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적국의 왕자로 사는 법-2화 (3/527)

제1장. 이거 정말 멍청하게 살았군 (2)

플란츠는 의복도 갈아입지 않은 채였다.

풀어헤쳐진 상의 안으로 맨살이 그대로 보였다. 그것이 어떤 나라인지와는 상관 없이 왕족은 결코 저런 모습을 보여서는 안된다.

다행인 것은 이런 무례하기 짝이 없는 행실에 놀라는 바람에 플란츠의 목에 나이프를 꽂아 넣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칼리안은 티가 나지 않도록 주의하며 짧은 한숨을 쉬었다.

플란츠의 행색에 란델이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곧 아무 것도 보지 못했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칼리안은 그런 란델의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1왕자가 2왕자를 건드리지 못한다.'

이유를 알 만 했다.

세 왕자는 전부 다 이복 형제였고 지금의 왕비 실리케는 2왕자 플란츠의 모친이었다. 때문에 란델이 아무리 1왕자였다 하더라도 플란츠의 윗사람 노릇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왕비 집안의 권력이 참으로 대단하였으니.'

이런 생각을 하며 소리 없이 혀를 차는 사이, 그들의 앞에 잘 만들어진 음식이 차례로 놓이기 시작했다.

향 좋은 스프와 고소한 냄새를 풍기는 구운 빵, 아침에 먹기 적절한 스크램블드 에그와 얇게 저민 햄. 거기에 신선한 채소만 가득한 샐러드와 갖가지 종류의 과일까지.

갑작스런 전쟁에 시달리던 베른에게 있어 이보다 훌륭한 식단이 또 있을까. 그러니 만약 혼자 있었다면 모두 남김 없이 먹어치웠을 터였다.

하지만 음식에 손이 가지 않았다.

체이스에 대한 걱정이 첫 이유였고, 생의 원수 플란츠를 앞에 둔 것이 두 번째 이유였다. 이 식당에 감도는 냉랭한 분위기도 한 몫을 했다.

'살얼음판이 따로 없군.'

카이리스의 세 왕자는 분명 형제였으나 이 자리에서 그 어떤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아무리 이복 형제라 하나 그것 만으로는 이 침묵의 이유가 될 수 없었다.

체이스와 베른 역시 이복 형제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웃고 떠드느라 요리사가 음식을 다시 데워다주기 일쑤였던 둘이었다. 언제나 베른을 챙기던 체이스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 기사가 되겠다니. 말만 들어도 듬직하구나.

- 베른. 걱정하지 말거라. 아무 걱정 말아.

세크리티아의 왕이자 목숨을 내어주어도 아깝지 않을 형 체이스가 절실하게 생각났다.

하지만 이 곳에서는 그 누구에게도 그에 대한 소식을 물을 수 없을 터였다. 때문에 더 걱정이 되고 그리웠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만나고 싶었다.

그런 생각의 끝에 플란츠에 대한 분노가 다시 치밀어 올라서, 칼리안은 애꿎은 물잔을 들어 한번에 다 비워냈다. 그러자 비웃음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들렸다.

"경박하기는."

하필. 플란츠의 목소리였다.

옷을 입다 만 것인지 벗다 만 것인지도 구분되지 않는 차림을 한 놈의 얼굴이 보였다. 플란츠는 한쪽 입술을 끌어올리며 말을 덧붙였다.

"제 어미를 닮아서 품격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지."

평민 출신인 칼리안의 모친을 두고 비아냥거리는 소리였다.

결국 칼리안의 눈이 차갑게 식었다.

채 갈무리하지 못한 증오가 담긴 칼리안의 붉은 눈을 플란츠가 보았다. 플란츠의 눈이 일순간에 날카롭게 변했다.

이런 상황인데도 란델은 둘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식사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완벽한 방관자가 아닌가.

칼리안이 고개를 돌려 란델을 쳐다봤다. 여전한 눈빛을 한 채였다.

그 때.

플란츠의 입에서 위협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감히······."

칼리안의 시선이 다시 플란츠를 향했다.

둘의 시선이 맞닿았고 누구도 먼저 눈을 돌리지 않았다. 그 지경이 되어서야 란델이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만하거라."

플란츠는 칼리안에게 고정한 시선을 여전히 치우지 않은 채로 말했다.

"재수 없는 피눈깔 때문에 입맛이 떨어져서. 먼저 갑니다."

란델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플란츠는 곧장 밖으로 나갔다.

차라리 잘 된 일이다. 놈을 오래 마주해도 괜찮을 만큼 칼리안의 인내심이 많지는 않았으니까.

