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3화 (4/527)

제1장. 이거 정말 멍청하게 살았군 (3)

참으로 낯설고도 기이한 하루가 지났다.

혹시라도 눈을 뜨면 다시 세크리티아에 와 있거나 혹은 저승에 가 있지 않을까 했는데. 기대를 저버리는 얀의 종 소리가 칼리안을 깨워낼 뿐, 달라진 것은 없었다.

"좋은 꿈 꾸셨습니까, 왕자님."

칼리안은 자리에 앉아 얀이 내미는 모닝 티를 즐긴 뒤 빈 잔을 얀에게 돌려주었다. 그 후 멀끔하게 세수와 양치를 하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머리 자를 거야."

그 말을 들은 얀이 큰 눈을 꿈뻑였다.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는 것이 빤히 보였기 때문에 칼리안이 다시 한번 말했다.

"내 머리. 자를 거라고."

칼리안의 두 손가락이 앞머리를 반으로 자르는 시늉을 했다. 얀이 칼리안의 말을 잘못 들은 것이 결코 아니라는 소리였다. 얀은 이게 무슨 일인가 싶은 마음을 곧바로 치워내며 대답했다.

"네, 왕자님.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오래지 않아 왕족 전담 미용사가 칼리안의 방을 찾아왔다. 가위를 조심스레 손에 든 그가 칼리안에게 물었다.

"정말로, 잘라내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칼리안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대부분의 기사가 그렇듯이 그는 두 번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그래서 지금 머리를 자르라는 말만 연거푸 세 번을 반복해야 하는 상황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대체 이것이 뭐라고 그리 벌벌 떤다는 말인가? 칼리안이 가위를 가리켜보이며 말했다.

"내가 잘라야 해?"

"아닙니다, 왕자님. 죄송합니다."

그제야 가위질이 시작됐다.

사각사각 소리가 몇 번 들린 뒤, 답답하게 얼굴의 반을 가리고 있던 검은 머리를 떨쳐낼 수 있었다.

칼리안이 눈을 들어 거울 속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비로소 자신의 얼굴을 제대로 살펴보게 된 것이다.

'호오.'

칼리안의 입이 미소를 만들어냈다.

여신의 환생이라던 프레이야를 그대로 닮았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은 까닭이다.

'이 얼굴, 프레이야가 남긴 매우 훌륭한 유산이 아닌가?'

칼리안이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잘 어울리십니다, 왕자님."

그 모습에 얀 역시 좋아하는 얼굴로 말을 건넸다. 다만 얀은 한편으로 드는 불안함 때문에 점점 수그러드는 목소리로 말했다.

"헌데 혹시라도 플란츠 왕자님께서 가만히 넘어가실지 모르겠네요."

"눈만 마주쳐도 그렇게 성질을 부리셨으니 가만히 넘어가지는 않으시겠네."

"그래서 걱정입니다. 오늘 아침 식사에 어떤 반응을 보일지······."

"잘 어울린다며. 그럼 됐지."

칼리안이 빙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싫어한다고 계속 멍청하게 지낼 수는 없잖아."

그것이 얀의 눈에는 생글거리는 것으로 보였다. 칼리안 답지 않은 표정과 말에, 얀이 놀란 얼굴을 했다.

그 때 칼리안의 얼굴에 드러난 것은 지금껏 단 한번도 보여진 적 없던 자신감이었다. 얀은 칼리안의 이런 갑작스러운 변화가 불안했다. 물론 너무나 반가운 일이었지만, 그래도.

"그래도 혹시라도 더 큰 화를 입으실까 걱정이 되어서요."

"걱정하지 마."

식당으로 향하는 길에 안절부절 못하는 얀을 향해 칼리안이 안심하라는 듯 말했다.

"내가 알아서 할 거야."

그렇게 도착한 식당으로 가 앉아있으니, 오래지 않아 플란츠가 들어왔다. 특유의 흐린 눈으로 식당 안을 쳐다 본 플란츠의 시선이 란델의 빈 의자를 향했고 그 뒤로 칼리안의 얼굴을 봤다.

가늘게 떠진 연두색 눈이 칼리안의 붉은 눈동자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칼리안은 그 눈을 피하지 않았다. 더 이상 가리는 것이 없어진 얼굴로 플란츠를 똑바로 쳐다봤다.

플란츠의 얼굴에 확연한 조소가 떠올랐다.

그 뒤 플란츠는 칼리안의 얼굴에서 시선을 뗐다. 얀이 놀란 표정을 급히 지웠다.

'끝이야? 비웃으시고 끝난 거야?'

정말 믿을 수 없게도 플란츠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제 자리에 가 앉았다. 그리고는 더 이상 칼리안을 쳐다보지 않았다.

칼리안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칼리안 역시 얀과 똑같은 생각이었다. 저 미친 왕자가 얌전히 자리에 앉은 것이다.

'대체 무슨 변덕인지 알 수가 없군.'

