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19화 (20/527)

제5장. 이건 너무 노골적인데 (3)

칼리안이 손을 치우고 고개를 들었다.

화를 참아내느라 잔뜩 굳은 얼굴을 한 채였다.

당연한 일이다. 지금 이 곳에서 가장 크게 화를 내야 할 사람은 바로 칼리안이 아닌가.

물론 그것은 주위 시선을 위해 만들어낸 표정이었다. 사실 칼리안의 진심은 오히려 그 반대. 당장 플란츠의 혀에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네가 도움이 될 때가 있구나, 플란츠!'

칼리안이 르메인을 쳐다봤다.

지금 칼리안이 르메인에게 바라는 것은 불같이 화를 내며 플란츠를 벌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로 르메인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 주기를 바랐다. 그것이 가장 큰 득을 불러올 테니 말이다.

그런 칼리안의 바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르메인은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플란츠를 혼내는 말을 하지도, 추후의 처벌을 예정하지도, 경멸의 시선을 보내지도 않았다. 아무 말 없이 다시 앞을 바라보며 2부를 시작해도 좋다는 의미로 시종장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었다.

그것을 본 실리케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지금 르메인은 플란츠에 대해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리고 앞으로도 그러하리라는 것을 몸소 보여준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칼리안은 다시 한번 드러나지 않는 웃음을 지었다.

'실리케. 어디까지 발을 물리겠나.'

실리케라면 분명 이 상황을 무마시키려 하리라 생각했다. 칼리안은 그것이 어떤 것일지에 대한 기대가 컸다.

실리케의 손에 들린 부채가 아드득 소리를 내며 망가졌다.

'멍청한······ 그렇게 말을 했는데도!'

플란츠의 행실이 좋지 않은 것은 르메인도 잘 알았다.

광장에 술을 먹고 나섰던 일로 플란츠에게 금주령까지 내렸으니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러니 칼리안을 욕하는 것은 어떻게든 넘어갈 수 있었다. 원래 그러니까 하고 말이다.

하지만 공개적인 자리에서 죽은 후궁 프레이야의 출신을 두고 모욕적인 언사를 한 것, 그것도 프레이야를 끔찍이도 아꼈던 르메인의 눈 앞에서 그런 짓을 벌인 것은 선을 넘은 행동이었다.

'플란츠.'

실리케의 눈이 플란츠를 향했다.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모를 플란츠가 아니었다. 그렇게 키우지 않았다.

플란츠와 눈을 마주친 실리케의 팔에 소름이 돋았다.

지금 플란츠는 당혹스러운 표정이나 후회하는 얼굴을 하고 있지 않았다.

'······ 일부러 하였구나.'

플란츠의 한쪽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었다.

일부러 저런 행동을 했다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 이 곳에 오기 전 플란츠를 찾아가 몇 마디 말을 한 것에 반발하여 이런 행동을 보인 것이 분명했다.

실리케의 소리 없는 외침이 플란츠를 향했다.

'왜 하필 오늘, 플란츠!'

앨런 마나실이 왕궁으로 찾아왔다.

귀족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왕세자 후보에 칼리안의 이름이 포함됐다. 같은 날 플란츠가 돌이킬 수 없을 실수를 했다.

브리센의 영역에 적당히 발을 걸치고 있던 귀족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결정을 할지는 굳이 따져 볼 필요도 없었다.

실리케가 다시 한 번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돌려 앞을 쳐다봤다. 2부 공연이 한참 진행되고 있었으나 특별석의 그 누구도 그것을 보고 있지 않았다. 실리케는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그리고 칼리안은 이 상황을 이용하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생각의 고리를 이어 나갔다.

그리고 그 시간.

무언가를 발견한 멜피르가 한숨을 쉬었다.

"허어."

그것은 안도의 한숨이기도, 놀라움의 한숨이기도 했다. 그의 앞에는 반쯤 잘려나간 밧줄이 있었다.

"이것이 전하의 머리 위로 떨어졌으면······!"

생각만으로도 목이 죄여오는 것 같다.

멜피르는 서둘러 밧줄이 더 상하지 않도록 조치하기 시작했다. 그 뒤에는 공연이 끝날 때까지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단단히 방비했다.

한숨을 돌린 폴룬이 문득 고개를 돌려 아래를 쳐다봤다.

이 일을 막도록 알려준, 그래서 멜피르의 목숨을 건져 준 검은 머리의 왕자가 흐트러짐 없는 모습으로 앉아있었다.

칼리안의 말을 믿고 르메인의 옆자리를 포기하는 말을 했을 때 칼리안이 지어 보였던 표정이 다시 생각났다.

그 막내 왕자는 분명, 문제를 잘 풀어낸 학생을 보는 선생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 뒤로는 이 곳에 대해 아예 신경을 쓰지 않는 듯 하지 않았던가. 멜피르가 자신의 말을 잘 알아듣고 해결해 낼 수 있는지를 불안해하는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사고 없이 오늘을 잘 넘기더라도 저 왕자님께서는 나를 찾지 않으실 것 같구나.'