"몸가짐에 주의하거라. 전하의 탄신 기념일 행사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그런데 이렇게, 칼리안의 인내심을 줄이는 목소리가 들렸다.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이런 말을 한 것은 란델이었다. 칼리안에게는 시선도 두지 않은 채였다.

'문제가 되는 것이 나란 말인가? 방금 나간 놈의 꼬락서니는?'

그 말이 너무 기가 찼던 탓에 칼리안이 실소했다.

죽음을 맞이한 다음 날 다른 몸을 가진 채 다시 눈을 뜨게 된 말도 안되는 상황만 아니었다면 칼리안은 분명 참지 않았을 것이다.

당연히 란델은 이 곳에 함께 자리한 동생이 살의를 감추느라 얼마나 애를 쓰는 중인지를 알지 못했다. 때문에 란델은 칼리안의 반응을 살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서 밖으로 나갔다.

"하루도 그냥 넘어가질 않으시니······."

뒤에 서 있던 얀이 혼잣말을 하는 것이 들렸다.

칼리안이 의자에 등을 기대고 긴 숨을 나누어 내쉬며 화를 가라앉혔다. 그것이 구박 받는 막내의 서러운 숨소리로 들렸던지, 뒤에서 얀이 안타까워 하는 것이 느껴졌다.

곧 칼리안이 소리 없이 일어났다.

곧장 다가온 얀이 의자를 마저 빼 주고 흐트러진 의복을 꼼꼼히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무시 받는 꼴을 매일 볼 텐데도 그 손길이 참으로 조심스럽고 정중하다. 다른 두 왕자의 시종도 이 정도로 정성을 들이지 않았던 것을, 칼리안은 분명히 보았다.

얀의 손바닥에 깊이 남은 손톱 자국이 보였다.

오히려 얀의 눈이 칼리안보다 더 일그러져 있었다. 칼리안보다 조금 더 나이가 많은 시종의 이런 모습에, 끓어올랐던 마음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고마워."

그 말에 놀라 칼리안을 쳐다본 얀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칼리안이 울고 있지도, 침중한 표정을 짓지도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그 얼굴에는 심지어 작은 미소까지 걸려 있었다.

칼리안으로부터 생전 처음 받게 된 감사 인사에 어찌 대답할지를 골라내기도 전에, 칼리안의 말이 이어졌다.

"다음 일정은?"

"한 시간 뒤에, 양신전쟁에 대한 수업이 있습니다."

"그 때까지 잠깐 혼자 있을게."

얀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리 하시라 답했다.

본래의 칼리안이 지니고 있던 기억은 제 할 일을 충실하게 했다. 덕분에 칼리안은 조금도 헤매지 않고 건물 밖으로 나와 인공호수 옆의 산책길로 발을 옮길 수 있었다.

다른 사람은 없었다. 칼리안과, 칼리안으로부터 멀리 거리를 두고 따라오고 있는 얀이 있을 뿐.

"하."

호숫가로 걸어간 칼리안이 발 아래의 물을 보며 참았던 숨을 토해냈다. 그런 칼리안의 눈에 호수 한 가운데 놓인 작은 조각상이 보였다.

검은 용이 하늘을 향해 날개를 펴는 모습. 용의 두 눈에는 붉은 색의 보석이 박혀 있었다.

'시스파니안인가.'

카이리스의 초대 왕비이기도 했다는 고룡 시스파니안의 조각상이다.

그녀가 고요한 밤과 같은 검은 머리와 신성한 불을 담은 붉은 눈을 가졌다던 말이 생각났다.

검은 머리, 붉은 눈. 그것은 칼리안도 마찬가지였다.

'재수 없는 피눈깔.'

플란츠의 목소리가 다시 떠올랐다.

몸이 어려지니 정신까지 여려지는 것인지. 고작 그런 말을 다시 상기한 스스로의 모습에 칼리안이 실소했다.

베른은 홀로 성문 앞을 막아선 채 버티고 버티다 죽음을 맞이한 기사이자 왕제였다.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잘린 팔을 대충 지혈한 뒤 온 몸에 무수한 화살을 꽂은 채 검을 휘두르지 않았던가.

이성을 잃지 말아야 했다.

당장 급한 것은 눈 앞의 플란츠를 죽이느냐 살리느냐가 아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겨났는지, 그것부터 따져보아야 할 일이니까.

그리하여 칼리안은 잠시 눈을 내리 뜬 채 머릿속을 가득 메운 상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으며 이 일의 원인이 되었으리라 생각되는 것을 떠올렸다.

'······ 시간의 축.'

시간의 축.

어느 날 갑자기 세크리티아 왕궁에 나타났던 것. 커다란 모래시계 같이 생긴, 그리고 단 한 번 시간을 되돌리는 힘을 지녔다던 그것.