당장이라도 사달이 나야 할 것 같은 적막함 속에 란델이 들어왔다. 언제나 그렇듯 란델은 칼리안의 얼굴을 본 체 만 체 자리에 앉았다.

식사가 올려졌고 셋은 어김 없이 각자의 음식에 집중했다.

이대로 아무 일 없이 조찬이 끝날 것 같다는 생각에 얀이 안도 할 때 쯤.

"······ 야."

결국 일이 터지고 말았다.

플란츠가 그렇게 입을 열어 부를 만한 상대는 이 곳에 단 한 명 뿐이었다. 그리고 그 한 명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 완벽한 예법으로 식사를 계속했다.

칼리안이 자신을 쳐다보지 않자 플란츠의 입술이 씰룩였다. 그 성질머리가 폭발하기 직전에 항상 보여지던 모습이었다. 얀의 심장이 이번에는 배꼽으로 쿵 하고 떨어지는 소리를 냈다.

하지만 당사자인 칼리안의 표정은 평온하기 이를 데 없었다. 자신의 일이 아니라는 듯한 얼굴이었다.

"야. 피눈깔."

플란츠가 다시 한번 씹어 뱉듯 말했다.

한번 더 무시해볼까 고민하던 칼리안이 조금 늦게 플란츠를 쳐다봤다. 플란츠가 그런 칼리안을 향해 무어라 말하려 할 때, 칼리안의 입이 먼저 열렸다.

"칼리안."

조용히 자신의 이름을 말해 준 칼리안이 썰어 둔 빵 조각을 포크로 찍은 뒤 좀전과 똑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 입니다."

이 말에 대한 반응은 란델에게서 나왔다.

고요하게 움직이던 양 손이 딱 멈춘 것이다. 란델이 고개를 들어 하루 아침에 태도를 바꾼 칼리안을 쳐다봤다. 허나 그 뿐이었다. 딱히 무어라 끼어들 생각을 할 성격이 아니었던 탓이다. 란델은 곧 다시 손을 움직이며 식사를 이어갔다.

"아아."

플란츠의 입이 비틀려 올라갔다. 그가 아주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뜨며, 지금 자신이 들은 소리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 지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는 오른손에 들린 나이프를 쳐다보며 낮은 목소리를 냈다.

"그래. 불러야지. 이름으로."

"네."

칼리안의 대답이 곧바로 흘러나왔다.

곧 칼리안이 물을 마시기 시작하자, 톡 하고 플란츠가 들고 있던 나이프 끝이 테이블에 닿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얀의 얼굴에서는 핏기가 사라졌다.

'알아서 하신다는 것이 이런 것입니까, 왕자님?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알아서' 인데요?'

플란츠가 다시 한번 웃었다.

어린 아이 같은, 그래서 더 섬뜩한 웃음이 그린 것처럼 떠올랐다.

그 뒤 플란츠는 오른손에 들려있던 나이프를 그대로 얀을 향해 집어던졌다.

- 쌔액!

칼리안에 대한 화풀이를, 칼리안의 시종에게 하는 것이다.

찰나의 순간. 얀의 팔이 얼굴로 올라오다 멈추었다.

막는다면, 다음은 칼리안에게 그 화가 향하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얀은 얼굴을 가리는 대신 눈을 감았다.

그와 동시에 칼리안의 팔이 움직였다.

- 탁!

손에 들린 물잔을 내려놓고 다시 팔을 뻗어 날아오는 나이프를 콱 움켜잡은 것이, 얀이 눈을 감는 것보다 빨랐다. 플란츠의 시선이 잠시 식탁 위의 물잔에 머물렀다.

급히 내려놓았음에도 물이 흔들리지 않고 있었다.

뚝, 뚝, 뚝.

나이프의 무딘 날을 세게 감아쥔 손에서 붉은 핏방울이 떨어졌다.

그 모습을 본 플란츠가 말했다.

"이런."

얀의 눈이 칼리안의 뒷모습과, 칼리안의 손과, 그 손에 들린 나이프와, 나이프를 타고 흘러내리는 피와, 플란츠의 웃는 얼굴을, 마치 시계 초침처럼 돌아가며 살폈다.

정신이 혼미해지는 느낌이었다.

칼이 날아왔던 것 때문이 아니라 지금 이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질까봐서였다.

칼리안이 일어났다. 피묻은 나이프를 들어 플란츠의 앞에 조용히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플란츠를 보며 생긋, 마주 웃었다.

"괜찮습니다."

그 말의 의미가 참으로 묘했다.

다친 손을 걱정하지 말라는 '괜찮다'인지, 플란츠의 무례를 용서하겠다는 '괜찮다'인지.

혹은 둘 다인지.

몇 방울의 피가 플란츠의 옷에 떨어졌다.

칼리안이 그대로 식당 밖으로 걸어나갔다.

* * *

왕자의 손에 상처가 생겼다며 엉엉 우는 열 일곱의 소년, 얀을 달래놓느라 혼이 쏙 빠진 채로 오후가 되었다.

