가 낮은 상자를 집어든 얀이 뚜껑을 열어보였다.

"여기, 폴룬 남작이 보낸 선물입니다."

우아한 손길로 햄을 썰던 칼리안의 움직임이 순간 딱 멈추었다. 왜 그러나 싶어 상자 속을 쳐다 본 얀의 눈이 화등잔만하게 커졌고 칼리안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한참을 정신 없이 웃던 칼리안이 물을 한 모금 마셔 목소리를 가라앉히고 말했다.

"내가 하라는 것은 아닐거고. 어제 상단에 무슨 얘기 했어?"

"그게······. 왕자님께서 레이븐을 특별히 아끼신다고는 했어요."

칼리안이 다시 웃었다.

그것은 아주 긴 체인을 가진 목걸이였다. 사람이 하기에는 너무 긴, 그러니까 정확하게는 말의 목에 채우기 딱 좋을 정도의 긴 목걸이였다.

어제 공연장의 사람들이 혹시라도 레이븐의 심기를 건드릴까봐 걱정한 얀이 칼리안이 특별히 아끼는 말이니 조심스럽게 다뤄달라는 말을 덧붙였었다. 그것을 멜피르가 전해들은 모양이었다.

"말 목걸이라니. 상상도 못했다. 나도 없는 목걸이를 우리 레이븐이 먼저 받네."

레이븐의 검은 털에 잘 어울릴 백금의 얇은 체인 한가운데에 루비 펜던트가 달려 있었다. 큭큭거리며 남은 웃음을 털어낸 칼리안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거절하지도 못하겠네. 레이븐한테 너무 잘 어울리게 생겼어."

칼리안이 다시 햄을 썰어내며 말했다.

"값을 따져서 폴룬 상단으로 보내. 마음에 드는 물건이니 사겠다고 전해주고."

"그냥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요?"

"응. 받는 게 아니라 사는 거야."

물론 멜피르가 제 목숨값으로 말 목걸이 하나만 보낸 것은 아닐 터였다. 무엇을 원해서 살려주었는지, 칼리안의 의중을 떠보려는 심산일 것이다.

'고작 보석으로 끝낼 수가 있나.'

칼리안은 만약 자신이 저 선물을 받는다면 멜피르의 목숨 값에 해당될 가치의 진짜 선물이 오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려고 레이븐의 목걸이를 보냈겠지. 나에게 줄 선물은 따로 있다는 의미로.'

하지만 칼리안이 원하는 것은 저런 재물이 아니었다.

그것이 저 선물을 그냥 받을 수 없는 이유였다.

"당분간 내가 그냥 받는 선물은 마법사 협회에서 보내주는 것 뿐이야. 폴룬 상단에서 오는 것은 따로 알려줘. 나머지 귀족들 선물은 받지 말고 알아서 돌려보내."

얀에게는 미안했지만, 멜피르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알고 경고했는지를 설명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얀은 더 이상 의문을 가지지 않고 대답했다.

"네, 왕자님. 그렇게 하겠습니다."

목걸이를 쳐다본 칼리안이 또 웃었다. 아무리 봐도 너무 웃겼다.

* * *

책상 앞에 앉아있던 앨런은 관자놀이를 주무르고 있었다. 곧 누군가 그를 찾아오자 살짝 눈을 떠 쳐다본 뒤 입을 열었다.

"이리 놓게."

눈 밑이 시커멓게 된 여성이 앨런의 앞에 새로운 서류를 내려놓았다. 비척비척 팔을 거둔 에우리아가 말했다.

"이건 어제 자 정보. 이제 진짜 없어요, 마나실 님. 다 털었대요."

에우리아 세이렌.

카이리스 마법사 협회의 수장이며, 마법 공학자를 다수 배출한 마법사 가문인 세이렌 백작가의 장녀이자 5서클을 마스터한 능력있는 마법사였다.

평소 에우리아는 주신 세렌티보다도 고룡 시스파니안과 앨런 마나실을 더 믿었다. 에우리아에게 있어 앨런 마나실은 그만큼 절대적인 존재였다. 참 마법사 다운 모습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니 국왕 탄신일 축제 둘째날 아침에 협회 문을 열고 들어온 적은발의 마법사를 본 에우리아가 얼마나 감격에 겨워 했을지는 보지 않아도 알 일이다.

그런 에우리아에게 앨런이 처음으로 건넨 말은 이것이었다.

- 혹시 여기 마법사들은 칼 든 새끼 사자가 왕관을 써도 괜찮다고 생각 중인가?

그럴리가.

에우리아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

-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그리고, 이틀 간의 지옥이 펼쳐졌다. 앨런 마나실에 대한 광신도 같은 믿음이 살짝 식을 뻔 했을 만큼 험난한 이틀이었다.

온 카이리시스를 뒤져 찾아내는 정보가 실리케의 음모와 관련된 것이 아니었다면 당장 죽을 것 같은 낯이 된 마법사들이 다시 건물 밖으로 나가서 새로운 정보를 찾아오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 정도면 정보 정말 많이 모은 거예요."

"알고 있네. 마법사들이 정보 찾는 것을 참 잘한다고도 생각 중이네."

"네. 의외의 재능이네요. 저도 그래서 정보 길드를 하나 만들어볼까 진지하게 고민했어요."

고개를 끄덕이며 실소한 앨런이 굵직한 것들을 꺼내어 추렸다.