대가를 원해서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것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뼛속까지 상인인 멜피르는 대가를 필요로 하지 않는 거래를 해본 적 없었다.

"허어······."

똑같은 소리를 다시 낸 멜피르가 마른 침을 삼켰다.

* * *

공연이 모두 끝났다.

꽃가루는 떨어지지 않았다.

'잘 해결 했나보네.'

그래도 혹시 모를 일이니, 칼리안은 자리에서 일어난 뒤 얀에게 말을 걸며 시간을 끌었다.

그렇게 란델과 플란츠가 먼저 내려간 뒤에 그 곳에서 빠져나왔다. 예상한대로 사고는 생기지 않았다.

계단을 내려서니 멜피르가 기다리고 있었다.

르메인이 그를 보며 말했다.

"좋은 시간이었네."

르메인은 멜피르가 옆을 지키지 않은 것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플란츠의 행동을 다른 귀족이 직접 보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만족스러우셨다면 다행입니다, 전하."

멜피르가 겸양을 보였다.

그 사이 칼리안은 멜피르가 아닌, 멜피르를 보는 실리케를 살폈다. 그런 칼리안의 눈에 작은 의문이 담겨 있었으나 누군가 그것을 눈치챌 만큼 드러난 것은 아니었다.

'실리케의 반응이 없다.'

그래. 플란츠가 일을 내기는 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오늘 일어났어야 할 사고가 없었다면 그것을 지나칠 실리케가 아니었다. 플란츠의 일로 다른 하나를 잊고 지나갈 만큼 멍청한 이가 아니었다.

'사고 따위는 전혀 신경쓰지 않는 얼굴인데.'

지금 실리케는 멜피르의 인사도 듣는 둥 마는 둥 하고 있었다.

'실리케도 모르는 일이라. 그럼 레넌이 혼자 저지른 일이라는 말이 되는데.'

머릿속이 다시 복잡하게 얽혀들어간다.

"그럼, 무도회 장소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멜피르가 이렇게 말하며 세 왕자를 쳐다봤다.

정확히는 칼리안을 향한 말이었으나 칼리안은 아무 반응 없이 인사를 받고 밖으로 나와 레이븐의 등에 올랐다.

'란델, 브리센 상단, 폴룬 상단. 상관 관계가 무엇일까. 혹시 텐실도 연관이 있는 것인가.'

베른은 카이리스의 옆에 붙어 있는 신성국가 텐실에 대해서까지 관심을 가지고 본 적이 없었다. 이 시기에 무슨 사건이 있었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덕분에 칼리안은 미간을 찌푸리며 이 시기의 텐실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짚어내려 끙끙거리기 시작했다.

'상단과 연관되어 있다면 물건이다. 왕족을 건드려서까지 이득을 취하려 한다면 일반적인 값어치는 아닐······ 아!'

일반적인 값어치가 아닌 물건.

거기까지 떠올리자 드디어 답이 나왔다.

칼리안의 입가에 알 듯 모를 듯 한 미소가 드러났다.

'다이아몬드. 다이아몬드 광산이다.'

숨겨진 단어를 찾으니 모든 퍼즐이 맞았다.

베른일 적에 체이스와 나누었던 짧은 대화가 생각났다. 사고 소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던 기억이었다.

- 테러라 하기에는 너무 어린 아이 장난 같은데요.

- 그것이 단순히 왕족에 대한 테러라고 생각하느냐?

- 왕자가 다쳤다 하니까요. 다른 것이 있습니까, 형님?

- 글쎄. 어디 한번 생각해보려무나.

너무 노골적이고 단순한 사고.

마치 왕족을 노렸다는 사실을 들키려고 작정한 것 같은 바보 같은 사고.

'신성국가의 신관들이 다이아몬드를 살 일이 많을 리 없지. 대부분 카이리스로 팔려고 했을 것이다. 텐실 쪽의 상단에서는 란델의 눈치도 보았을 테니 브리센이 아닌 폴룬을 선호했겠지.'

체이스가 곧바로 떠올렸을 문제의 원인을 칼리안이 되어서야 알아냈다.

'브리센이 다이아몬드 상권을 가져오려고 폴룬에게 누명을 씌운 것이었어. 어차피 폴룬이 아니면 그 정도 거래가 가능한 대형 상단도 없으니.'

왜 란델을 건드렸는지 그 이유도 명확해졌다.

'란델이 다치면 텐실 국왕이 개입하게 되고, 의문점을 파악하기 전에 빨리 마무리 되리라는 것을 노렸을 것이다. 레넌, 의외로 잔머리를 좀 굴리는구나.'

정리를 마친 칼리안이 눈을 돌려 멜피르를 쳐다봤다.