바로 그 시간의 축이 이 일의 원인일 터였다. 세크리티아와 카이리스의 전쟁도 시간의 축으로 인해 발발했으니까.

전쟁이 시작되기 전, 카이리스에서 시간의 축을 요구했다. 세크리티아에서는 그것을 거절했다. 위험한 물건임이 분명했기 때문에 국왕 체이스가 강경하게 맞섰다. 정신 나간 플란츠가 그 물건을 어디에 쓸 줄 알고 내어 주겠는가.

따라서 거절의 의사를 밝히니 기다렸다는 듯 대군이 쳐들어왔다.

협상은 고사하고 선전포고조차 건너뛰었다.

플란츠는 개념의 크기까지 남다른 놈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전쟁에서 세크리티아는 결국 패배했다. 그 결과가 지금 이 모습이다.

'형님께서는 내 죽음을 지켜보셨겠지.'

체이스는 살아있던 마지막 기사인 베른이 결국 죽는 모습을 고스란히 보았을 터였다. 때문에 칼리안은 체이스가 시간을 되돌렸으리라 생각했다. 그 결과가 이리 나타날 줄은 몰랐겠지만 체이스라면 베른을 살려내려 했을 것이라 여겼다.

칼리안이 한탄하듯 작게 말했다.

"원인이 시간의 축이라면······. 돌아가는 방법이 없다는 소리인데."

시간의 축은 단 한 번만 사용할 수 있을 물건이었으니까. 시간이 이미 뒤틀렸다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방법이 없었다.

허면 어찌 할 것인가, 하고 칼리안이 잠시 중얼거렸다.

만약 이것이 정말 꿈이 아니고 지금 떠올린 것이 맞다면 이것은 분명 두 번째로 주어진 생이다.

체이스가 준 기회를 허투루 보낼 수는 없었다. 때문에 칼리안은 돌아가기 위한 것이 아닌 살기 위한 것으로 생각의 방향을 바꾸었다. 우선은 살아야 다른 길을 찾을 테니까.

칼리안이 다시 생각에 잠겨들었다.

* * *

14세의 칼리안은 곧 죽는다.

왕비 실리케를 독살하려다 실패하고 처벌이 두려워 목을 매 자살했다.

물론 그것을 사실이라 믿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때문에 '자살'로 퍼져나온 이야기를 모두 '암살'로 걸러 들었다. 실리케라면 충분히 칼리안을 죽이고도 남을 위인이었기 때문이었다.

프레이야.

바로 칼리안의 친모와 연관된 일 때문이었다.

후궁 프레이야는 아름다운 외모로 유명했지만 평민 출신이었다. 국왕의 총애를 입고 칼리안을 낳았으나 오래지 않아 '출산의 후유증'으로 죽었다.

왕비가 보낸 차를 마신 뒤 부글거리는 검은 피를 토하고 죽는 출산의 후유증 말이다.

이렇게 칼리안은 모친을 잃었다.

그랬으니, 칼리안에게 조력자가 있으리라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흔한 독초조차 구하기 어려웠을 왕자가 국왕보다 큰 권력을 가진 왕비를 죽이려 했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게다가 칼리안은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쭉 왕비 실리케와 2왕자 플란츠의 멸시를 받으며 지냈다 했다. 이런 상황에서 자란 옛 칼리안은 제대로 숨도 쉬지 못했을 것이다.

아무리 맹수라 해도 새끼 때부터 우유를 먹여 키워내면 주인의 발을 핥고 배를 보이는 법이 아니던가. 그러니 칼리안은 누군가를 죽인다는 것을 상상도 하지 못했을 만큼 나약하게 자랐을 터였다.

칼리안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냥 보기 싫어서 치워버린 것이지."

칼리안은 머리 색을 빼고는 프레이야를 그대로 닮았다고 들었다.

왕비는 칼리안의 얼굴에서 죽은 프레이야를 떠올리기 싫었을 것이다. 때문에 칼리안을 살해하고 이야기를 지어냈을 테고, 국왕은 묵과했으리라.

왕실 친위대 중 국왕 직속의 1개 기사단을 뺀 나머지 3개를 모두 왕비가 틀어쥐고 있었으니까.

칼리안은 15세가 되기 두세 달 전에 죽었다 했다.

"앞으로 네 달 뒤가 내 15번째 생일이라 했으니······ 누구든 나를 곧 죽이러 오겠군."

칼리안이 '목을 매 죽은' 것으로 위장된 죽음을 맞이하기까지 남은 시간은 한 달에서 두 달이다.

물에 비친 칼리안의 붉은 눈이 예리한 빛을 냈다.

그들의 손에 곱게 죽어 줄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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