"실리케가 들어온 뒤 왕궁에서 독살되거나 암살된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4명, 마찬가지로 독살이 의심되는 마법사가 6명. 독살이나 암살된 것으로 추정되는 귀족이 13명······. 참 대단하군. 이 정도인데 르메인이 그냥 있었다는 것이."

모두 정황 증거 뿐인 사건들이었다.

하지만 죽었다는 이들 모두가 실리케 혹은 브리센 후작가와 연관이 있었다.

정확한 증거로 모인 것은 레넌의 집 은밀한 곳에 숨겨져 있던 타크리모사를 레넌이 왕궁에 들고 갔다는 마법사의 증언, 그리고 그것을 만들기 위해 크리모사를 대량으로 수입해왔다는 증거 뿐이었다.

'진작부터 의문점이 남은 사망 사건들의 증거를 모았다면 어땠을까.'

아쉬움이 들었다. 지금으로서는 그저 '그랬다더라'는 수준밖에는 되질 않는 것이다. 하지만 앨런이라는 중심점이 없는 이상은 증거가 있어도 소용 없었을 일이었다는 것도 알았기에, 앨런은 그것에 대해 굳이 말하지는 않았다.

"고생했네. 이제 가서 좀 쉬게."

"네. 마나실 님도 쉬세요."

에우리아가 당장 세상을 하직할 것 같은 얼굴로 인사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런 에우리아보다 스무 살은 어려보이는 앨런이 혀를 쯧쯧 찼다.

"젊은 놈 체력이 저래서야."

앨런은 곧 에우리아가 가져온 서류를 손에 들었다.

표지를 제외하면 딱 한 장 짜리의 짧은 보고서였다.

[플란츠의 프레이야 모독 사건에 가려진 하나의 미스터리!]

다분히 마법사다운 보고서 제목을 본 앨런이 피식 웃었다.

사실 지금까지 그가 보아온 모든 보고서의 제목들이 다 이런식이었다. 보고서란 일단 흥미롭고 재미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말이지, 마법사들이란.

"제목은 이렇게 써 놓고서는 비밀 엄수 마법을 걸어뒀군."

제목과 달리 중요한 내용이라도 담겨 있는 모양이다. 내용을 모두 보고 나면 종이가 자동으로 불에 타 사라지므로 주의 깊게 읽으라는 경고가 눈에 띄었다.

그러니 작성자와 앨런만 내용을 알 수 있었고, 에우리아조차 그 안에 무엇이 적혀 있는지는 모르는 채 가지고 왔을 터였다.

"그래. 얼마나 중요한지 한번 볼까."

가벼운 마음으로 중얼거린 앨런이 표지를 넘겼다.

- 우연한 기회에 국왕과 함께하는 기마 경기에 초대된 본인!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폴룬의 공연장을 찾았으나 이게 웬걸. 8층의 가장 구석진 자리를 배정받았음을 알게 되었다. 덕분에 경기장도 안보이고 진행자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 비운의 상황. 허나 본인은 현실에 굴복하지 않고 '이글 아이'와 '매직 이어'를 시전하였다.

먼 곳을 확대하여 보여주는 마법과 먼 곳의 이야기를 들리게 해 주는 마법.

"고작 경기 하나를 보자고 아무리 저레벨이라지만 활성화 유지가 필요한 마법 두 개를 동시에 쓰다니 참 쓰잘데기 없는 일에 마나를 낭비하는 친구로군."

불과 하루 전에 재미 삼아 얀에게 물벼락을 선물했던 앨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실소했다.

- 드디어 국왕 일가가 입장하고 뜨거운 화제의 대상 칼리안 왕자가 보였다. 칼리안 왕자는 멜피르 폴룬의 인사를 받으며 이렇게 말했다.

'머리 위가 불안하군요. 살펴보세요.'

그리고 잠시 후, 본인은 더 놀라운 장면을 보게 되었으니!

큰 기대는 하지 않은 듯한 얼굴로 글을 읽어내려가던 앨런의 얼굴이 조금씩 진지하게 변했다.

보고서는 칼리안이 예정된 사고를 막았으며 범인은 아마 브리센 상단이 아니겠느냐는 의문을 던지며 끝났다.

작성한 이도 자신이 알아낸 사실의 중요함을 알았던지 어디에서도 그가 본 것을 발설하지 않겠으니 앨런도 비밀을 꼭 지켜달라는 내용이 추가되어 있었다. 칼리안이 개입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실이 알려질 경우 칼리안의 입지가 곤란해질까 걱정한 모양이었다.

마법사들은 장난을 좋아할 뿐, 바보는 아니었으니까.

곧 앨런의 손에 들린 보고서의 글씨들이 빛나기 시작하더니 한글자 한글자가 불에 타들어가듯 사라졌다. 그 불이 종이에까지 번졌으나 열기를 내는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앨런은 그 보고서가 완전히 타 사라지도록 손에서 놓지 않았다.

"흐음."

처음 칼리안을 만났을 때 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 수비대원과 나누는 대화를 들었을 때, 말을 타고 근처를 거닐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 말이 거짓은 아니었다. 다만 앨런은 칼리안이 '앨런 마나실'이라는 이름을 들은 직후부터 움직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앨런이 인근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있는 범위는 칼리안의 예상보다 더 넓었으니까.

"나도 그렇고, 사고도 그렇고······ 우리 왕자님. 어떻게 먼저 아셨을까."

앨런이 다시 한번 관자놀이를 주무르며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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