멜피르는 칼리안을 당장 만나보고 싶겠지만 뜻대로 해줄 수 없었다. 얼마나 큰 값어치가 있는 문제였는지 알아냈으니 멜피르의 목숨값도 제대로 받아내야겠다고 생각을 바꾸었다.

"오늘 무도회에 가지 않겠다고 행사 담당에게 전해."

칼리안의 작은 목소리에, 얀이 깜짝 놀라 칼리안을 쳐다봤다. 그리고 플란츠 때문에 큰 충격을 받은 듯한 칼리안의 슬픈 얼굴을 보며 안타까운 숨을 내쉬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할게요."

"미안."

"아닙니다, 왕자님."

자신보다 더 침울해진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리는 얀을 보며 칼리안이 얼마나 큰 양심의 가책을 느꼈는지는 모르는 채였다.

* * *

공연에서 돌아와 책상에 앉아있던 르메인이 방문자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리고 쓰고 있던 안경을 벗어 책상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의외로군."

르메인을 찾은 이는 잠시 말 없이 서 있다 소파로 걸어갔다. 또각 또각 하는 구두 소리가 적막한 집무실에 울렸다. 르메인은 말 없이 그 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한참이 지난 뒤에야 르메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집무실을 채워나가는 르니에리 향기를 쫓듯 창문을 열었다.

집무실의 창문을 모두 열어갈 때 쯤.

-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차가 담긴 쟁반을 든 시종장이 들어섰다. 그러자 르메인이 손을 살짝 움직이며 말했다.

"필요 없다."

실리케의 눈꼬리가 떨렸다.

완전한 불청객 취급이 아닌가.

시종장을 도로 내보낸 르메인이 천천히 걸어와 실리케의 앞에 앉았다. 눈에는 아무 감정도 들어있지 않았다.

사실 실리케에게는 이미 익숙한 일이었다.

프레이야가 죽은 뒤로 줄곧 그래왔으니까.

"무슨 일이지."

르메인이 실리케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 눈빛에 딱 어울리는 무감정한 목소리였다.

"어린 아이니, 실수를 용서하세요. 벌을 받는 것은 브리센이 할테니까요."

실리케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자신이 르메인에게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생각해본 적 없던 탓이다.

르메인이 한쪽 눈썹을 올렸다.

지금껏 플란츠가 어떤 행동을 해도 이렇게 직접 찾아온 적 없었다. 심지어 저런 말을 꺼내놓은 경우는 더더욱 없었던 실리케였다. 이번 일이 상당히 큰 잘못이긴 했으나 예전이었다면 이렇게까지 숙이고 들어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용서라. 무엇을 용서해야 하나."

물론 르메인은 실리케의 태도가 바뀐 이유를 알고 있었다.

칼리안.

정확히는 앨런 마나실을 등에 업은 칼리안 때문이리라.

칼리안을 생각하니 앞에 앉은 실리케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가 함께 떠올랐다. 왜 이렇게 선뜻 브리센에서 책임을 지겠다는 이야기를 하는지도 알 것 같았다.

'당장 귀족들이 플란츠에게서 발을 돌리지 않도록 묶어두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겠지. 그래야 칼리안이 사라진 뒤 갈 곳 잃은 귀족들이 란델에게로 가지 않을테니.'

벌이라는 명목으로 무엇을 잃든, 칼리안이 죽은 뒤에 얼마든지 되찾아올 자신이 있는 것이다.

- 이번 일 까지는 모르는 것으로 하십시오.

앨런의 말을 상기한 르메인이 작게 웃었다. 앞에 앉은 실리케의 가느다란 목을 비틀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참아내느라 웃었다.

'웃었어?'

그 생각을 알지 못할 실리케가 살짝 놀란 얼굴을 했다.

그 동안 르메인은 다른 이들의 앞에서 감정을 보인 적이 없었다. 헌데 이런 노골적인 웃음이라니.

실리케가 새로운 부채를 잡은 손에 힘을 쥐었고 르메인이 말을 건넸다.

"그래. 그 벌은 무엇으로 받을 생각이지."

당연히 왕실 기사단을 물릴 리는 없었다.

그것을 포기할 만큼 절박한 것은 아닐테니까. 놀랐던 마음을 추스른 실리케가 입을 열었다. 르메인이 예상한 바와 같았다.

"인상 깊은 공연이었으니, 상을 내리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요."

"아아."

실로 인상 깊은 공연이었지.

실리케의 말은 폴룬 상단에 브리센의 상권을 일부 양보하겠다는 뜻이었다. 르메인은 용서의 크기만큼 양보의 범위를 정하면 될 것이고, 브리센 가문은 받아들이리라.

"오늘은 플란츠가 나와 함께 들어가는 것이 좋겠군."

거래를 받아들였다.

어차피 칼리안이 죽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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