말을 탈 수 있다 하여 플란츠를 보는 것을 참고 기마 수업에 왔더니 조랑말이 기다리고 있었다. 동글동글한 눈으로 칼리안을 쳐다보는 그 눈이 참으로 순하여, 칼리안은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칼리안은 아직 자신의 말이 없었다. 이전의 칼리안이 말을 굉장히 무서워했기 때문이다. 그런 기억이 떠오르자, 칼리안이 부끄러움에 손바닥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그걸 타기엔 자존심이 상하시나, 칼리안 아우님?"

플란츠.

칼리안이 플란츠의 목소리가 들린 쪽을 쳐다보았다.

딱 보기에도 좋은 혈통임이 분명한 은백색의 말 위에 앉은 플란츠가 칼리안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칼리안이 표정을 지우며 예를 보였다.

플란츠의 눈이 칼리안의 손에 감긴 붕대를 슬쩍 훑었다. 그리고는 다시 피식 웃었다. 그 모습을 보던 칼리안의 미간이 움찔했으나 그의 도발에 더 넘어가지 않기 위해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눈을 사로잡는 말 한마리가 보였다. 플란츠가 끌고 나온 두 번째 말이었다. 자연스럽게 말의 모습을 살핀 칼리안이 크게 감탄했다.

'아주 좋은 말이다.'

오른쪽 앞다리의 발목 부분에만 하얀 털이 있는 흑마였다. 잘 관리된 갈기와 꼬리털이 한올 한올 흩날렸다. 제대로 잡힌 근육이며 날렵한 몸집이, 지금 플란츠가 타고 있는 것보다 더 좋은 말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고집이 지독한 놈이라 선생에게 조련을 맡기려 했는데."

지금껏 제대로 타고 내린 적 없을 정도의 난폭한 놈이었다. 헌데 칼리안의 눈이 말에게서 떼어지질 않았다. 이를 본 플란츠의 입꼬리가 다시 올라갔다. 그가 칼리안을 향해 말했다.

"탈 수 있다면 주겠다. 대신 못한다면, 칼리안 아우님에게 아침의 일에 대한 사과를 받지."

그러자 얀이 저도 모르게 한 발 나섰다. 자칫 낙마하기라도 할까 걱정한 탓이다. 그 모습에 플란츠의 눈에 다시 불이 튀었다.

거슬렸기 때문이다.

아침에 나이프를 막으려다 만 것도. 지금 자신의 앞에 나서려는 것도.

마치 제가 칼리안의 보호자라도 되는 양, 시종 주제에.

그것을 눈치챈 칼리안이 슬쩍 얀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그렇게 플란츠의 시선을 다시 가져온 뒤 침착하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곧 칼리안이 놈의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칼리안이 천천히 놈의 곁으로 걸어갔다. 플란츠의 성격을 보고 배우기라도 한 것인지, 놈의 눈에 화난 기색이 역력했다. 절대 등을 내어주지 않겠다는 확고한 의지가 보였다.

그런 놈을 보는 칼리안의 입에는 진한 웃음이 걸렸다.

부드럽던 눈매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살기.

누군가의 생명을 수 없이 끊어내 본 이가 지닐 수 있는 살기를 담은 눈빛이었다.

자신을 한마리가 아니라 몇 십 인분으로 보는 듯한 그 소름끼치는 시선은, 좋은 환경에서 곱게 자란 세 살짜리 말이 견딜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도도하던 말의 눈빛이 매우 흔들렸다.

곧 놈의 눈빛이 조금 전의 조랑말처럼 동글동글하게 변했다. 그제야 칼리안의 눈도 다시 호선을 그렸다.

결국 놈은 칼리안이 안장에 오르는 것을 거부하지 못했다. 놈의 성격을 아는 플란츠만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애써 지웠다.

칼리안이 말을 타는 법 따위를 연습한 적이 눈꼽만큼도 없음을 잘 아는 얀은 이렇게 생각하며 감격에 겨워 했다.

'우리 왕자님, 기마술을 글로 배우셨어!'

여전히 칼리안이 기사 소설을 봤다고 믿는 얀이었다. 그러니 그냥 아무 생각이 없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칼리안이 얌전해진 말의 목을 툭툭 치며 말했다.

"레이븐이다. 네 이름."

검은색. 그리고 큰 까마귀.

이름의 뜻을 아는지 모르는지, 레이븐이 새 주인의 말에 푸르륵 하는 소리를 냈다. 그것을 보며 씩 웃은 칼리안이 고개를 돌려 플란츠를 쳐다봤다.

"감사합니다."

어느 정도는 진심이었다. 과정이야 어찌됐건 이렇게 좋은 말을 얻었으니까. 그 좋은 기분에 칼리안이 한 마디를 덧붙였다.

"플란츠 형님."

다분히 의도된 말이었다.

플란츠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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